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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76화 (76/136)
  • 076화 인터뷰는 사절입니다!

    메르헨은 한국으로 떠나는 박주혁을 더는 붙잡을 수 없었다. 진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그녀는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서 박주혁을 배웅했다.

    “미스터 박! 제발, 몸조심하세요.”

    “알겠습니다.”

    “글고 그 바닷가에서 회 사준다는 약속 잊지 않았죠?”

    메르헨의 말에 박주혁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고윤희가 박주혁을 따라가다가 뒤로 돌아 상체를 숙이며 메르헨에게 인사했다. 그녀는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미스터 박을 잘 보좌해주세요. 미스 고.”

    “네. 회장님.”

    박주혁과 고윤희가 출국장으로 들어가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메르헨은 한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

    차동진 전무는 노동조합 고채수, 최태익과 한 테이블에 앉았다.

    “안녕하십니까? 차동진 전무입니다.”

    “예. 지체 높으신 우리 임원님이시군요?”

    고채수가 차동진 전무를 향해 빈정거리듯 말했다. 익숙한 상황이었다. 사측과 노조의 벌어진 감정의 골은 아직 수습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차동진 전무는 미간을 살짝 좁히며 어색하게 웃어 보이더니 입을 열었다.

    “오늘 이렇게 만나자고 한 것은 다름 아니라, 칼스타의 제작을 생산 라인에 올리기 위해서입니다.”

    “칼스타요? 그 레트로 디자인 스포츠카 말씀입니까? 수요가 없어 생산 백지화 아니었습니까?”

    최태익이 눈을 빛내며 아는 척을 했고, 차동진 전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랬었죠. 그런데 이번에 사장님께서 챠넬 수석 디자이너에게 칼스타를 선물하면서 분위기가 반전됐습니다.”

    차동진의 말에 고채수와 최태익이 상체를 살짝 앞으로 내밀며 차동진을 바라봤다.

    “얼마 전 챠넬 패션쇼가 파리에서 열렸었습니다. 챠넬에서 칼스타를 2대를 발주했는데, 그 이유가 패션쇼 런웨이의 배경으로 쓰기 위해서였죠.”

    “우, 우리 차를 패션쇼의 배경으로···?”

    고채수가 놀라, 말을 다듬었고, 차동진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거기서 칼스타의 존재감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입니다. 패션쇼를 관람하는 유명인사들이 칼스타 구매에 대해 문의를 한 것이죠.”

    “오!”

    고채수와 최태익이 동시에 감탄사를 뱉었다.

    “그런데 문제는 3대 정도는 6개월에 걸쳐 본사 연구진이 만들어 냈지만, 밀려드는 주문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장님께서 생산직 여러분과 상의하라고 하셨습니다.”

    “생산하라는 것이 아니라 상의하라고 하셨다고요?”

    최태익이 눈을 커다랗게 뜨며 차동진 전무를 쳐다봤다.

    “예, 그렇습니다. 수작업으로 조립을 해야 하는 칼스타의 특성 때문에 생산직 여러분의 협조가 절실합니다.”

    차동진이 말하는 와중에 고채수와 최태익은 서로를 마주 보며 빙긋 웃었다.

    “사장님이 정말 약속을 이행하시려나 보네.”

    “제가 그랬잖아요. 좀 다르다고.”

    고채수와 최태익은 고개로 끄덕이더니 차동진 전무를 바라봤다. 고채수가 볼살을 살짝 떨면서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챠넬이라면 그 명품 만드는 곳 아닙니까? 그렇다면 차도 명품으로 만들어야지요!”

    “기존 생산 라인과는 분명 다릅니다. 하나하나 수작업을 해야 하는 작업이라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필요합니다.”

    차동진 전무가 우려 섞인 말을 하자, 고채수가 다시 한번 볼살을 떨며 소리쳤다.

    “우리가 뭐 맨날 볼트만 조이는 줄 아슈? 장인, 명장! 우리 중에서도 그런 사람들은 있지.”

    고채수의 말에 최태익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 위원장님이 한때는 판금의 장인이셨죠.”

    “크흠, 최태익이! 지금 뭐라는 거야. 한때라니?”

    “한때죠. 지금은 손 놓으셨잖아요? 살도 확 쪘고···.”

    “이, 이봐!”

    최태익이 고채수를 핀잔하며 이죽거리자, 차동진 전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위원장님. 칼스타 제조를 위해 필요한 인력들을 좀 뽑아 주시겠습니까? 연구소의 기술진을 내려보내 가이드를 한 후 칼스타 샘플을 한번 제작해봅시다.”

    “매뉴얼은 없습니까?”

    “있긴 한데 전부 영어라···.”

    “번역해서 보내세요. 아무리 가이드를 받아도 다 기억할 수는 없잖습니까?”

    고채수의 말에 차동진이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번역해서 곧 보내드리겠습니다. 칼스타의 생산을 잘 부탁드립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사장님이 그렇게 열심히 뛰시는데 우리가 가만있을 순 없죠.”

