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74화 (74/136)
  • 074화 화려한 조명이 박주혁을 감쌌다.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

    박주혁은 DD 자동차 서울 연구소 화재를 수습하고 파리에 도착했다. 럴커펠트에게 선물할 칼스타 1호와 챠넬이 추가로 발주한 2, 3호 차와 함께 말이다.

    럴커펠트가 쇼 준비로 너무 바빠, 공항으로는 챠넬 직원이 마중을 나왔다.

    “비아브뉴 아 파리. 미스터 박.”

    “봉쥬르.”

    뭔가 환영 인사 같았다. 불어를 모르는 박주혁이 머뭇거리자, 함께 파리로 온 고윤희 비서가 불어로 대신 인사했다. 고윤희 비서의 또 다른 모습에 박주혁이 눈을 살짝 크게 뜰 때쯤 익숙한 영어로 챠넬 직원이 말했다.

    “이번 패션쇼에 참가를 결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럴커펠트 씨가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이동하시죠.”

    박주혁은 칼스타 3대와 함께 그랑팔레에 도착했다. 박주혁은 트레일러에 실린 칼스타가 안전하게 내려지는 것까지 확인하고서야 안도하는 표정으로 럴커펠트가 쇼를 준비하는 곳으로 향했다.

    “거기! 그게 아니잖아! 삐뚤어졌어!”

    스테이지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럴커펠트가 짜증을 내며 소리쳤다. 평소 알던 럴커펠트의 모습과는 180도 다른 모습이었다.

    ‘자신의 분야에서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프로구나.’

    일하는 모습을 본 적 없었기에 그냥 편한 동네 아저씨 같았는데, 쇼를 진두지휘하는 럴커펠트는 그야말로 화신에 가까웠다.

    “워킹이 왜 그래? 그렇게 아기처럼 자박자박 걸을 거면 그만둬!”

    럴커펠트의 호통에 모델의 눈빛이 달라지더니 파워 워킹을 구사했다. 럴커펠트의 지휘는 너무도 디테일했고 가슴을 후벼팠다. 프로 모델들도 저럴진대 일반인인 박주혁이 저 런웨이에 오른다고 생각하니 벌써 아찔했다.

    ‘괜히 한다고 했네···.’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늦었다.

    럴커펠트가 호통을 치다 말고 박주혁을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팔을 활짝 벌렸다.

    “미스터 박! 마이 러브.”

    팔을 벌린 채 럴커펠트는 박주혁에게 다가와 그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예. 잘 지내셨죠?”

    “그럼요. 화재는 잘 처리된 건가요?”

    “걱정해주신 덕분에 잘 수습했습니다. 참, 칼스타가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오! 한 번 보러 가죠. 엄청나게 기대됩니다.”

    럴커펠트가 환하게 웃더니 뒤돌아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잠시 휴식!”

    럴커펠트의 명령이 떨어지자, 긴장감 역력했던 직원들의 표정이 한순간 풀렸다. 그들의 모습이 곧 박주혁에게 닥칠 미래였다.

    주차장에 가지런히 서 있는 칼스타의 뒤태를 보자, 럴커펠트가 아이처럼 뛰어나가 감탄사를 뱉었다.

    “오! 러블리.”

    박주혁이 봐도 칼스타의 뒤태는 빵빵한 오리 엉덩이처럼 사랑스러웠다. 럴커펠트는 칼스타의 주변을 천천히 돌며 연신 생소한 단어들로 칼스타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미스터 박. 정말 고마워요. 마음에 쏙 드는군요.”

    “한 번 운전해 보시죠.”

    “예스! 당장 해봐야겠어요.”

    럴커펠트가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자, 거친 그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칼스타가 살아났다. 저음의 엔진음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한 DD 자동차 연구진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오, 마이 갓. 이 저음의 사운드 좀 봐요. 달리고 싶다고 속삭이고 있군요.”

    “하하하. 엄청나게 노력한 엔진 사운드입니다. 알아주시니 감사하군요.”

    “미스터 박의 세심한 터치가 가미됐군요. 와우!”

    박주혁이 조수석에 타자, 럴커펠트가 칼스타를 도로에 올리고 액셀을 거칠게 밟았다. 패션 디자이너라는 세심한 직업과는 달리 럴커펠트는 차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었다. 칼스타는 저음의 배기음을 토해내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 부등. 부드드드.

