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78화 (78/136)
  • 078화 드디어 노른자위가 매물로 나왔다.

    칼스타의 판매가 호조를 보이고, 물쏘와 코린도가 꾸준히 DD 자동차의 매출을 올려줬다. 그야 말로 순항이었다. 거기에 전기 카트의 판매도 더해지니, 재무구조가 확실히 달라졌다.

    3조 적자였던 DD 자동차는 적자 폭을 줄이며 흑자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전기차도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있으니, SB 전지에서 리튬이온전지만 개발한다면, 곧 궤도에 올릴 수 있으리라.

    순조로웠다. 박주혁의 계획대로 말이다.

    “고 비서.”

    “예, 사장님.”

    스피커폰으로 고윤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특별한 일 없으면 잠시 나갔다 오려는데 오후에 급한 일정 있습니까?”

    - 사륵.

    수첩 넘기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고윤희가 답했다.

    “오후 일정이 있습니다만, 사장님께서 꼭 계셔야 하는 일은 아닙니다.”

    박주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장실 문을 열고 나오자, 고윤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인사했다.

    “다녀오십시오.”

    “급한 일 있으면 전화하시고요.”

    “알겠습니다.”

    #

    파인랭스로 향하는데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네, 박주혁 입니다.”

    “주혁아, 나다.”

    “어머니. 무슨 일 있으세요?”

    “내가 무슨 일이 있어야만 전화하니?”

    “그건, 아니죠···.”

    말투가 사뭇 다른 최효정 여사가 왠지 불안했다. 그리고 이어진 최효정 여사의 말에 박주혁은 자신의 직감이 정확했음을 알 수 있었다.

    “왜, 저번에 집에 왔던 친구 중에 딸이 교수라던데···.”

    “···아, 예.”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냉정하게 자신을 버린 곽원희가 떠오르며,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날 돈줄로만 생각했었지···.’

    물론, 상황이 좀 다르긴 하다. 지독한 외로움에 살갑게 다가온 곽원희에게 푹 빠졌었다. 그게 돈을 노린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그 당시 박영희가 그렇게 결사반대했었다. 일개 직원이 왜 저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지금에 와 생각해보니···.

    ‘날 친동생처럼 아꼈지.’

    햇빛보육원의 후원자였던 아버지에게 좋은 감정이 있던 만큼, 박주혁도 아꼈으리라.

    물론, 예전과는 상황이 좀 다르긴 하다. 지독한 외로움에 빠졌던 것은 세상에 홀로 남겨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는 최효정 여사도 있고, 파인랭스도 예전과 달리 건실하다.

    그렇다고 결혼?

    박주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더구나 중매 결혼이면, 상대도 잘 모른 상태로 결혼해야한다는 소린데, 내키지 않았다. 적어도 이번 만큼은 진정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싶다.

    이게 솔직한 박주혁의 마음이었다.

    “어머니. 전 아직 결혼 생각이 없습니다.”

    “누가 결혼하랬니? 한번 만나보라 이거지.”

    “아, 예···.”

    최효정 여사의 말을 칼처럼 자르기가 쉽지 않았다. 분명 고민 끝에 말씀하신 것일 텐데···. 얼결에 허락했지만, 영 찜찜했다.

    #

    파인랭스에 도착한 박주혁은 환하게 웃으며 직원들과 인사를 나눴다.

    “사장님!”

    “조 차장. 별일 없죠?”

    “별일 있습니다. 저 다음 달에 결혼합니다···.”

    “오···?”

    반가움에 목소리를 높이려는데 조광연 차장의 얼굴이 어두웠다. 역시 결혼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축하 받을 일인데 얼굴이 왜 그래요?”

    박주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데 한기훈 과장이 옆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생각보다 형수님이 너무 깐깐하세요. 술도 못 마시게 한다니까요?”

    “조 차장이 술을 안 마셔?”

    박주혁이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이자, 조광연 차장이 화들짝 놀라 박주혁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아, 사장님 왜 그러세요? 술 얘기도 꺼내지 마세요!”

    “으읍!”

    조광연 차장이 박주혁의 입을 막은 채 고개를 돌려 번역연구팀으로 시선을 옮겼다. 다행히 일에 집중하고 있는지 번역연구팀은 조용했다.

    “휴.”

    “아니, 우리 조 차장이 이렇게 변할 줄이야.”

    “사장님. 죽겠습니다. 불행 끝 행복 시작일 줄 알았는데···.”

    “하하하. 다, 조 차장을 걱정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의 표현 방식이라 생각하세요.”

    박주혁의 덕담에 조광연 차장이 한숨을 푹 쉬었다.

    “술 사주세요. 설마 회식 자리까지 못 가게 하겠습니까? 저 지금 이주가 넘게 쌉쌀한 맛을 못 보고 있습니다.”

    조광연 차장 말에 박주혁이 미소 지으며 답했다.