    차동진 전무와 고채수가 손을 맞잡자, 최태익이 활짝 웃으며 옆에서 박수를 쳤다.

    “와, 이렇게 훈훈한 사측과 노조라니 생경합니다?”

    “부위원장, 사측과 우리가 남인가?”

    “에에? 위원장님. 언제는 적이라면서요?”

    최태익이 빈정거리자, 고채수가 눈을 부릅뜨며 위협적으로 최태익에게 한발 다가섰다. 최태익이 배시시 웃으며 한발 뒤로 빼며 양 손바닥을 펼쳤다.

    “아아, 농담입니다. 농담.”

    매번 노조와의 만남은 무겁고 긴장감이 흘렀다면, 이번 미팅은 훈훈했고 협조적이었다. 임원으로 근무하면서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저번에 노조와 만나신다더니, 대체 어떤 말씀을 하셨길래···.”

    강경했던 노조가 상당히 호의적으로 변한 사실에 차동진 전무는 혀를 내둘렀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 박주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체감하니 놀라울 뿐이었다.

    #

    그로부터 몇 시간 후, 파인랭스 사무실로 퀵서비스가 도착했다.

    출입구 근처에 있던 조광연 차장이 재빨리 물건을 받아 발신처를 확인하더니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재빨리 번역연구팀으로 발길을 옮기며 소리쳤다.

    “박 팀장님!”

    “예?”

    조광연 차장이 밝게 웃으며 뛰어오자, 박영희 팀장이 사색이 되어 펄쩍 뛰었다.

    “왜, 왜 그러세요?”

    당황한 박영희 팀장과 달리 조광연 차장은 웃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DD 자동차에서 매뉴얼 의뢰가 왔습니다.”

    “DD 자동차요···? 어!”

    박주혁이 사장으로 있는 회사에서 번역의뢰가 왔다는 것은 박주혁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뜻이지 않겠나? 그렇다는 것은 이번 번역이 매우 중요하다는 뜻도 되는 것이고···. 박영희 팀장의 얼굴이 상기되더니 대봉투를 열어 문서를 확인했다.

    [칼스타 제조 매뉴얼]

    “칼스타···? 아. 이번 챠넬에 쓰였다던 그 차의 제조 매뉴얼이네?”

    박영희 팀장의 혼잣말을 듣던 조광연 차장이 흥분하여 소리쳤다.

    “오! 그 차군요. 생산이 시작되나 봅니다! 아 나도 그 차를 언젠가···.”

    조광연 차장이 욕망을 드러낼 때, 구경숙 과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톡 쏘았다.

    “전세금도 마련 못했는데 지금 그런 차를 사겠다는 건가요? 저랑 잠시 얘기 좀 하시죠.”

    “예? 갑자기 왜요? 그냥 언젠가 갖고 싶다는 거죠···.”

    “따라와요!”

    “아아···.”

    구경숙 과장이 정색하며 조광연 차장의 팔목을 잡아끌자, 조광연 차장이 잔뜩 풀이 죽어 한숨을 쉬며 끌려 나갔다. 상남자 같던 조광연 차장은 상견례 이후부터 구경숙 과장 앞에서는 기를 펴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고 박영희 팀장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완전히 잡히셨네. 천하의 조 차장님께서···. 풉.”

    박영희 팀장은 문서를 살펴본 후 번역연구팀을 향해 말했다.

    “자동차 제조 매뉴얼입니다. 생산 공정 경험이 있는 번역사들로 섭외해야 합니다. 이번 매뉴얼을 랭귀지패스트에 등록하면 추후 매뉴얼 의뢰가 오면 다시 활용할 수 있으니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바랍니다.”

    박영희 팀장의 브리핑이 끝나자, 직원들이 손을 들어 질문했다.

    “납기는 언제까지인가요?”

    “ASAP!”

    박영희 팀장의 말에 직원들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언제나 그렇지···.”

    #

    한국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을 때 박주혁은 하늘 위에 있었다. 메르헨의 배려로 일등석에 앉은 박주혁은 샴페인을 마시며 여유를 만끽했다. 그때 스튜어디스가 다가와 가죽 재질의 메뉴판을 건넸다. 비행기에서 메뉴판을 건넨 적이 있던가? 없었던 것같다. 이코노미석만 탔던 박주혁은 생소한 기분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고윤희는 처음이 아닌지 자연스럽게 메뉴판을 넘기더니 주문했다.

    ‘대기업 비서라 경험했었다···. 이건가?’

    뭔지 모를 질투심에 박주혁도 메뉴판을 넘겼다. 그런데 생경 처음 보는 음식 설명에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그뤼예르 오믈렛]

    그릴 치킨 소시지, 구운 감자, 시금치 및 버섯볶음과 함께···.

    [전통 아랍식 메즈]

    후무스, 타볼레(중동식 야채 샐러드), 가지 퓨레(바바 하누쉬), 양념된 새우···.

    [치킨 꼬르동 블루]

    그뤼예르로 속을 채우고 빵가루를 입힌···.

    ‘도무지 알 수 없군. 먹는 것들이냐?’

