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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66화 (66/136)
  • 066화 추진하세요. 일본에 지면 되겠습니까?

    한태현 기자가 박주혁에 대한 정보를 캐볼 틈도 없이 시간은 흘러갔다. 정확히 5분이 경과하자 럴커펠트는 시계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타임 오버.”

    야속했지만, 단독 인터뷰를 딴 것만으로도 한태현 기자에게는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한태현 기자가 쫓기듯 사장실을 나간 후 박주혁이 굳은 얼굴로 럴커펠트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정말로 DD 자동차와 협업 할 수 있겠습니까?”

    “와이 낫? 하지만, 아까도 얘기했듯이 내게 영감을 주지 못한다면 글쎄···. 미스터 박이라면 당장이라도 하겠지만, 차는 또 다르잖아요?”

    “그렇군요. 혹시 모르니 DD 자동차를 한번 보시겠어요?”

    “마이 뮤즈의 부탁이라면!”

    럴커펠트가 흔쾌히 답했지만,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이 당시 DD 자동차의 주력은 투박하고 남성적인 SUV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시도는 해봐야 하지 않겠나?

    ‘또 모른다. 럴커펠트의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자동차가 있을지도···.’

    럴커펠트와 차 한잔을 나누는 사이, 차동진 전무가 헐레벌떡 두툼한 문서와 함께 사장실로 들어왔다.

    “사장님! 말씀하신 회사 전체 자동차 카다로그 입니다.”

    “컨셉트 카까지 전부 넣은 건가요?”

    “예. 그렇습니다.”

    박주혁은 묵직한 문서를 럴커펠트에게 넘기며 말했다.

    “어디 한번 영감을 주는 차가 있는지 살펴보시죠.”

    “오. 그럼 어디 볼까요?”

    처음 몇 페이지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넘겼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 미소가 점점 자취를 감췄다.

    ‘없는 것인가?’

    박주혁이 럴커펠트의 눈치를 살피는 사이, 럴커펠트가 책을 슬그머니 밀며 말했다.

    “음. 미스터 박. DD 자동차는 SUV와 트럭 위주인가 봅니다. 물쏘? 라는 차가 굉장히 남성적이고 인상깊긴 하지만, 챠넬과 협력할 요소는 없어 보이네요. 오프로드 차와 챠넬이라... 뭔가 언밸러싱하지 않아요?”

    “확실히 그렇겠죠.”

    “뭔가 펜시하고, 강렬한 느낌을 주는 차가 필요한데···.”

    럴커펠트는 말끝을 흐리더니 팔짱을 끼고 쇼파에 등을 기댔다. 박주혁은 럴커펠트가 보던 문서를 넘겨받아 주르륵 훑어봤다. 역시 그의 예상대로 투박한 오프로드 차와 고급 승용차의 컨셉트가 눈길을 끌긴 했지만, 챠넬과 어울린다고는 할 수 없었다.

    ‘좀 차별화되고 눈에 확 띄는···. 차가 없을까?’

    박주혁이 턱을 쓸며 고민할 찰나, DD 자동차에게 스포츠카를 생산할 수 있다는 보도문을 본 기억이 스쳐갔다. 박주혁은 차동진 전무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차 전무님. 스포츠카는 이 서류에 없는 것 같습니다.”

    “스포츠카요? DD 자동차에 스포츠카는 없습니다.”

    “아닐 텐데요. 80년대에 인수했던 블랙팬서의 스포츠카가 하나 있지 않습니까?”

    박주혁은 미간을 좁히며 차동진 전무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머뭇거리자, 박주혁이 목소리를 높이며 물었다.

    “3월에 스포츠카의 생산을 재개한다는 보도문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아닙니까?”

    “예? 아, 설마···. 칼스타 말씀이신가요?”

    “뭐 그런 이름이었던것 같군요.”

    [스포츠카 ‘칼스타’ 생산 재개할 수도 있다/ 95년 3월.]

    분명 이런 제목의 보도문이었던 것 같다.

    차동진 전무는 살짝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사장님. 칼스타는 수작업 키트 조립 방식이라, 현 조립공정과는 맞지 않아 생산계획이 백지화되었습니다.”

