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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81화 (81/136)
  • 081화 주혁아, 나는 널 믿는다.

    박주혁이 퇴근하여 집에 도착하자, 최효정 여사가 저녁을 차리며 넌지시 말했다.

    “주혁아, 부동산에 연락 왔었다. 20억은 힘들고 35억에 팔겠다는데?”

    “아, 그렇군요.”

    “역시 안 되겠지? 강남에 좋은 곳이 있던데···.”

    “아니요. 어머니, 임대로는 안 갑니다.”

    “···.”

    박주혁이 정색하며 말하자, 최효정 여사가 아쉬워하는 눈빛으로 박주혁을 쳐다봤다. 끝까지 최효정 여사는 강남을 포기하지 못했지만, 박주혁의 의지는 확고했다.

    “생각해 보겠다고만 하고 기다려 보죠.”

    “35억이면 괜찮은 것 같은데···?”

    “그 입지면 그렇긴 한데, 분명 더 떨어질 겁니다.”

    “더 떨어진다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니?”

    “···.”

    알고 있는 정보는 많았지만, 이것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박주혁은 미간을 좁히며 잠시 고민한 후 말했다.

    “구로공단에 있는 업체들이 현금이 부족하다는 루머가 있었어요. 아마 돈이 급한 회사면 가격을 내려서라도 팔려고 할 겁니다.”

    박주혁의 말에 최효정 여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하긴, 구로공단이 예전 같진 않지. 공장들도 다 문을 닫는 추세고···.”

    최효정 여사가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얼마뒤 밝은 얼굴로 박주혁을 쳐다보며 말했다.

    “참, 내가 저번에 만나보라고 했던 교수 아가씨와는 약속 잡았니?”

    “예? 아, 아니요.”

    박주혁의 말에 최효정 여사가 눈을 크게 뜨고는 박주혁을 타이르듯 말했다.

    “주혁아. 20대 중반에 교수가 된 아이야. 한번 만나보기라도 하렴.”

    “연락해보겠습니다.”

    박주혁은 숟가락을 입에 가져가며 심드렁하게 답했다. 아무래도 최효정 여사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한 번 만나야 할 것 같았다.

    #

    황금 같은 주말. 박주혁은 난생처음 보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 신촌으로 향했다. 마침 상대방도 신촌에 있는 대학교에서 교수로 근무하기에 장소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만남의 장소는 Y대 후문에 있는 한정식집이었다.

    박주혁이 먼저 도착해 메뉴판을 훑어보고 있었고, 곧 한 여성이 방으로 들어왔다.

    박주혁은 메뉴판에서 시선을 떼고 여성을 힐끔 쳐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손을 내밀었다. 최효정 여사의 체면을 봐서 최대한 예의를 차렸다.

    “안녕하십니까? 박주혁이라고 합니다.”

    “서주경이라고 해요.”

    서주경은 눈웃음을 지었고, 박주혁은 자리를 권했다. 한껏 예의를 차린 박주혁과 달리 서주경은 머리를 질끈 묶고 화장기 없는 얼굴이었다. 다만, 안경 너머 눈에서는 뭔지 모를 빛이 났다.

    “연구를 하다가 오는 바람에 꼴이 말이 아니죠? 죄송해요.”

    털털한 성격인 것 같았다. 박주혁은 따뜻하게 미소지으며 답했다.

    “바쁘신 교수님의 시간을 괜히 뺏은 것 같군요.”

    “아, 뭐. 괜찮아요! 저도 밥은 먹어야죠.”

    이런 선 자리에서는 대부분 한껏 내숭을 부리기 마련인데, 서주경은 상당히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뭐 싫지 않았다. 불편해서 체할 것 같은 자리가 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서주경은 이 식당에 자주 왔었는지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점원을 불렀다.

    “여기 사랑 세트 아니, 국화 세트···.”

    서주경은 서슴없이 주문하다 말고 박주혁을 힐끔 보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주혁씨 홍어 드시죠?”

    “예.”

    박주혁의 대답에 서주경은 활짝 웃더니 국화 세트를 주문했다. 의사도 묻지 않고 메뉴를 시키는 서주경에게 기분이 언짢을 수도 있었지만, 박주혁은 왈가닥 같은 서주경이 퍽 귀엽게 느껴졌다.

    ‘정말, 밥 먹으러 온 거구나?’

    박주혁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상대방이 이렇게 나와주니 되레 편했다.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음식이 세팅되자, 서주경은 행복한 표정으로 음식들을 바라봤다. 이곳에서 식사하기 위해 박주혁을 이용한 것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시장하셨나 봅니다.”

