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75화 (75/136)
  • 075화 조명빨, 자체발광 보석.

    오뜨 꾸뛰르 패션쇼에 대한 보도문은 조간신문에 실려야 하므로 무조건 당일 번역이었다. 그래도 이제는 제법 챠넬의 스타일에 익숙해진 직원들과 번역사들이 있어서 큰 무리는 없었다.

    5분 대기조였던 일본어 번역사가 먼저 번역을 끝내 납품을 했고, DTP 팀에서 문서 편집 후 번역연구팀에서 감수가 순차적으로 이뤄졌다.

    “팀장님. 일본어 완성입니다.”

    “좋습니다. 일본 챠넬에 송부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래도 챠넬은 소프트 카피로 왔다 갔다 하는 편이었다. 너무 당연한 얘긴가?

    일본어 보도문이 완성된 후에도 영문본은 구경숙 과장이 끙끙거리며 손을 보고 있었다. 경험치가 쌓인 일본어와 달리 국문으로는 처음 번역하는 것이라, 구경숙 과장이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팀장님. 제목을 이렇게 뽑았는데 괜찮을까요?”

    “어디 봅시다.”

    박영희 팀장은 구경숙의 도움 요청에 의자를 돌려 구경숙의 옆으로 다가왔다.

    [챠넬 SS 패션쇼. 한국인 모델이 피날레를 장식했다!]

    “구 과장. 원문과는 너무 다른 것 같은데?”

    “아무래도 국내 사람들의 눈길을 끌려면 이런 제목이 더 좋지 않을까 해서요.”

    “하긴, 한국 사람이 챠넬 무대에 섰다는 것만으로도 큰 이슈긴 하지···. 일본 챠넬에 한번 확인해 보죠.”

    박영희 팀장이 수화기를 들었다.

    “모시모시?”

    “안녕하십니까? 파인랭스 박영희···.”

    “좃또 마떼 구다사이.”

    누군지는 몰라도 박영희의 유창한 한국말을 듣고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바꿨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싶었다.

    “여보세요?”

    “파인랭스 박영희입니다. 이번 보도문 관련하여 확인을 받고 싶은데요.”

    “아, 박 차장님. 그냥 이메일로 주시지 그러셨어요?”

    챠넬 일본 지사에서 근무 중인 허영석 과장이 웃으며 말했지만, 박영희 팀장은 정색하며 쏘아댔다.

    “보도문 번역은 한시가 급한데 어떻게 이메일로 주고받겠습니까? 제가 메일로 문의하면 또 몇 시간 뒤에나 확인하시잖습니까?”

    “아아. 알겠습니다.”

    수화기 너머 허영석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보도문 보내온 것은 확인했는데 역시나 깔끔하던데, 어떤 확인을 받으시려는 거죠?”

    “이번에 챠넬에서 한국어도 번역해달라고 요청해서 말이죠.”

    “저, 정말입니까? 하긴, 한국 사람이 무대에 섰으니···.”

    “챠넬 정식 보도문이라···. 제목을 변경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제목 변경?”

    허영석이 목소리를 높이며 되물었고, 박영희 팀장은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챠넬 SS 패션쇼. 한국인 모델이 피날레를 장식했다. 이렇게 제목을 뽑으면 어떨까 합니다.”

    “흠···. 그건 본사와 확인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전에 제가 항상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해 달라고요.”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이해할 수 없는 활자들의 조합이 될 텐데. 그렇게 할까요? 책임은 허 과장님이 지십시요!”

    박영희 팀장의 날 선 말에 허영석이 너스레 떨며 말했다.

    “에이, 화내지는 마시고요.”

    “화 안 냈습니다.”

    “하하하. 본사에 확인 한번 해보겠습니다.”

    박영희 팀장은 허영석 과장의 저 능글거림이 너무 싫었다. 단 한 번도 확실하게 답한 적이 없었다. 매번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공을 돌리곤 했다. 이번엔 본사 쪽으로 돌렸으니 최소 3~4시간은 기다려야 할 판이다. 박영희는 미간을 와락 구기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빨리 확인해서 알려주세요.”

