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84화 (84/136)

084화 부총리, 당신은 끝났어.

박주혁이 박장대소하자, 강승우 부총리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박 대표님. 뭐가 그리 웃기십니까?”

박주혁은 미소를 걷어내고 강승우 부총리를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정부가 일개 민간기업에 외화를 내놓으라고 말하는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습니다.”

박주혁의 말에 강승우 부총리의 볼살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그리고 박주혁은 쉬지 않고 말했다.

“DD 자동차의 달러를 풀라고요? 왜죠? 정부의 실책을 왜 민간기업이 뒤치다꺼리해야 하는 겁니까? 민간기업에 달러를 강탈해도 안 되면, 죄 없는 국민들에게 장롱 속 달러며 금붙이들을 내놓으라고 하실 겁니까?”

박주혁의 말에 강승우 부총리가 주먹을 쥐며 소리쳤다.

“나라가 없으면, 국민도 없는 것이고, DD 자동차도 없는 것입니다!”

강승우 부총리가 애국심에 빗대 말했지만, 그 또한 웃기는 말이었다.

“저희는 세금 잘 내고 있습니다만···.”

“크윽!”

박주혁의 말에 강승우 부총리가 신음하며 입술을 꽉 깨물 때 박주혁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

강승우 부총리가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박주혁을 노려봤다.

“DD 자동차는 제 소유가 아닙니다. 엄연히 벤타가 소유한 외국기업입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 재량권은 가지고 있으실 것 아닙니까? 그냥 달라는 것도 아니고 보유하고 있는 외화를 시장에 풀면, 나라가 보존해주겠다는데!”

“모순입니다.”

말끝마다 바로 반박하는 박주혁의 태도가 참기 힘들었는지, 강승우 부총리의 엉덩이가 쇼파에서 살짝 떨어졌다. 그의 주먹이 부들거렸고, 눈이 붉게 충혈됐다. 박주혁은 그런 강승우 부총리의 반응을 신경도 쓰고 있지 않다는 듯 담담하게 물었다.

“외화를 대체 어떻게 보존하시겠다는 겁니까?”

“그야, 국···.”

박주혁이 강승우 부총리의 말을 잘랐다.

“설마 국채는 아니겠죠? 외환위기로 휴짓조각이 될 텐데···.”

“외, 외환위기라니! 무슨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지금의 경제 발전을 이룩한 것이 누군데!”

“저도 궁금하군요. 누굽니까? 한국의 경제를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만든 사람이···.”

“···.”

강승우 부총리가 갑자기 입을 꾹 다물고 자리에 앉아 버렸다. 씩씩거렸지만, 박주혁의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었다.

“말씀해 보십시오. 누구입니까?”

“···.”

누구겠나?

답이 뻔하니, 답을 못할 뿐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박주혁의 태도가 너무 거슬리고 화가 났다. 결국 강승우 부총리는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내리치며 다시 벌떡 일어섰다.

- 쾅!

“박주혁! 네가 DD 자동차에서 영원하리라 생각해? 나와 척지면, 당장에라도 DD 자동차를···!”

강승우 부총리가 말하다 말고, 차갑게 식어버린 박주혁의 눈을 마주했다. 분위기가 일변한 박주혁 때문이었을까? 강승우 부총리가 말끝을 흐렸다.

“부총리님. 하신 말씀 그대로 돌려드리겠습니다.”

박주혁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가 큰 탓에 본의 아니게 강승우 부총리를 내려봤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박주혁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지금, 당신이 앉아있는 그 자리. 영원하리라 생각하는 건 본인 아닙니까?”

“뭐, 뭐라!”

박주혁의 말에 강승우 부총리의 얼굴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신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기업들의 외화까지 노리는 무능한 부총리를 향해 박주혁이 일갈했다.

“너야말로 착각하지 마! 세상이 네 손에 있는 것 같아? 잘 버티고 있는 기업들까지 쓰러트릴 생각하지 말고, 빨리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해.”

“···뭐, 뭐라고? 이 건방진 새끼가!”

강승우 부총리가 볼살을 부들거리며 소리칠 때 박주혁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어린놈이 겁도 없이!”

강승우 부총리가 박주혁의 뒤에 대고 이를 갈며 소리쳤다. 박주혁은 문고리를 잡고 뭔가 생각났는지 불현듯 고개를 돌려 강승우 부총리를 쳐다봤다. 시리도록 차가운 눈빛이었다.

“밑 빠진 독을 고치고 다시 말씀하세요. 또 모르죠. 그러면 제가 다른 말을 할지도.”

