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87화 (87/136)
  • 087화 모두의 삶을 바꿀 제품.

    DD 자동차의 회의실에 인우 디자인의 이인우 사장과 지상억 디자인 센터 소장이 모여 서로의 디자인을 살펴봤다.

    “음···.”

    두 사람이 서로의 작품을 보며 알 수 없는 신음을 내뱉을 때, 차동진 전무가 회의실 문을 열었다. 그 뒤로 박주혁과 한민철 교수가 들어왔다.

    “먼저 와 계셨군요.”

    박주혁이 미소로 인사를 건네며 한민철 교수를 소개했다.

    “모델 D에 탑재될 자율주행의 기술고문을 맡고 계신 한민철 교수님이십니다.”

    자율주행이라는 말에 이인우 사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랄 만도 하지.

    한민철 교수 공손히 인사하고 자리하자, 차동진 전무가 회의실의 조도를 낮췄다. 회의를 막 시작하려는데 회의실 문이 열리며 작업복 차림의 한 중년 남성이 들어왔다.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말이다.

    다들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그때 박주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반겼다.

    “오셨네요?”

    “바쁘다니까는···!”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투덜거리는 그를 향해 박주혁은 미소지으며 정중히 말했다.

    “크흠. 뭐, 박 대표가 오라면 와야지···.”

    그의 얼굴은 불만투성이였지만, 박주혁에게만큼은 성의를 보이려 애쓰고 있었다. 그가 막 자신의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릴 때, 박주혁이 그를 소개했다.

    “챠넬 콜라보 칼스타의 내장재를 생산했던 덕기봉제공장의 조덕기 사장님이십니다. 챠넬의 아시아 공방이기도 하죠. 이번 모델 D도 초기 생산분은 챠넬 콜라보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조 사장님을 모셨습니다.”

    박주혁의 말에 다들 눈을 동그랗게 떴고 조덕기 사장은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전 그냥 바느질하는 사람이니까. 전 신경 쓰지 마시고 회의 진행하세요.”

    겸손의 표현이었지만, 모두 알고 있었다.

    챠넬이 선정한 공장의 사장이라면 장인이라는 것을 말이다.

    박주혁이 회의 참가자들을 일일이 소개한 후 앞으로 나와 말했다.

    “오늘은 모델 D의 실내 디자인을 선정하는 중요한 날이죠. 여기 참석하신 모든 분의 의견을 종합하여 선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전에 우선 간략하게 모델 D의 개발 과정을 설명하겠습니다. 차 전무?”

    “예!”

    박주혁의 말에 차동진 전무가 힘차게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크린에 모델 D의 개발과정이 도표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모델 D는 현재 85% 정도 완성되었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자율주행 탑재와 실내 디자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차동진 전무의 말이 끝나고, 본격적인 이인우 사장과 지성억 소장의 전쟁이 시작됐다. 선공은 이인우 사장이었다.

    “자율주행이 탑재된다니 정말 놀랍군요. 역시 모델 D는 미래지향적인 차인 것 같습니다. 그에 맞춰 실내도 그런 감성을 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박주혁이 이인우 사장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지상억 소장의 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그는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마른침을 삼키느라 목울대가 계속 꿀렁거렸다. 박주혁은 그런 지상억 소장의 모습에 살짝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번 기회에 많이 배우시길 바랍니다. 더 빛날 자동차 디자인을 위해서 말이죠.’

    이인우 사장은 스크린에 자신이 디자인한 실내 디자인을 스크린에 띄웠다. 역시 인우 디자인다웠다고 해야 할까?

    박주혁은 눈을 살짝 크게 뜨며, 스크린을 응시했다.

    계기판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운전대를 제외하곤 어떤 표시장치도 없었다. 센터 페시아에 운전석 쪽으로 살짝 돌아간 모니터가 있었다. 아마 저 모니터에 계기판에 나타날 정보들을 표시할 것 같았다. 심지어 이인우 사장은 기어봉도 없애고, 버튼식을 채용했다.

    직선이 많이 사용된 실내 디자인은 모델 D의 외관과 연속성이 있어 나쁘지 않았지만, 너무 미래지향적이었다. 다시 말하면, 97년도 현재 기술로는 적용할 수 없는 사항들이 많았다. 미래에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겠지만···.

    이인우 사장의 설명이 끝난 후, 회의실은 적막이 흘렀다. 충격적인 디자인에 다들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충격도 필요하다고 박주혁은 생각했다. 운용되는 기술에 얽매여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없는 틀을 깨주고 싶었다. 그리고 인우 디자인은 그 틀을 확실히 부셨다.

    박주혁이 흡족한 얼굴로 박수 치며 말했다.

