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62화 (62/136)
  • 062화 소개합니다. 프레지던트 박!

    “조건이 뭡니까?”

    당돌한 박주혁의 말에 메르헨이 당황한 듯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이내 웃으며 말했다.

    “수락하겠다는 건가요?”

    “조건을 들어봐야겠습니다.”

    “독일에서도 최고의 대우를 해드리겠다고 했었습니다. 원하시는 조건. 말해보세요.”

    메르헨은 흥미롭다는 듯 턱을 괴더니 다리를 꼬았다. 그때 럴커펠트가 샴페인을 따르며 한껏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박주혁과 메르헨에 다가오며 말했다.

    “와이 쏘 씨리어스?”

    둘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럴커펠트는 짐을 풀어헤쳐 큰 상자 하나를 꺼내 박주혁에게 내밀었다.

    “미스터 박! 약속했던 옷입니다.”

    “예?”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데 럴커펠트가 눈치도 없이 옷 상자를 내미는 바람에 분위기가 흐트러졌지만, 럴커펠트가 직접 만든 옷이라면 이 또한 엄청난 가치가 있을 터. 박주혁은 메르헨을 힐끔 쳐다보며 양해를 구한 후, 럴커펠트가 준 상자를 열어봤다.

    “앗. 눈부셔.”

    상자를 열자마자 빛을 반사하는 재질의 무언가가 박주혁의 눈을 어지럽혔다. 박주혁이 미간을 좁히며 상자를 활짝 열자, 푸른빛이 도는 스팽글이 빼곡하게 박혀있는 옷이 들어있었다.

    ‘이게 대체. 밤 무대복인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한 찰나, 메르헨이 먼저 상체를 가까이 가져와 상자 안의 옷을 보며 소리쳤다.

    “어머. 이럴 수가!”

    “어때요. 미스터 박?”

    럴커펠트는 박주혁의 화려한 감탄사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여기서 또 그를 실망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보자, 저번에 키워드들이···.’

    [신비로운], [절묘한], [파리지엥], [빛을 발하는], [환상], [기하학적].

    가까스로 키워드들을 떠올리곤, 박주혁은 상자에서 옷을 들어 펼쳤다.

    검은색 재질에 박힌 푸른 스팽글, 목 부분은 부드러운 벨벳 느낌의 천으로 되어 있었지만, 지퍼를 올리면 목폴라처럼 감싸게 되어 있었다. 정장이라기보다는 트레이닝복 느낌이었다.

    ‘이걸 어떻게 표현한단 말인가···.’

    창작의 고뇌를 느낄 때쯤 메르헨도 박주혁의 감상이 궁금한 듯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며 박주혁의 입만 쳐다봤다. 그리고 잠시 뒤 박주혁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놀랍군요. 이 푸른 빛을 발하는 기하학적 문양의 스팽글들이 시선을 사로잡는군요. 분명히 이 옷을 입으면 신비하고도 환상적인 나의 매력을 절묘하게 뽐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브라보! 자, 입어 봅시다.”

    럴커펠트는 박주혁의 표현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는지 박수 치며 상자에 고이 접혀있는 바지까지 꺼내 박주혁을 방으로 밀어 넣었다.

    - 쿵.

    얼결에 럴커펠트가 디자인한 옷과 함께 방에 갇힌 박주혁이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문밖에서 럴커펠트와 메르헨이 소리쳤다.

    “미스터 박! 피날레는 아니지만, 여기서 보여주십시오.”

    “기대됩니다. 미스터 박!”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럴커펠트와 한 약속도 있으니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 지이익!

    박주혁은 부끄러운 나머지 상위의 지퍼를 끝까지 올린 후 문고리를 잡았다.

    “후우.”

    심호흡과 함께 박주혁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당당해야 한다.’

    속으론 닭살이 돋을 만큼 싫었지만, 럴커펠트의 옷을 극찬한 상태였다. 박주혁은 그 극찬에 맞는 옷걸이가 되어야만 했다. 그가 굳은 표정으로 문을 열고 나가자, 메르헨과 럴커펠트가 동시에 박주혁을 쳐다봤다.

