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68화 (68/136)
  • 068화 구질구질하게 굴지마세요.

    “어휴. 이런 명품 가구를 헐값에 매입한다는 게 마음이 안 좋네···.”

    주배정은 트럭에 실린 가구들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때 직원들이 가구를 모두 실었다며 주배정에게 보고했다.

    “사장님. 전부 실었습니다.”

    “그래? 가구에 흠집 안 나게 잘 다뤘겠지?”

    주배정의 말에 직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당연하죠. 그렇게 이태리 명품 가구라고 신신당부하셨잖습니까?”

    “그래, 수고했네. 출발하지.”

    인천 서구 배정산업의 공장에 도착한 주배정은 일일이 가구 내리는 것까지 관리 감독했다.

    “어이! 조심해야지.”

    “죄송합니다.”

    “이태리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수제작으로 만든 가구라고 했잖아!”

    주배정이 얼굴을 붉혔고 직원들은 진땀을 흘렸다. 가구를 모두 내린 주배정이 그제야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후. 괜시리 비싼 가구를 매입하는 바람에 엄청 신경 쓰이네···.”

    그는 미간을 와락 좁히며 낡은 수첩을 뒤적였다. 한참을 뒤적이던 주배정은 무엇인가 못마땅한 얼굴로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 톡. 톡.

    “정말, 전화해야 하나?”

    그가 펼친 수첩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와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덕기봉제공장] - 똘아이. 02-28X-XXXX.

    한참을 망설이던 주배정은 입맛을 다시더니 전화기를 들었다.

    - 드르르륵!

    수화기 너머 사람 목소리가 아닌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리고 잠시 뒤 목청껏 소리치는 갈라진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오랜만이야. 나 주배정이야.”

    “뭐라고?”

    “주.배.정이라고!”

    “아아, 주 사장? 웬일이야 전화를 다 하고? 죽었다는 소식인지 알았네.”

    “뭐? 이 새끼가.”

    조덕기 사장은 동대문에서 제법 규모가 있는 봉제공장을 운영 중이었다. 주배정과는 제법 오래도록 친분을 쌓았는지 대화에 격의가 없었다. 물론, 격의가 없다는 것이지 친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둘의 관계는 조덕기의 퉁명스러운 말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왜? 다신 거래 안 한다더니?”

    “비싸니까 단가 조정 좀 하자니까 칼처럼 자른 게 누군데 그래?”

    “난 뭐 땅 파서 장사하는 줄 알아? 그래서. 싼데 가서 품질은 마음에 들어?”

    “크흐으음!”

    주배정이 목청을 가다듬자, 조덕기가 미친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럴 줄 알았다. 쫌팽이 새끼.”

    “야이! 우리가 거래한 게 얼만데 좀 깎아주면 서로 좋을 것을!”

    “아, 됐어. 지나간 얘기 해서 어따 쓴다고···. 그래서 왜 전화한 건데?”

    “소개해줄 사람이 있어.”

    “소개? 주배정이가 나한테 사람을 소개한다고? 그럼 이따 오든가!”

    - 뚝! 뚜뚜.

    조덕기는 자신의 할 말을 다 했는지 전화를 거칠게 끊었고 주배정은 수화기를 노려봤다. 주배정도 한 성깔 한다고는 했지만, 조덕기의 꼬장꼬장함은 또 다른 차원이었다. 주배정은 얼굴을 붉히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박주혁의 부탁만 아니었어도 전화할 일이 없었을 텐데···. 전화기를 잠시 노려보던 주배정이 미간을 좁히더니 버럭 소리쳤다.

    “에잇! 그놈의 성질머리하곤.”

    #

    박주혁은 차동진 전무와 DD 자동차 디자인 센터를 방문했다.

    한창 개발 중인 고급승용차의 스케치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다. 박주혁은 스케치 된 종이를 슬쩍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E클래스 섀시와 엔진으로 고급차 시장에 안착은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투자한 만큼 성과를 얻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 프로젝트로 인해 DD 자동차는 3조 이상의 적자를 기록하고 있는 만큼,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바로 프로젝트를 드랍시키는 것이었다.

