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80화 (80/136)
  • 080화 또 다른 목표.

    ‘투박하다.’

    전기차는 미래지향적 차량이라는 점에서 차별화가 되어야만 하지만, 내부 인테리어는 물쏘와 코린도의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계기판에는 속도계, 온도계 등 각종 온도계를 가리키는 바늘이 있어야만 하고, 각진 에어 벤트들이 레트로 느낌을 자극했다.

    전기차라는 획기적인 친환경 차를 만들면서도 내부는 고정관념을 벗어나지 못하는 느낌이랄까? 박주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지상억 소장을 향해 말했다.

    “지 소장. 외부 디자인은 무척 마음에 든단 말이지. 칼스타와 이어지는 디자인의 연속성도 상징적이고···.”

    “뭔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깊게 팬 박주혁의 미간에 지상억 소장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실내 인테리어가 거슬리는군요. 개발 중인 전기차의 미래지향적 가치와 전혀 부합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내연기관이 아닌 전기차, 거기에 어울리는 파격적 디자인. 그런데 내부는···. 70~80년대 차량을 보는 느낌이랄까?”

    “아아···!”

    박주혁의 말이 무슨 의민지 바로 알아챈 지상억 소장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으음. 획기적인 차량인 만큼 실내도 파격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지상억 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지만, 90년대 기술적 한계로 디자인이 파격적이라 할지라도 기술이 따라주지 못해 이 투박한 디자인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박주혁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뭔가 획기적 요소는 필요했다. 소비자들의 머릿속에 ‘!’ 하나를 새길 뭔가가 말이다.

    지금 당장 EH슬라의 실내처럼 터치스크린을 적극 활용한 유저인터페이스를 도입할 수는 없었다. 아직 디스플레이 업계가 그 기술까지 미치지 못한 탓이다. CRT가 디스플레이 전부였던 90년대 심지어 LCD 디스플레이는 한창 개발 중이고 상용화 단계도 아니다. 그런데 터치스크린? 실현 불가능한 얘기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명색이 미래지향적 전기차인데 기존 차들과 같은 디자인으로 갈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박주혁의 뇌리에 인우 디자인이 스쳐갔다.

    ‘가만, 인우 디자인이 실내를 디자인한다면 어떤 느낌이 나올까?’

    현재 차용 가능한 기술을 바탕으로 전문 디자인 업체에 계기판과 실내 디자인을 의뢰한다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졌다. 자동차 업계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은 순수 디자이너의 관점에서라면···?

    박주혁이 고심하고 있는 지상억 소장에게 넌지시 말했다.

    “지 소장. 혹시 인우 디자인이라고 압니까?”

    디자이너들에게 입소문이 났는지 지상억도 인우 디자인을 알고 있었다. 하긴 산업 디자인 카테고리에 있으니 지상억 소장이 모르는 것도 이상한 일일 터.

    “상업 디자이너들의 집합체죠. 거긴 갑자기 왜?”

    “혹시 거기에 전기차의 실내 디자인을 의뢰해보면 어떻겠습니까?”

    “예? 거긴 전자기기 산업 디자인 전문 업체입니다.”

    지상억 소장의 말에 박주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동차는 전자기기가 아니란 말인가? 심지어 DD 자동차가 개발하고 있는 모델 D는 전기차인데?

    “···. 지 소장님. 저희가 개발하고 있는 것은 차이지만 좀더 들어가면 전자기기 아닐까요?”

    박주혁의 말에 지상억 소장이 한 대 얻어맞은 얼굴로 멍하게 눈을 끔벅였다. 말이 자동차일 뿐이지, 사실 모델 D는 전자기기가 아닌가? 박주혁의 말이 모순된다고 생각되면서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 어···. 따지고 보면 전자기기라고도 할 수 있을지도···.”

    혼돈 속에서 지상억 소장이 겨우 정신을 붙잡으며 대답했다. 멍한 지상억 소장의 얼굴을 보며 박주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됐기 때문이다.

    ‘내가 말해놓고도 참···.’

    “좀 과장된 표현으로 그렇단 말입니다. 어쨌든 인우디자인에 의뢰해보면 좀 더 색다른 컨셉이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장 소장 생각은 어떻습니까?”

    “흠···. 아무래도···.”

    지상억 소장이 박주혁의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선뜻 그렇게 하자고는 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모델 D의 디자인을 그려낸 자신의 작품에 남이 손을 댄다는 사실이 썩 내키지 않을 터. 하지만, 지상억 소장은 배포가 큰 사람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지상억 소장이 눈을 빛내며 목소리에 힘을 줬다.

