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69화 (69/136)
  • 069화 동대문 챠넬 공방

    “아, 글쎄 모른다고!”

    조덕기 사장은 계속 오리발을 내밀었지만, 박주혁과 주배정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숄더백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 말이다.

    주배정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이죽거렸다.

    “왜 이렇게 흥분하고, 얼굴을 붉히실까? 뭐 켕기나 봐?”

    “뭐? 내가 뭐···. 뭘 어쨌다고!”

    “지금도 그렇잖아. 말도 더듬고 소리 꽥꽥 지르고···. 아, 이건 원래 그랬나?”

    “이 망할 놈이!”

    조덕기 사장이 버럭거렸지만, 주배정은 팔짱을 끼더니 여유로운 표정으로 웃었다.

    “이봐. 자네는 거짓말에 전혀 소질이 없다고, 그냥 편하게 털어놔.”

    주배정은 테이블에 올려진 숄더백을 들고 흔들었다.

    “이거 자네가 만들었잖아.”

    “아, 글쎄 아니래도!”

    말은 그렇게 하지만, 조덕기 사장은 눈을 슬그머니 돌렸다. 그는 정말 거짓말에 소질이 없는 듯 했다. 영업과는 거리가 멀다고 해야할까?

    박주혁은 피식 웃으며 조덕기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조 사장님. 챠넬은 한국에 공방을 차릴 생각이라고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면, 아시아에 배급될 챠넬 제품을 독점 생산할 수 있다는 뜻이죠.”

    “으음?”

    박주혁의 말에 조덕기 사장이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박주혁을 쳐다봤다.

    “독점 생산?”

    “예. 당연히 제약은 있겠지만, 안정적인 공장 운영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크으음.”

    조덕기 사장이 안정적인 공장 운영이라는 소리에 턱을 잡으며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실력이 출중하다고 해도, 영업력이 없다면···.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꼴을 면할 수 없는 것 아니겠나. 그리고 90년대 한국은 다품종 소량 생산이 아닌 대량 생산으로 수출에 임할 시기라 조덕기와 같은 장인이 설 땅은 좁았다.

    고민하던 조덕기 사장이 헛기침하더니 말했다.

    “난 싸지 않아.”

    “한 땀 한 땀, 장인의 손길을 원하는 것이지 공장처럼 찍어내는 것을 챠넬도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이 숄더백의 품질을 알아본 것이 바로 챠넬의 수석 디자이너인 럴커펠트 씨고요.”

    “러···. 아 됐고. 그 사람이 나의 실력을 알아봤다는 건가?”

    한사코 거부반응을 보이던 조덕기 사장이 관심을 나타내자, 주배정의 입꼬리가 한층 더 올라갔다.

    “이것 봐. 자기가 만들어 놓고는 아니라고 오리발 낼 때는 언제고? 이제는 꼬리를 흔들고 있네?”

    “야 이놈! 주 가야. 도와줘라. 공장도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고. 이미테이션 만들어 봐야 푼돈이지만, 그런 일이라도 해야 겨우 풀칠한다고 내가 원한 게 아니었어!”

    “조 가야. 내가 아니라 박 사장한테 부탁해야지.”

    주배정의 말에 조덕기 사장이 박주혁이 손을 덥석 잡았다. 그의 손은 굳은살로 거칠었다. 한 분야의 장인이 되기 위해 노력한 그의 삶이 고스란히 느껴져 숙연해졌다.

    “박 사장. 챠넬에 다리를 나줄 수 있겠나? 마음 껏 내 실력을 뽐낼 수 있도록 말이야.”

    조덕기는 이런 사람이었다. 돈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실력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기회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내 제자들도 분명 좋아할 거야. 이미테이션이 아닌 세계적인 명품을 우리 손으로 만든다 생각하면 얼마나 기쁘겠나? 거기다 돈도 따라올 것이고···.”

    박주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쉽지 않은 길일 겁니다. 재료 다루는 법부터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넌지시 말했었거든요.”

