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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86화 (86/136)
  • 086화 기안, 올리세요.

    - 탁, 탁.

    박주혁은 심각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보며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모니터에는 이제 막 서비스를 시작한 무료 이메일 사이트인 넥스트가 열려 있었다.

    별도의 메일서버가 있지 않은 한 일반인들은 PC 통신에 접속 후 이메일을 확인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런데 넥스트가 별도의 접속 없이 웹브라우저에서 로그인만 하면 바로 이메일을 확인할 수 있는 넥스트 메일을 시장에 런칭했다. 심지어 무료다. 포털사이트 시장의 절반을 차지하는 넥스트의 시작이었다.

    박주혁은 여전히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포털사이트라. 파인랭스도 조금 손보면···?”

    생각에 잠겨있던 박주혁이 불현듯 눈을 빛내더니 수화기를 들었다.

    “네 파인랭스 개발팀 심영찬 과장입니다.”

    심영찬 대리는 파인랭스 시스템과 랭귀지패스트의 성공적인 활약으로 어느덧 과장으로 승진했다.

    “심 과장. 오후에 개발팀 전원과 미팅을 합시다.”

    “네, 사장님. 알겠습니다. 혹시 미팅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미리 준비할 자료가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주제라···. 새로운 프로젝트 구상이라고 하면 되겠군요.”

    “드디어 새로운 프로젝트입니까?”

    심영찬 과장의 목소리에 설레임이 묻어났다.

    랭귀지패스트가 시장에 런칭되고 벌써 1년이 넘었다. 아직 미진한 부분과 편의성 개선작업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지만, 처음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처럼 열정적인 일은 아니었다. 그들은 새로운 것을 갈망하고 있었고 때마침 박주혁이 신규 프로젝트를 언급했다. 그런데 심영찬 과장도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저도 말씀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심영찬 과장의 말에 박주혁이 눈썹을 올리며 답했다.

    “회의가 기대되는군요.”

    #

    파인랭스 회의실.

    박영희 팀장을 비롯해 심영찬 과장 그리고 개발팀원들이 모두 모였다. 직원들은 모두 박주혁의 입을 쳐다봤다. 항상 예상외의 것을 주문했던 박주혁이었기에 어떤 신규 프로젝트일지, 기대감이 컸다.

    “오늘 이렇게 모인 것은 파인랭스의 다음 먹거리를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개발팀원들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까닥였다.

    “앞으로 우리는 검색엔진과 인공지능을 개발할 겁니다.”

    박주혁의 말에 직원들이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막연히 랭귀지패스트와 연속성이 있는 자동번역 프로그램을 개발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뭐라고?

    “방금, 검색엔진이랑 뭐라셨어?”

    “인공···지능?”

    그때, 심영찬 과장이 손을 들고 말했다.

    “사장님. 검색엔진의 경우 이미 파인랭스 시스템을 개발하면서 자체 엔진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말씀하신 검색엔진이 정확히 뭡니까?”

    심영찬 과장의 말에 박주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맞습니다. 우리 시스템에 검색엔진이 있지만, 그것은 이미 가공된 데이터를 불러오는 수준이죠. 검색엔진의 일차 목표는 파인랭스의 전체 자료를 대상으로 합니다. 원문과 번역본만 해도 엄청난 양이죠.”

    박주혁의 말에 심영찬 과장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것이라면 랭귀지패스트에 어느 정도 구현이 되어 있습니다.”

    박주혁이 심영찬 과장의 말에 동의하며 말했다.

    “맞습니다. 그걸 심화해서 최종적으로는 더 광범위한 검색엔진을 만들자는 말입니다.”

    “더 광범위하게요?”

    심영찬 과장이 되묻자, 박주혁이 미소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가 예측한 대로 인터넷 속도는 빨라졌고, 많은 사람이 인터넷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당장 무료 메일로 유명한 넥스트의 회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죠. 사용자가 많아진다는 것은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양산된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야후와 함께 무료 이메일 시장을 개척한 넥스트의 시작은 포털사이트라기보다는 웹메일 사이트였다. PC 통신에 접속하여 사용하던 사람들은 웹브라우저에서 바로 사용이 가능한 야후와 넥스트로 선회했다. 그리고 넥스트는 단시간 내에 100만 명 넘게 회원 수를 확보하면서 서서히 포털사이트로 변모하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넥스트가 초반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미래의 경쟁사인 네버의 검색엔진을 차용했다는 점이다. 녹색 창으로 유명한 네버가 사이트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검색엔진을 개발하는 벤처 회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네버는 추후 독자 사이트를 구축하며 넥스트와 포털사이트 시장을 양분하게 된다.