    박주혁이 미간을 좁히며 메뉴판을 넘기다가 마지막 문구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컵라면은 항상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거다.’

    스튜어디스가 웃는 얼굴로 박주혁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꿇고 그의 주문을 기다렸다. 박주혁은 주메뉴 중 몇 개를 대충 골라 시켰다. 스튜어디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메뉴를 접수할 때 박주혁이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 컵라면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매운맛 괜찮으십니까?”

    “화끈한 거로 부탁해요.”

    박주혁의 말에 스튜어디스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박주혁이 한국 땅을 밟은 건 저녁 8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고윤희와 헤어진 박주혁은 공항에 주차된 벤타 E클래스에 몸을 실었다. 벤타인비테이셔널에서 홀인원을 하고 받은 상품이었다.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 같은 승차감에 절로 미소가 어렸다.

    ‘이런 차를 만들어야 할 텐데···.’

    DD 자동차의 미래를 걱정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어머니.”

    “주혁이 도착했니?”

    최효정 여사의 반가운 목소리 뒤로 웅성거리는 아줌마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의아함도 잠시 현관으로 동네 아줌마들이 다 몰려와 박주혁의 손을 잡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고! 챠넬 모델님이시네.”

    “아니라니까, DD 자동차의 사장님.”

    “모르는 소리. 파인랭스의 사장님이지!”

    “아이고, 인물도 좋고, 키도 크~고. 보기 좋네. 보기 좋아.”

    아줌마들이 달라붙는 바람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박주혁은 여사님들의 손길에 난도질당한 후에야 겨우 짐을 풀고 방에서 쉴 수 있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거실에서는 여사님들이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래서 주혁이 여자친구는 있데?”

    “맞아. 저 정도면 여자친구가 많은 거 아냐?”

    “아이고! 이 여편네들. 여자친구는 누가 없겠어? 애인이 있냐고 물어야지?”

    “맞네! 맞아 오호호호!”

    손뼉 치며 깔깔거리는 여사님들의 목소리에 왜 박주혁의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일까?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떤 박주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침대에 몸을 눕혔다. 그때 문 앞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주혁아, 잠깐 나와서 과일 좀 먹어라.”

    “예? 아니요. 괜찮아요. 친구분들이랑 좋은 시간 보내세요.”

    “그러지 말고···. 잠깐만.”

    최효정 여사도 난감한 상황임이 분명했다. 박주혁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흔들고는 문을 열고 나왔다. 최효정 여사가 미안한 듯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미안해. 주책바가지들이네.”

    “괜찮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괜찮을리가 없지 않나.

    “어머! 주혁이 애인 없다며? 내 딸이 서울 미래 병원 간호사인데···.”

    “이 아줌마가 뭐라는 거야. 주혁아 내 딸은 소아과 의산데!”

    “이 사람들이! 내 딸은 교수···.”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여사님들의 구애?에 박주혁은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과일을 입에 쑤셔 넣었다.

    “하.하.하. 그럼 즐거운 시간 되세요.”

    도저히 안 되겠는지, 박주혁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주혁아, 어디가?”

    “몸이 찌뿌둥해서 운동 좀 하려고요.”

    “그래. 무리하지 말고.”

    “예.”

    최효정 여사도 지금의 상황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는지 박주혁을 잡지 않았다. 박주혁은 여사님들의 탐욕의 눈길을 뒤로 하고 집 밖으로 나왔다. 집 근처를 산책하는데 지나치는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 저 사람. 그 챠넬 패션쇼에 올랐다던 그 사람 아니야?”

    “정말? 어머머!”

    “럴커펠트의 뮤즈라고 했던 그 사람?”

    박주혁은 입고 있던 트레이닝복의 최대한 세우고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그가 한국을 떠나있던 짧은 시간, 박주혁의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챠넬 한국인 모델은 누구인가!]

    [모델협회도 모르는 한국인 모델. 그의 이름은 Mr. 박?]

    어그로성 기사들이 판을 쳤지만, 그래도 한현태 기자가 의리는 지켰는지 아직 언론은 미스터 박으로만 알고 있었다. 기자들이 의리가 있던가?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박주혁은 왠지 모를 한기를 느끼고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 띠리리.

    “여보세요?”

    보통은 ‘네, 박주혁입니다.’라고 신분을 밝혔지만, 수많은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기에 차마 이름을 밝힐 수 없었다.

    “박 사장님. 귀국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한 기자? 이 시간에 왜?’

    박주혁이 의문을 품기도 전에 한태훈 기자가 자신의 속내를 밝혔다.

    “고 비서님이랑은 인터뷰 일정 잡았습니다.”

    “뭐라고요? 인터뷰 사절이라고 했잖습니까?”

    박주혁이 당황하여 목소리를 높이자, 한현태 기자가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누가 모델로 인터뷰하자고 했습니까? 칼스타 관련해서 인터뷰 좀 부탁드립니다.”

    “아, 칼스타요···.”

    거절할 수 없는 인터뷰였다. 박주혁이 알겠다고는 답했지만, 찜찜한 이 기분은 뭐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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