    박주혁이 목소리를 낮게 깔며 강조했는데, 예상외로 조덕기 사장이 눈을 빛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네. 이번 SS 시즌에 나온 챠넬 백을 모사하면서 느꼈는데···.”

    그는 말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물더니 팔짱을 껴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주배정이 그를 향해 쓴소리를 뱉었다.

    “이미 다 까발려졌는데 또 자존심 때문에 모사품을 만든다고는 말 못 하겠다는 거야? 어휴. 저 고집불통.”

    “크흐음!”

    품질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완벽함을 추구하려는 그의 성격이 챠넬과 매우 잘 어울릴 것만 같았다. 박주혁은 피식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잘됐군. DD 자동차의 프리미엄급에는 덕기봉제공장의 가죽시트를 사용하면 되겠어.’

    얘기가 얼추 마무리되자 주배정과 조덕기가 박주혁을 술자리에 초대했다.

    “제가 빠져야 두 분께는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챠넬과 계약을 하게 되면 그때 거하게 얻어먹겠습니다. 조 사장님.”

    박주혁은 정중히 거절했다. 그들의 쌓인 앙금을 푸는데 박주혁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조덕기 사장이 아쉽다는 듯 투덜댔다.

    “그거 섭섭하게. 같이 가면 좋겠구먼.”

    “조 사장. 박 사장이 좀 바쁘겠어? 오늘은 둘이 한번 진탕 마셔보자고!”

    “이 망할 놈아. 우리가 20대야? 진탕 마시게?”

    말은 저렇게 해도 조덕기 사장은 주배정 사장을 아끼는 것 같았다. 실력을 인정해주는 사람을 어찌 싫어할 수 있겠나?

    박주혁은 그들과 헤어지고 파인랭스로 향했다.

    #

    박주혁이 파인랭스 사무실에 도착하니 이미 오후 5시가 임박했다.

    “사장님!”

    조광연 차장이 밝은 목소리로 박주혁을 맞이하자, 직원들 모두가 고개를 돌려 박주혁을 쳐다봤다.

    “사장님! 소식 들었습니다. DD 자동차가 챠넬과 협업하기로 했다면서요?”

    최지훈 대리가 박주혁에게 다가와 아는 척을 했다. 이미 뉴스를 통해 많이 퍼진 얘기였지만, 파인랭스 직원들에게 축하를 받으니 왠지 모르게 친정집에 온 느낌이었다. 흡족하게 웃으며 직원들과 담소를 주고 받는데 박영희 팀장이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박주혁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음?”

    “사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직원들에 둘러싸인 박주혁을 빼낸 박영희는 회의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박 팀장. 무슨 일입니까?”

    “사장님! 어쩌면 이러실 수 있습니까?”

    “예?”

    박영희 팀장의 돌출행동과 질문에 놀란 박주혁이 박영희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의 눈가가 촉촉한 것을 발견한 박주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영희 팀장은 잠시 심호흡을 한 뒤 말했다.

    “아무리 DD 자동차 사장도 겸한다고 하지만, 어떻게 파인랭스에 일주일 만에 오실 수 있습니까?”

    “아, 그 부분은 미안합니다. 시급히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어요. 회사에 무슨 어려움이 있었습니까?”

    DD 자동차에서도 매일같이 시스템을 열어뒀기에 파인랭스의 업무 흐름은 파악하고 있었다. 지금 박영희 팀장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 외에 다른 문제가 있다는 방증일 터. 박주혁이 심각한 얼굴로 묻자, 박영희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박영희가 말끝을 흐리며 우물쭈물하자, 박주혁이 차분하게 말했다.

    “말씀해보세요. 제가 도울 일이 있습니까?”

    하고 싶은 말이 무척 많았는데, 막상 박주혁을 앞에 두고 있으니 박영희는 한없이 작아지는 것 같았다. 한참을 우물거리던 박영희가 말했다.