    “차 전무.”

    박주혁이 목소리를 낮게 깔며, 차동진 전무를 쳐다봤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차동진 전무가 몸을 살짝 움찔거렸다.

    “제가 분명 DD 자동차의 모든 제품 사진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아니었나요?”

    박주혁의 차가운 말투에 차동진 전무가 재빨리 큰소리로 답했다.

    “죄송합니다! 지금 당장 가져오겠습니다.”

    차동진 전무가 상체를 90도로 숙여 인사하곤 서둘러 사장실을 빠져나가자, 럴커펠트가 씩 웃으며 말했다.

    “미스터 박. 카리스마도 있군요.”

    “누락된 차량들이 있어 가져오라고 한 것뿐입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내주시죠.”

    “마이 뮤즈인 미스터 박을 위해서라면야. 당연히.”

    차동진 전무가 숨을 헐떡이며 사장실로 들어와 파일철을 내밀었다. 박주혁은 이번에는 바로 럴커펠트에게 넘기지 않고, 먼저 살펴봤다.

    ‘칼스타··· 칼스타. 여기 있군.’

    칼스타는 1930년대를 대표하는 전통 영국식 2인승 로드스터를 오마쥬하여 만든 차량이었다. 1970년 후반 제작된 칼스타는 마차를 연상케 하는 유려한 곡선의 휀더, 길죽한 프런트 오버행 그리고 외부로 돌출된 동그란 헤드라이트가 특징이다. 마치, 박물관에나 볼 수 있는 레트로 감성이 물씬 풍기는 그런 자동차였다. 칼스타의 사진을 확인한 박주혁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럴커펠트의 마음을 사로잡을지도 모르겠는데?’

    박주혁은 럴커펠트가 잘 볼 수 있도록 파일을 돌려 내밀었다. 그리고 초조한 마음으로 럴커펠트의 반응을 기다렸다. 럴커펠트는 파일철을 받아들더니 선글라스를 치켜올리며 한 톤 올라간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이게 정말 지금 제작이 되는 차량입니까?”

    박주혁이 차동진 전무를 쳐다보자, 그는 어눌한 영어로 답했다.

    “예.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차량이라 제작이 가능하지만, 제작 단가가 높아 생산되지 않는 차량입니다.”

    “언빌리버블! 이런 클롸식한 차량이 빛도 못 본다니!”

    럴커펠트는 칼스타의 사진 자료를 꼼꼼히 살피더니 박주혁을 보며 말했다.

    “미스터 박. 챠넬과 콜라보를 떠나, 이 차 제가 구매할 수 있게 하나 생산해 주면 안되겠습니까?”

    럴커펠트의 말에 박주혁은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콜라보를 넘어 구매까지 해준다면 생산 못할 이유가 없지.’

    박주혁이 얼이 빠져있는 차동진 전무에게 힘주어 말했다.

    “차 전무, 칼스타를 챠넬의 수석 디자이너분께 선물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 아, 예. 그럼요. 할 수 있습니다.”

    선물이라는 단어에 럴커펠트가 이를 드러내며 웃더니 말했다.

    “미스터 박. 그렇다면 챠넬이 칼스타의 내장재와 마크의 디자인 등을 손보는 콜라보를 진행하면 어떻겠어요?”

    “환영이지요. 기왕이면 DD 자동차의 로고도 새로 만들어주시면 좋겠는데요.”

    박주혁은 내친김에 사명과 로고까지 변경하여 새로운 회사로 탈바꿈할 생각이었다. 럴커펠트가 직접 디자인한 로고라는 사실만으로도 이슈몰이는 충분할 터. 박주혁의 제안에 럴커펠트는 턱을 엄지와 검지로 꼬집꼬집하더니 말했다.

    “칼스타를 선물로 준다는데 못 해준다고 할 수도 없고···.”

    럴커펠트가 망설이자, 박주혁이 뭔가 결심한듯 눈을 빛내더니 말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한 번이 아니라 시간이 되는한 당신의 무대에 서겠습니다.”

    찜찜한 결정이 아닐 수 없었지만, 럴커펠트가 정말로 박주혁을 뮤즈로 생각한다면 마음에 들어할 조건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적중했다.

