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화 조건이 뭡니까?
“특히, 태우차가 아주 난리입니다.”
안태희 주사의 말에 박주혁이 미간을 좁혔다.
‘그래. 태우가 대출 때문에 혈안이 되어 있을 거야.’
DD 자동차 공장설비를 담보로 대출을 실행하여 태우 그룹 이우주 회장은 해외로 도피하여 잠적해버린다. 그걸 지금 박주혁이 막아낸다면···? 최소한 DD 자동차가 깡통이 되어 상하이 사기차에 넘어갈 일은 없겠지.
안태희 주사의 말을 들으며 생각을 정리하는데 이원희 지사장이 입을 열었다.
“태우 그룹은 유동성 위기가 염려되는 것 같던데···.”
태우에 호의적인 국내 시선이 아닌 제3국의 시선으로 태우차 바라보는 이원희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이원희 사장의 말에 안태희 주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원희 지사장을 쳐다봤다.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봄바디오에서 태우 그룹 계열사 몇 개를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아···.”
안태희 주사가 그제야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태우는··· 몇몇 우량 계열사를 제외하곤 곧 휘청일 겁니다. 혹시 주식 가지고 계시면 파세요.”
유명한 국장이 안태희의 거친 언사가 염려스러웠는지 주변을 한번 둘러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쯧! 안 주사 말조심해. 내부 정보 유출로 신고 들어가면 어쩌려고 그래?”
안태희 주사도 유명한 국장의 말이 맞다고 판단했는지 이원희와 박주혁을 보며 사과했다.
“음. 제가 좀 취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태우 그룹 주식도 없는데.”
이원희가 별일 아니라는 듯 오리고기를 씹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그 틈에 잠자코 얘기만 듣던 박주혁이 안태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안 주사님. 미래와 태우가 난리라고 하셨는데. 그럼 주사님은 DD가 미래로 가야 한다고 보십니까?”
박주혁의 떠보기였다.
안태희가 미래에 매수된 상황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안태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국내에 매각할 일이 아닙니다. DD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말이죠. 문제는 윗선에서는 해외 매각을 꺼린다는 거예요.”
안태희 주사의 말에 박주혁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
“안 주사님의 고견이 궁금합니다. 혹시 해외 기업이라면···. 벤타입니까?”
박주혁의 말에 안태희의 눈썹이 심하게 요동쳤고, 이원희와 유명한이 눈을 끔벅이며 박주혁을 쳐다봤다. 그들의 반응이 별것 아니라는 듯 박주혁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벤타가 DD와 자본 제휴 계약도 체결했었고, 기술협약에 엔진공장 건립에 엔지니어까지 파견했었죠. 어쩌면 DD 자동차의 문제를 잘 파악하고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봤습니다.”
유명한 국장은 박주혁이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갖고 있다는데 놀랐는지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말했다.
“아니, 박 사장. 언제 또 자동차 쪽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어? 지식에 대한 갈증이야? 아니면 오지랖?”
“하하하.”
유명한. 국장의 농담에 다소 무거웠던 자리가 환기됐지만, 안태희 주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제 속마음이 들킨 것 같아 좀 놀랬습니다. 박 사장님.”
안태희 주사의 말에 유명한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돌렸다.
“안 주사, 자네?”
유명한 국장의 태도로 봤을 때 정부에서 가이드 라인 같은 것이 내려온 것 같았다. 유명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안태희는 턱을 매만지더니 말했다.
“윗선에서는 국내 알짜 기업을 해외에 매각하면 안 된다고는 하지만, 제 생각은 DD 자동차를 살리려면 그 방법이 최고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래는 찔러보기만 하는 눈치고, 태우는···.”
‘담보 대출용이죠.’
박주혁이 입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는 곧 2년 뒤 워크아웃에 들어가는 기어 자동차를 공개입찰에서 낙찰받는다. 독과점 우려가 있었지만, 삼송자동차가 기어를 인수하기 위해 물밑에서 허위보고서를 작성하는 등 악위적인 행태를 한 것이 드러나 공분을 사게 되고 결국, 기어자동차를 미래에게 헌납하게 된다. 역사적 사실을 봤을 때 사실 DD 자동차는 미래에게 매력적인 매물은 아닐 터. 그저 내가 갖긴 싫은데 남 주기엔 아까운 떡이랄까?
박주혁은 눈을 빛내며 안태희 주사에게 물었다.
“해외 매각을 윤허하지 않겠다면... 벤타가 인수할 방법이 없겠군요.”