    “놀랍군요. 상식을 깨버리는 디자인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우리 디자인 센터장님의 디자인을 한 번 볼까요?”

    박주혁이 웃으며 지상억 소장을 호명했다. 지상억 소장은 다시 한번 마른침을 삼키고 일어났다.

    “먼저, 이 사장님의 디자인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모델 D는 미래지향적 감성을 담아야 한다는 데 동의합니다.”

    말을 마친 지상억 소장이 자신의 디자인을 스크린에 띄웠다. 누구나 봐왔던 그런 실내 디자인이었지만, 몇 가지 요소가 달랐다. 특히 전면 유리창에 숫자들이 디스플레이 되는 장면에 박주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HUD···라. 좋은데?’

    미래의 HUD처럼 네비게이션 연동 및 다채로운 그래픽을 표현할 수는 없지만, 현재 속도 정도는 나타낼 수 있었다. 이런 작은 차이가 차량을 돋보이게 할 수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계기판도 아날로그식이 아닌 디지털 버전이었다. 지정된 정보만 출력하는 것이지만, 현재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으리라.

    지상억 소장은 현재 기술로 가능한 것들을 뽑아 잘 버무렸다. 박주혁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박수 쳤다.

    “좋군요. 특히 HUD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지상억 소장이 인사하고 자리로 돌아가자, 박주혁이 일어나며 말했다.

    “다른 분들의 의견은 어떤지 한번 들어보고 싶군요. 먼저, 한민철 교수님?”

    박주혁이 한민철 교수를 호명하자, 심각한 표정을 짓던 한민철 교수가 입을 열었다.

    “인우 디자인의 모니터가 컴퓨터와 연결될 수 있다면, 자율주행에는 더 적합한 디자인이 아닐까 합니다. 다만, CRT 모니터가 부피가 상당하고, 전력 소모가 심한 편인데 이걸 기술적으로 어떻게 풀어갈지···.”

    턱을 쓰다듬으며 한민철 교수가 뒷말을 삼켰다. 박주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조덕기 사장을 쳐다봤다. 그러자 조덕기 사장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내장재를 만드시는 분의 의견도 궁금합니다.”

    “크흐음.”

    조덕기 사장이 난처한 얼굴로 박주혁을 잠시 바라보더니 눈빛을 바꿨다.

    “제가 디자인은 평할 것은 아닌 것 같고, 모델 D라고 했나요? 고급 전기차라고 이해하는데···. 내장재에 쓰인 재질에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플라스틱 위주라면 고급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죠. 플라스틱보다는 우드, 또는 가죽을 많이 사용하면···.”

    조덕기 사장의 말도 매우 중요한 사항이었다. 박주혁이 살짝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차동진 전무는 어떻게 보셨습니까?”

    “음. 인우 디자인의 작품은 현재 기술로는 조금 어렵지 않겠나···. 특히 모니터와 버튼식 기어는 시기상조 같군요. 지 소장님의 디자인은 현실 가능한 것들이긴 합니다만, 미래지향적 느낌은 좀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차동진 전무의 말에 박주혁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지상억 소장을 쳐다봤다. 그는 여러 사람의 의견을 열심히 메모 중이었다.

    “지 소장.”

    “예!”

    “지금 나온 피드백들을 적용해서 다시 한번 디자인해 봅시다.”

    지상억 소장이 고개를 끄덕일 때, 박주혁은 이인우 사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사장님의 디자인이 매우 획기적이긴 했지만, 현재 기술로 구현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이네요.”

    “예. 저도 알고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실무 하시는 분과는 다를 수밖에 없죠.”

    “맞습니다. 하지만, 전 인우 디자인이 상당히 마음에 듭니다. 기술이 못 받쳐준다니 아쉬울 뿐입니다.”

    박주혁의 애둘러 칭찬하자, 이인우 사장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다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의는 지상억 소장의 디자인을 채택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박주혁은 한민철 교수와 조덕기 사장을 배웅하고 짐을 챙기는 이인우 사장에게 돌아왔다.

    “이 사장님. 잠깐, 시간 괜찮으시면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박주혁의 말에 이인우 사장이 짐을 챙기다 말고 다시 자리에 앉아 박주혁을 쳐다봤다.

    “휴대용 음악 재생기가 카세트에서 CD로 이제는 MD로 넘어가는 추세라죠?”

    “예. 맞습니다. 잘 알고 계시네요? 설마, 모델 D에 MD를 넣으실 생각이신가요?”

    이인우 사장이 놀란 토끼 눈을 뜨고 박주혁에게 물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인 것 같았지만, MD는 MP3 플레이어가 나오는 순간 사장된 방식이기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그건 아니고, 새로운 방식의 휴대용 음악 재생기를 개발해볼까 합니다.”

    “···!”