    “그럽시다. 총각파티도 좀 해야죠.”

    “역시 사장님밖에 없습니다.”

    박주혁의 말에 조광연 차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박주혁은 직원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한 후 사장실로 들어갔다. 그 뒤를 박영희 팀장이 비장한 표정으로 따라 들어왔다.

    “사장님.”

    “네, 박 팀장님.”

    “자주 오시라니까요.”

    박영희 팀장의 말에 박주혁이 웃으며 답했다.

    “미안합니다. 박 팀장도 아시겠지만, DD 자동차 일로 정신없었습니다.”

    “예. 그래 보이시긴 했어요···.”

    박영희 팀장은 말끝을 흐리며 섭섭한 마음을 억눌렀다. 섭섭함은 잠시, 박주혁의 웃는 모습을 보니 박영희의 얼굴에도 살짝 미소가 걸렸다.

    “사장님. 챠넬 런웨이를 걸어본 소감이 정말 궁금했습니다.”

    “아휴, 말도 마세요.”

    박주혁이 손사래 치며 말을 시작하자, 박영희는 얼굴에 홍조를 띠며 집중했다.

    “와, 정말요?”

    “그렇다니까요. 런웨이를 걸을 때는 제 의지가 아니었어요. 뭐랄까 혼이 빠져나간 상태로 걸었다고 해야 할까요?”

    “풉.”

    박영희의 웃음소리에 박주혁이 고개를 갸웃하며 쳐다봤다.

    “정말 곤욕이었는데 웃긴가요?”

    “아니요. 혼이 빠진 사람치곤 너무 멋지게 사진에 찍히셨잖아요.”

    “조명빨입니다.”

    박주혁의 말에 박영희는 고개를 숙이더니 몸을 들썩이며 웃었다. 그 모습을 보니 박주혁도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다.

    “하하하.”

    기분 좋게 한바탕 웃고 나자, 박영희 팀장이 정색하며 말했다.

    “무엇보다 전 사장님이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셔서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다 걱정해주신 덕분입니다.”

    인사치레였는데, 박영희 팀장의 얼굴이 살짝 상기됐다.

    “저는 일이 있어서 이만···.”

    “네. 수고하세요.”

    박주혁의 말에 박영희 팀장은 살짝 미소 지으며 사장실을 나갔다. 박영희 팀장이 문을 닫고 나간 곳을 잠시 애틋한 눈길로 바라보며 박주혁이 중얼거렸다.

    “자신의 삶을 사시라니까 아직도···. 너무 충성심이 강해서 문제야. 그나저나, 일전에 짝사랑하던 분과는 잘되고 있으려나···?”

    안타까움에 혀를 차고 있는데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네, 파인랭스 박주혁 대표입니다.”

    “역시, 파인랭스로 갔었던 것이군?”

    “어, 유 국장님.”

    “요즘 장안의 화제더군요? 대체 챠넬 무대는 어떻게 올라간 거야?”

    반복된 설명이 지겨워질 무렵, 유명한 국장이 웃으며 말했다.

    “그랬구먼? 내가 박 사장에게 좋은 소식을 하나 전해주려고 전화를 했지.”

    “뭡니까?”

    “국위선양을 한 박 사장에게 표창장을 수여한다는 소식이 있더군.”

    “아, 그렇군···. 예! 뭐라고요?”

    유명한 국장의 말에 박주혁은 화들짝 놀랐다. 표창장이라니?

    “챠넬 런웨이에 오른 것만으로도 엄청난데 칼스타를 완판 시켰다며? 거기에 요즘 DD 자동차의 노사 문화가 매우 모범적이라고 칭찬이 자자해.”

    “허···.”

    “대통령 표창은 아니고, 국무총리 표창이야. 그것도 엄청난 일이지. 자랑스러워하라고 집안에 가보가 생기는 거니까 말이야.”

    박주혁은 유명한 국장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듣고 있나?”

    “아! 예.”

    “너무 놀랐나 보군. 그나저나 자네 혹시 만나는 사람 있나? 없으면 내 딸을···.”

    “국장님!”

    유명한 국장의 말에 박주혁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리고 유명한 국장은 껄껄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하하하. 농일세 농. 난 딸도 없다고. 요즘 이런 얘기 자주 듣나 보네? 하하하.”

    박주혁은 유명한 국장과 전화를 끊고 한동안 혼이 빠진 사람처럼 허공을 응시했다.

    ‘국무총리 표창장이라니···.’

    한 번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는데, DD 자동차의 체질 개선을 높게 평가했던 것 같다. 연례행사처럼 열리는 자동차 업계의 파업에 DD 자동차 노조는 불참했다. 노조는 묵묵히 물쏘와 코린도 그리고 칼스타 생산에 매진했었다. 모두가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 움직인 덕에 적자를 탈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표창장까지 수여한다니···.

    “이건 내가 아니라 DD 자동차가 받는 것이다. 모두의 공이야.”