박주혁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자, 안태희가 지나가는 말 처럼 중얼거렸다.
“정부 주도하에서는 그렇지만, DD 그룹은 판매하려 하고 벤타가 직접 인수한다는데 정부가 뭐라 할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벤타가 관심이 없다는 것이죠.”
‘그건 모르는 겁니다.’
안태희 주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박주혁이었지만, 속으로는 미소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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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를 마치고 집에 온 후에도 박주혁은 온통 DD 자동차 생각 뿐이었다.
‘메르헨에게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할까?’
정중하게 거절했던 사안을 다시 본인 입으로 얘기하려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대책 없었더라도 독일에서 그냥 덥석 잡았어야 했나? 이런 생각도 여러 차례. 박주혁은 고개를 털레털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정공법이다. 사실대로 얘기하는 거야. 뭘 어렵게 생각해?”
사실 고민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소기업의 사장이 DD 자동차 같은 대기업의 CEO가 된다는 것은 개천에서 용이 나오는 것 아니겠나? 파장이 엄청날 것이다.
메르헨이 CEO의 직감으로 박주혁에게서 뭔가를 느끼고 손을 내민 것 같았지만, 과연 박주혁에게 맡길지도 미지수···. 박주혁이 고민을 하다말고 머리를 흔들더니 중얼거렸다.
“안돼도 그만이야. 태우에게 담보 대출용으로 전락하는 것보다는 여러모로 벤타가 인수하는 것이 좋지.”
물론 박주혁이 CEO가 된다면야 청사진을 그릴 수 있다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DD 자동차는 벤타의 아시아 생산거점이 될 터. 이 점만 놓고 보더라도 과거보다는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지 않겠나.
박주혁이 밤새 고민하는 사이 월요일은 다가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본의 아니게 아침 일찍 출근한 박주혁은 최지훈 대리와 김진우의 밝은 인사에 겨우 웃을 수 있었다. 성과급을 지급한다고 해서였을까? 유독 이들의 얼굴이 밝아 보였다. 밤새 고민했기 때문일까? 박주혁의 살짝 굳어 있는 얼굴을 보고 최지훈 대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사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예?”
“얼굴이 좀 안 좋아 보이시네요. 무슨 고민이라도?”
“아. 좀 피곤한 것 뿐입니다.”
박주혁은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탕비실로 향했다. 평소와는 다른 그의 모습에 최지훈 대리와 김진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장님 무슨 일 있으신가 본데요? 얼굴이 안 좋으신데···.”
“그러게···.”
오전내 사장실에 틀어박혀 있던 박주혁은 점심 무렵 사장실을 나와 허인아 과장에게 말했다.
“백희나 선수 귀국 날이라 공항에 갑니다. 오후에 못 돌아올 수도 있으니 참고하세요. 급한 일 있으면 전화하시고요.”
“네. 사장님. 그런데 어디···. 편찮으세요?”
“아닙니다. 생각할 것이 많아서 그런가 보네요.”
박주혁은 자신의 얼굴을 한번 쓰다듬고는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
공항은 취재진으로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백희나의 우승 소식이 엄청난 화제를 몰고 온 듯했다. 백희나가 나올 게이트에 도착하니 낯익은 얼굴이 박주혁을 맞이했다.
“박 사장님?”
“백 이사님. 오랜만입니다.”
“이제는 그냥 연주라고 하세요. 퇴사했으니까.”
“벌써요?”
깜짝 놀라는 박주혁에게 백연주는 피식 웃어 보였다.
“희나 마중 오신 거예요? 연락이라도 미리 주시지.”
“정신이 없었네요. 희나에 대한 관심이 엄청나군요.”
박주혁의 말에 백연주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물론, 희나를 취재하기 위한 인파도 있지만, 대다수는 아마 럴커펠트 때문일 거예요.”
백연주의 말에 박주혁의 미간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 할아버지는 왜 온다고 해서···.’
신경이 안 쓰일 수 없었다.
베를린에서 자신의 무대에 서는 약속을 마음대로 해버리는 바람에 마음 한편 엄청난 짐이 되어버린 탓이다.
“그러게요. 그런 거물이 한국에 오다니 취재 열기가 뜨거울 수밖에 없겠군요.”
“한국에 패션쇼도 없는데, 왜 오는 걸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박주혁의 입에서 ‘저 때문에요’라는 말이 툭하고 나올 뻔했지만, 그저 이렇게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취재진 쪽이 웅성거리더니 공항에 별무리가 터졌다.
