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63화 (63/136)
  • 063화 우리 멀리 봅시다!

    “소개합니다. 프레지던트 박.”

    메르헨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임원들이 모두 회의실 문을 바라봤다. 하지만, 회의실 밖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이 고개를 갸웃할 찰나 박주혁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옷매무새를 고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앞으로 DD 자동차를 경영할 박주혁이라고 합니다.”

    자동차 회의실에 있던 임원들의 얼굴이 하얗게 떴다.

    “저, 저 사람은···.”

    “통역사 아니었어?”

    “이런, 젠장!”

    임원들의 황망한 표정을 감상하던 박주혁이 입술을 뗐다.

    “DD 자동차는 벤타와는 다른 컬러로 시장에 접근하려 합니다. 물론, 그 전에 구조조정이 필요합니다. 조직에 암적인 존재들이 있더군요.”

    “···!”

    구조조정이란 몇몇 임원의 얼굴이 하얗다 못해 퍼레졌다.

    “사장님. 아까는···.”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십시오!”

    “진심이 아니었습니다. 오해할만한 상황이지만···.”

    횡설수설하는 그들을 박주혁이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지목하더니 입술을 천천히 뗐다. 차갑게 가라앉은 그의 눈빛 만큼 목소리 또한 낮게 깔렸다.

    “당신들은 해고야.”

    #

    벤타가 DD 자동차를 인수했다는 소식은 엄청난 파문을 가져왔다. 그로 인해 안태희 주사는 수화기를 내려놓을 짬이 없었다.

    - 따르릉.

    “여보세요? 예? 아니요. 저도 모르는 사실입니다.”

    - 딸각

    “기업간 거래를 정부가 어떻게 통제합니까?”

    - 딸각

    “아! 글쎄 그걸 제가 어떻게 아냐고요!”

    안태희 주사가 미간을 좁히며 전화를 신경질적으로 끊었지만, 전화기는 눈치도 없이 울렸다.

    - 따르릉.

    “아. 진짜!”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전화가 걸려오는 통에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안태희는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들며 소리쳤다.

    “아, 여보세요!”

    “어? 안태희 주사님?”

    항의성 전화를 하던 자동차업계 사람들과 달리 이번 목소리에는 당황함이 한가득이었다. 아차 싶었던 안태희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

    “크흠. 자동차과 안태희 주사입니다.”

    “안녕하세요. 파인랭스 박주혁 대표입니다.”

    “아! 박 대표님. 자꾸 이상한 전화가 걸려와서 제가 실수했네요. 죄송합니다.”

    안태희는 박주혁에게 정중하게 사과했고 박주혁은 괜찮다고 말하며 물었다.

    “어떤 전화가 안 주사님의 심기를 건드렸을까요?”

    “아, 글쎄 벤타가 DD 자동차를 인수했다지 뭡니까? 자동차 업계 사람들이 항의해대는 통에 업무가 마비될 지경입니다. ”

    “···”

    박주혁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제일 먼저 소식을 전하려 했더니 벌써···?’

    불과 2시간 전 일이었지만, 파급력 때문이었을까? 소문이 예상보다 빠르게 퍼졌다.

    “음. 그것 때문에 전화를 드리긴 했습니다.”

    “예?”

    안태희가 화들짝 놀라자, 박주혁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벤타가 조금 전 DD 자동차를 인수한 건 사실입니다.”

    “뭐라고요? 사실이란 말입니까! 맙소사. 아니, 잠깐. 그걸 박 사장님이 어찌 아셨습니까?”

    “만나서 말씀드리려 했는데요···.”

    박주혁이 말끝을 흐리자 안태희가 답답하다는 듯 그를 독촉했다.

    “다름 아니라, 제가 DD 자동차의 CEO로 취임하게 되었거든요.”

    안태희 주사가 너무 놀랐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질렀다.

    “예에에?”

    #

    안태희 주사와 전화를 끊은 박주혁은 직원들을 회의실로 소집했다.

    “여러분께 공표할 것이 있습니다.”

    박주혁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하자, 직원들도 덩달아 긴장했다.

    “무슨 일이시지?”

