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70화 (70/136)

070화 비참한 권선호의 말로.

당장이라도 한국행 비행기를 탈 것 같던 럴커펠트는 자신의 FW시즌 준비로 일정을 뺄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그럼 우선 샘플 제작을 해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샘플도 좋지만, 장인의 작업은 직접 봐야 하는데···.”

“모든 것을 직접 챙기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좋겠지만, 럴커펠트 씨의 몸은 하나죠. 눈앞에 있는 FW에 집중하시고, 덕기봉제공장은 사람을 보내시면 어떻겠습니까?”

럴커펠트가 직접 한국을 방문하는 대신, 박주혁의 말대로 덕기봉제공장에 샘플 제작을 의뢰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박주혁인 짧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또다시 기자들과 엮이고 싶진 않아···.”

고개를 살짝 좌우로 가로젓는데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 띠리리.

“네 박주혁입니다.”

“대표님. 고윤희입니다.”

“아, 고 비서. 무슨 일이죠?”

“노조 위원장이 미팅을 요청했습니다.”

“노조요?”

“예, 아마 임원들이 경질되면서 생산직도 구조조정 대상이 된 것은 아닌지 염려하는 것 같았습니다.”

박주혁은 가만히 고윤희의 얘기를 들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올 것이 왔구나.’

강성 노조와의 일전이 임박했음을 느낀 박주혁이 굳은 얼굴로 입술을 뗐다.

“임원 회의가 잡혀있으니 다음 주 스케쥴 비는 날로 잡아주세요.”

“알겠습니다.”

박주혁은 고윤희와 통화를 마치고, 깍지를 낀 채 고심에 빠졌다.

‘소통. 완전한 소통으로 노조의 필요성을 없애야 한다.’

마음을 다잡고 있을 때 사장실 앞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사장님.”

“심 대리. 보고할 것이 있나요?”

“저···.”

심영찬이 박주혁에게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어제 고백했습니다.”

“오!”

박주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심영찬을 쳐다봤다. 심영찬은 배시시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을 본 박주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잘 됐군요! 하하.”

“감사합니다. 사장님 덕분입니다.”

“내가 뭘? 연애도 일도 열정적으로 해주길 기대합니다.”

“네! 잘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랭귀지패스트는 기업용과 프리랜서용을 별도로 개발했습니다.”

심연찬의 말에 박주혁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수고했습니다. 이제 랭귀지패스트를 세상에 선보여야겠군요.”

“걱정이네요.”

심영찬의 자신감 없는 말투에 박주혁은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문제없습니다. 번역 연구팀에서도 랭귀지패스트의 효용성에 대해 극찬하지 않던가요?”

“그야. 사내에서 필요한 기능 위주로 개발했으니까요.”

“그러니까 잘될 거라는 말입니다. 어차피 랭귀지패스트의 주 고객은 번역회사와 번역사입니다. 분명 잘 팔릴 겁니다.”

박주혁이 용기를 북돋아 주자, 심영찬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

랭귀지패스트의 상용화가 결정된 후 프리랜서용은 체험판으로 파인랭스 번역사들에게 배포됐다. 그와 동시에 최지훈 대리와 김진우는 번역회사로 영업을 위해 움직였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베스트 번역원도 방문하게 되었다.

최지훈 대리는 베스트 번역원 간판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진우야.”

“예. 대리님.”

“저긴, 너 혼자 가라.”

“예? 자신 없습니다···.”

“여태까지 한 것처럼 하면 돼. 번역회사들 반응 직접 봤지? 모두 눈 튀어나오려 했었잖아. 괜찮을 거야. 너한테 경험도 될 거고···.”

최지훈 대리가 독려하자, 김진우는 입술을 앙다물더니 차에서 내렸다.

“그럼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래. 화이팅!”

김진우는 당당하게 베스트 번역원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최지훈 대리는 고개를 살짝 떨구더니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진우야···. 도저히 권 부장을 만날 자신이 없었어.”

한편 김진우는 어깨를 펴고 베스트 번역원의 문을 두드렸다.

“안녕하십니까? 파인랭스의 김진우라고 합니다.”

권선호를 비롯한 직원 두 명이 고개를 돌렸다. 번역회사들은 영세하기 때문에 직원 한두명 있는 회사도 더러 있었기 때문에 딱히 이상할 것은 없었다. 파인랭스의 규모가 큰 것이지 모든 회사가 다 이런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런데 김진우를 향해 걸어오는 사람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 그가 다가올수록 김진우의 얼굴은 굳었고, 눈이 점차 커졌다.

‘헉. 뭐···. 뭐야 권선호?’

김진우가 당황할 무렵 권선호가 먼저 말을 건넸다.

“진우씨? 오랜만이야.”

“어어! 부, 부장님?”

“이제는 사장이야.”

“아아···.”

잠시 멍하게 있던 김진우가 상체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셨습니까?”

“우리 사이에 그런 예의를 갖출 필요가 있나?”

권선호는 특유의 뱀 같은 미소를 지으며 김진우를 접견실로 안내했다.