박주혁의 말에 강승우 부총리가 얼굴을 붉히더니 테이블에 있던 재떨이를 들며 소리쳤다.

“어디서 아는 척이야!”

고함과 함께 강승우 부총리는 재떨이를 박주혁에게 던졌다. 박주혁은 고개를 살짝 틀어 재떨이를 피했다. 재떨이는 부총리실의 문을 때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 쾅! 쩌저정!

바닥을 뒹구는 크리스털 재떨이를 힐끔 쳐다본 박주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강승우 부총리를 쳐다봤다. 모든 것을 꿰뚫고 보고 있는 것 같은 박주혁의 눈이 실로 매서웠다.

“이게 당신의 수준인 겁니다.”

박주혁의 말에 강승우 부총리가 몸을 부들거리며 소리쳤다.

“야! 너 이 새끼! 당장 이리 와!”

“문민정부라더니···. 아직도 군사정권의 색깔을 못 지웠군요.”

박주혁은 강승우 부총리를 비웃으며 문을 거세게 닫아 버렸다.

- 쾅!

강승우 부총리는 얼굴을 붉힌 채 박주혁이 사라진 문을 노려보며 씩씩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DD 자동차를 가만두지 않겠어!”

부총리실에서 강승우가 악에 받친 소리가 들렸지만, 박주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재정경제원을 벗어났다.

한참 씩씩거리며 화를 삭히고 있는 강승우 부총리에게 직원들이 허겁지겁 들어왔다. 가뜩이나 기분이 좋지 않던 강승우 부총리가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무슨 일이야.”

“신한공영도 당장 다음 주에 만기인 어음을 못 막을 것 같답니다.”

“···.”

강승우 부총리가 고개를 떨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막을 수 있을 것 같다더니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채, 채권단이 지급기한 연장을 거절했다고 합니다.”

“뭐라고? 주관사가 어딘데? 왠만하면 유예해주자고 금융권이랑 다 얘기 끝난것 아니었어?”

강승우 부총리가 눈을 부라리며 직원을 쳐다볼때 또 다른 직원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부총리님!”

“넌 또 왜?”

강승우 부총리의 미간이 펴질 짬이 없었다.

“기어차도 두 달 뒤 만기인 어음을 못 막을 것 같답니다.”

“기, 기어차까지···? 이런 젠장!”

보고를 받은 강승우 부총리가 책상 위에 있던 서류 뭉치를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박주혁과 DD 자동차를 당장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텐데, 현실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굵직한 대기업들만 보고를 해서 그렇지, 산소호흡기를 달고 가쁜 숨을 쉬고 있는 기업들이 너무도 많았다.

강승우 부총리의 의지가 그렇다 한들, 지금 당장 박주혁과 DD 자동차에 손을 쓸 여력은 없어 보였다.

#

운전대를 잡은 박주혁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 쓴소리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한국은행과 한국개발연구원이 강승우 부총리에게 외환위기에 대한 경고와 함께 IMF에 외화 차입을 건의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근시안적인 해결 방법만 모색한단 말인가? 답답했다.

박주혁은 혀를 차며 구로공단으로 향했다. 매도인이 하루라도 빨리 거래하자고 성화였기 때문이다. 부동산에는 최효정 여사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빨리 오셨네요?”

“엄청 다급하신 것 같더라.”

“요즘 시기가 그렇죠.”

박주혁은 덤덤하게 말하며, 매도인을 기다렸다. 커피 한잔을 하고 있는데 누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매도인의 손에는 은행 대봉투가 여럿 들려있었다. 핼쑥한 표정과 조금 커 보이는 정장이 그의 현재 상황을 대변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회사를 살려보기 위해 고군분투하느라 살이 빠져 정장은 커졌고, 스트레스로 얼굴에 암운이 드리웠다. 그 시절 여느 사장님들의 모습이었다. 반면, 재정경제원 부총리님께서는 피부 마사지를···.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감사를 표했다.

“8억에 팔려고 했는데 10억에 매수해주신다고 들었습니다.”

“예. 워낙 목이 좋은 곳인 것 같아서 말이죠.”

그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상체를 90도 숙이며 인사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의 돌발 인사에 박주혁이 일어나며 말했다.

“이러지 마십시오. 원래 50억에 팔 수 있는 땅입니다.”

박주혁의 말이 위로되었던 것일까? 그가 눈물을 글썽이며 박주혁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닙니다. 지금 10억은 제게 50억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정말,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씁쓸함을 뒤로 한 채 박주혁은 휴대폰을 꺼내 파인랭스 허인아 과장에게 전화했다.