    박주혁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차동진 전무가 디자인 센터장을 박주혁에게 소개했다.

    “안철구 소장입니다.”

    “DD 자동차의 얼굴을 만드시는 분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과찬이십니다. 헌데 여긴 어쩐일로?”

    그동안 경영진이 얼마나 디자인에 관심이 없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얼핏 본 스케치도 구형 E클래스를 살짝 리터치한 수준이었고 말이다.

    “CEO로서 당연히 디자인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 아닐까요? 제가 못 올 곳에 온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만···”

    박주혁이 언짢다는 분위기를 풍기자, 안철구 소장이 흠칫 놀라며, 자신의 집무실로 박주혁을 안내했다. 박주혁은 상석에 앉자마자 안철구 소장에게 말했다.

    “디자인 센터의 작품들을 보고 싶군요.”

    “예? 너무 급작스럽게 오시는 바람에 준비된 것이 없습니다.”

    안철구 소장의 소심한 태도에 박주혁이 미간을 와락 좁혔고, 차동진 전무도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는 안철구 소장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사장님께 그렇게 말하면 어쩌자는 겁니까?”

    “아니. 사실대로 얘기해야 하는 겁니다. 준비된 것이 없습니다.”

    “여태까지 모아놓은 포트폴리오라도 보여드리세요.”

    “흐음.”

    차동진 전무의 추궁에 안철구 소장은 못이기는 척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꺼내왔다. 박주혁은 그가 건네는 서류철을 받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열정 가득한 파인랭스 식구들이 그립네···.’

    해고한 임원들과 디자인 센터장의 태도를 보아하니, 왜 DD 자동차가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박주혁은 페이지를 넘기다 말고 서류철을 거칠게 덮으며 말했다.

    “안 소장님의 디자인 철학은 뭡니까?”

    “예?”

    “DD 자동차 디자인의 맥락이 있을 것 아닙니까? 어떤 것을 기준으로 삼고 계시죠?”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디자인 철학 따위는 없고, 막무가내로 디자인한다는 건가···. 한심하군.’

    디자인 센터의 소장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디자인 기조가 없다는 소리에 박주혁은 기가 막혔다. 그는 미간을 좁히며 차동진 전무에게 시선을 옮겼다.

    “안 되겠군요. 차 전무님.”

    “예. 사장님.”

    “사내 자동차 디자인 공모전을 개최합시다.”

    “디자인 공모전이요?”

    박주혁은 서류철에서 구형 E클래스를 리터치한 스케치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런 리터치 디자인이 아닌 DD 자동차만의 디자인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칼스타에 대한 챠넬 수석 디자이너의 반응 기억하십니까?”

    박주혁이 차동진 전무를 바라보며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고 안철구 소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칼스타면···. 그 골동품 말씀이십니까?”

    안철구 소장의 단어 선택에서부터 럴커펠트와 차별화됐다. 패션과 산업디자인의 장르가 아무리 다르다고 할지라도 수준 차이에서 오는 안목은 어쩔 수 없었다. 박주혁은 안철구 소장을 쳐다보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골동품이라···. 럴커펠트 씨는 클래식하다며 극찬하셨는데 말입니다.”

    “예? 사장님. 말씀이 좀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패션과 산업디자인은 엄연히 다릅니다. 아무리 럴커펠트 씨가 패션계의 거장이라지만, 산업디자인에서는 제가 한 수 위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이번 공모전에서 그 실력을 뽐내주십시오.”

    박주혁은 차동진 전무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번 디자인 공모전에서 우승한 자를 디자인 센터장으로 임명하겠습니다.”

    “예?”

    차동진 전무와 안철구 소장이 모두 놀라 동시에 소리쳤다.

    “디자인 센터장이라고 꼭 경험 많은 사람이 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저는 실력 위주로 DD 자동차가 재편되길 바랍니다.”

    “크윽.”

    안철구 소장이 낮게 신음하는 사이 차동진 전무는 수첩을 꺼내 열심히 메모하기 바빴다.