    “오. 마이. 갓!”

    “와우! 미스터 박. 너무 멋진데요?”

    그들의 칭찬 때문이었을까? 박주혁은 자신도 모르게 당당한 표정과 시크한 눈빛으로 상위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무표정하면서도 도전적인 그의 얼굴이 더욱 럴커펠트의 옷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퐌타스틱! 지져스.”

    럴커펠트는 감동했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천천히 박주혁에게 그의 주변을 돌며 감탄사를 연신 내뱉었다.

    “러블리. 언빌리버블. 이건 미스터 박 당신을 위한 옷이 맞았군요!”

    트레이닝 복은 생각보다 질감이 부드러웠고, 많은 스펭글이 있음에도 움직임에 전혀 방해가 돼지 않았다.

    “생각보다 착감도 좋고 편하군요. 감사합니다.”

    “트레이닝복이 편한 것은 당연한 거죠. 거기에 미스터 박의 비쥬얼이 더해지니. 이게 바로 퍼펙트. 한땀 한땀 스펭글을 꿴 보람이 있군요.”

    “이걸 한땀, 한땀 직접이요?”

    럴커펠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박주혁 계속 위아래로 쳐다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한참 박주혁 주변을 서성이던 럴커펠트가 박주혁이 입은 옷 몇 군데를 직접 매만지더니 말했다.

    “소원 풀었네요. 고마워요. 메르헨 양. 이제 좀 쉬어야겠어. 이 감동을 꿈에서도 느껴야지.”

    럴커펠트가 메르헨의 방문을 열고 나가다 말고 뒤돌아서서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미스터 박! 내 무대에 서겠다는 약속 잊지 않았죠?”

    그 말을 끝으로 럴커펠트는 메르헨의 방에서 나갔다. 럴커펠트가 옆 방으로 건너간 후, 메르헨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다시 얘기해 볼까요? 어떤 조건을 원하세요.”

    번쩍이는 파란 스펭글 트레이닝 복을 입은 채로 박주혁은 자신이 생각한 조건을 말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파인랭스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겸업이 허용되어야 합니다.”

    “오케이.”

    메르헨은 당연하다는 듯 쿨하게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월급이야 알아서 책정하시겠지만, 전 DD 자동차의 스톡옵션을 받고 싶군요. 그래야 오너십이 생길 것 같습니다.”

    “원하던 바군요. 좋아요. 주식 몇 프로에 대한 스톡옵션을 바라죠?”

    메르헨은 박주혁이 말하는 조건을 모두 수용할 태세인 듯 너무도 여유로운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그 부분은 메르헨 당신의 얘기를 듣고 싶군요.”

    “미스터 박 지금 제 의견을 들으면 당신은 주도권을 잃는 겁니다. 괜찮겠어요?”

    확실히 이런 협상에서 먼저 얘기하는 사람이 유리하다. 먼저 말한 조건이 기준점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주혁은 거기까지 욕심부릴 생각은 없었다.

    “이미 원하는 조건들을 얘기했고, 이후는 메르헨, 당신이 날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척도라고 해두죠.”

    박주혁의 도발에 메르헨이 피식 웃더니, 잠시 고민하는 엄지와 집게로 턱을 꼬집듯 잡았다.

    “날 이토록 고민하게 만들다니, 미스터 박 당신은 대체···.”

    그녀의 팽팽한 미간에 주릅이 생길 무렵, 메르헨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벤타가 소유할 DD 자동차의 지분 중 10% 어때요? 이 정도면 충분히 매력적일 것 같은데.”

    메르헨의 제안에 이번엔 박주혁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어때요? 제가 당신을 얼마나 생각하는지에 대한 답이 됐을까요?”

