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64화 (64/136)
  • 064화 세계를 놀래켜보자.

    김현옥 부장과 유성환 선임이 한참 동안 얘기를 주고받더니 심각한 얼굴로 박주혁을 쳐다봤다.

    “박 사장님. DD 자동차가 원하는 바는 잘 알았습니다. 내부 협의를 거쳐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습니다.”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분명 SB 전지에도 나쁜 일은 아닐 겁니다.”

    “예. 기회는 잡는 자의 것이죠. 위에서도 그렇게 생각해야 할 텐데 말이죠···.”

    김현옥 부장은 말끝을 흐렸다.

    SB 그룹의 최고경영자는 공무원 출신으로 상당히 보수적이었다. 좋게 말해서 매우 신중하게 사업확장을 하는 편이라는 뜻이다. 경영진은 실패 확률을 배제하고 안전한 길을 택하려는 것이었지만, 그에 반비례해 조직은 무거워졌다.

    SB 전지가 2차 전지 시장이 무르익은 후, 뒤늦게 뛰어든 것도 경영진의 성향 때문이었다. 상부의 성향을 잘 알기에 김현옥 부장이 말끝을 흐렸던 것이리라.

    김현옥 부장의 자신감 없는 말투에 박주혁 자신도 모르게 눈가가 살짝 찌푸려졌다.

    ‘어쨌든 주사위는 던져졌다.’

    전기차 시장이 활성화되려면 아직 시일이 있기에 SB 전지와 우호적 관계를 맺는 것은 전략적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일 터.

    박주혁은 SB 빌딩을 나와 건물을 올려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흐음. 그래도 김현옥 부장의 추진력이라면···.”

    #

    SB 전지와 미팅을 끝낸 박주혁은 파인랭스가 아닌 메르헨과 럴커펠트가 머무는 호텔로 향했다.

    “미스터 박!”

    메르헨이 박주혁을 밝은 목소리로 반겼다.

    “네. 회장님.”

    “회장이라는 호칭이 나쁘진 않지만, 그냥 메르헨이라고 하세요.”

    메르헨은 씩 웃으며 말했고, 박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부터 출근이죠?”

    “예.”

    “긴장되시나요?”

    “아니요. 어떻게 체질을 개선할 수 있는지 계속 고민 중입니다.”

    박주혁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메르헨이 밝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미스터 박이라면 잘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또 그래야만 하고요. 이번 DD 자동차의 발전에 따라 저의 길도 달라지겠죠···.”

    메르헨이 말끝을 흐리며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박주혁은 메르헨의 말속에 무언가 숨어있는 것을 느끼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설마···?”

    메르헨은 답 대신 미소 지으며 찻잔을 천천히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DD 자동차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사항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DD 자동차는 벤타의 계열사니까요.”

    “으음.”

    아무래도 메르헨은 DD 자동차를 통해 동아시아 시장을 차지하려는 것 같았다. 이미 보장된 자신의 지위까지 걸면서 말이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군요.”

    “그럼요! 미스터 박과 전 운명 공동체니까요.”

    메르헨의 눈빛이 순간 번뜩였다.

    스위트 룸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을 무렵, 럴커펠트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메르헨···! 어? 마이 러브, 미스터 박! 언제 왔어요? 나한테는 말도 안 하고···.”

    “방금 도착했습니다.”

    “뭐 좋아요. 소식 들었습니다. 한국의 자동차 회사를 맡게 됐다면서요?”

    “아, 예. 그렇게 됐습니다.”

    박주혁은 차분하게 답했지만, 럴커펠트는 과한 몸짓과 두 톤은 올라간 목소리로 소리쳤다.

    “브라보우! 미스터 박. 제가 미스터 박에게서 느꼈던 그 아우라를 분명 메르헨도 본 거겠죠?”

    럴커펠트가 얼굴을 붉히며 메르헨 쪽을 쳐다봤다. 메르헨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을 뿐 말이 없었다.

    “미스터 박이라면 잘 할 수 있을 겁니다. 혹시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 얘기하세요.”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내일이 첫 출근이라죠? 그렇다면 제가 선물한 옷을 만인에게 보일 절호의 기회군요?”

    “예? 지금, 그게 무슨···?”

    “좋았어!”

    럴커펠트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메르헨은 차를 마시다 말고 헛기침하며 말했다.

    “콜록! 럴커펠트 설마···? 그 옷을 입게 하려는 건가요.”

    “와이 낫?”

    럴커펠트가 어깨를 으쓱이며 메르헨과 박주혁을 번갈아 쳐다봤다. 메르헨과 박주혁은 손사래 치며 동시에 말했다.

    “그건 아니지요!”

    “와이?”

    럴커펠트는 배시시 웃으며 다시 한번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오늘 미스터 박이 산다는 한국 음식 먹을 때 입는 건 어때요? 그 옷은 만인에게 공개해야 하는 걸작이라고요. 그 멋진 블링블링!”

    “하아.”