    “글쎄···.”

    “또 뭐 엄청난 프로젝트 수주하신 것 아냐? 어제 오후 내내 외부에 계셨었잖아?”

    작은 소리로 수군대던 직원들은 박주혁이 입술을 떼는 순간 조용해졌다.

    “독일 출장에서 벤타 측이 제게 제안한 것이 있었습니다.”

    벤타라는 말에 직원들이 긴장감을 거두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수주 소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박주혁의 말에 회의실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하나같이 입을 떡 벌린 채 숨도 쉬지 못했다.

    “허···.”

    직원들의 반응에 박주혁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많이들 놀라신 것 같군요. 저도 그런 제안이 올 줄 몰랐습니다. 어쨌든 파인랭스의 대표직도 유지하니, 여러분들은 지금처럼 하시면 됩니다.”

    “···.”

    박주혁의 말에 아무도 반응하지 못했다. 박주혁이 피식 웃으며 회의실을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틀자, 직원들의 눈동자가 천천히 박주혁을 쫓았다. 그가 회의실을 완전히 빠져나가고 나서야 직원들이 최면에서 풀린 듯 ‘헉’하고 숨을 내뱉었다.

    “허억. 방금 뭐라고 하신 거야?”

    “잠깐만···. 나 숨 좀 쉬고.”

    “DD 자동차라니···?”

    다들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박주혁이 다시 회의실로 얼굴을 들이밀더니 말했다.

    “번역연구팀. 박 팀장과 구 과장은 잠시 사장실로 오세요. 그리고 뭘 그렇게 멍하게 앉아 있어요. 다들 일 안 해요?”

    박주혁이 손뼉 치며 말하자, 그제야 직원들이 고개를 털레털레 흔들며 하나둘 일어났다. 박영희 팀장과 구경숙 과장은 살짝 흐리멍덩한 눈으로 사장실로 들어섰다. 그들이 자리하자, 박주혁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챠넬 번역은 어떻던가요?”

    “예? 아. 챠넬이요.”

    그들의 대답이 굼뜨고 한 박자 느렸다. 충격적인 소식에 따른 부작용이었다.

    “챠넬 번역이 매우 난해합니다.”

    “네. 주어가 빠지는 경우가 많아 추상적이고, 단어들도 평소 쓰는 것과는 괴리가 커서 번역이 상당히 어렵다고 합니다.”

    박주혁은 익히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선은 이미 번역된 챠넬 일본을 참고하면서 최대한 맞춰보도록 하세요. 챠넬에서도 피드백을 하기로 했으니 노력하는 수밖에요.”

    “예. 감수자가 아주 죽을 맛인 것 같더라고요.”

    “충분히 이해됩니다. 지금은 일본어지만, 곧 한국어, 중국어도 의뢰가 오기 시작할 겁니다.”

    “허···.”

    구경숙 과장이 벌써 겁이 나는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왼손으로 머리칼을 쓸었다. 그때 빛에 반사되는 반짝이는 무언가가 박주혁의 시선을 끌었다.

    ‘음?’

    평소 보지 못했던 반지를 끼고 있음을 눈치챈 박주혁이 구경숙 과장에게 넌지시 물었다.

    “구 과장님. 못 보던 반지가 있네요?”

    “예?”

    박주혁의 말에 구경숙이 손을 슬쩍 가리며 얼굴을 붉혔다. 박영희 팀장은 그런 구경숙 과장을 보며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지 입을 가린 채 쿡쿡거렸다. 박영희 팀장의 반응으로 미뤄보건대 저건···.

    “조 차장이 잘해줍니까?”

    “예에?”

    구경숙 과장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고 박영희는 아예 허리를 숙이고 어깨를 들썩였다. 박주혁이 구경숙 과장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구경숙 과장은 얼굴을 붉히며 우물쭈물했다.

    “저번에 심 대리에게도 말했지만, 사내 커플이 결혼하면 최신 양문 냉장고를 선물한다고 했습니다.”

    구경숙 과장이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박주혁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숙이고 웃고 있는 박영희를 쳐다봤다.

    “박 팀장도 웃지만 말고 짝을 찾아야죠?”