    “리얼리?”

    럴커펠트는 활짝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박주혁은 마지못해 그의 손을 잡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결국 나를 팔아서···.’

    수심가득한 박주혁과는 달리 럴커펠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미스터 박. 내가 그랬죠? 당신은 모델을 해야 할 사람이라고···.”

    “놀리지 마십시오.”

    “놀리다니? 나의 눈을 의심하는 겁니까?”

    “그럴리가요. 단지 제가 전문모델이 아니라 그러는 겁니다.”

    “노우노우. 자기는 걷는 것 자체가 퍼펙트하다고. 돈 워리.”

    럴커펠트는 박주혁의 어깨를 두드리며 행복하게 웃었다. 그러다 문득 박주혁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차동진 전무에게 말했다.

    “아까 그 한태현 기자던가요? 아직 얼마 못 갔을 것 같은데···. 특종하나 준다고 오라고 하세요.”

    “예? 아아! 알겠습니다.”

    한태현 기자가 한걸음에 달려와 DD 자동차와 챠넬이 협약하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 찰칵, 찰칵!

    “미스터 박. 멋진 작품을 하나 만들어 봅시다.”

    “럴커펠트씨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도록 명품 자동차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

    [DD 자동차 챠넬과 콜라보 협약을 맺다!]

    [챠넬 수석 디자이너 럴커펠트의 목적은 DD 자동차와 콜라보였다!]

    [벤타가 인수한 DD 자동차 챠넬과 콜라보 협약을 맺었다.]

    [DD 자동차의 주가는 언제까지 오를까?]

    한태현 기자의 보도 이후, 언론에서 DD 자동차와 관련된 뉴스를 마구 쏟아냈다. 그리고 이 기사들은 SB 전지의 이웅렬 사장의 귀에도 들어갔다. 이웅렬 사장은 비서실에 전화를 걸어 김현옥 부장을 불렀다.

    “사장님. 김 부장입니다.”

    “들어오세요.”

    이웅렬 사장은 신문을 보다 내려놓으며 김현옥 부장을 바라봤다.

    “김 부장. DD 자동차에서 리튬이온전지를 개발해달라고 요청했었다지?”

    “그렇습니다. DD 자동차 박주혁 대표가 직접 배터리 연구원과 미팅도 진행했습니다.”

    DD 자동차의 사장이 직접 연구원들과 미팅을 진행했다는 소리에 이웅렬 사장이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박 사장이 직접? 흠. 정말로 적극적인 인물인가 보군.’

    “김 부장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DD 자동차의 요청에 대해서?”

    “개발과 관계없이 사적인 의견이어도 됩니까?”

    “해보세요.”

    김현옥 부장은 이웅렬 사장에게 속에 담아둔 얘기를 쏟아냈다.

    2차 전지의 미래성과 DD 자동차가 그리는 미래에 대해서 여과 없이 말이다.

    “그러니까. 리튬이온전지가 개발되면 휴대성도 올라가고, 출력도 좋다?”

    “그렇습니다. 이미 일본에서는···.”

    김현옥 부장의 추가 설명을 들은 이웅렬 사장이 낮게 신음하더니 생각에 잠겼다.

    ‘으음. 일본에서는 리튬이온전지를 생산하고 있는데···. 우린 아직 니켈카드뮴에 머물러 있단 소리군.’

    “허허.”

    이웅렬 사장은 턱을 쓸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김현옥 부장은 이웅렬 사장이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말을 이어갔다.

    “박 사장의 예견으로 전기 골프카트만 100만대가 예상된다고 합니다. 전기차는 그 이후 개발되겠지만, 리튬이온전지가 필수라고 합니다. SB 전지가 리튬이온전지를 개발한다면, DD 자동차는 물론 새로운 배터리 시장을 선점하는 효과도 있을 겁니다.”

    “으음.”

    이웅렬 사장은 김현옥에게 시선을 살짝 돌린 뒤 다시 낮게 신음했고 김현옥 부장은 자신감을 담아 의견을 피력했다.

    “SB가 안전한 길을 추구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그게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번 리튬이온전지는 SB가 반드시 걸어가야 할 길이라는 생각입니다. 18년 배터리 영업을 해온 제가 느끼기에는 그렇습니다.”