    “아이, 러브 잇!”

    럴커펠트가 마음에 들어 하자, 박주혁도 환하게 미소 지을 수 있었다. 그리고 칼스타가 이번 패션쇼의 배경에 쓰겠다고 했으니 세계에 DD 자동차를 알릴 좋은 기회였다. 물론, 럴커펠트의 배려였지만 말이다.

    주변을 한 바퀴 돌고 주차장에 도착하자, 언제 왔는지 메르헨이 커다란 챠넬 선글라스를 쓴 채 미소 지으며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럴커펠트가 먼저 메르헨을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메르헨 양? 아직 쇼는 이틀이나 남았는데···?”

    럴커펠트는 말하다 말고, 박주혁을 돌아보더니 껄껄 웃으며 말했다.

    “미스터 박을 만나러 온 겁니까?”

    “에이, 설마요? DD 자동차의 칼스타를 미리 보기 위해 왔습니다.”

    “아아?”

    럴커펠트는 피식 웃으며 칼스타의 키를 메르헨에게 쥐여줬다.

    “끝내주는 차입니다. 미스터 박이 명품을 만들어냈어.”

    “그 정도예요?”

    “한 번 몰아봐요.”

    메르헨이 운전석으로 향하자, 럴커펠트가 박주혁을 조수석 쪽으로 밀치며 말했다.

    “레이디 곁에는 언제나 든든한 기사가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저는 쇼를 준비해야 하니 두 분은 드라이브 좀 즐기고 오세요.”

    “예? 하지만···.”

    박주혁이 뭐라 말하려 했지만, 럴커펠트는 조수석에 박주혁을 밀어 넣고 문을 닫아 버렸다.

    “헤브 펀!”

    럴커펠트가 웃으며 멀뚱히 서 있는 고윤희를 향해 말했다.

    “대신 미스···?”

    “고윤희 입니다.”

    “미스터 박 대신 미스 고가 절 좀 도와주시겠어요? 칼스타 배치에 조언이 좀 필요하군요.”

    고윤희는 칼스타에 앉아 있는 박주혁을 바라봤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럴커펠트를 향해 말했다.

    “럴커펠트 씨에게 누가 되지 않는다면 기꺼이 돕겠습니다.”

    고윤희의 말에 럴커펠트는 환하게 미소지으며 고윤희와 함께 오뜨 뛰꾸르로 들어갔다.

    #

    - 부드드등.

    칼스타는 거친 숨을 뱉어내며 시원하게 달렸다. 벤타의 차기 수장답게 메르헨의 운전 스킬은 수준급이었다. 그녀는 코너를 돌 때 엔진브레이크로 속도를 줄였다. 칼스타는 울컥거리며 감속하더니 메르헨의 액셀 반응에 따라 다시 한번 거친 숨을 토하며 금세 본래 속도를 되찾았다.

    칼스타는 메르헨이 원하는 대로 민첩하게 움직였다. 코너를 빠져나와 직선주로에 오른 메르헨은 액셀을 꾹 밟으며 속도를 더욱 높였다. 칼스타는 그에 맞춰 비명을 질렀다.

    - 바다다당!

    “와우!”

    메르헨이 상기된 얼굴로 소리쳤다. 반면 박주혁의 얼굴은 창백하게 떴다.

    “미스터 박! 정말 명차를 만드셨군요. 코너 접지력도 좋고, 가속력도 아주 훌륭해요.”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메르헨의 운전 테크닉이 놀라운데요?”

    “칭찬이죠?”

    박주혁의 말에 메르헨이 얼굴을 붉히며 배시시 웃었다.

    한참 운전의 재미에 빠져있던 메르헨이 속도를 살짝 늦추며 말했다.

    “미스터 박. 화재 수습은 잘 된건가요? DD자동차는 어떻습니까?”

    “DD 자동차 임직원들과 같은 호흡을 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아이러니하지만, 이번 화재가 큰 도움이 됐어요.”

    박주혁의 말을 듣던 메르헨이 미간을 좁히더니 정색하며 말했다.

    “정말 위험한 결정이었습니다. 자칫 미스터 박이 큰 화를 입을 수도 있었다고요!”

