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83화 (83/136)
  • 083화 외환위기가 목전인데··· 피부관리?

    파인랭스는 제닉스 소송 건으로 눈코 뜰 새 없었지만, 충분히 관리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랭귀지패스트 덕분이었다. 랭귀지패스트가 없었다면 박주혁의 말대로 돈을 뿌려가며 프로젝트를 진행했을 것이다.

    “단어당 200원 아니면 안 해요!”

    이렇게 당당하게 외치는 최소영에게도 아마 번역을 줄 수밖에 없었겠지···.

    랭귀지패스트 덕분에 예상 투입인력이 절반 이하로 줄었다. 투입인력의 축소는 전부 파인랭스의 이익으로 돌아온다. 이보다 좋을 수 없었다. 힘든 6개월이 되겠지만, 파인랭스 직원들은 행복한 것이다. 97년, 98년은 악몽의 해니까 말이다.

    거래절벽을 해소한 박주혁은 일주일 넘게 자리를 비운 DD 자동차로 출근했다. 책상에 앉아 밀린 신문을 살펴보는데 유독 눈길을 잡는 제목이 있었다.

    [96년 1인당 국민총생산 16,000달러 달성!]

    YS 대통령이 대내외적으로 대한민국의 위상 즉, 체면을 중요시하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정도가 심하지 않나? 내부는 곪아 썩어가고 있는데 반창고를 붙인다고 해결이 되겠냐는 말이다. 눈 가리고 아웅이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기다. 당장 다음 주부터···.

    씁쓸한 표정으로 신문을 덮은 박주혁이 의자에 몸을 기대며 창밖을 응시했다. 차디찬 날씨와 달리 햇살만큼은 따사로웠다. 혹한에 처한 한국 경제 상황 속에서 유독 따사로운 햇살을 받는 파인랭스와 DD 자동차를 날씨가 마치 대변하는 것 같았다. 착잡함을 느끼며 지그시 눈을 감았는데 스피커 폰이 울렸다.

    “사장님.”

    고윤희 비서의 목소리에 박주혁이 감았던 눈을 뜨고 책상으로 다가왔다.

    “네.”

    “재정경제원 기획관리실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박주혁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재정경제원은 미래의 기획재정부와 같은 곳이었다. 부총리 직할의 행정기관에서 DD 자동차에 무슨 일로···? 박주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무슨 일이라고 합니까?”

    “자세한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전화 돌리세요.”

    “예.”

    대체 무슨 일로 전화를 했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일까? 고윤희가 전화를 돌리는 그 짧은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 띠리리.

    전화기가 울리고, 박주혁이 천천히 수화기를 귀에 가져갔다.

    “안녕하십니까? 재정경제원 기획관리실 우원식 주사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DD 자동차 박주혁 대표입니다.”

    “DD 자동차의 명성은 익히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통화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우원식 주사의 입바른 소리에 박주혁은 웃을 수 없었다. 속마음을 감춘 채 대화의 활로를 모색하는 전형적인 멘트였기 때문이다. 관례적인 인사말이 오가고, 박주혁은 우원식 주사가 이빨을 드러내길 기다렸다.

    “부총리님께서 박 대표님을 좀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저를요?”

    “예. 전화로 말씀드리긴 뭐하고···.”

    우원식 주사가 말끝을 흐리자, 박주혁이 정색하며 말했다.

    “이유도 모르고 만나면 난처할 것 같습니다만.”

    “아, 곤란하게 해드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부총리님께서 경제계 인사들과 만나는 자리니 큰 부담을 느끼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원식 주사의 말에 박주혁은 미간이 구겨졌다.

    ‘냄새가 나는데···.’

    불길한 느낌은 있었지만, 나라 서열 3위인 부총리의 부름에 응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원식 주사는 박주혁이 별말이 없자, 말을 이어갔다.

    “이틀 뒤 재정경제원 대회의실로 오시면 됩니다. 식사와 다과가 준비되니 편하게 오시면 됩니다.”

    “···흠. 알겠습니다.”

    알겠다고는 답했지만, 뒷맛이 개운하지 않았다.

    #

    97년 3월 초 재정경제원 대 회의실.

    박주혁은 자리하고 있는 재계 인사들과 인사를 주고받았다. 업계가 다양했지만, 공통점은 수출 비중이 높은 기업들이라는 것이었다. 박주혁은 자리에 앉아 미간을 좁혔다.

    ‘벌써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던 걸까?’

    미래를 알고 있던 박주혁은 이 자리가 영 불편했다. 정치권의 노림수가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연회는 강승우 경제부총리의 인사말로 시작됐다.