    박주혁의 말에 이인우 사장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 자동차가 아니라요?”

    “네. 파인랭스에 멀티미디어 재생 프로그램을 개발했는데, 이것을 휴대용 플레이어 이식하면 좋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물론, 모델 D에도 그 기능을 추가하면 좋겠네요.”

    “···.”

    이인우 사장은 입을 살짝 벌린 채 박주혁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물었다.

    “설마, Mp3 플레이어를 생각 중이신 겁니까?”

    “오! 이 사장님도 알고 계시는군요.”

    “헐.”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Mp3 파일들을 현재는 CD에 담아 CDP로 듣고 있었다. 용량 문제도 있었고, 지웠다 썼다가 불가능한 CD 대신 일본에서 최장 74분, 100만 번은 지웠다 쓸 수 있는 MD(mini disk)를 출시하며 CDP 시장을 뺏어가고 있었다. 물론, 잠시뿐이겠지만···.

    97년 말 아직 세상에는 Mp3 플레이어가 없었다. 하지만, 산업 디자인 업체였던 인우 디자인은 플래시 메모리를 활용한 초소형 Mp3 플레이어가 시장을 장악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인우 디자인이 가전기기 전문 디자인 업체이기 때문에 이런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자동차 회사의 대표가 어찌 이런 사실을 알고 있단 말인가? 이인우 사장이 놀란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눈을 끔벅이며 박주혁을 쳐다보던 이인우 사장이 자신의 가방을 뒤적였다. 그리고 몇 장의 제품 디자인을 꺼냈다.

    “아직 스케치 수준입니다만, 앞으로 플래시 메모리를 활용한 플레이어가 나오면 이런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박주혁은 이인우 사장이 내민 스케치들을 한 장씩 살펴보더니 갑자기 눈을 번뜩였다. 바로 세계를 주름잡았던 프리즘 모양의 Mp3 플레이어 스케치였다.

    ‘이게 벌써 이인우 사장 머릿속에 있었군요.’

    박주혁은 프리즘형 Mp3 플레이어 스케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디자인 독특하군요.”

    “아, 이건 AAA형 배터리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넣어볼까 생각해서···.”

    박주혁은 이인우 사장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몇 장 더 넘기니 목걸이 모양의 Mp3 플레이어 스케치도 있었다. 박주혁은 눈을 살짝 크게 뜨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최소 5년은 내다보고 계시는군요.’

    박주혁이 눈을 빛내며 천천히 이인우 사장에게 시선을 옮겼다. 먹이를 노리는 명수의 눈빛이었기에 이인우 사장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혹시, Mp3 플레이어와 휴대폰을 합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Mp3 플레이어와 휴대폰이라···. 상당히 기발한 조합이긴 한데, 휴대폰은 이제 개발되는 과정이라 성능 위주입니다. 아직 디자인을 논하기는 좀 이릅니다.”

    맞는 말이었다. 현재 휴대폰은 어떤 회사의 제품이 주파수를 잘 잡는지, 끊김 없이 통화가 되는지에 대한 기술적 성능에만 초점이 맞춰진 상황이었다. 오죽하면 제품명이 어떤 전화도 받을 수 있다는 ‘애니콜’이었겠나? 하지만, 성능이 평준화되면서부터는 디자인 싸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는 생각보다 빨리 온다.

    이인우 사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박주혁의 눈빛은 여전히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원래 디자인은 앞서나가는 것이죠. 어떻습니까? 저와 함께 Mp3 플레이어를 넘어 휴대폰을 만들어보는 것은···.”

    “에이, 농담하지 마십시오.”

    이인우 사장이 박주혁의 말이 농담으로 들렸는지 피식 웃어버렸다.

    “지금 당장 휴대폰을 만들자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의 목표를 그렇게 잡자는 것이죠.”

    “지, 진심이십니까?”

    이인우 사장의 말에 박주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헐.”

    이인우 사장이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동차 회사에서 Mp3 플레이어와 휴대폰을 얘기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었다.

    ‘이 사람, 대체 뭐지?’

    허무맹랑한 얘기였기에 농담이려니 생각했지만, 박주혁의 눈은 누구보다 진지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박주혁의 말이 솔깃해서 자꾸만 끌렸다. 이진우 사장은 팔짱을 끼더니 고민에 빠졌다.

    DD 자동차의 칼스타와 모델 D가 박주혁의 예사롭지 않은 사업 수완을 증명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무엇보다 디자인을 중요시하는 박주혁과 협력한다는 것이 썩 나쁠 것 같지 않았다.

    고민을 끝낸 이인우 사장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도전해보겠습니다.”

    이인우 사장의 말에 박주혁이 그제야 미소 지으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모두의 삶을 바꿀 제품을 한 번 만들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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