    “예? 갑자기 저는 왜···.”

    “너무 일에 몰두하지 말고 여가도 즐기란 말입니다. 토요일 격주 휴무도 시행되었잖아요.”

    “사장님이 모르셔서 그렇지 저···. 사랑하는 사람 있습니다!”

    “그래요? 정말 잘 됐군요.”

    “···.”

    박영희 팀장의 어색한 미소가 조금 신경 쓰였지만, 전생에도 나이가 꽉 차도록 결혼을 못 했던 박영희에게 애인이 있다니 다행이었다. 박영희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중얼거렸는데, 그 말이 박주혁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내 눈에만 보여서 그렇지.”

    ‘이런, 왜 짝사랑을 하고 그러세요···. 쯧.’

    사장실을 벗어나는 박영희 팀장의 뒷모습을 박주혁이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봤다.

    번역연구팀이 사장실을 나가고 박주혁은 서랍에서 SB 전지 김현옥 부장의 명함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파인랭스 박주혁 대표입니다.”

    “아, 대표님. 번역할 문서는 준비 중입니다. 아마 곧 연락이 갈 겁니다.”

    “예. 번역은 문제 없이 처리하겠습니다. 그 전에 좀 만났으면 합니다.”

    “음? 혹시 벤타 소식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죠···.”

    박주혁은 김현옥 부장과 약속을 잡고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시스템 온. 검색, EH슬라”

    - 검색이 완료되었습니다.

    박주혁은 배터리 관련 특허들과 스펙에 대한 문서들을 반출했다.

    - 띠링!

    곧 이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림이 컴퓨터에서 들렸고, 박주혁은 문서들을 편집해 인쇄했다.

    ‘한국에 EH슬라가 없으리란 법은 없잖아. 미안하다. 메론 머스크.’

    공교롭게도 메론 머스크와 박주혁은 동갑이었다.

    아직 세상에 나타나지도 않은 기술과 개념으로 박주혁은 과감한 베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인쇄된 자료를 서류 가방에 챙겨 선릉으로 향했다.

    #

    선릉, SB 빌딩 1층에 있는 커피숍에서 박주혁과 김현옥 부장이 만났다.

    김현옥 부장은 박주혁이 DD 자동차의 CEO가 되었다는 소리에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입을 떡 벌린 채 흐리멍덩한 눈으로 박주혁을 바라봤다.

    “그래서. 저는 DD 자동차의 제품군을 좀 다르게 가져가 보려고 합니다.”

    “어, 어떻게요?”

    “SUV와 MPV 그리고 트럭으로 제품군을 간소화시키고 전기차를 제품군에 넣으려 합니다.”

    “저, 전기 뭐요?”

    “전기차요. 우선 시작은 골프장에 있는 엔진 카트를 전기 카트로 바꿀까 합니다.”

    “어···.”

    김현옥 부장이 눈을 끔벅거리며 박주혁의 입만 쳐다봤다.

    “그래서 배터리 개발이 필요합니다.”

    “아아.”

    김현옥 부장은 배터리라는 말에 비로소 눈을 빛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갑시다. 제가 자리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예?”

    “연구소 사람들과 얘기해 보는 게 빠를 것 같아서요.”

    “아, 그렇겠군요.”

    박주혁이 원하던 바였다.

    SB 전지 회의실.

    박주혁은 김현옥 부장의 주최로 SB 전지 연구소 사람들과 미팅을 가질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DD 자동차 대표 박주혁입니다.”

    박주혁은 DD 자동차라 대표라는 명칭을 공식 석상에서 처음으로 꺼냈다. SB 전지가 자동차 회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은 연구원들도 알기에 그들의 집중을 끌어내기 위한 선택이었다.

    “DD 자동차는 앞으로 레저인구의 증가를 고려해 전기 카트 제조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카트요?”

    자동차 회사에서 카트라니 생소할 수 있겠지만, 곧 백희나가 LPGA에 진출했으니 골프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이미 벤타 인비테이셔널에서 우승을 차지한 덕에 벌써 그 조짐이 보이고 있기에 박주혁은 자신있게 전기 카트를 계획한 것이다.