    럴커펠트에게 들릴 듯 말듯 박주혁은 한숨 내쉬었고, 메르헨은 양손을 가지런히 붙이고 좋은 생각이라더니 빠르게 박수 쳤다. 둘의 텐션이 지붕을 뚫을 듯할 때쯤 럴커펠트가 먼저 말했다.

    “자, 그럼 파티복으로 갈아입죠. 메르헨도 제가 준 옷 챙겨 왔죠?”

    “그럼요! 저도 갈아입어야겠어요.”

    한국 일반인들이 먹는 식당을 소개해 달라더니, 그런 옷을 입고 가자니···. 박주혁은 온몸에 털들이 삐죽 서는 느낌이었지만, 메르헨과 럴커펠트가 저리도 좋아하는 것을 보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 그냥 고깃집에 가는 건데···.’

    박주혁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사람 눈에 띠지 않는 곳을 골라야 한다. 빨리 생각하자.’

    괴상한 옷과 패션이어도 사람들이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을 생각하자, 딱 한 곳이 떠올랐다.

    ‘홍대로 가야 한다.’

    전국에서 인디밴드를 하겠다고 몰려들었기에 홍대 거리는 괴상한 패션과 헤어디자인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곳에서 장사하시는 분들은 그런 사람들을 보면 그저 ‘예술하는 사람인 가 보네···.’ 하는 곳 아니던가.

    박주혁은 다급하게 휴대폰을 꺼내 예약한 식당을 취소하자, 메르헨이 옷을 갈아입었는지 방문을 열고 나왔다.

    ‘으윽! 눈부셔.’

    메르헨은 핑크빛 스팽글이 박혀있는 타이즈 같은 옷을 입고 나타났다. 그녀의 몸매가 예사롭지 않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옷 덕분에 몸매가 더욱 강조되고 있었다. 메르헨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박주혁을 보며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때요? 정말 예쁘죠.”

    “···예.”

    옷이 이쁜 것인지, 메르헨의 몸매가 좋은 것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메르헨은 박주혁에게 사뿐사뿐 걸어와 뒤로 돌더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좀 잠가 주세요. 손이 안 닿아서···.”

    “아, 예.”

    - 지이익.

    박주혁이 조금은 박시한 트레이닝복이라면 메르헨은 몸매가 강조되는 레깅스라고 하면 딱 맞을 듯싶었다. 럴커펠트도 옷을 입고 등장했는데 은색 스팽글이 번쩍이는 어깨 뽕, 허벅지 뽕이 있는 트레이닝복이었다.

    ‘맙소사.’

    저 디자인이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주혁도 옷을 갈아입고 나자, 세 명의 블링블링은 홍대로 향했다.

    #

    홍대 뒷골목 한 삼겹살집.

    아무리 홍대라지만, 외국인들과 함께 블링블링한 옷을 입은 박주혁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리된 거 시선을 즐기는 수밖에.

    “어서 오십시오!”

    “우선 목살 3인분 주시고, 멜젓 있죠?”

    “네네! 여기 목살 3인분!”

    점원이 큰 소리로 주문을 되뇌며 말했다.

    “술은 안 하십니까?”

    “소주 1병과 맥주 2병이요.”

    “예. 알겠습니다.”

    정신없는 주문이 끝날 무렵, 메르헨과 럴커펠트는 매우 흥미롭다며 가게와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여긴, 좀 다르군요.”

    “뭐가 다릅니까?”

    “내가 만났던 한국 사람들은 모두 정장만 입고 예의를 차리던데··· 여긴 자유분방해요.”

    메르헨의 말에 럴커펠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는 턱을 괴고 밖을 하염없이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는지 말수가 부쩍 줄어있었다.

    “럴커펠트? 괜찮아요?”

    “으음? 그럼요. 여기 너무 좋네요.”

    아마도 또 뭔가 영감을 받는 모양이다.

    음식이 나오고, 박주혁은 열심히 고기를 구웠다.

    “미스터 박이 요리를 하다니.”

    “메르헨 양. 미안하지만, 미스터 박의 음식은 제가 먼저 먹어 볼 겁니다.”

    “그러세요.”

    럴커펠트의 말에 메르헨이 웃으며 답했다. 박주혁은 피식 웃더니 목살을 하나 집어 멜젓에 푹 담근 후 럴커펠트의 접시에 올려줬다.

    “킁킁. 오우. 생선 냄새가 나는데? 이거 돼지고기라고 하지 않았나요?”

    럴커펠트가 선글라스를 추켜올리며 매우 놀라는 눈치였다.

    “이 소스에 멸치가 들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오오. 돼지고기와 생선 소스라니···.”

    럴커펠트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박주혁이 건넨 고기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얌전히 고기를 씹던 럴커펠트가 갑자기 엉덩이를 들썩이더니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홀리 쉿!”

    메르헨과 박주혁이 럴커펠트의 반응에 놀라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왜요? 무슨 일이에요?”

