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85화 (85/136)
  • 085화 자율주행차는 이미 개발되어 있었다.

    97년 11월 22일 저녁 9시 뉴스의 오프닝 멘트가 가슴을 후벼팠다.

    [실로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한 주일을 보냈습니다. 세계 부자 대열에 끼었다고 자랑하던 게 엊그제였는데 하루아침에 빚더미, 삼류국가로 전락했습니다.]

    달러화는 치솟아 2천 원 이상에 거래됐고, 주가는 대폭락했다.

    수많은 알짜배기 회사들이 구조조정이라는 명목하에 헐값에 해외로 팔려나갔다. 일반 기업체 사장들은 어떻게라도 버티기 위해 자산을 매각하기 이른다. 그로 인해 부동산 시장도 대폭락했다. 바야흐로 현금을 가진 자가 패권을 쥐는 시대가 도래했다.

    다음날.

    외환위기라는 암흑기와는 달리 박주혁은 밝은 모습으로 구로공단으로 향했다. 구로공단 대지의 잔금을 치르고, 박주혁은 사옥이 만들어질 땅 한가운데 서서 주변을 둘러봤다. 아직은 낙후되고 공기마저 매캐한 것 같은 구로공단이었지만, 이곳은 곧 첨단 IT 기업들의 메카로 돌변할 터.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박주혁은 휴대폰을 열어 전화를 걸었다.

    “허 과장.”

    “예. 사장님.”

    “파인랭스의 사옥을 지어야 할 것 같은데···.”

    “건축설계 및 시공사를 알아볼까요?”

    “한 번 알아봐 주세요.”

    한 푼이라도 절약해야 하는 시기에 박주혁은 공격적인 투자를 펼쳤다. 전도유망한 기업들을 찾아가 투자의향서를 제출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여의도.

    컴택 본사에 도착한 박주혁이 손에 들린 007 가방의 손잡이를 다시 한번 꽉 쥐었다.

    삐삐를 시작으로 CDMA 휴대폰을 생산하는 컴택은 아직 벤처기업에 머물러 있었지만, 내년에 모터놀라와 매년 3억 불 어치의 휴대폰을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컴택은 규모가 더 큰 미래큐리텔을 인수할 것이다.

    “그 전에 지분을 확보해야 한다.”

    박주혁은 눈을 빛내며 컴택 건물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컴택 유병엽 대표가 박주혁을 반갑게 맞이했다. 서로 악수를 주고받고 나자, 유병엽 대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유명 인사께서 컴택을 방문해 주시다니, 이거 영광인데요?”

    “과찬이십니다.”

    “젊은 나이에 DD 자동차를 회생시킨 미다스의 손이라는 소문이 있더군요.”

    영업사원 출신답게 유병엽 대표의 언변은 청산유수였다.

    “그래서 컴택을 방문하신 연유가 무엇일까요?”

    “컴택에 투자를 해볼까 합니다.”

    “투자요? 우리 회사에?”

    IMF 시기에 투자라니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유병엽 대표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박주혁을 잔뜩 경계하는 눈초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자동차와 이동통신의 결합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

    박주혁의 말에 유병엽 사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자동차와 결합이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자율화 자동차에 이동통신 기술은 필수적일 것입니다. 유 대표님도 생각하신 적 있으실 테죠.”

    분명 없다.

    휴대폰을 가성비 좋게 만들어 매출 증대할 생각만 가득한데 무슨 미래의 기술 가치까지 따진단 말인가? 하지만, 유병엽 대표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야. 이동통신 기술의 미래가치를 아시는 분과 대화하게 될 줄이야! 그런데 왜 컴택입니까? 굴지의 기업들이 있을 텐데 저희 같은 작은 벤처 회사에···.”

    “기업가 정신이 살아있는 벤처기업이기 때문이죠.”

    “···.”

    기업가 정신이란, 새로운 생산방법과 새로운 상품개발을 위해 기술혁신을 주도하며, 그를 통해 창조적 파괴에 앞장서는 혁신가적인 정신을 일컫는다. 그리고 벤처기업의 정의는 첨단 신기술과 아이디어로 사업에 도전하는 창조적인 기업이다. 일맥상통한 얘기 아닌가?

    유병엽 대표 본인은 모르겠지만, 그는 분명 벤처기업 성공 신화의 주역이었고, 기업가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유병엽 대표가 박주혁의 말에 눈을 끔벅이더니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너무 비행기 태우시는 것 아닙니까? 전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도 미다스의 손은 아니죠.”

    박주혁의 말에 유병엽 대표가 한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호탕하게 웃어버렸다.

    “박 대표님께는 못 당하겠습니다.”

    유병엽 대표가 고개를 가로저을 때 박주혁이 서류가 방을 열고 대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투자의향서입니다.”

    유병엽 대표는 서류를 꺼내 읽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박주혁을 쳐다봤다.

    “배···. 백억!”

    “그렇습니다.”

    유병엽이 놀라 입을 떡 벌리고 있을 때, 박주혁이 차분하게 말했다.