    시작점이 자못 달랐지만, 자체 검색엔진이 없다는 것은 넥스트에게 하나의 약점이었다. 물론, 추후 개발하지만, 좀 늦은 감이 있었다.

    박주혁의 얘기를 듣던 심영찬 과장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개발할 검색엔진은 인터넷상에 있는 자료들이란 말씀이십니까?”

    “맞습니다.”

    “와!”

    심영찬 대리와 개발팀원들은 박주혁의 스케일에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가지, 검색엔진 개발의 필요성은 이해가 됐지만, 인공지능은 또 다른 얘기다.

    “그럼, 인공지능은···?”

    이어진 직원들의 질문에 박주혁이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우리 검색엔진의 최종목표죠.”

    “검색엔진에 인공지능을 더하시겠단 말입니까?”

    “정확합니다.”

    일순간 회의실이 소란스러워졌다.

    “검색엔진과 인공지능이면 대체 무슨 조합이지?”

    “검색하면 관련된 것들을 자동으로 찾아줘야 하는 건가···?”

    “뭐 그런 것 아닐까? 사용자의 검색패턴을 인지하고 그와 연관성이 높은 검색 결과를 보여준다든지···.”

    사람들은 정말 잘 뽑아놓은 듯싶었다. 미끼만 더뎠을 뿐인데 알아서 덥석 물어주고 원하는 대로 끌려오니 말이다. 박주혁은 직원들의 토론을 가만히 지켜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지금까지 나온 얘기들을 개발하는 겁니다.”

    “오우. 재밌겠다.”

    심영찬 과장이 눈을 번뜩이며 소리치는 자신의 부하직원을 슬며시 째려보더니 말했다.

    “쉽지 않을 것 같지만, 한번 의논해보겠습니다.”

    “좋습니다. 아참, 그리고 제게 보고할 것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 있습니다.”

    심영찬 과장이 자신의 부하직원인 공대 3인방을 힐끔 쳐다봤다. 그러자 홍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사장님. 저희가 짬짬이 개발한 것이 있습니다.”

    “어디, 들어봅시다.”

    홍자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지난 4월에 미국에서 윈엠프라는 멀티미디어 재생 소프트웨어가 프리웨어로 출시됐습니다.”

    국민 프로그램이라고 불린 윈엠프를 왜 모르겠나? 사운드바다에서 음악을 다운받아 윈엠프에서 재생시키고, 음악방송도 하는 사람이 있었지···. 박주혁이 잠시 추억을 떠올리다 말고 고개를 갸웃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윈엠프 얘기가 여기서 왜 나오지?’

    박주혁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홍자를 쳐다봤다.

    “저희가 윈엠프와 비슷한 프로그램을 만들어봤습니다.”

    홍자의 말에 박주혁이 눈썹을 치켜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뭐라고요?”

    박주혁의 반응에 놀란 개발팀 공대 3인방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역시나 돈이 되지 않는 프리웨어를 개발하는 것이 아니었다. 심영찬 과장이 사장님께 보고하자며 흥분하는 모습에 용기를 내었건만···.

    박주혁의 눈빛에 공대생 3인방은 얼어붙어 버렸다. 천둥 벼락같은 호통이 곧 귓가를 때리리라. 한껏 긴장하고 있는데 박주혁의 입에서는 예상과는 다른 말이 나왔다.

    “지금 당장 시연해보시죠.”

    홍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박주혁을 빤히 보며 되물었다.

    “예?”

    “개발한 멀티미디어 재생 프로그램 시연해보시라고요.”

    “아, 예!”

    홍자가 허둥지둥 컴퓨터를 프로젝터에 연결하는 사이 박주혁이 상기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예상왼데? 애써 사운드바다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겠어.’

    홍자가 멀티미디어 프로그램을 실행시켜 스크린에 띄웠다.

    “아직 프로그램 이름은 미정입니다.”

    홍자의 말에 박주혁이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사운드바다라고 하시죠.”

    “사, 사운드바다요?”

    “오. 느낌 좋은데요? 소리들의 바다라···.”

    “정말 괜찮은데요? 소리를 내려받아라. 이런 의미도 있는 것 같고요.”

    아직 사운드바다가 출시 전이었으니 먼저 선점하는 사람에게 우선권이 있는 법이다. 사운드바다라는 이름의 멀티미디어 재생 프로그램은 아직 디자인적으로 손질이 필요해 보였다. 하지만, 프리웨어였던 윈엠프의 기능들을 대거 가져와서 그런지 기본적인 기능은 충실했다.

    “얼핏 보기엔 괜찮은데···. 좀 색다른 무언가를 함께 연동시켰으면 좋겠군요.”

    박주혁의 말에 공대 3인방이 바짝 긴장했다.

    “우리가 개발할 검색엔진을 붙입시다.”

    “예? 검색엔진은 왜?”