    “하하. 죄송해요. 여기 음식을 너무 좋아해서요.”

    “그러셨군요.”

    어느 정도 배가 차고 나서야,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했다.

    “주혁씨, 무슨 일 하세요?”

    분명 어른들께 전해 들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물어본다는 것은 박주혁과 마찬가지로 별로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서로 관심이 없으니, 자리는 한없이 편해졌다.

    “여러 가지 일을 하죠.”

    “여러 가지요? 오오!”

    서주경은 살짝 감탄한 것처럼 눈을 키우더니 홍어를 입에 넣고 오독오독 씹었다. ‘네가 뭘 하든 난 관심없다’는 듯한 서주경의 태도에 박주혁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질문할 필요도, 딱히 답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박주혁도 삼합을 싸서 한 입 크게 넣었다.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편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래도 서주경에 대해 궁금한 것은 있었다. 박주혁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주경씨는 교수라고 들었는데, 젊은 나이에 대단하시네요. 실례가 아니라면 어떤 학문을 연구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서주경은 음식을 입에 넣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음식을 꿀꺽 삼킨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 경영학이에요.”

    경영학이라는 말에 박주혁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20대 중반에 경영학 교수라니?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예술 쪽 교수일 거로 생각했는데, 예상외였다.

    “경영이요?”

    “예.”

    서주경의 눈이 활자를 그리더니, 말했다.

    “요즘은 DD 자동차를 연구 중이에요.”

    “DD···요?”

    서주경의 말에 박주혁이 의외라는 듯 눈을 살짝 키웠다. 서주경은 자신이 연구하는 것을 언급하며 살짝 얼굴이 상기됐다. 그녀는 자신이 하는 일에 열의를 가지고 있었다.

    “DD 자동차는 짧은 시기에 유동성 위기를 벗어났고, 자동차 회사 중 유일하게 노조가 파업하지 않았어요. 궁금하지 않으세요?”

    빨리 궁금하다고 말하라는 분위기였다. 박주혁이 눈을 깜박이며 서주경을 응시하자, 그녀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DD 자동차가 벤타에 인수되면서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어요. 박주혁이라는 20대 중반의 CEO인데···.”

    서주경은 말하다 말고 갑자기 박주혁을 빤히 쳐다보며 눈을 끔벅였다. 그녀는 안경을 추켜올리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이름이···. 같네요?”

    “그러게요.”

    박주혁은 자신이 DD 자동차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서주경을 응시했다. 그의 태도에 서주경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말을 이어갔다.

    “회사의 체질을 먼저 개선한 것 같더라고요. 무리하게 고급승용차 개발하고 있던 프로젝트를 중단시키고, 당장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아이템을 잡았죠.”

    “놀랍군요. 그 아이템이 뭔가요?”

    박주혁은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띠며 물었다.

    “골프 카트에요.”

    “골프 카트요? 왜? 그거였을까요?”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성공했어요. 우리나라 골프장에 있는 카트는 전부 DD 자동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놀라운 전략이에요. 그리고 칼스타라는 명품 차를 세상에 내놓으며 DD 자동차의 이미지를 한 번에 바꿔놨어요. 정말 연구하고 싶은 회사입니다.”

    서주경은 젓가락을 쪽 빨며 눈을 빛냈고, 박주혁은 흥미롭다는 듯 서주경의 말에 집중했다.

    “재미있는 얘기군요.”

    “재미있었어요? 보통 이런 얘기 하면 따분하다고 하던데···.”

    “무척 흥미로웠어요. 서 교수님.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이름이 아닌 교수라고 부르니 서주경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박주혁을 쳐다봤다.

    “이동통신이 대중화가 되고 있는데 미래를 어떻게 보십니까?”

    유명한 국장, 이원희 지사장 그리고 이연호 사무관과 골프 치고 나서 얘기 나눴던 화두였다. 박주혁은 DD 자동차를 날카롭게 분석한 서주경의 의견이 무척 궁금했다.

    “이동통신이라···. 그렇죠. 요즘 그게 뜨겁죠.”

    서주경이 잠시 눈을 감았다. 박주혁은 호기심어린 눈으로 서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뒤 눈을 뜬 서주경의 눈빛은 아까와는 또 달라져 있었다.

    “이동통신으로 세상이 변할 거예요. 지금이야 일반 전화기에 그치겠지만, 종국에는 이동통신이라는 것이 인터넷을 대체할 거로 생각해요.”

    서주경의 말에 박주혁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걸 예상했다고···?’

    서주경의 말에 놀라워하고 있는데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직 인터넷과 이동통신은 걸음마 수준이에요. 한번 물꼬가 터졌으니 기술개발은 급속도로 이뤄질 겁니다. 그리고 휴대폰이 곧 컴퓨터가 되는 날이 오겠죠.”