    “DD 자동차에서 80억, 파인랭스에서 20억을 투자하는 겁니다.”

    “···파, 파인랭스요?”

    “예. 제가 파인랭스의 대표기도 하거든요.”

    “파, 파인랭스···? 분명 들어봤었는데?”

    “번역회사입니다.”

    “번역···. 아! 거기, 우리와도 거래합니다.”

    유병엽 대표가 화들짝 놀랐고, 박주혁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원래 번역이라는 일이 그늘에 가려져 있죠.’

    번역은 늘 그렇듯 음지에서 산업이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산업이다. 자동차 엔진의 마찰열을 줄이기 위해서는 윤활유가 필요하듯, 번역은 산업계의 윤활유다.

    유병엽 대표는 투자의향서에 직인을 찍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박주혁은 그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컴택의 미래를 기대해보겠습니다.”

    박주혁의 말에 유병엽 대표가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투자자의 가치 제고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DD 자동차와 파인랭스의 협업이 기대되는군요.”

    역시 영업사원 출신이었다. 어떻게든 떡밥을 흘리며, 작은 연결고리를 만들어가는 영업맨 특유의 화법이 마음에 들었다.

    #

    DD 자동차의 모델 D는 개발 막바지를 향하고 있었다. EH슬라의 동력 부분은 거의 구현했지만, 기술격차로 인해 자율주행은 빠져있었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생각했지만, 박주혁이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박주혁은 요즘 들어 서주경 교수를 자주 만났다. 자신이 놓치고 있는 정보를 서주경 교수를 통해 보완하기 위함이었다. 박주혁이 DD 자동차의 CEO라는 사실을 알고도, 서주경의 태도는 딱히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박주혁은 한동안 질문 공세를 받아내야만 했다.

    “그래서 왜 전기 골프 카트를 개발한 겁니까?”

    “챠넬과 콜라보는 어떤 계기로?”

    “앞으로 DD 자동차는 어떤 방향으로 갑니까?”

    초롱초롱하게 빛을 내는 서주경 교수에게 박주혁은 차근차근 설명했고, 서주경 교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집중했다. 서주경 교수도 자신이 접하는 새로운 소식과 지식을 박주혁에게 아낌없이 얘기했다.

    서로 Win-Win이랄까?

    사실 대부분의 얘기는 박주혁이 이미 알고 있던 사실들이었지만, 놓치고 있는 많은 것들이 서주경 교수의 입을 통해 채워졌다. 오늘 나눈 대화도 그러했다.

    “주혁씨, 우리나라에서 자율주행 자동차를 세계 최초로 성공시켰다는 사실 아세요?”

    “자율주행···이요?”

    들어보지 못했다.

    아직 자율주행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할 97년도였는데, 심지어 한국에서 연구하고 있다니? 하지만, 서주경 교수의 말은 사실이었다.

    박주혁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서주경 교수의 입을 바라봤다.

    93년 K대 산업공학과 교수인 한민철 교수는 세계 최초로 자율주행차를 개발했다.

    너무 이른 기술 덕에 관심을 끌지는 못했지만, 95년도 비가 오는 와중에도 시속 100Km로 무인 주행을 한 기록도 갖고 있었다. 자율주행 잠수정 개발에 참여했던 경험을 자동차에 녹인 것인데, 이미 자율주행 3단계의 성능을 갖추고 있었다.

    이런 기술이 사장되고 있었다니···.

    박주혁이 입을 벌리고 서주경 교수를 바라봤다. 한참 얘기에 집중하고 있던 서주경 교수가 홍어를 입에 넣고 씹다가 입을 벌리고 있는 박주혁을 발견하고 ‘풉’하고 웃어버렸다.

    “소개해 드려요?”

    “부탁합니다.”

    #

    K대 산업공학과 한 연구실. 박주혁이 문을 두드리고 연구실로 들어갔지만, 한민철 교수는 컴퓨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교수님을 방해하고 싶지 않던 박주혁은 천천히 연구실을 둘러봤다. 여러 대의 모니터에 차로를 인식하며 달리는 주행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한쪽 컴퓨터에는 복잡한 프로그래밍 언어들과 카메라 및 기계 장치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이걸 혼자···?’

    새삼 한민철 교수의 업적에 놀라고 있는데, 그제야 박주혁을 발견했는지 한민철 교수가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며 소리쳤다

    “누, 누구세요!”

    “DD 자동차의 박주혁 대표입니다. 오늘 방문한다고 연락드렸었는데요.”

    박주혁의 말을 듣고야 한민철 교수가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미안합니다. 한번 집중하면 내가 이래요.”

    “아닙니다. 괜히 방해한 것 같아서 죄송하군요.”

    박주혁의 말에 한민철 교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연락을 받긴 했는데, DD 자동차의 대표가 직접 올 줄은 몰랐네요. 반가워요. 좀 지저분하지만, 앉으세요.”

    한민철 교수가 의자 위에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던 기계들을 치우며 겸연쩍게 웃었다.

