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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82화 (82/136)

082화 할 수 있습니다. 해야 하고요.

“신랑 입장!”

조광연 차장이 늠름하게 식장을 가로질러 걸어 들어왔다. 한기훈을 비롯한 파인랭스 영업 팀원들이 큰소리로 외쳤다.

“조광연, 멋있다!”

조광연과 구경숙의 친지들이 그들의 재치 있는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고, 조광연이 고개를 돌리며 히쭉 웃더니 손가락 2개를 펼쳐 보였다. 그리고 잠시 뒤 사회자의 외침과 함께 익숙한 피아노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 딴~ 딴따따. 딴 따라라.

“신부! 입장!”

조명이 어두워지며, 구경숙 과장이 수줍은 듯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식장에 나타났다. 평소 편안한 옷차림과 달리 오늘은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그 모습에 조광연도 반했는지 얼굴에 홍조를 띠며 활짝 웃었다.

박주혁은 둘의 박수를 치며 구경숙과 조광연을 번갈아 쳐다봤다.

‘보기 좋네.’

흐뭇하게 웃던 박주혁의 얼굴은 식이 끝날 무렵에는 경직되어 있었다. 곁에 있던 박영희 팀장이 그런 박주혁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디 불편하세요?”

“음? 아니요.”

“얼굴이···.”

박영희의 말에 박주혁이 얼굴을 손으로 쓸며 애써 웃어 보였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단지, 곧 닥칠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는 것이 걱정될 뿐.

‘당장 2월부터 거래절벽이 될 텐데···.’

전에는 권선호가 직원들을 데리고 나간 덕분에 근근이 버텼다지만, 기존 직원들과 함께 식구들이 늘어난 지금이라면 얘기가 좀 달랐다. 박주혁은 미간을 좁히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프로젝트를 단독 수주해야 한다는 소린데···.’

박주혁이 한창 고민에 빠져있을 때 곁을 지키던 박영희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박주혁의 팔을 툭 쳤다.

“으음?”

“사장님. 무슨 걱정거리 있으시죠?”

“박 팀장 눈은 못 속이겠네요.”

박주혁의 말에 박영희 팀장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뭔데요?”

“내년이 무척 힘든 한 해가 될 것 같아서 말이죠···.”

그늘이 드리워진 박주혁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박영희 팀장이 힘주어 말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전 사장님 곁에 있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고민되는 일 있으면 제게 말하세요.”

박영희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박주혁은 그녀의 진심을 알고 있기에 그저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끼어들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저 빼고 이러시면 안 되죠. 저도 사장님과 한배를 탔다고요.”

심영찬이 박주혁과 박영희의 틈에 얼굴을 들이밀며 웃었다. 심영찬과 바짝 붙어있던 오해영도 슬그머니 다가와 수줍게 한마디를 보탰다.

“저도, 파인랭스와 함께 할 거예요.”

“해영씨도?”

“그럼요. 냉장고···. 받아야 하거든요.”

오해영의 말에 심영찬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해, 해영씨? 갑자기 냉장고라니···?”

“왜요. 저도 결혼해야죠? 심 대리님은 결혼 안 하실 거예요?”

“해, 해야죠! 당연히···.”

“당연히···. 누구랑?”

심영찬이 갑자기 입을 오므린 채 눈만 끔벅거렸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박주혁과 박영희 팀장이 피식 웃었다. 심영찬의 애절한 구조요청 눈빛을 슬그머니 피한 박주혁은 그 자리를 벗어나 차에 올랐다. 시동을 걸고 운전대를 잡은 박주혁의 눈빛이 번뜩였다.

“약한 소리 하지 말자. 할 수 있어. 아니, 반드시 해야 한다!”

#

파인랭스는 박주혁의 활약으로 많은 고객을 확보하고 있었고, 계속 성장세에 있었다. 하지만, 그가 걱정한 대로 97년 1월부터 심상치 않은 기류가 감지되고 있었다.

회의실에 모인 팀장급 인원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모였고, 조광연 차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작년 말에는 연말이어서 일감이 다소 감소해도 그러려니 했는데 심상치 않아요.”

조광연 차장이 스크린에 차트를 띄우며 말을 이어갔다.

“재작년, 작년 매출 비교표입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연초가 보편적으로 좀 매출액이 낮습니다. 그런데···.”

조광연 차장이 다음 슬라이드를 띄우자, 사람들이 눈빛이 흔들렸다.

“올 1월은 상당히 심각한 수준입니다. 특히 한부 그룹 부도 이후로 문의조차 없는 실정입니다.”