    “다시 그와 같은 일에 처한다 해도 저는 같은 결정을 할 겁니다.”

    “못 말리겠군요. 당신은 정말···.”

    메르헨이 버럭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말끝을 흐렸다.

    칼스타의 엔진음 때문에 잘 들리지 않는지 박주혁이 미간을 좁히며 큰소리로 되물었다.

    “예? 뭐라고 하셨어요?”

    박주혁의 질문에 메르헨은 답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풀악셀을 밟았다.

    - 바다다당!

    “크흡!”

    급가속 덕분에 박주혁은 메르헨이 중얼거린 말을 다시 묻지 못하고 안전띠를 꽉 쥐었다.

    #

    블랙 & 화이트, 브라운 & 베이지 칼라의 칼스타가 챠넬 런웨이 양옆에 비스듬하게 배치됐다. 럴커펠트는 칼스타의 헤드라이트를 켜게 한 다음 빛무리가 합쳐지는 곳을 확인하더니 소리쳤다.

    “왼쪽 헤드라이트 좀 더 내려봐요. 오케이! 거기까지. 오른쪽은 좀 올리고···. 스탑! 좋아요.”

    고윤희는 럴커펠트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어, 시키는 대로 분주하게 움직일 뿐이었다.

    “미스 고! 펄펙트! 땡큐.”

    어쨌든 럴커펠트가 웃으며 고맙다고 하니 된 거다. 고윤희 비서가 어색하게 웃으며 칼스타에서 비켜서자, 럴커펠트가 대기하고 있는 모델들에게 말했다.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곳에서 프리스타일 후에 워킹을 이어가 봅시다.”

    럴커펠트의 지시에 따라 모델들은 칼스타가 비추고 있는 한 지점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뮤직!”

    럴커펠트의 말에 경쾌한 음악이 흘렀고 모델들이 하나둘 런웨이를 걸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던 모델들은 칼스타의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지점에서 활짝 웃으며 한 바퀴 돌거나, 당당한 얼굴로 아크로바틱한 포즈를 취했다.

    “좋아, 좋은데···.”

    럴커펠트는 상당히 흡족한 듯했지만,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럴커펠트가 미간을 좁히며 턱을 쓸었다.

    “뭔가, 뭔가 부족해.”

    그때 메르헨과 박주혁이 돌아왔다. 칼스타가 단순히 런웨이의 배경으로 쓰이는 줄 알았더니 헤드라이트가 한 곳을 집중적으로 비추고 있었다. 박주혁은 눈을 살짝 크게 뜨며, 그곳을 쳐다봤다. 때마침 한 모델이 그곳에서 미소 지으며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헐.”

    충격적이었다. 역시 럴커펠트라고 해야 할까?

    무뚝뚝한 표정으로 정면만 응시하는 기존 패션쇼와는 좀 다른 느낌이었다. 신선하다고 하면 딱 맞았다. 박주혁이 감탄하고 있는데, 럴커펠트가 발을 구르며 짜증을 냈다.

    “2% 부족해!”

    2%가 부족하다는 말에 박주혁이 눈썹을 치켜뜨며 런웨이를 전반적으로 살펴봤다. 분명 신선하고 충격적인 런웨이였지만, 칼스타가 비추는 곳이 다른 조명들로 인해 몰입감이 약했다.

    “음. 혹시 그래서인가?”

    박주혁은 럴커펠트에게 다가가 살며시 조언했다.

    “이런 말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미스터 박. 그대의 말이라면 언제나 땡큐죠.”

    “칼스타가 비추는 곳에 모델이 도착했을 때, 주변 조명을 꺼보면 어떻겠습니까? 저 지점만 돋보일 수 있도록 말이죠.”

    “아?”

    박주혁의 말에 럴커펠트가 선글라스를 치켜올리더니, 소리쳤다.

    “조명팀! 모델이 저 스팟에 오면 조명을 꺼봐!”

    “예!”

    경쾌한 비트의 음악에 맞춰 걷던 모델이 칼스타가 비춘 지점에 오는 순간 주변 조명이 일순간 꺼졌다.

    “조명팀! 저 지점을 비추는 조명 몇 개만 더 켜봐!”