    “그런데 DD 자동차가 자율주행차에 관심이 있었나요?”

    “자동차 회사라면 응당 관심을 가져야 하는 분야 아닐까요?”

    박주혁의 되물음에 한민철 교수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다들 무관심하던데, 박 대표는 좀 다르군요? 어때요. 한번 보시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

    박주혁이 고개를 숙이며 답하자, 한민철 교수가 미소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볼까요?”

    한민철 교수는 산업공학과 건물 뒤편 연구동으로 향했다. 셔터를 올리자, 한민철 교수의 작품이 모습을 드러냈다. DD 자동차의 단종된 구형 코린도 루프에 정체불명의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고 여러 전선이 엔진룸까지 이어져 있었다. 외형은 괴이했으나, 분명 자율주행 3단계 수준이라고 했다.

    한민철 교수가 운전석에 앉더니 박주혁을 향해 말했다.

    “타요.”

    “알겠습니다.”

    일반적인 차와는 달리 내부는 여러 기계 장치들로 복잡해 보였다. 조수석에 박주혁이 몸을 구겨 넣었다. 한민철 교수가 차에 시동을 걸고 대시보드에 각양각색의 버튼을 차례로 누르니 차가 서서히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서행이라지만, 운전대를 잡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한민철 교수를 박주혁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박주혁의 걱정을 눈치챘는지 한민철 교수가 껄껄 웃었다.

    “시작부터 자율주행을 해야 진정한 의미에 자율주행 아니겠습니까? 이래 봬도 이 녀석은 주차도 알아서 합니다.”

    “주차까지요?”

    믿을 수 없었다.

    2010년 후반을 넘어서야 상용화되는 기술이 97년도에 이미 한민철 교수의 손에 의해 개발되었다니···! 감탄도 감탄이었지만, 속도가 제법 붙었는데도 한민철 교수가 양반다리를 하고 팔짱을 끼는 모습은 상당히 우려스러웠다. 하지만, 한민철 교수는 그저 껄껄 웃기만 할 뿐이었다. 차량은 점점 속도를 올려 산업공학과 건물을 벗어나 교내를 시속 60Km로 주행했다. 예상보다 빠른 속도에 박주혁이 긴장하여 한민철 교수를 넌지시 불렀다.

    “교수님.”

    “예.”

    “행인이 많습니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걱정 없어요. 기왕이면 앞으로 끼어들면 좋겠네. 하하하.”

    “···!”

    한민철 교수의 말에 박주혁이 경악할 때쯤, 정말로 한 학생이 불쑥 뛰어나와 무단횡단을 시도했다. 박주혁이 아찔한 장면을 상상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끽!

    예상과는 차는 학생과 불과 1m 남짓 남겨두고 울컥거리며 급정거했다. 박주혁이 놀라 눈을 하고 있자, 한민철 교수가 박주혁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뭔 남자가 그렇게 겁이 많아요?”

    “···.”

    너무 놀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학생은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고 외치며 사라졌고, 학생이 사라지자 차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서서히 속도를 올렸다. 그 과정에서 한민철 교수는 어떤 조작도 하지 않았다. 놀라웠다. 정말로 자율주행 3단계가 이미 개발되어 있었다니, 그것도 순수 국내 기술로···!

    충격이었다.

    그리고 이 기술이 사장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까웠다.

    ‘왜?’

    머릿속에 의문으로 가득 찰 때쯤 차는 교내를 크게 돌아 산업공학과 건물로 돌아와 연구동으로 알아서 후진으로 들어갔다.

    “정말 대단하군요.”

    “그렇죠? 이 정도는 돼야 자율주행이라고 하지 않겠어요?”

    박주혁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한민철 교수의 연구실로 돌아온 박주혁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교수님. 혹시 이 기술을 상용화하고 싶진 않으십니까?”

    “아, 나야 하고 싶지! 그런데 이 기술에 관심을 보이는 기업이 단 한 군데도 없었어···.”

    한민철 교수가 고개를 살짝 떨구며 아쉽다는 듯 말을 이었다.

    “벤타와 폴스바근은 기술진을 보낼 테니 가르쳐달라고도 하던데···. 어째서 우리 국내 기업들은···. 쯧쯧.”

    한민철 교수가 혀를 찰 때, 박주혁이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제가 있습니다. 아니, DD 자동차에는 교수님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박주혁의 말에 한민철 교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고 박주혁이 목소리에 힘을 줘가며 말했다.

    “DD 자동차가 개발 중인 전기차에 교수님의 기술이 보태진다면, 세상에 없던 차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한민철 교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박주혁의 말을 경청하다 말고 갑자기 놀라 소리쳤다.

    “바, 방금. 저, 전기차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현재 DD 자동차는···.”

    박주혁이 뭐라 설명하기도 전에 한민철 교수가 상기된 얼굴로 박주혁에게 한 발짝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의 목소리가 흥분하여 살짝 갈라져 있었다.

    “전기차라니···! 박 대표, 함께 만들어 봅시다. 미래를 선도할 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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