    “세상에 이런 맛이 있다니! 지져스. 메르헨도 빨리 먹어봐요. 이건 미라클이야.”

    “그, 그 정도예요?”

    메르헨이 놀랍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며, 박주혁이 건넨 고기를 어색한 젓가락질로 입에 넣었다.

    “와우···!”

    메르헨과 럴커펠트의 반응에 박주혁은 피식 웃으며 소주와 맥주를 혼합해 한 잔씩 내밀었다.

    “고기를 먹고 이걸 한 모금씩 하세요.”

    그들은 박주혁이 건넨 소맥을 한 모금씩 하더니 또 눈을 번쩍 떴다.

    “세상에 입안이 완전 깔끔해졌어. 이러면 온종일 먹을 수도 있겠어요.”

    메르헨이 감탄할 때 럴커펠트는 티슈로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이건 감동이잖아. 미스터 박 고마워요. 이런 걸 맛보게 해주다니···. 음식이 엘레강스하다니 이런 경험은 처음입니다.”

    럴커펠트는 목살과 멜젖 그리고 소맥 앞에 한없이 겸손해지는 것 같았다.

    옷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메르헨과 럴커펠트가 이리도 좋아하니 상당히 뿌듯했다. 박주혁은 웃으며 메르헨과 럴커펠트의 접시에 고기를 올리며 말했다.

    “맛있게 드십시오.”

    그들이 상기된 얼굴로 소맥잔을 부딪힐때, 조금 떨어진 차안에서 누군가 카메라로 그들을 찍으며 중얼거렸다.

    - 찰칵! 찰칵.

    ‘저 한국 사람은 대체 누구지? 옷도 비슷하게 입었고, 설마···? 특종이다.’

    그는 카메라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

    다음날.

    박주혁은 파인랭스가 아닌 DD 자동차 서울 사무소로 출근했다.

    파인랭스야 지금 가장 바쁠 시기이기도 했고, 권선호라는 배신자도 없었기에 당분간 박영희 팀장과 조광연 차장 체제로도 충분히 운영될 수 있을 것이다. 파인랭스 시스템도 가동되고 있으니, 원격으로 사무실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박주혁이 DD 자동차 사무소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자,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이 일렬로 서서 상체를 숙였다. 박주혁은 그 광경에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무슨 조폭 두목도 아니고···’

    차동진 전무와 어제 회의실에서 봤던 임원 몇몇이 다가와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사장님.”

    “안녕하세요. 왜들 이렇게 나와 있는 겁니까?”

    “당연히 사장님께 인사하기 위해서···.”

    박주혁은 한 임원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이런 문화는 바람직하지 않군요. 이럴 시간이 있으면 직원들이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개선할 사항들을 찾으세요. 임원이라면 그래야 하는 겁니다.”

    박주혁의 카리스마 있는 말에 임원들이 움찔거렸고, 차동진 전무는 눈을 빛내며 박주혁을 쳐다봤다.

    “우선 20분 뒤 임원분들은 제 방으로 모이세요.”

    “알겠습니다!”

    임원들의 대답을 들은 박주혁은 차동진 전무에게 다가가 말했다.

    “전무님께는 사무실 안내를 좀 부탁하고 싶군요.”

    “네! 사장님.”

    차동진 전무의 안내에 사무실을 둘러본 박주혁은 사장실로 향했다.

    “사장님. 여기가 집무실이십니다.”

    “그렇군요.”

    박주혁이 고개를 끄덕일 때 문 앞에 있는 비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상체를 90도로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의 비서인 고윤희입니다.”

    “수고가 많으시군요.”

    박주혁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사장실로 들어갔다. 매우 넓은 공간에 한눈에 봐도 비싼 가구들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박주혁은 미간을 좁히며, 차동진 전무와 고윤희 비서를 돌아보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모든 임원 방이 이렇습니까?”

    “예?”

    차동진 전무와 고윤희가 놀라서 대답했고, 박주혁은 목소리를 높였다.

    “낭비군요. 제 방에 있는 가구들 처분하도록 하세요. 방도 줄이겠습니다.”

    “예?”

    “DD 자동차가 지금 이런 사치를 부릴 때가 아닙니다. 고 비서님은 배정산업에 연락해서 실속있는 가구들로 바꿨으면 좋겠군요.”

    “배정산업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고윤희는 재빨리 수첩을 꺼내 메모하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차 전무님. 다른 임원들 오기 전에 하나 물어봅시다.”

    “예. 사장님.”

    “DD 자동차의 문제점이 뭐라 보십니까?”

    “···”

    차동진은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박주혁이 출근 처음부터 보였던 태도로 말미암아 차동진은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고 있었다. 차동진은 입술을 천천히 뗐다.

    “방만한 경영인 것 같습니다.”

    박주혁은 차동진 전무의 말이 마음에 드는지 웃으며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DD 자동차의 체질 개선에 많은 도움을 주십시오.”

    차동진 전무는 눈을 빛내며 큰소리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박주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DD 자동차는 이제 세계를 놀래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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