    “우리 회식해요.”

    “예?”

    “술 사달라고요.”

    “아, 그럴까요?”

    회식하자는 얘기를 이렇게 심각하게 해야 했나 싶었지만, 파인랭스 직원들도 스트레스 분출구가 있어야 할 터. 어쩌면 박영희 팀장이 직책의 무거움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장을 대신해 회사를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감 말이다. 그렇게 졸지에 회식 자리가 만들어졌다.

    회식은 역시 조광연 차장의 소주병 마이크로 시작됐다.

    “오늘도 역시 우리 박 사장님의 개회사로 시작하겠습니다!”

    조광연 차장이 소주병을 건넸고, 박주혁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제가 자리를 비웠음에도 여전히 파인랭스가 건재한 것은 모두 여러분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겠죠.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주혁이 말하는 와중에 한기훈 과장이 손을 번쩍 들더니 소리쳤다.

    “사장님. 그럼 소고기 사주세요!”

    “하하하.”

    직원들이 한기훈 과장의 말에 웃고 있을 때, 박주혁이 큰소리로 외쳤다.

    “이모! 여기 그만 달라고 할 때까지 끊기지 않게 주세요. 소.고.기로!”

    “우와아!”

    직원들의 환호성을 뚫고 한기훈 과장의 목소리가 박주혁의 귀에 쏙 들어왔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박주혁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술잔이 돌고, 제법 취기가 올라왔을 때 심영찬이 다가와 박주혁의 옆자리에 앉았다.

    “사장님.”

    “심 대리, 표정이 왜 그래?”

    정말로 심영찬 대리의 표정이 상당히 칙칙해 보였다. 박주혁의 질문에 심영찬은 답하지 않고 엉뚱한 소리를 했다.

    “제가 사장님 좋아하는 거 아시죠?”

    “이 사람이 취했군?”

    박주혁의 말에 심영찬이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오해영씨를 좋아하는 것도 아시죠?”

    “그렇게 티를 내는데 모를 수가?”

    “근데 왜 그녀는 모를까요?”

    어쩌다 사랑 카운셀러까지···. 웃음이 비실비실 나오려 했지만, 진지한 심영찬의 모습에 차마 웃을 수 없었다. 박주혁은 망설이며 심영찬에게 물었다.

    “···고백은 해봤나?”

    “아뇨.”

    “···.”

    더 할 말이 없었다. 고백도 하지 않았는데 당사자가 어찌 알겠나? 박주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심영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진지한 말투로 그에게 조언했다.

    “진지하게 고백을 해봐. 사귀자고 말이야.”

    박주혁의 말에 심영찬 대리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굳이 말해야 하나요? 그냥 가깝게 지내고 그러면 사귀는 거지.”

    심영찬 대리의 말에 박주혁이 얼굴을 굳히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답답한 친구를 봤나. 아니, 원래 이런 식이었었지···.’

    불현듯 과거 심영찬의 배우자가 떠오르자, 박주혁이 손에 힘이 들어갔고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꼭 고백해보도록 해. 사랑도 일도 모두 승자가 독식하는 법이야.”

    진지한 박주혁의 말에 심영찬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사장님께 물어보길 잘한 것 같습니다. 고백해보겠습니다.”

    “그래. 내가 최신 양문형 냉장고를 살 수 있도록 해줘.”

    “네!”

    어두웠던 심영찬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리고 잠시 뒤 박영희 팀장이 박주혁의 옆자리에 앉았다.

    “사장님.”

    “박 팀장. 제가 자리에 없는 바람에 고생이 많습니다.”

    “그건 괜찮아요. 각오했던 바라서···.”

    박영희는 말끝을 흐리더니 아까 사무실에서 하지 못한 말을 힘겹게 꺼냈다.

    “직원들이 모두 합심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사무실에 자주 나오세요. 사장님이 안 계시니까 너무 허전합니다.”

    “그런가요?”