    “주제는 미래의 전기 자동차로 합시다.”

    “저, 전기 자동차요. 알겠습니다.”

    차동진 상무가 박주혁의 말에 답했고, 안철구 소장은 멍한 눈으로 박주혁을 바라봤다.

    “안 소장님. 할 말이 있으신가요?”

    박주혁의 물음에 안철구 소장이 눈을 번뜩이며 날을 세웠다.

    “지금, 절 해고하시는 겁니까?”

    “조금 전 제게 보여주신 자신감은 어디 가신 겁니까? 우승하셔서 자리를 유지하시면 되는 것 아닌가요?”

    “이미 우승자를 내정해 놓고 실시하는 이런 공모전을 제가 왜 받아들여야 합니까?”

    “···”

    우승자를 내정해 놓았다니, 안철구 소장이 나가도 너무 멀리 나갔다. 차동진 전무도 어안이 벙벙하여 안철구 소장을 빤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안 소장님. 지금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장님께서 디자인 센터를 오늘 처음 방문하신 건데 내정자를 어떻게 골라놨다는 겁니까?”

    “우승 상품이 디자인 센터장이라는 것이 말이 된다고 보십니까?”

    안철구 소장이 버럭하며 박주혁을 향해 소리치자, 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자신 없으시면 짐 싸세요. 구질구질하게 굴지 말고.”

    “뭐, 뭐라고요?”

    “명색이 DD 자동차 디자인 센터장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디자인 철학도 없으면서 무슨 디자인을 하겠다는 겁니까? 그러니까 이런 리터치 디자인이 나오는 것 아닙니까?”

    박주혁은 테이블에 놓여있는 안철구 소장의 콘셉트 디자인을 밀쳤다. 그리고 목소리를 더욱 낮게 깔며 말했다.

    “3조입니다. 당신이 구형 E클래스 디자인을 리터치한 이 자동차 개발에만 3조 원이 투입되었다 이 말입니다.”

    “크으윽.”

    안철구 소장은 낮게 신음하며 고개를 떨궜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차 전무님은 공모전 차질없게 진행시키세요. 당분간 디자인 센터장은 공석으로 두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안철구 소장은 멀어져가는 박주혁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이번 달 카드값 어쩌지···?”

    #

    박주혁이 사장실로 돌아오고 얼마 뒤 주배정 사장이 배정산업의 가구와 함께 들어왔다.

    “박 사장. 위치는 어디에 둘까?”

    “기존의 가구 배치대로 하시죠. 딱히 불편하진 않았거든요.”

    “알겠네.”

    배정산업 직원들이 가구를 설치하는 동안 주배정은 박주혁과 차를 한잔했다.

    “오늘 동대문 갈 수 있나?”

    “예. 가야죠. 챠넬의 부탁도 있고요.”

    “역시 이미테이션 공방을 찾아 고발할 생각인가 보지?”

    “아니요. 챠넬 아시아 공방을 만들기 위해 조사를 하는 겁니다.”

    “아시아 공방? 그럼 챠넬의 제품을 우리나라에서 만들겠다는 건가?”

    박주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주배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소개할 친구가 아주 적절하겠군.”

    “혹시 이미테이션 공방을 찾으셨나요?”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자신이 장인이라고 생각하는 봉제공장 사장은 알지.”

    서로 죽일 듯 으르렁거렸지만, 주배정이 조덕기 사장의 실력은 인정하고 있었다.

    “직원들이 설치 잘 할테니 우린 먼저 출발하는 것이 어떻겠나?”

    “그러면 저야 좋죠.”

    박주혁은 고윤희에게 사장실 가구설치 일을 일임하고 주배정과 함께 동대문으로 향했다.

    덕기봉제공장이라고 쓰인 낡은 간판 앞에 주배정이 멈추며 말했다.

    “박 사장. 여기 사장이 좀 꼬장꼬장하거든? 수틀리면 쳐다도 안 보는 수가 많으니까. 내가 먼저 얘기를 잘해볼게.”