“권 부, 아니 사장님이 베스트 번역원에 계실줄은 몰랐습니다.”

“으음? 몰랐나? 내가 진우 씨에게는 얘기하지 않았나 보네.”

“아아···.”

김진우의 멍한 표정을 보며 권선호가 피식 웃었다.

“요즘 파인랭스는 어때?”

“똑같죠.”

“그런가? 박 사장도 잘 지내고?”

“예. 이번에 DD 자동차···.”

김진우가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왠지 박주혁의 현황을 알리면 안 될 것 같은 본능적인 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DD 자동차? 이번에 벤타가 인수했다던데···. 파인랭스가 그쪽 번역도 하나 보군?”

“예, 예!”

권선호가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런데, DD 자동차의 새로운 CEO가 박주혁이라더군. 묘하게 이름이 같단 말이지.”

“예? 아아. 그러게요.”

김진우가 얼버무리자, 권선호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그래. 그나저나, 여긴 웬일이야?”

“아. 랭귀지패스트가 개발 완료되어 번역회사들에 영업하고 있습니다.”

“···!”

권선호의 표정이 순간 딱딱하게 굳더니, 눈을 빛내며 물었다.

“벌써, 상용화하는 건가?”

“예, 한 번 보시겠습니까?”

“부탁하지.”

김진우가 랭귀지패스트를 시연하자, 권선호가 낮게 신음했다.

“으음. 정말 개발했군.”

“예.”

“허허.”

권선호는 헛웃음을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박주혁이 정말 해내다니···.”

김진우는 말없이 권선호의 눈치를 보다가 영업 멘트를 날렸다.

“이번에 랭귀지패스트를 구매하시게 되면 출시 기념으로 3달간 무료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출시 이벤트 기간 내에 유료 계약을 체결하시게 되면 카피당 3만 5천 원에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이벤트가 끝난 후에는 카피당 5만 원이니 지금 구매하시는 것이 유리합니다. 월, 정액에는 추후 업데이트 비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번 고려해 보시죠.”

김진우의 말이 끝나자 권선호가 갑자기 박장대소하고 웃었다. 영문을 모르는 김진우가 당황하여 그를 빤히 쳐다봤다.

“진우씨, 우리가 무슨 번역을 하는지 알아?”

“예?”

“비자 연장이나, 해외 이주하는 사람들의 각종 서류를 번역해서 공증을 대행하고 있지.”

“예에.”

“돈 안 되는 이런 일에 랭귀지패스트 같은 고급 프로그램이 필요하겠어?”

권선호의 자조 섞인 말에 김진우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랭귀지패스트의 장점은 양식이 비슷한 문서들의 편집을 건드리지 않고 반복되는 문장들을 그대로 번역한다는 것이죠. 말씀하신 각종 제출 서류들은···.”

김진우의 말이 분명 틀린 것이 아니었다. 직원당 3만 5천 원을 투자하면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특히 공증문서들의 경우 양식이 거의 흡사해서 CM(Contents Memory)를 만들어 놓으면, 80% 이상 번역이 되어 나오니 그 효용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것이다. 하지만, 권선호에겐 고려대상이 아닌 듯했다.

“그래. 무슨 말인지 알아. 알지만, 미안하네.”

“3개월만 무료로 사용해 보시고 결정하시죠.”

“하아.”

권선호의 한숨에서 진한 패배감이 묻어나왔다.

“그럼, 그렇게 하지.”

권선호는 자포자기하듯 말하며, 김진우가 내민 랭귀지패스트의 체험판 CD를 챙겼다.

김진우는 서둘러 베스트 번역원을 나와 차에 올라탔다. 최지훈 대리가 그런 김진우를 빤히 쳐다보며 무언가 답을 원하는 것 같았다.

“권선호 부장이 있었어요.”

“그래? 진짜?”

이미 알고 있었지만, 최지훈은 최대한 모른척하며 물었고 김진우는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예. 하아. 말로가 참 비참하군요.”

“왜?”

“번역회사 중 가장 밑바닥이라는 공증서류 번역을 하고 계시네요.”

“···”

최지훈 대리와 김진우는 그 후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다음 회사에 도착하고서야 최지훈 대리가 입술을 뗐다.

“진우야.”

“예.”

“우린, 파인랭스에 뼈를 묻자. 이런 회사 또 없다.”

“이미 몇 개월 전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최지훈 대리와 김진우 사원은 서로를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

DD 자동차 사내 디자인 공모전이 끝났다.

전 직원의 투표로 우승자가 결정됐는데, 우승자의 이름을 본 박주혁이 눈이 커다랗게 커졌다.

“뭐야. 이 친구가 DD 자동차에 있었어?”

지상억 디자이너.

미국 JM모터스의 디자인 매니저로 코르벳과 카마로를 디자인하며 명성을 떨쳐 영국 최고급 자동차라 불리는 불탈리의 디자인 총괄까지 맡았던 인물이었다.

박주혁은 수화기를 들어 고윤희 비서에게 명했다.