    “오늘 한국 경제의 기둥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오늘 이 자리는 한국의 경제를 이끄는 여러분들의 의견을 들어보는 자리입니다. 경제인들의 활동을 지원하여 OECD 가입국에 걸맞은 경제 대국을 만들라는 각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뜬구름 잡는 소리였다. 강승우 경제부총리의 말에 박주혁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벌써 외환이 바닥을 보이고 있을 텐데?’

    한국은행과 한국개발연구원이 3월에 외환위기 도래 가능성을 예측하고 IMF 및 국제금융기구로부터 외화를 긴급 차입할 것을 비슷한 시기에 건의했다. 이때 미리 손을 썼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아니다.

    곪은 환부가 치유되려면 뿌리까지 도려내야 깨끗하게 치유될 수 있는 법이다. 당장 외화 차입을 해 급한 불을 끈다손 치더라도, 경제 전반에 걸친 높은 부채비율은 언제고 발목을 잡았을 것이다.

    전문 기관들의 외환위기 보고서를 무시하고 한국 경제는 탄탄하다고 외쳤던 사람이 바로 저기에 서서 말하고 있는 강승우 부총리다. 물론 그도 위기를 느끼고 7월에 들어 금융개혁법을 발표하며, 개인 외화보유 한도를 1만 달러에서 50만 달러까지 확대하고 출처를 묻지 않겠다는 시행법령을 발표한다. 한마디로 시장에 달러를 내놓으라는 얘기였다. 얼마나 급했으면···.

    박주혁은 무능력했던 강승우 부총리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리려 했지만, 강승우 부총리의 마지막 말에는 미간이 좁힐 수밖에 없었다.

    “여러분들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외화가 시장에 돌지 않고 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한국 경제의 건전성을 올리려면, 자금 시장이 안정화돼야 합니다···.”

    ‘그럼, 그렇지.’

    수출을 주력으로 하는 기업 대표들을 괜히 한자리에 모은 것이 아니었다. 결국은 기업들이 보유한 외화가 목적이었다. 박주혁이 강승우 부총리의 노림수를 파악하고 진저리치고 있을 때, 강승우 부총리가 외쳤다.

    “경제 발전을 위하여!”

    “위하여!”

    샴페인을 들어 건배하긴 했지만, 이 잔은 독배다.

    #

    씁쓸한 경제부총리와 만찬이 끝나고 2주 뒤. 연초 한부 그룹 부도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에 언론에는 안 좋은 소식만 들려왔다.

    [97년 3월 19일.]

    착잡한 표정과 말투로 앵커가 소식을 전했다.

    “재계 20위 권에 있는 사미그룹이 부도가 났습니다.”

    시장의 시그널은 확실했고 외국인들은 하나둘 한국에서 짐을 쌌다. 외화는 빠른 속도로 유출됐다.

    [97년 4월 20일.]

    “한부, 사미 그룹의 부도에 이어 진루가 워크아웃을 신청했습니다.”

    두꺼비 소주로 유명한 진루도 휘청거렸다.

    [97년 5월 15일.]

    “삼림식품이 최종 부도가 났다는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그리고 4일 뒤인 97년 5월 19일.

    “유통기업이자 도래미 백화점의 모기업인 태농이 부도 처리되었습니다.”

    뒤이어 식품 기업 현태의 부도 루머와 건설업계인 신한공영의 법정관리 그리고 재계 10위권에 있던 기어 그룹까지 사실상 부도가 났다.

    불과 5개월 만에 재계 순위권에 있던 기업들의 도미노 몰락으로 시장은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다. 기업들의 대출은 꽉 막혔다. 심지어 금융회사도 부도가 나는 판국에 누가 누구에게 대출해준단 말인가···. 전쟁이 따로 없었다.

    뻔히 알고 있는 사실들이었지만, 박주혁의 마음도 편치는 않았다.

    “두 번을 겪어도 역시나 악몽이네···.”

    그나마 DD 자동차는 체질 개선을 통해 해외판매가 주였기에 다행이었다. 여전히 칼스타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물쏘와 코린도는 저가 시장을 공략하며 외화를 벌어드렸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았을까? 재정경제원에서 다시 한번 연락이 왔다.

    “박 대표님. 우원식 주사입니다.”

    “아, 네. 안녕하셨죠?”

    “저, 부총리님께서 좀 만나 뵙자고···.”

    지난번과 달리 우원식 주사는 저자세였고,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재정경제원은 전쟁 한복판이었으니까.

    “알겠습니다. 언제 들어가면 됩니까?”

    박주혁의 대답에 우원식 주사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편하신 시간에 최대한 빠르게 오시면 좋겠습니다.”