    “예이, 예이.”

    전화를 끊자마자, 박영희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우! 짜증.”

    구경숙 과장이 박영희 팀장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번엔 어느 부서랍니까?”

    “본사래!”

    박영희 팀장이 버럭 소리치자, 구경숙 과장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그 새끼는 자기가 교환원인 줄 아나? 맨날 뺑뺑이 돌리고 있어 진짜!”

    평소 차분하고 소심한 구경숙 과장이 거친 말을 쏟아내자 박영희 팀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그 눈빛을 읽었는지 구경숙이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때 마침 조광연 차장이 싱글거리며 다가와 말했다.

    “팀장님. 사장님께서 연락하셨습니다.”

    “사장님이요? 잘 지내신대요? 뭐라고 하셨어요?”

    박영희 팀장이 살짝 상기되어 질문을 쏟아내자, 조광연 차장이 빙그레 웃었다.

    “아까 통화하는 거 얼핏 듣고 여쭤봤거든요.”

    “뭘요?”

    “챠넬 보도문 제목 변경 건이요.”

    “아! 그래서 뭐라 하시던가요.”

    “꼭 본인 얘기를 써야 하냐고···.”

    조광연의 말에 파인랭스 직원들이 모두 ‘풉’하고 웃음을 터트렸지만, 박영희 팀장은 정색하며 말했다.

    “왜요? 누가 봐도 모델이던데.”

    “예에? 그건 아니죠.”

    조광연도 정색하며 말했지만, 말로는 여자를 이길 수 없는 것이 진리 아니던가?

    #

    한현태 기자는 박주혁의 전화를 받고 화들짝 놀랐다.

    “아니, 파리에 계신다고요? 그런데 왜? 자, 잠깐 설마 오뜨 뀌뜨르 가신 겁니까?”

    “역시. 기자님이시라 그런지 촉이 좋으시군요.”

    “초, 초청되신 거예요? 저도 좀 데려가 주시지!”

    한현태 기자가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했다. 그리고 이어진 박주혁의 말에 깜짝 놀라 소리쳤다.

    “저, 정말입니까!”

    “그게 그렇게 됐네요. 보도문을 한 기자님께 먼저 보내라고 할 테니까. 알아서 잘 처리해 주십시오.”

    “허···.”

    “여보세요?”

    “···.”

    박주혁이 다시 불러도 한현태 기자는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게 수화기를 든 채 눈을 끔벅였다.

    “여보세요? 한 기자?”

    “아아. 예. 박 사장님. 아니 모델이라고 불러야 합니까?”

    “아, 놀리지 마시고요. 보도문 잘 부탁합니다.”

    “그건 염려 마시고 한국 돌아오시면 저와 인터뷰 제일 먼저 해주세요.”

    “인터뷰는 사절합니다.”

    박주혁의 말에 한현태 기자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아, 사장님!”

    “모델로서 인터뷰는 사절이에요. 안 됩니다.”

    “아 정말 이러시기에요?”

    “끊습니다.”

    - 뚝. 뚜뚜.

    한현태 기자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빤히 내려봤다.

    “아, 너무하시네.”

    특종을 놓친 것만 같았는지 한현태 기자가 한동안 입맛을 다셨다. 그러더니 갑자기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가만, 모델로서는 안 한다고 했지. 인터뷰 거절은 아니잖아? 좋았어.”

    한 기자는 주먹을 불끈 쥐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 띵.

    때마침 파인랭스에서 보도문을 번역하여 한현태 기자에게 보내왔다. 이메일을 열어본 한현태 기자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정말로 박주혁 사장이 평소 입지 못할 그런 디자인의 옷을 입은 채 미소 짓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헐···. 진짜였네. 훤칠하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챠넬 패션쇼라니.”

    한현태 기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보도문을 쭉 훑어보더니 중얼거렸다.

    “제목도 잘 뽑았네. 이대로 올리면 되겠다.”

    [챠넬 SS 패션쇼. 한국인 모델이 피날레를 장식했다!]

