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67화 (67/136)

067화 새 술은 새 부대에.

그날 저녁 7시 무렵. 박주혁은 메르헨과 함께 럴커펠트를 배웅하기 위해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은 럴커펠트를 취재하기 위한 기자들로 북적였다.

- 촤라락!

“럴커펠트씨 여기 좀 봐주세요!”

“한국에 오신 이유가 정말 DD 자동차와 협약 때문입니까?”

“박주혁씨와는 어떤 관계십니까?”

수많은 질문이 쏟아졌지만, 럴커펠트는 가볍게 기자들을 무시했다. 그는 미소 지으며 엘레강스하게 손을 흔들 뿐이었다. 럴커펠트는 출국장에 와서야 박주혁과 메르헨을 돌아보며 말했다.

“마이 러브. 미스터 박, 곧 다시 봅시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아, 그리고 선물해주신 옷 잘 간직하겠습니다.”

“간직이라뇨. 자주 입어서 제 디자인을 뽐내주세요.”

“노력해보겠습니다.”

박주혁의 솔직담백한 말이 흡족했는지 럴커펠트는 피식 웃었다.

“메르헨 양은 언제 복귀하시나요?”

“DD 자동차 잘 세팅되면 귀국해야죠.”

“미스터 박에게 달렸군요?”

럴커펠트의 말에 메르헨이 윙크하며 말했다.

“저흰 운명 공동체라서요.”

“으음? 상당히 의미심장한 말인데?”

럴커펠트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메르헨을 쳐다봤다. 메르헨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더니 미소 지었다.

“그래요. 모두 잘 돼야 다음에도 웃으며 만나지. 화이팅합시다!”

럴커펠트는 그 말을 남기고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럴커펠트와 작별하고, 몸을 돌리자, 이번엔 카메라 플래쉬가 박주혁을 향해 연달아 터졌다.

“박주혁 사장님. 챠넬과 협업하게 된 계기가 무엇입니까?”

“럴커펠트 씨와는 무슨 관계세요?”

“벤타는 무슨 생각으로 DD 자동차를 인수한 겁니까!”

쏟아지는 질문에 박주혁은 브드럽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박주혁의 팔짱을 낀 채 포즈를 잡던 메르헨이 태연하게 응대하는 박주혁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럴커펠트가 그랬던 것처럼, 박주혁은 걸어가며 미소와 함께 손을 천천히 흔들었다.

“미스터 박. 그새 배웠군요?”

“럴커펠트씨의 대응이 현명하다고 판단한 것뿐입니다.”

“하하. 맞아요. 괜히 언론과 인터뷰하다가 말실수라도 하면 큰일이죠. 앞으로도 그렇게 응대하세요.”

공항을 빠져나가는 메르헨은 여전히 박주혁과 팔짱을 낀 채였다.

#

“한국은 원래 이렇게 밤낮없이 사람들이 활동하나요?”

분주한 밤거리가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던 메르헨이 물었다.

독일만 하더라도 밤 8시가 되면 시내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아 쓸쓸한 거리가 되었다. 밤 장사하는 곳은 논외로 치더라도, 서울 시내는 모든 가게가 불을 밝힌 채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밤 되면 다 문을 닫죠?”

“클럽이나, 술집을 제외하면 그렇죠. 매번 올때 마다 느끼지만, 한국 사람들은 참 열정적인 것 같아요.”

메르헨은 지나치는 사람들을 신기한 듯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제가 한국 사람들을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고요.”

“감사한 얘기군요.”

그러다 문뜩, 메르헨이 두어 발 앞으로가 박주혁을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오늘은 어떤 퐌타스틱한 것을 맛보여주실 건가요?”

“하지 마세요. 마치 럴커펠트씨가 함께 있는 것만 같단 말입니다.”

“하하하. 그···. 쏘맥? 맛있었어요.”

“그럼 소맥과 어울리는 것을 먹어야겠군요···.”

박주혁이 잠시 고민하더니, 메르헨에게 물었다.

“로우 피쉬 드시나요?”

“로우 피쉬? 아아. 사시미?”

메르헨이 해맑게 말했는데 박주혁이 다급히 그녀의 곁에 다가가 속삭였다.

“한국에서 일본말을 쓰면 상당히 불쾌해하니까 조심하세요.”

“사시미가 일본말이었어요?”

박주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메르헨이 얼굴을 붉히며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박주혁과 메르헨은 신촌 뒷골목에 있는 한국수산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방 있나요? 외국 손님이 계셔서요.”

“잠시만요.”

점원은 무전기로 누군가와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 말했다.

“마침, 자리가 나왔네요. 들어가시죠.”

박주혁과 메르헨이 가게로 들어서자, 점원은 그들을 앞에 두고 무전기에 말했다.

“룸 7번. 룸 7번! 커플 한쌍!”

커플이라는 말에 박주혁이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메르헨은 뭐가 좋은지 피식피식 웃었다.

“방금 커플이라고 했죠?”

“네.”

“재미있네요.”