    재정경제원의 힘이 이 정도였나? 지금 당장 들어오라고 해도 설설 길 사람들이 태반이었을 텐데···.

    “한 시간 뒤에 도착할 겁니다.”

    “박 대표님. 정말 감사합니다.”

    #

    박주혁이 차를 몰아가고 있는데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주혁아···. 정말 세상이 어찌 돼가는 거니.”

    최효정 여사의 걱정스러운 말투에 박주혁이 차분하게 답했다.

    “파인랭스와 DD 자동차는 전혀 문제없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네가 잘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항상 우울한 뉴스만 방송을 타는 것은 아니었다. DD 자동차가 해외에서 선전한다는 소식도 자주 전파를 탔다. 희망적인 뉴스가 없으니 DD 자동차가 언급된 측면도 없지 않겠지만, 덕분에 최효정 여사가 걱정을 줄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박주혁이 일부로 한현태 기자에게 소스를 흘린 것도 있지만 말이다.

    한 달에 대기업 하나씩 쓰러지고 있는 작금의 현실 속에서 그래도 잘 굴러가는 기업이 있다는 사실은 사막의 오아시스 같지 않을까? 박주혁의 생각은 그러했다.

    “이런 상황에서 꼭 구로공단 땅을 사야겠니?”

    “이럴 때 사야 합니다. 그래야 자금이 필요한 회사에 도움이 돼요.”

    “···.”

    박주혁의 말이 구구절절 옳았기에 최효정 여사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말했다.

    “8억에 팔겠다고 연락이 왔더구나.”

    “10억에 산다고 하세요.”

    “8억··· 인데?”

    “얼마나 급하면 8억까지 왔겠습니까? 10억에 산다고 하세요.”

    파인랭스는 무차입 경영에 랭귀지패스트의 판매 호조까지 이어져 현금을 쌓아두고 있었다. 자금 여력은 충분했다. 심지어 극성전자의 소송 건을 진행하며 유입될 현금도 많다. 투자의 적기는 바로 지금이다.

    최효정 여사와 통화를 끝낼 무렵에 박주혁은 재정경제원에 도착했다. 예상대로 재정경제원의 분위기는 매우 무거웠다. 사방에서 전화가 빗발쳤고 공무원들의 표정에 암운이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보며 안타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업자득이다.’

    결국 외환위기는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 모두의 책임이다. 리더가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면, 바로 잡아줬어야 할 사람들이 바로 저들 아닌가? 손을 놓고 있다가 둑이 터지니 인제야 부랴부랴···. 물론, 제일 큰 책임은 통수권자겠지만 말이다.

    우원식 주사의 안내에 따라 박주혁은 부총리실로 들어갔다.

    “아! 박 대표님. 어서 오세요.”

    “안색이 좋아 보이십니다?”

    “하하하. 요즘 피부 마사지를 받고 있어요.”

    실제로 피부에서 강승우 부총리의 얼굴에 광기가 돌았다. 나라가 부도가 날 지경인데 최소한 애쓰고 있다는 인상은 보여야 함이거늘.

    코로나19 사태를 막아내기 위해 애썼던 질병관리청장과 너무나 비교가 됐다. 청장은 날이 갈수록 살이 빠지며 흰머리가 늘어갔다. 그런 그녀를 국민들은 영웅이라 칭했었는데···.

    국가 부도 사태를 마주하고 피부 마사지를 받고 있다니? 언론에 뻔지르르한 얼굴로 국가 부도를 선포할 생각인 건가?

    ‘한심하군.’

    썩어가는 표정을 애써 감추며, 박주혁은 강승우 부총리와 손을 맞잡았다. 박주혁이 자리를 하자, 강승우 부총리가 비서에게 커피를 내오라고 했다.

    사치스럽도록 고급스러운 잔에 담겨있는 커피가 쓰디썼다.

    “박 대표님. 이렇게 오시라고 한 건 다름이 아니라···.”

    강승우 부총리의 말을 듣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무리 태연한 척하려 해도 미간의 주름이 점점 깊게 패여갔다.

    “그러니까. 지금 DD 자동차의 외화를 전부 내놓으란 말씀이십니까?”

    “내놓으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정부가 보존해줄 테니 달러를 좀 풀어달라 이 말이지요. DD 자동차가 보유한 외화가 상당하지 않습니까? 칼스타던가요? 그 차 한 대만 팔아도 10만 불이 들어온다고 알고 있습니다.”

    웃겼다.

    그리고 실제로 박주혁은 강승우 부총리를 앞에 두고 크게 웃어버렸다.

    “하하하!”

    강승우 부총리의 표정이 일순간 딱딱하게 굳었지만, 박주혁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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