    “소비자들이 우리 프로그램을 통해 모든 음악을 검색하고 들을 수 있게 해야죠.”

    “허얼···.”

    공대 3인방이 얼빠진 표정으로 박주혁을 빤히 쳐다볼 때, 심영찬 과장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거기에 보안도 붙여서 사람들이 불법으로 음악을 공유할 수 없도록 해야겠군요. 그래야 사운드바다에서 수익도 생길 테고요.”

    심영찬 과장의 말에 박주혁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심 과장.”

    “예?”

    “언제, 독심술까지 하게 됐죠?”

    박주혁의 말에 심영찬 과장이 배시시 웃더니 말했다.

    “그런 건 못합니다. 확실한 건 개발자는 반드시 더 필요할 것 같네요.”

    박주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기안. 올리세요.”

    #

    파인랭스에서 흡족한 회의를 마친 후 주배정 사장이 소개한 건축설계사무소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파인랭스 박주혁 대표입니다.”

    “안녕하세요. 주 사장님께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한설계라고 합니다.”

    한설계 사장은 박주혁과 악수를 하며 상체를 90도로 숙였다. 아무리 갑과 을의 관계라지만, 이 정도로 저자세를 보일 필요는 없을 텐데···. 대체 주배정 사장이 뭐라고 얘기했길래? 박주혁은 한껏 낮은 자세로 대응하는 한설계 사장이 의뭉스러웠다.

    의뭉스러움은 뒤로하고 한설계 사장은 상당히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 같았다. 한설계 사장은 미리 준비해둔 지적도를 펼치고 박주혁이 구매한 대지를 손가락으로 집으며 입을 열었다.

    “이곳이죠?”

    “맞습니다.”

    박주혁의 대답에 한설계 사징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직원을 호출했다. 그러자 직원이 땅 모양이 인쇄된 종이를 몇 장 가지고 회의실로 들어왔다.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

    한설계 사장은 구로공단의 땅이 그려진 종이에 이것저것 메모를 하더니 말했다.

    “박 대표님은 사옥을 어떻게 짓고 싶으십니까?”

    외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어떻게 운영할지는 생각해 뒀었다.

    “1층은 고객 응대, 및 로비와 번역사들의 작업공간을 만들고 싶습니다.”

    한설계 사장은 박주혁의 말을 경청하며 받아적었다.

    “2층은 일본어와 중국어 3층은 영어와 제3외국어 팀 4층은 소프트웨어 개발팀과 디자인팀···.”

    실체화되지 않은 자신의 꿈을 쭉 나열했다. 상상 속의 파인랭스를 말이다.

    “와···. 엄청나군요.”

    “아직 안 끝났습니다.”

    “예? 아! 계속 말씀하시죠.”

    당황하는 한설계 사장을 무시한 채 박주혁은 이어서 말했다.

    “8층은 구내식당 겸 레스토랑, 9층은···. 그리고 마지막으로 옥상은 정원처럼 꾸며서 직원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아, 예···.”

    한설계 사장이 벌써 지치는지 얼굴이 그늘졌다.

    “그럼 총 10층 건물입니까?”

    “음···.”

    한설계 사장의 말에 박주혁이 신음하더니 처음 한설계 사장이 펼쳤던 지적도를 보며 중얼거렸다.

    “여기는 대륭이고 여긴 코오롱, 여기가 디지털 타워···. 다 높은 건물이네.”

    박주혁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자, 한설계 사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다 문뜩 정신이 들었는지 다급하게 말했다.

    “아 참, 여긴 용적률 250%라 12층 이하까지 건물을 지을 수 있습니다.”

    “어, 그렇습니까?”

    한설계 사장의 말에 박주혁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아, 아직 규제에 묶여 있구나···. 아쉽네.’

    디지털단지 지정되면 용적율이 올라가겠지만, 미리 땅을 선점하고 건물을 짓는다는 것에 의미를 둬야 했다. 그렇다면 고민할 이유가 없지 않나?

    “12층 건물로 설계해주시죠.”

    “그게 가장 베스트긴 하죠.”

    한설계 사장이 웃으며 이번에는 건물 외관에 대해 박주혁의 의견을 물었다. 디테일한 디자인까지는 모르겠지만, 상상했던 모습은 있었다. 뉴욕에 있는 랜드마크 빌딩들이 그러했듯 외부를 유리로 마감하여 번쩍이는 그런 빌딩 말이다.

    “그냥 콘크리트 건물은 싫고, 유리를 많이 사용했으면 좋겠네요.”

    “유리요···?”

    “예. 불가능합니까?”

    “아, 아니요. 불가능은 없습니다. 시안을 몇 가지 만들어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한설계 사장의 말에 박주혁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멋진 시안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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