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77화 (77/136)

077화 그저 호기심입니다. 호.기.심.

한현태 기자는 아침 일찍부터 박주혁을 찾아왔다.

“박 사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아, 한 기자. 오랜만이네요.”

한현태 기자와 손을 맞잡긴 했지만, 안경 너머 그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마치 속속들이 모든 것을 파헤치려는 듯 말이다.

“앉으시죠. 고 비서님? 커피 2잔 부탁합시다.”

“네, 사장님.”

한현태 기자는 자리에 앉자마자, 패션쇼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이번 오뜨 꾸띄르 정말 대단했더군요. 자동차를 무대에 올리다니 럴커펠트 씨는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요?”

“···.”

박주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한현태 기자를 쳐다봤다.

“이것도 인터뷰입니까?”

“에이, 그냥 여쭤보는 겁니다. 녹음기도 수첩도 아무것도 안 꺼냈잖아요.”

“패션쇼 관련해서는 말 안 할 겁니다.”

“예? 칼스타가 패션쇼 무대에 올랐는데, 패션쇼 얘기를 안 할 수는 없잖습니까?”

“···.”

한현태 기자의 말에 박주혁은 말문이 막혔다. 틀린 말이 아니지 않나?

‘집요한 놈.’

집요해야 기자다.

고윤희가 가져온 커피를 한 모금 하고 나서, 한현태 기자는 수첩과 녹음기를 꺼내며 웃었다. 이빨을 드러낸 한현태 기자가 먹이를 노리는 맹수 같았다.

한현태 기자가 집요하게 박주혁을 추궁하는 것은 직업 때문이라지만, 박주혁이 패션쇼에 선 것은 그야말로 비지니스적인 것이었다. 애초에 이렇게 세간의 이목을 끌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예상외로 반응이 너무 뜨거웠다. 한국인으로서 챠넬의 패션쇼에 올랐다는 것 자체만으로 말이다.

“우선, 칼스타에 대해 얘기해 보죠.”

‘우선?’

한현태 기자가 선택한 첫 단어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칼스타에 대한 얘기로 시작해 결국, 패션쇼와 연결하겠다는 한현태 기자의 생각이 읽혔다.

“칼스타는 클래식과 현대의 조합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생각보다 럴커펠트 씨가 칼스타를 마음에 들어 하셨던 것 같습니다.”

“예,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셨죠. 칼스타에는 2.5L 가솔린 엔진이 탑재되었습니다. 벤타의 가솔린 엔진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내구성과 출력은 확실히 보장되죠. 거기에 우리 연구진이 각고의 노력 끝에 로드스터에 어울리는 배기음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로 인해···.”

상당히 중요한 얘기였는데 한현태 기자는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수첩에 대충 몇 가지만 끄적였다.

‘지금 말한 건 상당히 중요한 얘긴데···.’

박주혁은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박 사장님 아직 인터뷰 안 끝났는데요?”

“칼스타에 대한 인터뷰라고 하셨잖습니까? 직접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예?”

한현태 기자가 당황하여 되묻는데 박주혁은 사장실 문을 열고 앞장서고 있었다.

“어어?”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한현태 기자는 황급히 자신의 물건을 챙겨 박주혁을 따라나섰다. 그가 사장실 문밖으로 나오자, 박주혁이 고윤희에게 뭐라 말하고 있었다.

“연구실에 연락하세요. 칼스타를 취재하러 온 기자와 함께 간다고···.”

“알겠습니다.”

박주혁은 고개를 돌려 한현태에게 웃어 보이더니 말했다.

“그럼 가보실까요? 칼스타를 취재하시려면 실물을 보셔야죠.”

“아아, 예. 그렇긴 한데···.”

칼스타를 핑계로 박주혁에 대한 인터뷰를 하려 했는데 어째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박주혁에게 말리는 느낌이랄까?

연구실에 도착하자, 도색되지 않은 칼스타의 알류미늄 바디가 영롱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챠넬에서 제공한 흐릿한 배경의 칼스타만 보다가 실물 보니 느낌이 또 달랐다. 한현태 기자는 박주혁을 바라보며 사진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예, 어차피 공개된 상태라 찍으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한현태 기자는 칼스타 주위를 돌며 열심히 셔터를 누르며 말했다.

“와, 실물이 훨씬 유니크 하네요!”