조광연 차장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좌중을 둘러봤고, 구경숙 과장이 손을 들며 말했다.

“혹시, 고객 이탈이 있는 건 아닙니까?”

“현재도 꾸준히 해피콜을 돌리고 있는데, 그런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조광연 차장의 말에 이어 한기훈 과장이 입술을 열었다.

“품질 이슈나···. 불만족 사항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로 고객은 살아있는데 번역이 없어졌다고 이해하는 게 빠를 것 같습니다.”

“번역이 없다···?”

한기훈 과장의 말에 박영희 팀장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렇다면 투자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소린데···. 이제 막 CDMA 시장이 태동했는데도 IT 기업들조차 몸을 사린다는 것은 심상치 않은 것 같네요.”

박영희 팀장의 말에 다들 걱정스러운 한숨을 내쉬었고 조광연 차장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사장님께 보고해서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박영희 팀장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사장님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습니까? 고객이 아니라 번역물량이 없는 것인데요···.”

그렇게 무거운 회의가 이어지는데 회의실이 벌컥 열렸고 모두의 시선이 한곳을 향했다.

“뭔데 분위기가 이렇게 무겁습니까?”

“사장님!”

박주혁은 웃으며 테이블에 앉아 스크린을 살펴보더니 빙긋 웃었다. 직원들이 스스로 회사가 닥친 문제점에 대해 고민하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선다는 것 자체가 뿌듯했다. 뾰족한 수를 낼 수는 없겠지만, 직원들이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무적인 것 아니겠나?

“너무 우려하지 마십시오.”

박주혁이 직원들을 달랬지만, 그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대외적으로 악재가 지속되고 있지만, 파인랭스는 건재할 겁니다. 여러분은 절 믿고 따라오시면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박주혁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번역할 일이 없다면 재정적 어려움에 부닥칠 터. 그것을 알고 있던 박영희 팀장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박주혁을 쳐다봤다. 박주혁은 박영희 팀장을 부드러운 눈길로 쳐다보더니 말했다.

“회사를 걱정하는 여러분들의 마음은 잘 접수했습니다. 곧 좋은 소식이 들려올 테니 여러분들은 지금처럼 각자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주세요.”

박주혁의 말에도 직원들의 여전히 무거운 표정이었다.

“조 차장과 한 과장은 남고 모두 업무로 복귀하세요.”

박주혁이 사람들을 물리고, 조광연 차장과 한기훈 과장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찬바람이 아주 거세네요.”

“혹한입니다. 아무리 1월이라지만, 예사롭지 않습니다. 사장님.”

조광연 차장의 걱정 가득한 말에 박주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 추워질 겁니다.”

“지금보다 더요?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박주혁은 그저 씁쓸하게 웃어 보이더니 입술을 뗐다.

“극성텔레콤은 변함없이 우리와 거래 중이죠?”

“예. 저희 말고는 등록된 회사가 없다고 하던데요.”

“좋습니다. 이제 곧 극성전자의 일로 연락이 올 겁니다.”

“극성전자요?”

권선호 때문에 수주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

미국의 가전업체 제닉스.

1918년 설립되어 한때는 GE의 유일한 경쟁사였을 정도로 가전제품 최고의 브랜드였다. 세계 최초로 무선 리모컨을 개발, 상용화한 것도 바로 이 제닉스였다. 하지만, 가격을 앞세운 일본 기업들에 밀려 사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제닉스가 일본 기업에 밀려 기운 것은 판매 부진도 한몫했지만, 실은 과도한 연구 투자 때문이었다. 아직 HDTV가 상용화되기도 전인 80년도에 제닉스는 이미 HDTV의 원천 기술들을 확보하고 있을 정도였다.

95년 제닉스가 파산 위기에 처했을 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이 기업에 투자한 기업이 있었으니···. 바로 한국의 극성전자였다. 물론, 극성전자는 HDTV 원천 기술을 노리고 투자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GE, 일본의 쏘니, 파나쏘닙 등 쟁쟁한 브랜드와 경쟁하기 위해 제닉스라는 브랜드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단순 자본참여만 하던 극성전자는 외환위기 직전에 제닉스를 완전 인수하기로 한다. 미국 시장을 위한 노림수였지만, 막대한 부채 덩어리였던 제닉스는 외환위기와 맞물리며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다. 경영사에서도 흔히 M&A의 실패라고 자주 언급되는 사건이었다.

