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72화 (72/136)
  • 072화 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고채수와 최태익은 뭔가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사장실을 나왔다. 그들은 서울 사무소를 조금 벗어난 골목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 후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은 동시에 허공에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우리가 조금 전에 뭘 들은 거냐?”

    고채수가 먼저 입을 열었고 최태익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저도 지금 정리가 안 됩니다.”

    “어쨌든 좋은 거 아니냐?”

    “그런 것 같긴 한데···. 솔직히 까놓고 우리 성과급 못 받아낸 겁니다.”

    최태익의 말에 고채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박 사장 말 못 들었어? 3조 적자래. 아까 재무제표지 뭔지, 그거 까놓고 말하는 거 같이 들었잖아. 3조 적자라는데 무슨 성과급이야.”

    “그러니까 말이죠. 할 말이 없더라고요. 저래놓고 사측 성과급 잔치하면 조합원들 난리 납니다.”

    - 후우!

    최태익의 말에 고채수가 담배 연기를 뿜으며 미간을 와락 좁혔다.

    “쓰벌. 그럼, 아주 뭐 되는 건데.”

    “그런데 박 사장님이 그럴 것 같진 않았습니다. 눈치채셨어요? 일전에 우리가 사장실 점거했을 때 봤던 그 휘황찬란한 가구들 오늘 보니 없더라고요.”

    “아, 그러고 보니 뭔가 분위기가 다르다 싶었더니···.”

    고채수가 말끝을 흐리며 하늘을 쳐다보는데, 최태익이 차분하게 말했다.

    “우리, 이번 한 번만 속는 셈 치고 박 사장 믿어볼까요?”

    “태익이 네가 그렇다면···. 한번 속아보지 뭐.”

    고채수의 말에 최태익이 피식 웃으며 담배를 가져가더니 말했다.

    “형님. 조심하세요.”

    “뭘?”

    “박 사장 보통내기 아니더라고요. 이제 뒷돈 받고 사람 뽑는 짓 그만하시란 말입니다.”

    “뭐? 내, 내가 언제!”

    “알만한 사람은 다 알아요. 그리고 박 사장이 임원들 내쳤다는 소식 사내에 다 퍼져있잖아요? 얼마 전에 디자인 센터장도···. 이거 됐잖아요.”

    최태익이 손날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고채수가 자신의 목덜미를 손으로 한번 쓸더니 헛기침을 했다.

    “크음!”

    “이번 사장님 젊다고 무시하다간 모가지가 남아나질 않을 겁니다. 조심하세요. 괜스레 저까지 걸고넘어지지 마시고요.”

    “아, 알았어!”

    고채수는 자신의 목덜미를 연신 쓰다듬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가자. 평택으로. 역시 서울은 눈뜨고 코베이는 곳이야. 정을 줄래야 줄 수가 없다니까?”

    #

    DD 자동차의 임원들과 노조의 관계를 정립한 박주혁은 계획대로 DD 자동차의 고급 승용차 개발을 중도에 드랍시켰다. 그 소식이 증권가에 퍼지며 주가가 한동안 롤러코스터를 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DD 자동차 고급 승용차 개발 포기로 불확실성 떨쳐내.]

    [DD 자동차 박주혁 사장. 회사 체질 개선에 사활을 걸다.]

    [철저한 성과 위주의 DD 자동차, 실적 날개 돋친 듯 올라.]

    [DD 자동차 목표 주가 상향!]

    DD 자동차에 대한 기사가 연일 터지며, 주가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심지어 지상억 디자인 센터장이 국제 자동차 페스티벌에서 올해의 디자이너 루키상을 수상하며 세간의 관심은 받아, 되레 주가는 상승세를 탔다.

    박주혁은 DD 자동차의 위상을 올린 지상억 소장을 불러 축하의 말을 건넸다.

    “이번에 디자이너 루키상을 수상했다죠?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다 회사가 지원해주신 덕분입니다.”

    “이거 격려금이라도 드리고 싶은데 회사 사정이 여의치 않다 보니 아쉽군요.”

    “바쁜 와중에도 페스티벌에 나갈 수 있게 허락해주신 게 어디입니까?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주혁은 지상억 소장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저는 그저 다리를 하나 놨을 뿐. 모든 것은 지 소장이 이뤄낸 겁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었다. 박주혁의 말에 지상억 소장이 감동한 듯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나저나, 이번 전기차 디자인은 상당히 파격적이더군요.”

    “기술진에게 자문해보니, 전기차에 그릴이 그다지 필요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음. 그렇죠. 아무래도 내연기관과 달리 열이 많이 발생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박주혁은 전기차의 컨셉 디자인을 보며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이건 뭐 EH슬라와는 또 다른 느낌이네. 나쁘지 않아.’