“외관은 참 고풍스럽죠? 하지만, 최신 기술들이 적용되어 있습니다.”

박주혁은 말끝에 차동진 전무를 향해 눈짓했다. 차동진 전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칼스타의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 부등! 부드드,

칼스타의 낮고 컬컬한 배기음에 한현태 기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녹음기를 꺼내 들었다.

“와!”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 엔진음 개발을 위해 연구진들이 꽤 고생했습니다.”

“이건, 우리나라 자동차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한현태 기자가 상기된 얼굴로 연신 셔터를 눌렀다. 외관 촬영을 얼추 끝낸 한현태 기자는 내부로 카메라를 들이밀다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니!”

“칼스타는 300대 한정으로 챠넬 콜라보로 출시됩니다. 내장재는 샤넬의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손으로 이은 가죽이 적용됐고, 핸들에 박힌 로고도 보시면 아시겠지만···.”

한현태 기자는 박주혁의 말을 자르며 소리쳤다.

“온통 챠넬이네요! 심지어 카, 카메트까지···.”

“챠넬이 만든 카매트는 흙먼지가 잘 달라붙을 수 있도록 특수하게 개발된 소재로···.”

“와!”

한현태 기자는 분명 박주혁의 설명을 듣고 있지 않았다. 연신 감탄사를 토해내며 셔터를 누르기 바빴다. 그런 한현태 기자를 바라보며, 박주혁과 차동진 전무는 씩 미소 지었다. 품질에 대한 자신감이었다.

#

[DD 자동차의 새로운 로고 챠넬 럴커펠트가 직접 디자인했다.]

[‘칼스타’ 한국의 새로운 자동차 문화를 만들다.]

[없어서 못사는 칼스타, 해외 큰손들도 돈을 싸들고 기다린다.]

한현태 기자의 칼스타 취재 이후 언론의 시선은 칼스타로 향했다. 물론, 챠넬 무대에 오른 박주혁에 관한 추측성 기사가 계속 나오고 있었지만, 그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박주혁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후속 기사가 나올 수 없는 것 아닌가? 반면, 칼스타에 대한 정보는 물밀듯 쏟아지니 당연한 결과였다.

박주혁은 신문을 펼쳐 들고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 모든 관심이 칼스타로 쏠렸어.”

박주혁은 신문을 덮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그때 고윤희 비서의 목소리가 전화기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사장님. 차동진 전무님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차동진 전무가 상기된 얼굴로 소리쳤다.

“사장님! 칼스타 챠넬 콜라보 버젼이 전부 계약됐다고 합니다!”

“오, 좋은 소식이군요.”

“우리나라 구매자도 있다고 하는데요?”

“그래요?”

박주혁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관심을 표명했다. 그러자 차동진 전무가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삼송 그룹의 조창희 회장님이시랍니다.”

“아아. 그분이라면 그럴 법합니다.”

“예? 아무리 그래도 1억에 육박하는데···.”

“삼송 그룹 회장이잖아요···?”

박주혁의 말에 차동진이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삼송그룹 회장이라면 1억도 껌값이겠지.

“칼스타가 국내 도로를 질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니, 좀 놀랍긴 하네요.”

“일반도로에서는 못 보지 않겠습니까? 삼성그룹은 별도의 레이스 트랙도 있다던데요.”

“아, 그렇겠군요. 트렉이 용인에 있다죠?”

“예. 한정판 차는 한 대씩 다 있다더라고요.”

차동진 전무의 질투 어린 말에 박주혁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 차들 사이에 칼스타가 들어가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자부심을 가지세요.”

박주혁의 말에 차동진 전무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잠시 뿌듯함을 느끼던 차동진 전무가 뭔가 생각난 듯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말했다.

“아! 참, 칼스타 생산 매뉴얼이 번역되어 조금 전 도착했습니다. 평택 공장으로 보내서 칼스타 생산을 본격적으로 할까 합니다.”

“좋습니다.”

“가격대는 3천만 원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차동진 전문의 말에 박주혁이 입술을 앙다물며 고민에 빠졌다.

“가능하겠습니까? 전체 수작업 공정입니다.”

“그렇긴 합니다만, 보급형으로 제작할 생각입니다. 외관은 그대로 두고, 엔진도 1.6L급으로 낮추고···.”

차동진 전무의 전략이 무엇인지는 알겠지만, 칼스타라는 고급이미지에 걸맞지 않았다. 박주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말했다.