    “궁금하긴 하네요. 인우 디자인에서 어떻게 뽑아낼지 말이죠. 저도 실내 디자인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테니, 비교해보시면 어떻겠습니까?”

    달라진 지상억 소장의 태도에서 열의를 느낀 박주혁이 눈에 호선을 그리며 말했다.

    “질 수 없다는 표정이군요.”

    “제가 만든 녀석입니다. 마무리도 제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번 지켜봐 주시죠. 인우디자인에 질 수 없습니다.”

    “정말, 기대되는군요.”

    빈말이 아니었다. 불탈리 수석디자이너였던 지상억 소장이 어떤 디자인을 가져올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인우디자인을 제물로 지상억 소장이 더욱 눈 뜰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사장실을 나가는 지상억 소장의 한 걸음 한 걸음에서 비장함이 느껴졌다.

    박주혁은 이인우 사장의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지성억 소장의 실력을 의심하진 않았다. 다만, 그에게 열정을 불태울 경쟁자는 필요했다. 적당한 자극은 성장의 밑바탕이 되니까 말이다. 박주혁은 수화기를 들어 인우디자인에 전화를 걸었다.

    “네, 이인우입니다.”

    “안녕하십니까? DD 자동차의 박주혁 대표입니다.”

    “DD 자동차···요?”

    이인우가 당황하여 목소리가 갈라졌다.

    “예, 얼마 전 국무총리 표창장에서 인사를 나눴었는데요.”

    “아아아! 기억납니다. 안녕하십니까?”

    DD 자동차가 연락할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는지, 이인우 사장이 무척이나 당황한 것 같았다.

    “인우 디자인에 의뢰를 하고 싶습니다.”

    “예!?”

    당황에 당황을 더하면 경악이 된다. 자동차 회사에서 전자기기 산업 디자인 업체에 디자인을 의뢰하겠다니 심지어 디자인 센터도 갖춘 곳에서···. 생각해보니 이인우 사장이 경악할만도 하다.

    “자, 자동차 디자인 말씀이십니까?”

    이인우 사장이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 자동차를 디자인해서 제품화가 된다면, 인우디자인에게도 상당한 레퍼런스가 될 터. 그의 목소리에 진지함이 묻어났다.

    “아, 자동차 디자인은 아닙니다.”

    “그렇군요···.”

    이인우 사장이 여운을 남기며 말끝을 흐렸다. 그 여운 속에 진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이인우 사장의 반응에 박주혁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자동차와 아주 깊은 연관이 있죠.”

    “···!”

    다 꺼져가던 이인우 사장의 숨소리가 일순간 거칠어졌다.

    #

    이인우 사장은 박주혁과 전화를 끊고, 상기된 얼굴로 직원들을 소집했다. 직원이라고 해봐야 몇 안 되고 대학 동기 및 함께 디자인을 전공했던 친구들이었다.

    “우리에게 상당히 도전적인 의뢰가 들어왔다.”

    이인우 사장의 말에 직원들의 표정에 의아함이 묻어났다. 항상 도전적인 디자인을 그려왔던 터라, 이인우 사장의 말이 가슴에 와닿지 않았으리라.

    “바로 자동차 디자인이지.”

    이인우 사장의 말에 직원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새로운 컨셉의 전자기기일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동차라니?

    직원들이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이인우 사장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물론, 자동차 외관을 디자인하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계기판과 대시보드로 이어지는 실내 디자인을 해달라는 의뢰지.”

    “오오!”

    매번 카세트, 어학기 등 마이너한 제품 디자인을 해오던 직원들에게 흥미로운 소식이었다.

    “개발되는 자동차 컨셉은 뭔데?”

    “디자인 기간은?”

    “의뢰 회사는 어디야? 승용차? 아님 SUV? 트럭?”

    직원들은 벌써 의욕이 넘치는 것 같았다. 이인우 사장은 씩 웃으며 말했다.

    “나도 이 얘기를 듣고 정말 놀랐지.”

    “···!”

    뜸을 들이는 이인우 사장을 잠시 쳐다보던 직원이 버럭 소리쳤다.

    “아, 뭔데? 속 시원하게 말해 뜸 들이지 말고!”

    이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이 이인우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극비사항이야.”

    “알았으니까, 뭔데!”

    “전기자동차란다.”

    “!”