메르헨은 지금 이 상황이 재미있는지 쿡쿡 웃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손님. 주문은 뭐로 하시겠습니까?”

“지금은 민어가 제철이죠?”

박주혁의 물음에 점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민어 대자로 두툼하게 썰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술은···?”

“소주 1병 맥주 2병.”

점원이 주문을 받고 나가고 얼마 뒤 다양한 곁들이 안주들이 들어왔다. 그중 특히 메르헨의 눈길을 끈 것은 산낙지 탕탕이였다.

“오, 마이 갓! 이, 이게 뭐예요?”

메르헨은 방석에서 엉덩이를 들썩이며 기겁했다. 그녀의 반응을 보며 피식 웃던 박주혁은 노른자를 풀어 산낙지 탕탕이를 뒤적인 후 접시에 덜어 메르헨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미간을 잔뜩 좁힌 채 꼬물거리는 낙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게 별미랍니다.”

박주혁이 산낙지를 입에 넣고 오물거리자, 메르헨이 상체를 뒤로 빼며 인상을 구겼다. 그를 동물 취급하듯 바라보던 메르헨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산낙지를 어설픈 젓가락질로 쿡쿡 쑤셨다.

- 꼬물꼬물.

“오, 노.”

징그러워하면서도 메르헨의 얼굴에 장난기가 돌았다. 그녀는 산낙지를 쿡쿡 찔러대더니 점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이거 문어예요?”

“낙지라고···. 문어의 종류긴 하죠. 쫄깃하면서 부드러운 식감이 일품입니다. 죽어가는 소에게 먹이면 소가 벌떡 일어날 정도로 몸에 좋은 음식입니다.”

“리얼리?”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메르헨은 산낙지를 집어 들려 했다. 하지만, 빨판으로 접시에 붙어 있던 산낙지의 다리는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와우! 이 녀석 힘 좀 봐요. 접시가 들리네요.”

“그러니까 스테미나 음식이라는 겁니다.”

“···”

메르헨은 젓가락을 빙빙 돌려 산낙지를 접시에서 뜯어낸 후 초장에 살짝 찍었다. 그러자 산낙지가 고춧가루의 통증으로 인해 더욱 미친 듯이 꼬물거렸다.

“오···. 노우.”

산낙지가 불쌍하다는 듯 쳐다보던 메르헨이 눈을 질끈 감고 산낙지를 입에 넣었다.

- 오독오독.

오만상을 찌푸리던 메르헨의 표정은 점차 편안해지더니 눈을 번쩍 떴다.

“어메이징.”

산낙지의 매력에 빠져버린 메르헨을 보며 박주혁은 소맥을 주조한 후 건넸다.

“건배!”

“치얼스!”

뒤이어 나온 두툼한 민어회에 메르헨은 다시 한번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무슨 물고긴데 고기가 이렇게 두껍나요?”

“민어라고 엄청 큰 물고기입니다. 이 시기에 먹어야 제맛이죠.”

“미스터 박. 그런 정보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거예요? 한국 사람은 다 그런가요?”

“으음.”

박주혁은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머리를 잠시 긁적이더니 답했다.

“한국 사람은 미식가들이라, 다들 알 겁니다.”

메르헨은 상추에 도톰한 민어를 올리고 초고추장과 쌈장 그리고 작은 마늘 조각을 올려 쌈 싸 먹었다. 한국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식성이었지만, 박주혁은 그런 그녀를 걱정된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마늘 매울 텐데···.”

박주혁이 먹는 방식을 흉내 내고 있는 메르헨이 걱정스러웠다. 아니나 다를까 생마늘을 먹은 메르헨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오 노우! 핫. 쏘 핫!”

호들갑을 떠는 메르헨이 귀여웠는지 박주혁이 피식 웃으며 소맥을 들며 말했다.

“그럴 땐 마셔요.”

소맥을 벌컥 마신 메르헨이 조금 진정되는지 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마늘 진짜 매운데···. 또 먹고 싶어요. 왜죠?”

“매운맛은 자꾸 당기는 법이죠.”

이해할 수 없는 박주혁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린 메르헨은 다시 마늘을 넣고 쌈 싸 먹었다. 그리고 소맥을 들이켰다.

“캬아. 정말 이 술은···. 그뤠잇.”

어느새 한국 사람처럼 변한 메르헨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메르헨, 다음에는 바닷가로 가서 먹어요. 바닷소리를 들으며 먹는 회는 또 다르죠.”

“정말요? 기대되는군요.”

술기운 때문에 불어진 메르헨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박주혁을 바라봤다.

“약속해요.”

박주혁은 메르헨과 새끼 손가락을 걸었다.

“네. 약속하죠.”

#

다음 날 아침.

아침 일찍부터 DD 자동차에 서울사무소에 도착한 주배정은 고윤희 비서의 안내에 따라 사장실에서 가구의 상태를 확인하고 사장실을 실측하며 중얼거렸다.

“DD 자동차 어렵다는 소리는 듣긴 했는데 사장실에 있는 이태리 수입 가구까지 팔아야 할 지경인가? 쯧.”