    벤타가 DD 자동차의 지분을 얼마까지 사들일지는 모르겠지만, 벤타가 사들인 총 주식의 10% 라면 나쁜 거래 조건은 아니었다. 어쩌면 주주총회에서도 상당한 의결권을 가질 수도 있을 터.

    뜻밖의 큰 제안에 박주혁이 눈을 끔벅일 때 메르헨이 미소 지으며 위스키를 들었다. 그녀는 위스키를 들고 흔들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프레지던트 박. 축하주 한잔?”

    “좋죠. 회장님.”

    회장이라는 얘기에 메르헨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

    다음날.

    박주혁은 메르헨과 함께 DD 자동차의 서울 사무소로 향했다. 표면적으로는 통역으로 동행한 자리지만, DD 자동차의 면모를 파악할 기회였다. 설레임과 기대감이 교차했다. 사무소 건물에 도착할 때쯤 메르헨이 박주혁을 바라보며 넌지시 말했다.

    “미스터 박. 긴장할 필요 없어요. 오늘은 자본제휴 얘기만 할 거니까요. 편하게 부하직원들을 미리 만나본다고 생각하세요.”

    “알겠습니다.”

    메르헨이 차에서 내리자, DD 자동차 임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상체를 90도로 숙이며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메르헨 부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성함이 미스터···. 차?”

    “네. 차동진 전무입니다.”

    메르헨이 차동진 전무의 어눌한 영어 발음 때문에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자, 박주혁이 메르헨의 귓가에 속삭였다.

    “차동진 전무라고 합니다.”

    “아! 승진하셨군요. 미스터 차.”

    “그걸.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박주혁이 통역을 하는 것을 눈치챈 차동진이 이제는 대놓고 한국말로 말했다. 메르헨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차동진 전무와 악수한 후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 누구도 박주혁이 누군지 묻지 않았다. 메르헨이 데리고 온 통역사 그 이상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구두로 협의가 어느 정도 이뤄졌었는지 회의는 빠르게 진행됐다.

    “여기에 서명하시면 벤타가 5%의 DD 자동차 지분을 매입하는 자본제휴 계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메르헨은 박주혁의 통역해주는 내용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메르헨이 계약서에 서명하기 위해 팬을 잡을 때 동행한 벤타 직원이 갑자기 메르헨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그러자 메르헨이 팬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긴급한 전화가 있어서···.”

    “아, 알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메르헨이 자리를 이탈하자, 몇몇 임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의견을 주고받았다. 물론, 좋은 얘기는 아니었다. 그들은 박주혁을 벤타 쪽 사람이라고 전혀 생각지 않는지, 가감 없이 얘기를 주고받았다.

    “벤타는 무슨 생각인 거야?”

    “왜? 우리로서는 좋은 것 아닌가? 현재 적자만 3조라고··· 이번 기회에 우리 퇴직금이라도 챙겨야 하지 않겠어?”

    “맞습니다. 이번 계약이 성사되고 주식이 반응하면 재빨리 던지고 나와야겠어요.”

    ‘하. 저런 사람들을 데리고 무슨 일을 하겠다고···. 경영진이 저 지경이면 말 다 했지.’

    박주혁은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은 부글부글 댔다. 그때 차동진 전무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자신의 안위만 걱정하는 임원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벤타가 동아시아 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해 우리에게 대대적인 투자를 하겠다는데···. 그런 썩어빠진 소리나 하고 계시다니 정말 한심하군요. 우릴 믿고 따르는 직원들 생각은 안 하십니까?”

    “어허, 차 전무. 왜 이래? 외부인도 있는데 그런 막말을 하면 쓰나?”

    한 임원이 박주혁을 가리키며 핀잔했지만, 그는 화가 풀리지 않는지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회사를 대표하는 임원이란 사람들이 자기 퇴직금 걱정이나 하고 있다니···. 이번에 투자받아 고급 승용차 완성하겠다면서요!”

    “차 전무, 알 만큼 아는 사람이 왜 이래? 당연히 개발해야지. 누가 안 한다고 하던가?”