    럴커펠트의 말에 주변이 암전되고 딱 한 지점으로 시선이 쏠렸다. 모델은 음악에 맞춰 활짝 웃으며 자켓을 벗어 어깨에 걸쳤다. 그러더니 정색하며 다시 파워 워킹을 시작할 때쯤 럴커펠트가 소리쳤다.

    “조명!”

    - 팟!

    다시 주변이 환해졌다. 다음 모델이 도착할 때쯤, 주변 조명이 또다시 꺼졌다. 럴커펠트는 환하게 웃으며 손뼉 쳤다.

    “브라보! 펄팩트!”

    마지막 퍼즐을 맞춘 박주혁을 돌아보며 럴커펠트가 미소를 띤 얼굴로 말했다.

    “준비가 끝났군요.”

    “축하합니다.”

    박주혁이 건넨 인사에 밝은 얼굴로 럴커펠트가 말했다.

    “미스터 박은 리허설도 필요 없지요?”

    럴커펠트의 말에 박주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럴커펠트, 다시 한번 생각해봐요. 전 저기 있는 프로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박주혁의 말에 럴커펠트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미스터 박, 자유롭게 나를 가두고 있는 모든 것을 풀어버리고 걷는 겁니다. 제 생각에 미스터 박은 리허설도 필요 없어요. 지금도 완벽하니까.”

    ‘대체 무슨 소린지···.’

    완곡하게 거절했지만, 소용없었다.

    이틑날. 박주혁은 정말 리허설 없이 무대에 올랐다. 럴커펠트가 한 땀 한 땀 스팽글을 직접 단 블링블링 트레이닝 복을 입고 말이다.

    “미스터 박, 뤠디?”

    진행자의 말에 박주혁의 입안이 바짝 타들어 갔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다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박주혁의 긴장감이 느껴지는지 주변에 있던 모델들이 박주혁을 응원했다.

    “유 캔 두 잇!”

    하지만, 들리지 않았다.

    “미스터 박! 고. 나우!”

    진행자가 박주혁의 등을 살짝 쳤다. 그 바람에 떨어지지 않던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이제는 멈출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경직되어 있던 몸이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자연스러워졌다는 것이다.

    ‘그래, 그냥 걷는 거다.’

    긴장감을 떨쳐내고 자연스럽게 걸을 수 있게 될 무렵, 칼스타의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곳에 도착했다.

    - 팟!

    조명이 꺼지고, 화려한 조명이 박주혁을 감쌌다. 스팽글들이 조명을 반사하여 어설프게 서 있는 박주혁을 더욱 빛나게 했다. 박주혁은 상위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좌중을 둘러봤다. 어색한 포즈였지만, 그 자체로 황홀했기에 럴커펠트는 멍한 눈으로 박주혁을 바라봤다. 메르헨도 살짝 입을 벌린 채 눈을 끔벅였다. 오늘따라 유독 메르헨이 얼굴을 자주 붉히는 것 같았다.

    박주혁의 모습을 넋 놓고 지켜보던 럴커펠트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어, 언빌리버블···!”

    #

    챠넬 오뜨 꾸뛰르가 성황리에 막을 내리고 파인랭스로 번역 의뢰 메일이 도착했다. 조광연 팀장은 퇴근하려다 말고 도착한 메일을 열어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사, 사장님이 무대에 섰잖아?”

    “뭐라고요?”

    다들 조광연 주위에 모였고, 챠넬의 보도문에는 박주혁이 블링블링한 옷을 입은 채 웃고 있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박 팀장님! 잠깐만요. 빨리 와보세요.”

    조광연이 박영희 팀장을 큰 소리로 불렀다. 박영희 팀장은 투덜거리며 조광연 차장의 자리로 왔다.

    “뭔데, 사람을 오라 가라 해요.”

    “이, 이것 보세요. 챠넬에서 번역 의뢰한 보도문인데···.”

    “사, 사장님이잖아요?”

    “그쵸? 대박.”

    얼굴이 상기된 박영희 팀장은 조광영 차장에게서 마우스를 뺏어 이메일 내용을 확인했다. 내용을 확인한 박영희 팀장이 미소 가득한 얼굴로 소리쳤다.

    “챠넬이 드디어 한국어 번역도 한답니다. 오늘은 퇴근이 좀 늦겠어요!”

    “네!”

    직원들은 우렁차게 답했고, 박영희 팀장은 웃으며 자기 자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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