    벌떡 일어나 박수 치고 싶었다.

    왈가닥 같은 첫인상과는 달리 그녀의 분석과 예측은 매우 날카로웠다. 박주혁은 눈을 빛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서 교수와 가깝게 지내야겠는 걸?’

    #

    96년 12월.

    티비에서 속보가 흘러나왔다.

    [속보입니다. 대한민국의 OECD 가입이 허가가 났다고 합니다. 드디어, 우리나라가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역사적인···.]

    박주혁은 속보를 보고 곧바로 유명한 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유명한 국장입니다.”

    “국장님. 축하드립니다.”

    “어! 박 사장. 다 파인랭스가 잘 번역해줘서 수월하게 됐어. 고맙네.”

    유명한 국장의 특유의 화법이었다. ‘잘되면 남 탓 안 되면 내 탓’ 배울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박주혁은 웃으며 유명한 국장의 말을 응수했다.

    “저는 그저 번역만 했을 뿐이고, 성과를 낸 것은 국장님이시죠.”

    “···.”

    어디서 많이 들어본 느낌의 말에 유명한 국장이 잠시 말을 하지 못하더니 유쾌하게 웃어버렸다. 웃음이 잦아들고 유명한 국장이 심각한 말투로 말했다.

    “축하할 일은 맞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직 확실한 얘기는 아닌데···. 한부 그룹이 부도가 날 것 같다는군.”

    “예?”

    박주혁이 짐짓 놀란 말투로 유명한 국장에게 되물었다.

    외환위기의 첫 스타트인 한부 그룹의 부도가 코앞에 다가왔다.

    당진 제철소를 짓는 비용의 90%를 은행 돈으로 메꿨던 한부 그룹의 부도는 이미 예견되었던 것이었다. 은행 돈으로도 부족하자, 한부 그룹의 조수태 회장은 정치권까지 손을 뻗으며 정책 자금까지 끌고 왔다. 하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였다.

    한부를 시작으로 사미, 진루, 현태, 대동 등 대기업들이 줄줄이 부도가 난다. 심지어 재계 서열 8위였던 기어 그룹까지 쓰러지게 된다. 대기업의 연쇄 부도는 금융기관의 과다한 외화 차입과 맞물리며 시장을 얼어붙게 했다.

    OECD에 가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부는 체면을 살리기 위해 보유 외화를 시장에 풀었다. 엎친데 덮친 격이라고 그 결과는 국가신용도 하락으로 이어졌다. 급기야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에서 자금을 빼게 된다. 즉, 한부 그룹의 부도는 외환위기라는 재앙의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박주혁은 유명한 국장과 전화를 끊고 달력을 지그시 쳐다봤다.

    96년 12월 12일.

    ‘앞으로 한 달 뒤면···.’

    외환위기라는 태풍이 곧 몰아닥칠 것이다. 미래를 알고 있던 박주혁이었기에 덤덤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아픈 역사였으니 말이다.

    긴장감 가득한 얼굴로 달력을 넘기고 있는데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주혁아.”

    “예, 어머니.”

    “구로공단 땅 25억까지 맞췄다고 연락 왔다.”

    박주혁은 어머니의 전화를 받으며 달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차갑게 말했다.

    “더 내려갈 겁니다.”

    “더? 아무리 그래도···.”

    25억도 분명 저렴한 가격이었지만, 박주혁이 생각하는 목표가와는 갭이 컸다.

    “얼마에 살 생각인데 그러니?”

    “10억이요.”

    “··· 뭐라고?”

    “기다리면 옵니다.”

    “주혁아, 아무리 그래도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목표를 이루려고 하면 안 되는 거다.”

    최효정 여사의 말도 맞다. 하지만, 10억도 많이 책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외환위기 당시 건물과 땅값은 그야말로···. 휴짓조각과 같았으니 말이다.

    “어머니 말씀이 무엇인지 잘 압니다. 하지만, 기다려 보세요. 한국에서 현금이 마르는 날이 옵니다.”

    “현금이 마르다니?”

    “외무부에 OECD 가입 축하 전화를 했더니. 국장님이 알려준 소식이 있습니다. 분명 그리될 거예요.”

    “···!”

    박주혁의 말에 최효정 여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현금이 마르다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박주혁이 정부 고위관계자들과 어울리는 것을 알고 있던 터라. 박주혁의 말이 허황한 얘기가 아닌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최효정 여사는 박주혁과 통화를 끝내고 멍하게 허공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주혁아, 나는 널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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