    상체를 가까이 가져왔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펄쩍 뛰더니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이인우를 쳐다봤다.

    “에이. 이 새끼 또 장난치고 있네.”

    “전기차라니. 무슨···. 참나, 의뢰업체가 어딘데? 뭐 중소기업 프로젝튼가 보지?”

    직원들, 아니 친구들의 회의적인 반응에 이인우는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목소리에 힘을 줬다.

    “디자인 의뢰한 곳이 DD 자동차다.”

    “···DD?

    “어, DD.”

    “그 이번에 챠넬 콜라보, 칼스타 만든 DD?”

    “그래. 거기.”

    “허!”

    이미 DD 자동차의 광폭 횡보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전통적인 SUV 강자인 DD 자동차가 전기 골프 카트를 생산하여 점유율 1위를 기록한 것도 황당했었는데, 전기차라니···! 분명 당황스러운 일이긴 했지만, 테이블에 모여앉은 이들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박주혁 사장님이라면···.”

    “그래 그 사람이라면 충분히.”

    “정말 탈 지구인이었네. 전기차라니.”

    어느새 박주혁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혁신적인 개혁가로 인식되어 있는 듯 했다. 이인우 사장도 직원들과 같은 심정이었는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래서 전기차 컨셉에 맞는 획기적인 디자인이 필요하시단다. 우리 박주혁 클라이언트님께서 말이지.”

    “세상에 없던 형식이니까···. 내부도 뭔가 센세이션해야 한다는 뜻이네.”

    “그렇지!”

    이인우를 비롯한 디자이너들의 눈이 번뜩였다.

    #

    인우디자인에 모델 D의 실내 디자인을 의뢰한 박주혁이 의자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돌렸다. 지상억 소장과 인우 디자인이 어떻게 그려낼지 벌써 설렜다. 박주혁은 씩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두 거장의 피 튀는 전장. 벌써 기대가 되는군.’

    아마도 모델 D의 실내 디자인은 역대급이 될 가능성이 컸다. 박주혁은 기분 좋게 그 결과를 기다리면 됐다. 의자에 몸을 기대며 박주혁이 나지막이 말했다.

    “시스템 온, 검색. 미래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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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주혁은 연도별로 데이터를 정렬한 후 천천히 살펴봤다. 반도체 점유율 세계 2위를 기록하는 SJ카이닉스의 전신이 미래전자였다. 한리버가 삼성전자의 반도체를 비싸게 공급받는 바람에 마이팟과의 가격경쟁력에서 밀렸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던 박주혁이다. 미래전자의 문서들을 살피는 그의 눈에서 빛이 났다.

    그저 망상이라고 생각했던 일을 실제로 벌일 생각이었던 것일까?

    박주혁은 꼼꼼히 미래전자가 의뢰했던 번역들을 살펴보다가 불현듯 손가락을 튕겼다.

    “미래큐리텔! 맞아. 여기도 미래전자 소속이었지? 검색. 컴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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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컴택.

    삼송과 극성 그리고 파인애플로 3강으로 나뉜 스마트폰 시장에서 선전했었던 휴대 전화 제조업체였다. 삐삐를 제조하는 벤처기업에서 CDMA 휴대 전화를 만드는 기업으로 변신했다. 때마침 미국의 모터놀라가 CDMA 휴대 전화를 납품하기로 전략적 제휴를 맺으며 사세를 키운 컴택은 자신보다 덩치가 큰 미래큐리텔을 인수하기에 이른다. 미래큐리텔을 인수한 컴택은 사명을 컴택&큐리텔로 변경하였다. 두 회사의 합병은 높은 시너지로 성공적인 인수라는 평가를 들었다.

    한번 재미를 본 기억 때문이었을까?

    컴택&큐리텔은 고급 제품군을 육성하기 위해 당시 센세이션한 반응을 일으켰던 ‘SKY’ 브랜드를 보유한 SJ텔레텍을 무리하게 인수했다. 하지만, SKY 브랜드에 대한 욕심은 컴택&큐리텔이 감당하기 힘든 부채를 떠안게 되었다. 결국 컴택&큐리텔은 늘어난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1년 5개월 만에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미래큐리텔 인수로 급성장한 경험을 살린 것이었지만, SJ텔레콤은 독배였다.

    박주혁은 번역 문서들로 히스토리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이거, 생각보다 퍼즐들이 딱딱 들어맞는데? 한리버에 컴택 그리고 사운드바다···.”

    박주혁은 턱을 쓸며 눈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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