    한현태 기자는 미소 지으며 보도문에 이은 후속 기사를 작성했다.

    [챠넬 오뜨 꾸띄르에 오른 자동차 ‘칼스타’는 한국제품이었다!]

    제목을 써놓고 한현태는 씩 웃었다.

    “특종 감사합니다. 박 사장님. 하하하.”

    한현태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키보드를 두드릴 때, 동료들이 수군거렸다.

    “한 기자. 또 뭐 잡았나 본데?”

    “아, 저번에 럴커펠트 인터뷰 따고 부터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됐다니까?”

    “그러게 맨날 허탕 치더니. 역시 인생은 한방이야···?”

    동료들의 부러운 눈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한현태를 쳐다봤다.

    천덕꾸러기 기자에서 특종 제조기가 된 한현태 기자의 위상이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

    연구소 화재로 연기를 흡입한 차동진 전무는 일주일 병원 신세를 진 뒤 DD 자동차로 복귀했다. 살뜰이 자신과 TF 팀원을 챙겨준 박주혁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려 했지만, 이미 그는 파리로 떠난 후였다.

    차동진 전무는 집무실에 앉아 오늘 자 신문을 펼쳤다. 평소 관심 없던 패션란을 무심결에 넘기는데 익숙한 얼굴이 큼지막하게 걸려있었다. 차동진 전무는 눈을 살짝 크게 뜨며 패션란을 펼쳤다. 그리고 그는 입을 쩍 벌렸다.

    “어? 사, 사장님?”

    박주혁이 챠넬 패션쇼에 참석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모델이라니! 차동진 전무가 보도문을 읽고 있는데, 전화기가 울렸다.

    “차 전무님. 몸은 어떠세요?”

    “고 비서? 오늘 신문에 사장님이 대문짝만하게 실렸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아아. 패션쇼에 참석한다고 알고 계셨잖습니까?”

    “아니, 모델로 참석하시는 줄은 몰랐지. 챠넬 모델이라니···.”

    차동진 전무가 말을 잇지 못하자, 고윤희가 답답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뭐? 왜? 사장님께 무슨 문제가 생겼나?”

    “칼스타 주문이 밀려들고 있다고요.”

    고윤희는 챠넬 무대에 올라간 칼리스에 대한 관심이 예상보다 대단하다며 박주혁의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그래서 생산 확대를 위한 방법을 강구하라고 하셨습니다.”

    “헐. 연구소에서 최고의 기술진이 한 땀 한 땀 만든 걸 대량생산 하시겠다는 건가?”

    “아니요. 주문 제작 생산을 위한 절차를 노조 위원장과 협의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으. 노조랑?”

    보통 임원들은 노조를 꺼리고 있었기에 차동진 전무도 알게 모르게 거부감을 표했다. 그러자 고윤희가 정색하며 말했다.

    “반드시 해야 한다고···.”

    “알았네. 또 다른 지시는 없으셨나?”

    “벤타 부사장님과 협의할 사항이 있어 귀국이 예상보다 늦어질 것 같습니다. 벤타의 판매망에 칼리스를 밀어 넣으실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벌써 그렇게까지 진도를 나가셨어? 나도 서둘러야겠군. 알겠네.”

    전화를 끊고 차동진 전무는 자신이 메모한 사항을 다시 한번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판매가 힘들어 생산계획이 백지화됐었던 차를 이렇게 살려내시다니···. 역시 예상을 뛰어넘으시는군요.”

    #

    고윤희가 한국의 차동진 전무에게 박주혁의 지시사항을 전달할 때 박주혁은 럴커펠트 그리고 메르헨과 함께 파리의 한 식당에 모여있었다.

    “미스터 박. 이번 패션쇼에서 활약이 정말 대단했습니다.”

    “민폐였습니다. 다신, 제게 무대에 서란 얘기하지 마십시오.”

    “무슨 소리입니까! 당신은 페뷸러스 했다고요. 뭐랄까? 자체 발광하는 보석 같았어요.”

