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79화 (79/136)
  • 079화 한리버+사운드바다=마이팟?

    사실,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부터 전조증상은 있었다. 중견기업들이 어음을 막지 못해 유동성 위기에 처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그에 따라 은행들이 대출 만기 연장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 영향으로 사향 산업군이 몰려있던 구로공단 회사들은 대출이 막혔다. 유동성 위기를 탈피하고자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산 매각뿐이었다. 구로공단에 무더기로 나온 매물들만 봐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박주혁은 외환위기가 다가왔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지만, 부동산 중개인은 상황의 심각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사장님, 여기 말고 더 저렴한 부지도 많습니다. 한 번 안내해드릴까요?”

    “그러시죠.”

    박주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덤덤히 말했다. 철저한 포커페이스였다. 협상력을 가지려면 중개인에게 이곳 아니면 안 된다는 인상을 풍겨서는 안 된다. 최효정 여사는 박주혁이 부동산 중개인을 다루는 것을 보며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생각보다 능숙 능란하게 했기 때문이다.

    아직 철없는 20대 중반이라 여겼건만···.

    “이곳은 건물 사이에 끼어 있군요···. 땅값이 저렴하지만, 건축비는 많이 들겠어요.”

    “응달진 곳이군요. 수풀이 우거지지 않은 것이···.”

    “하아, 여기에 건물을 지으면 누가 찾아오겠습니까?”

    박주혁이 날카롭게 지적할 때마다 부동산 중개인은 흠칫거렸다.

    젊은 사람이라 잘 팔리지 않는 땅을 이참에 떠넘겨볼까 했더니, 생각보다 박주혁의 눈은 예리했다.

    “정말, 하나 같이 마음에 안 드는군요.”

    “아하하.”

    부동산 중개인은 손수건으로 이마를 훔치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좀 비싼 곳으로···.”

    “됐습니다. 다른 부동산을 알아봐야겠군요.”

    “예? 아니, 사장님. 아직 매물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여태 보여주신 부지들이 이 지경인데 매물을 더 본다고 달라집니까?”

    박주혁이 쏘아보며 말하자 중개인이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그때 최효정 여사가 부드럽게 말했다.

    “괜찮은 부지에 가격도 합당해야겠죠. 지금 보여주신 부지들은···. 가격만 싼 것 같네요.”

    “···그럼 처음 보신 땅의 가격을 제가 한번 깎아보겠습니다.”

    중개인의 말에 최효정 여사가 슬쩍 박주혁을 쳐다봤다. 박주혁은 무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까 50억이라고 했었나요?”

    “예. 제가 30억까지 내려보겠습니다.”

    중개인의 말에 박주혁이 피식 웃으며 몸을 돌리며 말했다.

    “20억 이하라면 고민해 보죠.”

    “2, 20억이요?”

    “거래하겠다면, 계약금 2억 바로 송금하겠습니다.”

    중개인의 허망한 표정을 뒤로하고, 박주혁은 주차되어 있던 E클래스에 올랐다. 최효정 여사가 박주혁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주혁아, 역시 강남으로 가야겠지?”

    아직도 강남을 포기하지 못한 어머니의 말에 박주혁은 웃으며 말했다.

    “아니요. 어머니도 제가 별로 관심 없어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까?”

    “좀···.”

    “그럼 성공했네요. 곧 연락 오겠죠. 회사가 자금 사정이 안 좋다 했으니···.”

    #

    따스한 봄 날씨. 골프 치기 너무도 좋은 날씨였다.

    하늘은 쾌청했으며 간간이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었다.

    - 깡!

    “나이스 샷!”

    박주혁의 티샷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명한 국장과 이원희 지사장이 박수 치며 소리쳤다. 뒤이어 티박스에 오른 정통부 이연호 사무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아니, 무슨 프로선수냐고.”

    “제가요? 결코 아니죠. 골프는 멘탈 게임이라던데, 사무관님 흔들리지 마시고 본인의 스윙 하시면 됩니다.”

    응원하는 것 같지만, 상대방을 살살 긁는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박주혁의 전략은 그대로 먹혔고 이연호의 티샷은 땅바닥을 굴렀다.

    - 퍽. 데구르

    이연호 사무관이 얼굴을 붉히며 주머니에서 공을 하나 더 꺼내며 말했다.