물론, 제닉스의 원천 기술로 M&A 실패의 흑역사가 뒤집히는 결과를 가져오긴 하지만, 어쨌든 당시에 극성전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부채를 줄이기 위한 구조조정뿐이었다.

문제는 제닉스의 소액 주주들이었다.

그들은 극성전자가 제닉스를 공중분해 시켜 날로 먹으려 한다며 집단 소송을 걸었고, 그 소송에 대응하기 위해 곧 극성전자는 대규모의 번역을 발주하게 된다.

-띠리리리.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렸고 박주혁은 서둘러 수화기를 들었다.

“네, 파인랭스 박주혁 대표입니다.”

“안녕하십니까? 극성텔레콤 구매부 임형섭 차장입니다.”

“임 차장님 오랜만입니다.”

박주혁은 임형섭 차장의 전화를 받으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올 1월 매출은 평균 대비 반 토막이었다. 박주혁의 예상대로 2월은 거래절벽이 되며 위기감이 극에 달했다. 그런데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극성텔레콤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다.

“혹시 파인랭스에서 법률 문서들도 번역하십니까?”

“물론입니다.”

“그렇군요. 분량이 많아도 가능하죠?”

“얼마나 많으시길래···.”

이미 알고 있었지만, 박주혁이 걱정스럽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엄청난 양이라고 합니다. 파인랭스가 저희와 문제없이 거래해왔으니 잘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극성 텔레콤에서 의뢰하는 것이 아닌가요?”

박주혁의 연기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아, 네. 저희 물건이 아니고, 그룹사에서 연락이 갈 겁니다.”

“그룹사요? 네. 알겠습니다.”

목소리는 덤덤했지만, 박주혁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리고 몇 시간 뒤, 극성전자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극성전자 법률팀 유승렬입니다. 소송 관련 문서도 번역할 수 있다고 듣고 연락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언어로 되어 있다면 번역 가능합니다.”

“양은 많고 기간은 짧습니다.”

“대략적인 분량과 기간을 알려주셔야 합니다.”

“으음···.”

유승렬이 곤란한 듯 말끝을 흐렸다. 이전 생에서는 이쯤에서 박주혁이 꼬리를 내렸다. 직원도 몇 남지 않았고, 파인랭스 시스템은 이제 막 개발이 시작된 상태였다. 당연히 랭귀지패스트와 같은 프로그램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파인랭스는 과거와 다른 전력을 갖추고 있다. 박주혁은 자신 있는 목소리로 예민한 사항을 스스럼없이 꺼냈다.

“사실, 분량과 일정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돈입니다.”

“돈이요?”

지금 극성에게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박주혁이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아무리 많은 분량이라 하더라도 그에 비례해 번역사를 투입할 수 있는 재정적 여유가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박주혁의 말에 유승렬은 반색하며 말했다.

“돈은 상관없습니다. 무조건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원하시는 일정에 번역본을 받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확신에 찬 박주혁의 말에 유승렬이 갑자기 웃어버렸다.

“아니, 박 사장님. 무슨 자신감이십니까? 이번 프로젝트 정말 분량이 엄청나다니까요?”

“자신 있습니다. OECD 문서도 2달 만에 전부 번역했었습니다. 괜히 파인랭스가 번역업계를 대표한다는 얘기가 나오겠습니까? 믿고 맡겨 보십시오.”

“극성텔레콤에게 관련한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우선 알겠습니다. 저희가 갑이지만, 을이 된 상황이라 어쩔 수 없네요. 파인랭스 주소가···.”

유승렬은 파인랭스의 주소를 받아 적더니 말했다.

“곧 트럭들이 갈 겁니다. 최대한 빨리 번역이 완료되는 대로 보내주셔야 합니다. 정말 긴급을 요하는 건입니다.”

“맡겨주십시오.”

그리고 잠시 뒤 트럭이 줄줄이 파인랭스 건물 주차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OECD 대비 10배 많은 분량, 기간은 6달이었다. 거래절벽에 낙담하던 직원들은 물밑들 들어오는 번역 물량에 눈을 휘둥그레 떴지만, 눈빛 하나만큼은 날카롭게 빛났다. 마치 당장이라도 문서들을 씹어 삼킬 듯 말이다.

팀장급 직원들이 한가득 실려있는 문서들을 보고 기겁하며 박주혁을 불렀다.

“사장님!”

“제가 걱정하지 말랬죠?”

“그. 그래도 이건···!”

“할 수 있습니다. 해야 하고요.”

비장한 박주혁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문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박주혁 역시 날카로운 눈빛으로 문서들을 노려봤다.

‘···이번엔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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