    지성억 소장의 디자인대로 제작이 된다면 DD 자동차의 첫 전기차는 클래식과 중후함 그리고 세련미를 갖춘 럭셔리 세단이 될 가능성이 컸다.

    “고급 승용차는 포기를 선언했는데 전기차는 고급 승용차라니···. 아이러니하군요.”

    “일전에 사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세상을 놀랠 차를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나쁘지 않아요. 아직 본격적인 투자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니 마음껏 그려보세요.”

    “가, 감사합니다!”

    박주혁은 뒤돌아 나가는 지상억 소장을 쳐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완전 물건이네. 저대로만 나와준다면 걱정 없겠어.’

    지상억 소장이 물러가고 박주혁은 TF팀의 미팅에 참석했다.

    전기 골프 카트 개발은 생각보다 많은 기술이 필요하지 않았다. DD 자동차의 전기 골프 카트는 벌써 샘플 제작이 끝나 시범 운행 중이었다. 그로 인해 TF는 어느덧 전기차 개발 TF로 승격되어 브레인스토밍을 지속하고 있었다. 물론, 리딩은 박주혁이었지만 말이다.

    EH슬라의 기술은 못 해도 5년 또는 10년은 앞서 있던 기술이었기 때문에 기술진들이 따라오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박주혁은 가랑비에 옷 젖듯 천천히 EH슬라의 기술을 아이디어를 차원으로 TF팀과 공유했다. 그리고 그 전략은 유효했다.

    “오늘은 전기차에 특화된 섀시에 대해 의논해 봅시다.”

    박주혁의 의제로 시작된 브레인스토밍은 열띤 논쟁을 이어갔다.

    “전기차는 내연기관과는 달리 배터리가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엔진룸에 많은 투자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자동차 본연의 외형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배터리의 무게입니다. 니켈카드뮴이 아무리 납축전지보다는 가볍다고 하지만, 상당한 무게였습니다. 차의 무게 중심을 고려해서 섀시를 기획해야 할 겁니다.”

    각 부서에서 인재들을 추렸다더니, 정말 날카로운 지적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박주혁은 요새 TF와 브레인스토밍하는 것이 하루의 낙이었다.

    “아주 좋은 말입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배터리를 바디 하단부에 설치하여 무게 중심을 낮추고 실내 공간을 최대로 확보하는 방안이 어떨까 합니다.”

    박주혁의 말은 물론 EH슬라와 미래 자동차의 번역본에서 가져온 미래의 얘기였다. 그리고 TF팀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오. 정말 그럴 것 같습니다. 전륜과 후륜에 각각 모터로 제어를 하면 트랜스퍼케이스도 필요 없을 테고, 실내를 평탄하게 만들 수 있겠군요!”

    딱 원하던 대답이 나오자, 박주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브레인스토밍 중 나온 얘기를 접목하여 샘플카를 제작해 봅시다. 구동 부분은 전기 골프 카트와 큰 차이가 없을 테니, 이제는 한번 도전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박주혁의 말에 TF팀은 모두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

    박주혁이 TF팀과 브레인스토밍을 마치고 집무실로 돌아오자, 고윤희가 재빨리 따라 들어오며 말했다.

    “사장님. 외무부의 유명한 국장님께서 연락하셨습니다.”

    “유 국장님께서? 무슨 일 있으시답니까?”

    “아니요. 그냥 안부 전화라 하셨습니다.”

    고윤희의 말에 박주혁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죠. 연락해보겠습니다. 다른 사항은 없습니까?”

    “차동진 전무님께서 칼스타 1호차 조립에 들어간다고 보고하셨습니다.”

    “음. 벌써 그렇게 됐군요.”

    박주혁은 책상위에 있는 달력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벌써 6개월이 흘렀구나···.’

    잠깐 달력을 바라보고 있던 박주혁이 갑자기 눈을 번쩍 빛내더니 고윤희를 물렸다.

    “DD 자동차에 몰두했더니 큰 건을 놓칠 뻔했구나. 시스템 온. 검색, 통신.”

    - 검색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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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주혁은 96년도 상반기 자료를 훑어보다가 갑자기 손가락을 멈추며 말했다.

    “그래. 맞아. 이제 곧 한국통신과 신세계 통신이 서비스를 시작한다. 시스템 오프.”

    박주혁은 시스템을 끄자마자, 수화기를 들어 전화를 걸었다.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파인랭스 조광연 차장입니다.”

    “조 과장.”

    “어? 사장님!”

    “요즘 너무 바빠서 내가 미리 못 챙겼는데···.”

    박주혁은 IT 중계기 제조업체의 최근 동향에 관해 물었고 조광연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답했다.

    “요즘 들어 번역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번역 물량이 많아졌죠? 역시···.”