    “첫 티샷인데 멀리건 없습니까?”

    “오케이!”

    유명한 국장과 이원희 지사장이 웃으며 소리쳤다. 그리고 박주혁은 이연호 사무관을 향해 말했다.

    “긴장하지 마시고, 자신의 스윙을 하시라니까요.”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미운 법이다. 이연호 사무관은 미간을 구기며 어드레스를 취했다.

    - 퍽! 데구르.

    “젠장!”

    성질내는 이연호 사무관에게 유명한 국장이 박장대소하며 말했다.

    “멀리건 하나 더!”

    “죄송합니다.”

    이연호 사무관이 멋쩍게 웃으며 공을 하나 더 꺼내 티샷을 날렸다. 이번엔 공이 하늘로 떠서 날아갔다.

    “굿!”

    “나이스!”

    이연호 사무관의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다들 한마디씩 하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속내는 그의 주머니를 다 털어버리겠다는 생각뿐이었겠지만···.

    오늘도 역시 최저타수는 박주혁이 차지했다. 주머니가 가장 두둑한 것도 박주혁이었고 말이다.

    “오늘 식사는 제가 대접하지요.”

    박주혁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자, 다들 고개를 털레털레 흔들었다.

    골프장 근처 식당에 도착한 그들은 맥주와 사이다를 혼합하여 한 잔씩 쭉 들이켰다. 오늘 라운딩에서 죽을 쓴 이연호 사무관이 한 잔 더 마시더니 말했다.

    “어우, 속이 다 시원하네.”

    다들 그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기에 다 같이 웃어버렸다.

    오리백숙을 맛있게 먹고 죽을 끓이는 사이, 이연호 사무관이 얼큰하게 취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제 곧 이동통신 서비스가 시작될 텐데, 다들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박주혁은 맥사를 입에 가져가며 유명한 국장과 이원희 지사장을 살펴봤다. 과연 이들은 미래를 어떻게 예측할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유명한 국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상상도 안 된단 말이지. 부자들의 전유물 같던 휴대폰의 대중화라. 정말 세상이 어떻게 변할까?”

    유명한 국장의 말에 이원희 지사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많은 것이 변할 겁니다. 일단 삐삐와 시티폰은 사라질 테고···.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지겠죠.”

    이원희 지사장의 말에 이연호 사무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박주혁은 이원희 지사장의 말에 속으로 감탄했다.

    이동통신. 간단하게 말하면 모든 사람에게 전화기가 생기는 것이었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새로운 문화의 밑거름이 맞았다. 세상을 뒤집어 놓을 스마트폰이 탄생할 수 있는 밑거름 말이다.

    앞으로 약 10년 뒤의 얘기긴 하지만, 2G가 3G로 넘어가고 얼마 후, 최초의 터치 스마트폰인 마이애플사의 ‘마이폰’이 등장해 세계를 뒤흔들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마이폰’의 시초는 휴대폰이 아닌, MP3 플레이어 ‘마이팟’이라는 사실이었다.

    문뜩 마이애플의 CEO 스테판 깁스의 말이 떠올랐다.

    [살다 보면 획기적이고 혁신적인 제품이 우리 모두의 삶을 바꿔놓습니다.]

    너무도 정곡을 찌르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스마트폰이 생긴 후, 우리의 삶이 얼마나 바뀌었는가?

    마이폰의 전신인 마이팟은 사실 MP3 플레이어로서는 후발 주자였다. MP3 플레이어의 대중적 성공은 한국기업이 먼저 차지했었다. 세계 점유율 2위를 차지하며 벤처 신화를 이룩한 한리버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마이애플과 한리버 모두 파인랭스의 고객이었지···.

    이동통신이라는 화두를 던진 이연호 덕에 박주혁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때 이연호 사무관이 박주혁을 쳐다보며 물었다.

    “박 사장 생각은 어때?”

    “네···? 아, 이동통신망이 구축되면서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날 겁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음악에서 시작되죠.”

    박주혁의 말에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박주혁을 쳐다봤다. 뜬금없이 음악이라니?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

    집에 복귀한 박주혁은 방안에 누워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시스템 온. 검색, 한리버.”

    - 검색이 완료되었습니다.

    - 총 1,872건이 검색되었습니다.