“지상억씨 이력서좀 보내주세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고윤희가 곧 서류 하나를 들고 사장실로 들어왔다. 박주혁은 지상억의 이력서를 살펴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물쏘 디자인에 깊이 감명받았습니다. 자동차 디자이너로서의 꿈을 DD에서 이뤄보고 싶습니다.]

지상억은 군대를 막 제대하고 인턴으로 DD 자동차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아마도 정직원이 되지 못하고 곧 미국 JM모터스로 자리를 옮기겠지.

“이런 인재를 놓쳤던 건가?”

박주혁은 미간을 좁히며 지상억이 디자인한 자동차를 다시 한번 살펴봤다.

동그란 헤드라이트에 큰 그릴 그리고 직선이 강조된 그의 디자인에서 얼핏 불탈리의 향이 나는 것 같았다.

“나쁘지 않아. 아니, 이보다 좋을 수 없어.”

동그란 헤드라이트가 칼스타의 디자인 아이덴티티와 겹쳐지며, DD 자동차만의 디자인 철학이 정립되는 느낌이었다. 그때 박주혁의 전화기가 울렸다.

“사장님. 임원 회의 시작 5분 전입니다.”

“알겠습니다.”

박주혁은 지상억의 출품작을 들고 대회의실로 향했다.

“사장님 오셨습니다.”

진행자의 말에 임원들이 전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주혁은 강단에 올라서자, 진행자가 말했다.

“모두 앉아 주십시오.”

임원들이 착석하자, 박주혁은 마이크를 잡고 입술을 천천히 뗐다.

“반갑습니다. DD 자동차 CEO 박주혁입니다.”

박수 소리와 함께 박주혁의 DD 자동차의 비전에 관한 얘기가 시작됐다.

“DD 자동차는 기존의 관념에서 탈피한 전기 자동차 전문기업으로 태어날 겁니다.”

박주혁의 마지막 말에 임원들이 모두 웅성거리며 혼란스러워했다.

여기저기 질문을 위해 손을 드는 임원들을 진행자가 한 명씩 지목했다.

“사장님. 그렇다면 지금 DD 자동차의 주력인 디젤과 4WD 제품군을 포기하시겠다는 겁니까?”

“뭔가 착각하신 것 같군요. 저는 주력 제품군을 포기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질문했던 임원이 코가 쭉 빠져 자리에 앉았다.

“사장님의 비전은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현재 시장은 내연기관이 주력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좋은 질문입니다.”

박주혁은 미리 준비한 자료를 대형 스크린에 띄우며 말을 이어갔다.

“1973년 1978년 오일쇼크 모두 기억하실 겁니다. 그 후로 80년대 이란, 이라크의 전쟁으로 유가는 널뛰기했죠.”

불안정한 유가 문제를 지적하며, 박주혁은 슬라이드를 넘겼다.

원유를 뒤집어쓴 새와 기름띠에 의해 흰 배를 드러내고 죽어버린 물고기 등의 사진에 임원들이 낮게 신음했다. 환경오염의 심각성은 모두 알고있었지만, 애써 등을 돌려왔다.

“불안정한 유가뿐 아니라, 환경오염 문제 또한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수준입니다. 당장 우리만 하더라도 맑은 하늘을 본 적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자동차는 어떨까요?”

박주혁이 잠시 임원들을 바라보다 질문자에게 역으로 질문했다. 임원은 쭈뼛거렸다. 그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박주혁이 말을 이어갔다.

“우리의 주력 디젤 엔진. 먼지 배출량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

“지금 당장 전기차를 생산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건 여기 계신 모두가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자동차 업계가 언젠가는 친환경으로 변경해야 한다는 노선만큼은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박주혁은 잠시 말을 끊고, 임원들을 쭉 둘러본 뒤 힘주어 말했다.

“우리가 남들보다 먼저 그 길을 가자는 것일 뿐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박주혁의 힘찬 포부에 임원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장내가 고요해지자, 박주혁은 장기억의 디자인을 꺼내며 말했다.

“이번 공모전에서 우승한 장기억 디자이너의 작품입니다.”

고전과 현대의 감성이 잘 섞인 장기억 디자이너의 작품을 임원들도 한 번씩 봤을 터. 장내가 다시 한번 소란스러워지려 할 때 박주혁이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는 지금부터 장기억 디자인 센터장을 중심으로 전기차 개발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박주혁이 장기억 디자인 센터장이라고 힘주어 말하자, 몇몇 임원들이 들썩이며 소리쳤다.

“디자인 센터장이요?”

“그 친구는 아직 인턴이라 들었습니다!”

“사장님. 연륜과 경험이 없는 친구에게 디자인 센터장이라는 직책을 맡기게 되면 혼란이 있을 것입니다.”

불만 가득한 의견을 쏟아내는 임원들과 눈을 하나하나 맞추며 박주혁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연륜과 경험이 디자인에 미치는 영향이 있나 보군요. 처음 들었습니다.”

박주혁의 한마디에 임원들의 동공이 격하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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