    럴커펠트의 말에 박주혁은 고개를 저으며 와인 잔을 입에 가져갔다. 부담스럽긴 했지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지 않던가?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런웨이에 다시 서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뭐, 럴커펠트의 부탁이라면 또 어쩔 수 없겠지만···.

    메르헨도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럴커펠트씨의 표현을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저도 미스터 박을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예? 메르헨까지 왜 그러세요.”

    “아니, 정말 미스터 박은 빛났습니다.”

    “조명빨입니다.”

    박주혁이 정색하자, 럴커펠트와 메르헨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분명 그것도 조금은 영향이 있었을 거예요.”

    “맞지, 맞아. 그 조명도 미스터 박 아이디어였으니까. 이번 쇼에서 미스터 박은 정말로 내게는 한 줄기 빛 같았다고.”

    박주혁은 둘의 입바른 소리에 혀를 내두르며 와인 잔을 들었다.

    “이번에도 세계를 놀라게 한 럴커펠트를 위하여!”

    박주혁의 말에 럴커펠트와 메르헨이 미소 지으며 잔을 들어 잔을 부딪혔다.

    “치얼스!”

    식사를 마치고, 럴커펠트는 또 다른 행사 때문에 먼저 자리를 일어나야만 했다. 무척 아쉬워하는 그를 떠나보낸 박주혁은 메르헨과 함께 센 강변을 거닐었다.

    “미스터 박과 함께 센 강변을 거닐다니 새롭군요.”

    메르헨의 말에 박주혁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때 한 화가가 박주혁과 메르헨을 다급히 불러세우며 말했다.

    “원더풀! 내 그림의 모델이 되어줄 수 없겠습니까?”

    메르헨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젖자, 거리의 화가는 박주혁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이분 말입니다.”

    “저, 저요?”

    화가가 고개를 끄덕이자, 박주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메르헨의 팔을 잡아끌고 냅다 뛰었다.

    “아, 아니! 잠깐만요!”

    화가가 무척이나 아쉬운 듯 크게 소리쳤지만, 그들은 이미 저만치 멀리 달아난 뒤였다.

    박주혁과 메르헨은 벤치에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곧 서로를 마주 보며 박장대소했다.

    “세상에 미스터 박을 그리고 싶었다니···. 제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요?”

    메르헨이 단단히 삐진 얼굴로 박주혁에게 묻자, 박주혁이 미소 지으며 답했다.

    “제가 생각해도 이상하다 싶으니까 도망친 거잖습니까. 그 화가의 눈이 이상한 겁니다.”

    “하하하. 그럼 거꾸로 말하면 미스터 박에게 저는 매력적인 여자인가 보네요?”

    메르헨이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물었는데 박주혁은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그럼요. 박력 있게 운전하는 것도 매력이라면 매력이죠.”

    “뭐에요?”

    박주혁의 농담에 메르헨이 새초롬해져서 박주혁의 팔을 툭 쳤다. 그렇게 웃으며 잡담을 주고받다가 박주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칼스타 말입니다.”

    “이번에 대 히트였죠? 정말 잘 만들었더군요. 욕심나게···.”

    “수작업해야 해서 생산이 좀 느리겠지만, 이번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벤타 판매망을 이용하고 싶다. 이거죠? 칼스타를 직접 운전할 때부터 그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DD 자동차에 칼스타 1,000대 생산해서 보내라고 하세요.”

    역시 메르헨은 운전 실력만큼이나 박력 있고 추진력이 강했다. 하지만, 예상을 깨는 것은 언제나 박주혁이었다.

    “아니요. 우선, 챠넬 콜라보 버전으로 딱 300대만 생산하겠습니다.”

    그러자 메르헨이 눈을 빛내며 박주혁을 빤히 쳐다봤다.

    “희소성 전략인가요?”

    “비싸게 팔 생각이라서요. 챠넬 버전으로 칼스타의 이미지를 만들어 놓으면 일반 칼스타에 대한 가격저항도 적어질 겁니다.”

    “오호. 굿.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칼스타의 고가 전략은 그렇게 센 강변의 한 벤치에서 확립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