    박주혁은 천천히 나열된 항목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래, 이랬었지. 프리즘 디자인. 굉장히 획기적이었는데 말이야···.”

    세계 시장을 석권했던 한리버의 급격한 몰락은 후발 주자인 마이팟이 마이튠즈라는 플랫폼과 함께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원하는 음악을 쉽게 바로 마이팟으로···.]

    MP3 플레이어의 선구자였지만, 한리버에게는 자체 음악 플랫폼이 없었다. 즉, 소비자는 원하는 음악을 찾기 위해선 직접 광활한 인터넷을 뒤져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마이팟은···? 마이튠즈에서 간편하게 검색 후 다운로드 받아 마이팟에 옮기면 된다. 원스톱으로 가능하니 편의성에서 한리버를 압도했다.

    마이팟에 마이튠즈라는 플랫폼이 있다면, 한리버에게는 불법 공유 P2P 사이트이긴 했지만 전 국민의 노래창고인 ‘사운드바다’가 있었다.

    만약 ‘사운드바다’가 불법 공유가 아니라 마이튠즈처럼 한리버의 독자적 플랫폼이었다면···! 그리고 한리버가 세계 최초 스마트폰을 만들어 낸다면···? 상상만으로도 짜릿했다.

    “재밌겠네···.”

    박주혁은 피식 웃으며, 시스템을 껐다.

    #

    “이어서 국무총리 표창장을 수여하겠습니다. 우수 기업문화 창조로 산업계에 귀감이 되는 DD 자동차의 박주혁 대표님!”

    걸출한 재계 인사들이 모두 모여 단상에 오르는 박주혁을 향해 박수 쳤다. 표창이 수여되자, SB 전지의 이웅렬 사장이 커다란 꽃다발을 박주혁에게 건넸다.

    “박 사장님. 축하합니다.”

    “이 사장님. 뭐 이런 걸 준비하셨습니까?”

    이웅렬 사장은 박주혁과 사진을 한번 찍더니 말했다.

    “요즘, 박 사장님 덕에 SB 전지도 날아가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DD 자동차가 더 성장해야 SB 전지의 실적도 함께 오를 텐데요···.”

    이웅렬 사장과 박주혁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을 때 그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리튬이온전지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삼송과 극성 그리고 SJ 그룹의 대표들이었다.

    “하도 박주혁, 박주혁 하길래 궁금했었는데 저 사람이었군요···.”

    “박 사장이 SB 전지에 리튬이온전지 개발을 하자고 먼저 제안 했다고 하더군요.”

    리튬이온전지 개발이라는 말에 사장들의 얼굴이 경직됐다. 누가 먼저 개발하는지 치킨게임 중인 그들이었기에 예민할 터. SB 전지가 상용화 전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자동차 회사에서 리튬이온전지라니···.”

    “듣기론 전기 골프 카트를 만들고 있다고 하네요.”

    “전기 골프 카트라, 중소기업에서나 만들 제품을···. 격 떨어지게.”

    세 명의 대표들은 DD 자동차를 깎아내리며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로는 그러면서도 전기 카트 세게 점유율 1위인 DD 자동차를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서로 눈치를 보며 박주혁에게 다가가 명함을 내밀었다. 그리고 축하의 말과 함께 회사 홍보를 했다.

    “박 사장님. 축하합니다. 삼송 SDI는 이차전지에 많은 투자를···.”

    “극성화학은 이차전지 개발에 가장 근접했죠. 추후 저희 리튬이온전지로 전기 카트를···.”

    “DD 자동차의 전기 카트에 저희 SJ에너지의···.”

    중소기업에서나 만들 전기 카트라고 비하하더니 향후 리튬이온전지의 큰 수요처임이 확실하기에 박주혁에게 눈도장을 찍어둘 필요가 있을 테지···. 속내가 뻔히 보였지만 박주혁은 웃으며 그들과 명함을 교환했다.

    그리고 곧 다음 표창장 수여가 진행됐다.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산업의 활력을 불어넣은 인우 디자인의 이인우 사장님!”

    사회자의 호명에 모두 박수를 칠 때 박주혁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인우 디자인이면···! 한리버의 프리즘 MP3 플레이어를 디자인했던 곳이잖아?’

    박주혁이 눈을 빛내며 이인우 사장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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