    “그렇습니다.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백희나 선수가 이번 벤타 인비테이셔널에서 우승을하면서 골프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으음.”

    연구원 중 골프를 치는 사람들이 있는지 낮게 신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국에 있는 전세계 골프장은 3만 개가 넘고 카트 수요는 약 100만대입니다. 그 카트의 대부분은 소형 엔진 가솔린을 사용하고 있고, 일제가 대부분이죠.”

    박주혁의 말을 듣고 있던, 한 연구원이 손을 들며 말했다.

    “그런데 대표님. 골프 카트 정도의 출력이면 SB의 납축전지로도 충분히 운용 가능할 겁니다.”

    “맞습니다. 저희 제품 중에···.”

    연구원들이 앞다퉈 SB 전지 제품에 대해 말하려 할 때, 박주혁이 그들의 말을 잘랐다.

    “납축전지의 단점은 저보다 연구원분들이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무겁고 저온 출력에 문제점이 있죠. 특히나 산악 골프 코스가 많은 한국의 특성상 오르막 주행도 무리가 없어야 합니다. 출력이 높고 일정해야 한다는 소리죠.”

    박주혁이 납축전지의 단점을 지목하자, 연구원들이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차량용 납축전지야 시동시에만 고출력을 내면 되고 엔진에서 발생하는 열로 납축전지의 단점을 커버할 수 있다지만, 엔진 없이 축전지로만 가동되는 카트라면 얘기가 달랐기 때문이다.

    박주혁은 잠시 연구원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준 뒤 이어서 말했다.

    “그래서 SB 전지에서 리튬이온전지를 개발해 주셨으면 합니다.”

    “리튬이온전지?”

    연구원들이 화들짝 놀라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 봤다. SB 전지에 없는 기술을 박주혁이 내놓으라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이가 지긋한 한 연구원이 박주혁을 향해 말했다.

    “리튬이온전지는 아직 일본에서 생산되고 있고 한국에는 기술이 없습니다. 대신 니켈 카드뮴은 SB 전지에서도 생산이 가능합니다.”

    “성함이?”

    “유성환 선임입니다.”

    “유 선임님. 니켈 카드뮴은 저온에서도 출력이 변함없다는 장점이 있죠?”

    박주혁의 말에 유성환 선임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반면에 중금속으로 인해 환경오염에 문제가 있고 전에 충전돼 있던 만큼 용량이 줄어드는 매모리 현상도 있을 테고요···.”

    해박한 지식의 박주혁 앞에 유성환 선임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렇게 하시죠. SB 전지와 협력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니켈 카드뮴 배터리를 사용하겠습니다.”

    현재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뒤이은 박주혁의 말에 연구원들의 눈을 크게 떴다.

    “니켈 카드뮴 전지를 사용하겠다는 것은 단지 연구개발 시간을 벌기 위한 것입니다. 정확한 일정은 협의를 해봐야겠지만, 1차는 니켈 카드뮴 2차는 니켈 수소 3차는 리튬이온전지 순으로 개발되는 대로 업그레이드를 하겠습니다. SB 전지에서 개발이 불가능하다면, 다른 곳을 찾아봐야 합니다.”

    박주혁은 말을 마치고 김현옥 부장을 쳐다봤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100만대라고 하셨나요?”

    “그렇습니다. 최소 100만대입니다. DD 자동차에서 생산한 물량이 어느 정도일지 모르지만, 전 세계적으로 카트에만 사용될 배터리가 그 정도 분량입니다. 교체, 수리 등 부가적인 수요와 앞으로 개발될 전기차를 생각해 본다면···. SB 전지에서 반드시 개발해야 한다고 보는데요.”

    “크으음.”

    김현옥 부장이 신음하며 유성환 선임 연구원을 바라봤다.

    “유 선임님. 가능하십니까?”

    “개발에 얼마나 시간이 들지 알 수 없어. DD 자동차만 믿고 위에서 개발비를 투자할지도 미지수고 말이야···.”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박주혁이 눈을 빛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멀리 보십시오. 멀리. 이건 기회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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