DD 자동차가 한심하다는 듯 투덜거릴 때, 고윤희가 사장실로 들어와 말했다.

“사장님 오셨습니다.”

고윤희가 주배정을 배려해 미리 언질을 준 것이었다. 주배정은 고윤희의 뒤편에서 걸어들어오는 누군가의 인영을 확인하고 상체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배정산업의 주배정 대표입니다.”

“주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익숙한 목소리에 주배정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음? 아는 목소린데?’

그는 천천히 상체를 들며 손을 내밀고 있는 DD 자동차 사장의 얼굴을 확인하고 펄쩍 뛰었다.

“어억!”

“뭘 그리 놀라십니까?”

“너, 넌···!”

너무 놀라 기겁하는 주배정을 향해 웃으며 박주혁은 고윤희에게 커피 2잔을 부탁했다.

“네, 사장님.”

커피 잔을 든 주배정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박 사장! 어, 어떻게 된 거야?”

“그간, 많은 일이 있었죠.”

박주혁이 그간에 있었던 얘기를 전하자, 커피가 사레들렸는지 주배정이 콜록거렸다.

“그러니까, 벤타의 부사장이 자네를 DD 자동차의 CEO로 임명했다?”

“그렇습니다.”

“와···. 그리고 SB 전지와 전기차 개발을 위해 업무협약을 체결했고?”

주배정의 말에 박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배정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커피잔을 입에 가져갔다.

“어휴. 믿을 수 없는 얘기구먼.”

“네. 저도 아직 실감이 나질 않네요.”

“뭐 좋다 이거야. 그런데 왜 이 고급진 가구들을 왜 처분하려는 거야?”

“본보기를 보이려는 거죠.”

“본보기라···. 그렇군.”

주배정은 박주혁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구라는 것이 살 때는 고가지만, 처분할 때는 헐값이야 괜찮겠나?”

“네. 이 일로 임원들에게 CEO의 가치관을 알릴 수 있다면 얻는 게 더 많을 겁니다.”

“박 사장. 내가 익히 자네의 됨됨이를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군. 독한 사람 같으니···.”

주배정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투덜거리듯 말했다. 배정산업의 직원들이 가구를 하나둘 빼낼 때 박주혁이 주배정에게 넌지시 물었다.

“사장님. 뭐하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가?”

“동대문 쪽에 이미테이션을 만드는 공방이 있는 것 같던데···. 혹시 아시는 분이 계신가 하고요?”

“이미테이션 공방이라···.”

주배정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이미테이션 공방은 모르겠고, 동대문 쪽에 미싱의 대가들이 있는 곳은 알지.”

“그렇군요. 소개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안될 게 뭔가? 우리 더블백의 원사도 그쪽에서 작업을 하거든. 마침 오후에 방문하기로 했는데 어때? 시간 되면 같이 가 보겠나?”

“그러면 더 좋겠군요.”

박주혁은 환하게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미테이션 공방이 챠넬 외주 공방으로 바뀌면 우리나라의 위상이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DD 자동차의 내장재를 생산하는 곳이 그 공방이라면···.’

대내외적인 DD 자동차의 이미지는 명품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박주혁이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릴 때 주배정이 자신의 수첩을 펼쳐 확인하더니 말했다.

“그럼, 오후에 사무실 가구를 들인 후 출발하는 것으로 할까?”

“좋습니다.”

휑해진 사장실을 떠나던 주배정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박주혁에게 말했다.

“참, 날 이렇게 챙겨줘서 고맙네.”

“챙기다뇨? 배정산업의 더블백 품질을 믿고 발주한 겁니다.”

“하하하! 더블백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만들긴 했지.”

주배정이 웃으며 박주혁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나도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자네의 힘이 되어 주지.”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럼 이따 보자고.”

주배정이 떠나고 얼마 뒤, 차동진 전무가 결재판을 들고 들어왔다. 그는 휑한 사장실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사, 사장님. 정말 가구들 정리하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사치품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일에 집중할 수 없어서 말이죠.”

“허.”

차동진은 짧은 탄식과 함께 결재판을 박주혁에게 내밀었다.

“뭔가요?”

“칼스타 제조와 관련된 기안지입니다.”

“아. 1호 차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박주혁인 기안지를 찬찬히 훑어보더니 서명하여 차동진 전무에게 건네며 말했다.

“DD 자동차의 비전과 체질 개선에 대해 임원들과 전체 회의를 갖고 싶군요.”

“필요한 일이죠.”

“그 전에 차 전무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박주혁의 말에 차동진 전무가 눈을 빛내며 박주혁을 쳐다봤다.

박주혁의 경영전략과 비전을 들으며 차동진의 얼굴이 점차 경악으로 점철되었다.

“사, 사장님. 저, 전기차라니요?”

“시대는 빠르게 변할 겁니다. 그리고 DD 자동차는 시대의 변화를 이끄는 선구자가 돼야 합니다.”

“허.”

허황된 비전 같아 보였지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법이다. 박주혁이라는 새로운 CEO에 맞춰 DD 자동차도 변화의 변곡점을 맞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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