“허 과장.”

“예. 사장님.”

“지금 좋은은행 222-123465···. 진림모피. 이쪽으로 1억 송금하세요.”

“좋은은행 222··· 진림모피, 1억 원. 알겠습니다.”

허인아 과장이 계좌번호를 확인하더니 알겠다고 전화를 끊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매도인의 얼굴에 그늘이 조금 사라지는 것 같았다. 부동산 중개인이 계약서를 박주혁과 매도인에게 건네며 말했다.

“잔금은 한 달 안에 치르시면 되고요···.”

가만히 계약서를 쳐다보던 박주혁이 중개인의 말을 잘랐다.

“한 달까지 기다릴 필요 있나요. 돈, 급하신 것 같은데 보통 서류처리가 얼마나 걸립니까?”

“아, 빨리하면 3일 정도···. 걸릴 겁니다.”

“그럼 잔금 3일 안에 지급하는 것으로 하죠. 중개인 분께서 최대한 빨리 서류를 처리해주시는 것이 서로 좋겠군요.”

시원시원한 박주혁의 말에 매도인의 눈가에 투명한 물이 맺혔다.

그토록 원하던 구로공단 대지를 계약한 박주혁은 최효정 여사와 함께 차에 올랐다. 최효정 여사가 시원섭섭한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샀구나.”

“네. 그것도 아주 저렴하게요.”

박주혁의 말에 최효정 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네가 인심을 후하게 써서 매도인이 무척 감동한 것 같더구나.”

“정말 저렴하게 샀으니까요. 막상 거래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네요.”

“아니다. 아까 사장님이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것 같았어. 지금 10억이 자기에겐 50억 같다는 말이 정말 가슴 아프더구나.”

“···.”

최효정 여사의 말에 박주혁은 답할 수 없었다. 다시 한번 사는 삶이기에 박주혁은 이런 위기를 피할 기회라도 있었다지만, 다른 사람들은···. 박주혁은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밑바닥 경제가 이렇다는 것을 강승우 부총리, 아니 통수권자는 알까? 현재 부도가 대기업만의 문제가 아닌 것을 말이다.

#

언론에서 OECD 가입으로 인해 94년 멕시코 외환위기와 비슷한 상황을 겪는 것 아니냐고 정부를 질타했다. 그때마다 YS는 한결같이 말했다.

“우리의 경제체질이 멕시코와 비교도 안 될 만큼 튼튼해서 그런 사태는 절대 없습니다.”

“외환 보유고는 언제나 300억 달러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고, 안정적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외화부채는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300억 달러의 5배인 1,500억 달러 수준이었다. 이런 중요한 사실을 축소, 은폐했다는 이유로 강승우 부총리는 직무유기 혐의로 기소 및 구속되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OECD 가입 한 달 후 도산한 한부 그룹 사태는 사과 상자째 돈을 받은 정치권과 한부 그룹의 유착으로 드러났다. 거기에는 YS 대통령의 차남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에 밝혀지며 민심까지 등을 돌렸고, 97년 말 대선을 앞두고 정국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비리 여파는 매서웠지만, 한국의 경제 또한 빠르게 허물어져 갔다.

IMF에 차입을 결정하기 한 달 전, 강승우 부총리의 인터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분명, 한국은행과 한국개발연구원에서 3월에 외환위기를 경고했었고, 박주혁이 쓴소리까지 들었음에도 전혀 나아진 것은 없었다. 국민소득 1만 불 돌파와 OECD 가입 등의 성과를 유지하고 싶은 그들만의 욕심이 화를 더 키운 폭이다.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은 튼튼하며, 멕시코와 동남아식 위기는 없습니다!”

박주혁은 강승우 부총리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더니, 딱 그 꼴이구나.”

그리고 이어진 보도에 박주혁은 피식 웃었다. 언론도 강승우 부총리의 말을 비웃듯 현실을 보도한 탓이다.

[강 부총리의 말씀과는 달리 우리나라의 체불임금이 97년 10월 현재 6,480억 원에 달한다는 소식입니다.]

“97년 들어 도산하는 업체가 늘어나며, 6,500억 원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임금도 못 받고 길거리로 나앉았습니다. 위기가 아니라는 정부의 말과는 달리 실물 경제는 나아질 기미가 없고 되레 악화하고 있습니다.”

기자의 보도를 들으며 박주혁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강승우 부총리···. 당신은 끝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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