“챠넬과 콜라보는 300대였지만, 우린 명품을 만든다는 명성을 얻었죠. 굳이 칼스타를 보급형으로 만들 이유는 없습니다. 가격은 30% 인하하고, 지금 그대로 갑시다.”

“예? 그, 그럼 7천만 원 수준입니다. 누, 누가 구매하겠습니까?”

“차 전무님. 좀 더 넓게 그리고 멀리 보세요. 이번 칼스타 구매자들이 한국 사람들이었습니까?”

박주혁의 말에 차동진 전무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칼스타는 재력가들이 재미로 탈 수 있는 자동차입니다. 남들의 이목도 끌 수 있는 디자인에 배기음까지···. 튀고 싶어 하는 그들에게 안성맞춤이죠. 제 말을 믿고 추진하세요. 단, 품질 검수는 철저하게 해야 합니다. 그 옛날 선조들이 작은 티가 있는 청자도 과감히 깼던 것처럼, 양품이 아닌 칼스타는 폐기합니다.”

“···.”

차동진 전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끔뻑이자, 박주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야 생산자들도 자부심을 가질 수 있고, 품질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겁니다. 솔직히 한 대만 팔아도 이득이 많을 뿐 아니라, 전 양품만 나올 거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생산자들의 실력을 믿고 있죠.”

무서운 말이었다.

양품이 아니면 과감히 폐기하라면서, 생산자들을 믿는다니···. 불량 나오면 각오하라는 것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차동진 전무의 등줄기를 따라 차가운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제, 제가 직접 챙기겠습니다!”

“좋습니다. 아, 그리고 전기 골프 카트 상황은 어떻죠?”

“판매는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국내 골프장 카트는 저희 DD ev카트가 독점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수출을 준비중이고요.”

차동진 전무의 보고에 박주혁은 흡족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요. 이참에 연구소에 들러야겠습니다. 전기차 프로토를 개발 중이죠?”

“예. 그렇습니다. 아, 지금쯤이면 지상억 센터장도 연구소에 있을 겁니다.”

“그래요? 그럼 지금 가봐야겠군요.”

#

B22

베를린.

손승찬이 상기된 얼굴로 메르헨에게 칼스타 완판 소식을 보고했다.

“완판?”

결재판을 쳐다보고 있던 메르헨이 흠칫 놀라 손승찬을 쳐다보며 되물었다. 손승찬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정말, 잘되었군요.”

“예, 부사장님의 안목이 정말 대단하시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음?”

메르헨이 손승찬을 올려보며 고개를 갸웃하자, 손승찬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미스터 박을 영입하고자 하실 때는 살짝 걱정이었습니다. 너무 즉흥적이고 감상적인 건 아니셨나 하고요.”

“내가요?”

“예. 파독 근로자들을 돕는 기업의 대표라는 이유로 관심을 가지셨던 것 아닙니까? 인성이 좋을 것 같다고···.”

“아아.”

손승찬의 말에 메르헨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까닥였다.

“물론, 처음엔 그랬는데, 럴커펠트 씨를 단숨에 사로잡는 것을 보고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죠.”

“럴커펠트 씨요?”

“네, 그 까다로운 사람을 몇 마디 말로 휘어잡았었죠.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됐죠? 오뜨 꾸띄르에 올랐어요.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사람입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손승찬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메르헨은 손승찬이 올린 결재판에 서명한 후 넌지시 물었다.

“한국 사람은 어떤 사람을 좋아합니까?”

“전 독일사람인데요.”

“아, 그렇죠. 미안합니다.”

메르헨이 민망한 듯 손을 휘저을 때, 손승찬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에게 듣기론, 참하고 여성스러운 사람을 좋아한다더라고요.”

“여성스럽다?”

메르헨이 고개를 갸웃할 때, 손승찬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부사장님은 이미 여성스러우니 문제없을 겁니다.”

손승찬의 말에 메르헨이 피식 웃더니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아,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미스터 박을 좋아한다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황급히 수습하려는 메르헨을 웃는 얼굴로 쳐다보던 손승찬이 태연하게 말했다.

“예. 그저 호기심이시겠죠.”

“맞아요. 호.기.심. 그저, 호기심입니다.”

손승찬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부사장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메르헨은 벌게진 얼굴을 향해 손부채질하면서 중얼거렸다.

“어머, 내가 잠깐 미쳤었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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