    박주혁은 이 기쁜 소식을 회사에 알리려 고윤희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박주혁 사장님 비서실입니다.”

    “고 비서.”

    “네, 사장님.”

    박주혁이 표창장 수여 사실을 말하자, 고 비서도 무척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국무총리 표창장 말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방금 소식을 들었습니다.”

    “와···.”

    평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고 비서마저, 감탄사를 뱉어냈다.

    “해서, 홍보실에 이 같은 사실을 알리고 모두의 노력으로 표창장을 수여하게 됐다는 논조로 공고문을 작성하라 하십시오.”

    “예예! 알겠습니다. 초안 작성하여 보고하라고 하겠습니다.”

    “좋아요.”

    모두의 공으로 표창장까지 수여한다니 이보다 좋을 수 없었다. 외부의 시선으로 봐도 DD 자동차의 체질이 확실히 개선되었다는 뜻이리라.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네, 박주혁입니다.”

    “박 사장님. 저 김현옥 부장입니다. 사무실에 안 계시다 하여 휴대폰으로 전화했습니다.”

    “김 부장님. 오랜만입니다. 좋은 소식 있습니까?”

    “그렇죠. 리튬이온전지 분리막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으나, 리튬이온전지 개발에 진척이 있다는 소리였다.

    “잘 됐군요.”

    “네, 곧 샘플 제작하여 DD 자동차에 보내겠습니다.”

    “차동진 전무와 스펙 관련하여 협의를 해보세요. 원하는 사이즈가 있었습니다.”

    “이미 거기에 맞춰 개발하고 있었죠.”

    김현옥 부장의 말에 박주혁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제 DD 자동차가 EH슬라보다 앞서, 전기차의 선두에 설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뿌듯했다.

    박주혁이 기꺼워하며 전화를 끊자마자, 또 휴대폰이 울렸다.

    “네, 박주혁입니다.”

    “주혁아!”

    최효정 여사가 다급하게 박주혁을 불렀다. 항상 침착하신 분이었는데, 무슨일이기에?

    “매물 나왔다더구나.”

    “매물이요?”

    “구로공단 말이다.”

    “아아!”

    드디어 구로공단 땅이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이었다. 박주혁도 순간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평당 얼마라던가요?”

    “평당은 모르겠고, 그때 말한 그 부지를 통으로 50억에 판다고 하더구나.”

    “50억이요!?”

    “너무 비싸지?”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은 좋았으나, 아직은 가격대가 좀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침은 미리 발라놔야 한다. IMF가 터지기 전에 관심을 표명해놔야, 기회가 올 테니 말이다.

    “아직은 비싸네요. 그래도 한번 보러 갈까요?”

    “지금? 회사는 어쩌고.”

    “급한 일은 없어서 나갈 수 있어요. 부동산에 방문한다고 말씀해 주세요. 제가 모시러 갈게요.”

    전화를 끊자마자 박주혁은 달력을 힐끔 쳐다봤다. 96년도 이제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내년이면 IMF가 터질 테고, 다수의 기업이 현금 마련을 위해 부동산을 매물로 내놓을 것이다. 구로공단이 50억? 소유주의 희망 사항이겠지.

    박주혁은 굳은 얼굴로 사장실에서 나왔다. 사무실에 얼마 머물지 않고 사무실을 나서는 것이었다. 직원들은 하나같이 의아한 눈빛으로 박주혁을 쳐다봤다. 특히 박영희 팀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박주혁에게 뭐라 말하려 입을 벌리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박주혁의 표정이 너무도 심각했기 때문이다. 뻗었던 손을 천천히 내리는 동시에 박영희 팀장의 고개도 같이 떨어졌다.

    ‘또 무슨 일이신 겁니까?’

    못다 한 말을 속으로 삼키며, 박영희 팀장은 박주혁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제는 박주혁은 그녀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만 같았다.

    #

    구로공단.

    박주혁과 최효정 여사는 눈도장을 찍어둔 곳을 천천히 둘러봤다. 역시나, 박주혁이 예상했던 그 부지였다. 미래 가치를 생각하면 50억이 아무것도 아닌 돈이겠지만, 현재 파인랭스가 투입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몇 개월만 기다리면 폭락할 것이다. 그때는 충분히···.

    생각에 잠겨있는데 부동산 중개인이 양손을 비비며 박주혁과 최효정 여사에게 물었다.

    “어떻게 마음에 드십니까?”

    “비쌉니다.”

    박주혁이 정색하며 말하자, 부동산 사장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답했다.

    “원래 이렇게 덩어리가 큰 것은 네고가 가능한 법이죠. 매도인도 50억을 다 받을 것으로 생각하진 않을 겁니다···. 회사가 어려워 어쩔수 없이 매물을 내놨거든요.”

    중개인이 마지막 말을 속삭였고 박주혁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회사가 어렵다? 어쩌면 쉽게 풀리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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