    박주혁은 이제 곧 이동통신 시장이 열릴 것이며, 휴대폰 매뉴얼 번역이 많아질 것이라고 조광연에게 알렸다. 쏟아질 번역 물량이 걱정되어 한 말이었는데 돌아오는 조광연의 대답에 박주혁은 그만 웃어 버렸다.

    “근데 요즘 랭귀지패스트 덕에 번역 효율이 올라가서 웬만한 물량에도 끄떡없습니다.”

    “하하하. 랭귀지패스트가 제대로 작동하나 보군요.”

    “프리랜서들도 좋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가끔 회사 들리셔서 소식도 좀 듣고 하세요. 요즘 박영희 팀장님이 아주 시무룩하단 말입니다.”

    “박 팀장이 왜요?”

    “글쎄요···.”

    조광연이 목소리를 깔며 말끝을 흐렸다. 보통 박주혁에게 솔직한 모습을 보였던 조광연이 이런 태도를 보인다니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졌다.

    ‘무슨 문제가 있나 본데?’

    박주혁이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물었다.

    “박 팀장에게 무슨 일 있습니까? 회사는 문제없이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죠.”

    “그건 사장님께서 직접 오셔서 알아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흐으음.”

    박주혁이 신음하자, 조광연이 답답하다는 듯 한마디 쏘아붙였다.

    “저 곧 상견례를 합니다.”

    “어! 정말입니까? 상대가 혹시···?”

    “구 과장이죠.”

    “정말! 축하합니다. 냉장고 준비해야겠군요.”

    박주혁이 목소리를 높이며 좋아할 때 조광연이 정색하며 말했다.

    “박 팀장님도 짝을 찾고 계신 것 같습니다. 회사에 한 번 나오세요. 사장님이 필요합니다.”

    “···.”

    박영희 팀장이 짝을 찾는 것과 박주혁의 출근 사이에 상관관계를 찾을 수 없었지만, 파인랭스에서 챙겨야 할 현안들이 있었기에 박주혁은 알겠다고 답했다. 전화를 끊고 박주혁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시 생각해봐도 조광연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흠. 회사에 가보면 알겠지.”

    박주혁은 가볍게 생각하고, 유명한 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외무부 국제기구 유명한 국장입니다.”

    “국장님. 저 박주혁입니다.”

    “박 사장! 정말 목소리 듣기 어렵구만?”

    “그러게요. DD 자동차로 온 후로 너무 정신없네요.”

    “어련하겠어?”

    박주혁과 유명한은 반갑게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유명한에게서 아주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봄바디오가 한국에 지사를 설립하기로 했네.”

    “그게 이제야 결정이 난 겁니까?”

    박주혁이 놀라자, 유명한이 껄껄 웃더니 말했다.

    “이제 이 선배가 정말 지사장이 된 거라고. 전화 한번 해봐.”

    “아! 정말 축하할 일이군요. 전화로 되겠습니까? 괜찮으시면 식사나, 골프로 회포를 푸시죠.”

    “나야 좋지!”

    유명한과 전화를 끊고, 박주혁은 곧바로 이원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봄바디오 이원희 지사장입니다.”

    “지사장님!”

    이원희는 박주혁의 목소리를 바로 알아챘는지 큰소리로 소리치며 반가워 했다.

    “이야! 이게 누구야 박 사장 아닌가?”

    “이제는 정말 지사장님이라고 불러도 되겠군요.”

    “하하하. 그렇지!”

    “오래 기다리셨네요.”

    박주혁의 축하와 위로가 섞인 말에 이원희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파인랭스에 진 빚을 갚을 수 있게 되었어.”

    “드디어 대금 지급입니까? 이자까지 받아낼 겁니다.”

    “하하하. 그렇게 하시게나.”

    밝은 이원희의 목소리 덕에 박주혁도 마음 한켠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원희가 또 다른 희소식을 전해왔다.

    “파인랭스가 잘 도와준 덕분에 이번 용인경전철 철도 신호를 봄바디오가 낙찰받았네.”

    박주혁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목소리를 높이며 축하를 건넸다.

    “겹경사군요. 유명한 국장과 골프 약속을 잡을까 했는데, 이번 스폰은 봄바디오에서 해야겠습니다?”

    “좋지! 좋아.”

    이원희 국장은 흔쾌히 박주혁의 제안을 받았고, 서로의 일정을 확인 후 다시 연락하기로 했다. 전화를 끊고 박주혁은 옅은 미소와 함께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잘됐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잘돼야 내게도 좋은 법이지.”

    흡족한 얼굴로 잠시 의자에 기대는데 고윤희가 다급히 문을 열고 들어와 말했다.

    “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평소 차분한 고윤희가 저렇게 다급하다는 것은 정말 큰 문제가 났다는 뜻이었다. 박주혁은 무엇인가를 직감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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