    박주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박영희 팀장은 얼굴을 붉히며 박주혁을 물끄러미 바라봤지만, 그의 시선은 웃고 떠들고 있는 직원들을 향해 있었다. 박영희는 살짝 풀죽은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언제나 시선은 회사와 직원들을 향하시는군요. 하긴, 그래야 작은 사장님 답죠···.’

    박영희 팀장도 소주를 입안에 털어 넣고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주혁은 멀어져가는 박영희 팀장의 뒷모습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많이 힘든가 보네. 내일은 파인랭스로 출근해야겠다.”

    #

    다음날.

    박주혁은 어제 다짐한 대로 파인랭스로 출근했다. DD 자동차의 임원 회의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어서 큰 무리는 없었다.

    8시 30분을 넘긴 시간, 파인랭스는 여전했다.

    최지훈 대리와 김진우가 사무실을 환기하며 사무실의 아침을 열었고, 이제 막 사무실로 들어선 박주혁을 맞이했다.

    “어, 사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박주혁은 카피를 들고 사장실로 들어갔다.

    고작 일주일이 지났을 뿐인데, 상당히 그리운 느낌이었다. 따사로운 햇볕을 맞으며, 커피 한 모금을 마시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역시 내 자리는 여기인가···.”

    - 벌컥!

    사장실 문이 열리고 박영희 팀장이 웃는 얼굴로 들어왔다.

    “사장님!”

    “아, 박 팀장. 좋은 아침입니다.”

    “네. 좋은 아침입니다.”

    박영희 팀장이 밝게 웃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박 팀장. 마침 잘 왔어요. 앉으세요. 챠넬 번역은 잘 돌아가고 있더군요. 피드백은 잘 정리하고 있나요?”

    박주혁의 물음에 박영희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더 바빠질 겁니다. 챠넬이 아시아에 공방을 낼 계획이라고 합니다.”

    “공방이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게 바로 한국이죠.”

    “저, 정말입니까?”

    박주혁이 고개를 끄덕였고, 박영희 팀장이 얼굴이 상기되어 말했다.

    “그럼, 조금 저렴하게 살 수 있을까요?”

    박영희 팀장의 현실적인 감상에 박주혁이 웃음보가 터질 뻔했다.

    “아니요. 그 번역을 우리가 맡겠죠.”

    “아. 그렇겠네요.”

    조금 실망한 듯한 박영희 팀장을 보며 박주혁이 속으로 생각했다.

    ‘협력사 직원 할인 같은 것은 없냐고 럴커펠트에게 물어봐야겠군. 그러고 보니 DD 자동차 할인 혜택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경영에 있어 내부고객의 만족도는 무척 중요하다. 생산에 직접 참여한 그들이 잠재고객층을 만날 수 있는 접점이기 때문이다. 내부고객은 자사 제품을 소비하고 느낀 점을 직접적으로 전달하기 때문에 기업 이미지 형성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즉, 내부고객의 충성도가 높을수록 회사에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DD 자동차의 임직원도 내부고객이겠지만, 박주혁에게 있어 진정한 내부고객은 파인랭스 직원들인 것 같았다. 박영희 팀장을 물리고, 박주혁은 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럴커펠트에게 전달할 사항도 있고 말이다.

    “안녕하십니까? 박주혁입니다.”

    “오! 마이러브. 미스터 박. 목소리를 들으니 무척 반갑군요.”

    “좋은 소식이 있어 연락드렸습니다. 찾으시던 동대문 공방을 찾았습니다.”

    “정말입니까? 퐌타스틱 하군요! 당장 확인하러 한국을 가봐야겠습니다.”

    “예?”

    예상치 못한 럴커펠트의 답에 박주혁이 당황했다.

    “직접 제작 과정을 살펴봐야 합니다.”

    “아. 물론 그러시겠죠.”

    챠넬의 아시아 공방 프로젝트는 예상보다 빨리 진행될 것만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