    “김 부장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현재 납축전지 세계 시장 점유율 1위인 우리가 나서야 할 시장인지 확신이 안 서는군요.”

    이웅렬 사장의 말에 김현옥 부장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직할까?’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극성과 삼송에서 리튬이온전지 개발을 위한 원자재 수입을 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으음? 극성과 삼송에서?”

    대기업의 얘기를 들먹이니 이웅렬 사장이 눈빛이 살짝 변했다.

    “최근, 삼송에서 SB 전지 연구개발팀을 스카웃하려 했습니다. 보고 들으셔서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랬지. 극성과 삼송에서 우리 인력을 빼가려 한다기에 의외라고 생각했었는데···. 리튬이온전지 개발을 위해서였다?”

    “그렇습니다. 사장님. 현재 우리는 극성과 삼송보다 한발 앞서 있습니다. 지금 개발을 시작해야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겁니다. 고려해주십시오.”

    김현옥 부장의 비장한 말투에 이웅렬 사장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재계 모임에서 처음 박주혁의 이름이 언급될 때만 해도 졸부가 나타났나 했었다. 그런데 그가 세계적인 자동차 제조회사 벤타의 DD 자동차 인수를 이끌어냈고, 단시간내에 명품 챠넬과의 업무 협약까지 했다. 박주혁은 그렇게 유동성 위기의 DD 자동차를 단숨에 화제의 기업으로 탈바꿈시키고 있었다. 그의 횡보가 알게 모르게 이웅렬에게 상당히 큰 자극제가 되고 있었다.

    ‘으음. 안전한 경영만으론 성장의 한계가 있지. SB도 변화를 꾀할 때가 되긴 했어.’

    이웅열 사장이 미간을 좁히며 고민하더니 김현옥 부장에게 힘주어 말했다.

    “한 번 해봅시다. 현재 일본에서만 생산된다고 했었나요?”

    “그렇습니다.”

    “위험한 시장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일본에게 만큼은 질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이웅렬 사장의 질문에 김현옥 부장이 큰소리로 답했다. 그의 당찬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웅렬 사장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추진하세요.”

    “감사합니다! 사장님.”

    김현옥 부장은 상체를 90도로 숙여 인사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밝은 미소로 재빨리 수화기를 들었다.

    “유 선임님!”

    “김 부장? 뭐 좋은 일 있나 보네. 목소리가 왜 이렇게 밝아?”

    “추진하신답니다!”

    “어? 뭘. 추진해. 갑자기 무슨 소리야?”

    “리튬이온전지요!”

    “뭐···뭐라고? 정말인가? 사장님이 투자하시겠다던가?”

    환호인지 비명인지 모를 외침 후에 김현옥 부장은 박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DD 자동차 박주혁 대표입니다.”

    “박 사장님! 저 SB 전지 김현옥 부장입니다.”

    “김 부장님? 좋은 소식이 있는 것 같습니다?”

    “리튬이온전지 개발 허가 떨어졌습니다!”

    “오! 잘되었군요.”

    박주혁은 전화를 끊고, 씩 웃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SB 전지의 자체 투자로는 부족할 테지. 자본제휴를 맺어야겠군. SB 전지와 우호적인 관계를 다지고 안정적인 리튬이온전지 공급까지 받을 수 있다면 밑지는 장사가 아니다.”

    박주혁은 주먹을 말아쥐며 수화기를 들었다.

    “메르헨?”

    “오, 미스터 박. DD 자동차가 아주 센세이셔널 하더군요? 역시 제가 사람 보는 눈은 조금 있나 봅니다.”

    “회장님께 청이 하나 있습니다.”

    “음. 회장님···? 뭔가 제가 놀랠 일인 것 같군요.”

    박주혁은 DD 자동차의 미래 전략과 방향을 설명한 후 본론을 꺼냈다.

    “SB 전지와 자본제휴를 맺고 싶습니다.”

    “···자본제휴요?”

    확신이 담긴 박주혁의 말에 메르헨이 잠시 할 말을 잃었는지 수화기에서 그녀의 약한 숨소리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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