    평소 시원시원한 주배정 사장의 성격과는 달리 오늘은 표정이 굳어있었다. 그런 주배정의 모습이 의아했지만, 박주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배정의 뒤를 따랐다.

    돋보기안경을 쓴 채 천천히 재봉틀을 돌리던 조덕기는 공장 입구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버럭 소리쳤다.

    “누구야!”

    “날세. 주배정.”

    “빌어먹을.”

    조덕기는 안경을 거칠게 벗어 던지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주배정과 박주혁에게 이리 오라며 손짓했다.

    “한창 바쁠 때 왔네. 하여간 주 사장 눈치는···.”

    “아니 오라며? 그럼 몇 시라고 지정을 하든가 하지 그랬어?”

    “눈치껏 안 올 줄 알았지!”

    “뭐? 이런 빌어먹을 녀석이!”

    욕만 안 할 뿐이지 싸우는 것 같았다. 박주혁은 불안감을 느끼며 조덕기와 주배정의 대화를 지켜봤다.

    “그래서 소개할 사람이라는 게 이 친군가?”

    “안녕하십니까? DD 자동차 박주혁 대표입니다.”

    조덕기는 박주혁과 악수하며 툴툴댔다.

    “어디서 또 재벌2세를 알았데? 난 이런 낙하산 타는 사람이랑은 같이 일 못 해.”

    그 말에 주배정이 버럭 소리쳤다.

    “전후 사정도 모르면서 그런 선입견을 갖으면 쓰나? 하, 아직도 그 몹쓸 버릇을 못 고쳤어?”

    “주 가야. 아직도 모르나? 성격 변하면 죽는 거랬어.”

    주배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박주혁을 정식으로 소개했다. 그러자 조덕기의 눈빛에서 호기심이 일어났다.

    “그러니까. 이 젊은 친구가 DD 그룹의 사람이 아니라고?”

    “그렇데도. 파인랭스라는 번역회사 사장이었는데···.”

    주배정이 다시 한번 설명하려 하자, 조덕기가 손을 들어 주배정의 입을 막았다.

    “그건 아까 말했잖아. 그만해도 돼. 그나저나 대단한 친구네.”

    조덕기는 종이컵에 있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크으. 그래서 DD 자동차가 이 봉제공장까진 무슨 일이신가?”

    “DD 자동차보다는 챠넬의 부탁으로 왔습니다.”

    박주혁의 말에 조덕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챠넬···?”

    조덕기가 뭔가 켕기는 것이 있는지 말끝을 흐렸고 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는 잠시 헛기침을 하더니 버럭 소리쳤다.

    “우리랑은 관계없어!”

    그의 말에 주배정도 함께 버럭버럭했다.

    “무슨 소리야! 뭐가 관계가 없다는 거야. 무슨 말을 끝까지 듣고 해야지. 이놈아!”

    “아, 몰라! 챠넬 모조품 만드는 것은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성격은 지랄 같았지만, 예상보다 순진한 사람이었다. 박주혁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미테이션 만드셨다고 뭐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챠넬에서 그 이미테이션을 만든 공방을 찾고 있습니다.”

    “아, 글쎄 모른다고!”

    조덕기는 얼굴까지 붉혀가며 소리쳤지만, 박주혁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조 사장님 챠넬에서는 고발이 아닌 해당 이미테이션을 만든 공방과 협업을 원하고 있습니다. 제가 다리를 놔드릴 수 있습니다.”

    “뭐, 뭐라?”

    조덕기 사장이 토끼 눈을 뜰 때 박주혁이 럴커펠트가 증거품으로 남기고 간 숄더백을 가방에서 꺼내 내밀었다.

    “이 가방을 만든 곳을 찾고 있습니다.”

    가방을 본 조덕기가 흠칫 놀라더니 상체를 뒤로 빼며 숄더백을 밀쳐냈다.

    “아, 몰라. 몰라. 이런 건 어디서 가져왔어?”

    그의 얼굴이 붉어지고 맥박이 빨라지는 것이 도둑이 제 발 저린 느낌이었다. 박주혁은 피식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조 사장님 당신이군요. 럴커펠트에게 극찬을 받았던 장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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