    “진정해. 다들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회사가 유동성 위기가 눈앞에 있는데 다들 자기 앞길 걱정해야지. 자네도 가족 걱정부터 하라고.”

    미간이 좁혀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박주혁은 차동진 전무를 눈여겨봤다. 그는 씩씩거리며 테이블에 앉더니 다시 한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혼잣말이었지만, 차동진은 분명 썩어빠진 새끼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흠. 그래도 회사를 걱정하는 직원이 있긴 하네···.’

    잠시 뒤, 메르헨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부사장님. 자 여기 서명하시면 끝납니다.”

    “예. 그런데 죄송하지만, 이번 계약은 없던 일로 해야겠습니다.”

    “예?”

    차동진을 제외한 임원들의 얼굴이 순간 흙빛으로 변했다.

    “아니, 갑자기 왜···?”

    “회장님께서 다른 지시사항을 말씀하셔서 말이죠.”

    “예?”

    박주혁은 통역하면서도 그들의 벙찐 표정을 보고 있자니 뭔지 모르게 통쾌했다.

    “이번 자본제휴 뒤 승용차 샤시와 가솔린 엔진 기술 지원을 요청하신 것 같던데요.”

    “예. 맞습니다.”

    “그것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예?”

    이번 벤타와의 자본제휴계약을 통해 자신의 안위를 챙기려 했던 임원들이 특히나 놀라는 표정으로 메르헨을 쳐다봤다. 모두의 이목을 끈 메르헨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벤타는 DD 자동차를 인수하기로 했습니다. 곧 계약서가 새로 도착할 것입니다.”

    DD 자동차의 모든 임원들이 입을 쩍 벌리고 서로를 쳐다봤다. 그때 차동진과 대립하던 임원들이 재빨리 메르헨을 옹호하고 나섰다.

    “옳으신 결정입니다. 동아시아의 거점으로 DD 자동차 만한 매물이 없다고 판단하신 거군요.”

    “이미 벤타의 기술 제휴를 통해 벤타 기술에 익숙한 기술직과 생산직이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옳은 결정입니다. 환영할 일이군요.”

    “이로써 DD 자동차의 고질적인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여러 임원님도 잘 생각해 보십시오.”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사람들이었다. 박주혁은 그들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나저나 이런 큰 결정을 전화 한 통화로 해버리다니, 박주혁은 메르헨의 스케일에 학을 뗐다.

    ‘오늘은 그냥 편하게 있으라더니···.’

    박주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이 회의실 문이 열리며 DD 자동차 김원용 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회, 회장님!”

    “모두 모여있었군. 자리에 앉지. 안녕하십니까? 메르헨 부사장님.”

    메르헨은 김원용 회장과 손을 맞잡으며 웃었다.

    “말씀하신 사항을 정리한 계약서입니다.”

    “약속대로 가져오셨군요.”

    메르헨이 계약서에 서명하자, 김원용 회장이 임원들을 향해 손을 들며 말했다.

    “앞으로도 DD 자동차를 잘 부탁하네.”

    “회, 회장님!”

    임원들의 애타는 외침에 김원용 회장은 계약서을 손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난 이제 자네들의 회장이 아니야. 자네들의 회장은 메르헨 부사장이지.”

    김원용 회장이 메르헨을 손바닥으로 가리키며 웃었다. 김원용 회장이 막 회의실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한 임원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회장님! 고용승계는···!”

    그의 외침은 허공을 맴돌았고 회의실은 혼란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그럼, 이제 난 벤타의 임원인가?”

    서로 다른 상상을 하며 임원들은 패닉에 빠졌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던 메르헨이 웃으며 목을 가다듬었다.

    “으흠!”

    그녀의 가녀린 헛기침에 임원들이 전부 메르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메르헨은 자리에서 일어나 당당하게 말했다.

    “소개합니다. DD 자동차의 새로운 CEO. 프레지던트··· 박!”

    ‘메르헨···. 편하게 있으라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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