- 촤라라락!
카메라 셔터음과 플래쉬로 눈이 먹먹해질 때쯤, 백희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어? 오빠도 왔어?”
백희나의 말 한마디에 몇몇 카메라가 박주혁을 향해 움직였다.
- 촤라락!
백연주가 먼저 백희나를 꽉 끌어안고 축하의 말을 전한 뒤 박주혁은 미리 준비한 꽃다발을 백희나에게 주며 말했다.
“우승. 정말 축하해! 이제 LPGA 선수구나?”
“헤헤.”
백희나는 수줍은 듯 웃더니 박주혁을 와락 껴안았다. 백희나의 기쁨의 표출이었겠지만, 카메라가 저렇게 많은데···.
- 촤라락!
카메라 셔터음에 질릴 때쯤 누군가 소리쳤다.
“백희나 선수! 여기 좀 봐주세요!”
백희나는 꽃다발을 든 채 환하게 웃으며 취재진을 향해 몸을 돌렸다.
- 촤라락!
수많은 플래쉬와 셔터음 사이에서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백희나 선수 우승 소감 한마디 해주세요!”
“아니카 쇠렌스람과 끝까지 경쟁했습니다. 우승 비결은 뭡니까?”
“마지막 홀 퍼팅이 승부수였습니다. 그때 기분은 어땠습니까?”
쏟아지는 질문에 백희나가 당황하자, 백연주가 앞으로 나가 기자들의 질문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매니저이자 캐디 백연주의 전문가다움이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한 분씩 말씀하세요. 제가 지정해드리겠습니다. 손드시고 질문해주세요. 먼저 JA 기자분부터 질문하시죠.”
“우승 소감 부탁드립니다!”
백희나가 스포츠 기자들과 질의응답 시간을 가질 무렵 게이트에서 또 다른 거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엔 패션 쪽 기자들이 난리가 났다.
“나왔다! 럴커펠트다!”
- 촤라라락!
백희나가 먼저 나와 자리를 잡았기에 망정이지 동시에 나왔다면 난장판이 따로 없었을 것 이다.
럴커펠트는 메르헨과 팔짱을 끼고 같이 나왔는데, 메르헨은 챠넬 백과 캐리어 심지어 옷까지 챠넬로 도배를 하고 있었다. 마치, 챠넬 소속 모델인 것 처럼 말이다. 그것이 메르헨의 배려였다는 것을 나중에 들었지만, 어쨌든 메르헨의 남다른 미모 덕분에 럴커펠트가 더욱 빛난 것은 사실이었다.
럴커펠트는 취재 열기가 익숙한지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고, 곧 박주혁을 발견했다.
“오, 마이 고져스. 미스터 박!”
럴커펠트가 환하게 웃으며 박주혁을 향해 소리치자, 카메라가 또 다시 움직여 셔터를 눌러댔다.
‘아, 싫다.’
- 촤라락!
럴커펠트는 박주혁에게 다가와 껴안으며 박주혁의 손을 붙잡더니 취재진을 향해 박주혁을 소개하는 듯한 제스쳐를 취했다.
‘아니 대체 왜?’
- 촤라라락!
“저분은 누구십니까?”
박주혁이 질문을 바로 통역해서 알려줬고, 럴커펠트는 믿기 힘든 답을 해버렸다.
“마이 뮤즈.”
‘아 진짜. 왜 이래?’
박주혁이 당황할 틈도 없이 쉴 새 없이 터지는 플래쉬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는지 박주혁이 버럭 소리쳤다.
“통역하러 온 겁니다!”
박주혁의 말에 카메라 셔터음이 순간 멎었다.
“아, 뭐야 속았어.”
“럴커펠트가 농담한 거네.”
“한국 사람이 무슨 뮤즈야. 완전히 속았네.”
박주혁의 말에 취재진들이 어이없다는 듯 한마디씩 하더니 카메라를 럴커펠트와 메르헨에게 돌렸다.
“휴.”
기자들이 럴커펠트를 계속 쫓는 바람에 박주혁은 호텔에 도착하고 나서야 제대로 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미스터 박! 내가 직접 옷 선물하러 한국에 오게 하다니. 언빌리버블.”
“죄송합니다. 미리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노우노우. 덕분에 한국도 와보고 좋아요.”
럴커펠트와 인사를 끝낸 박주혁이 드디어 메르헨과 악수하며 말했다.
“정신없으셨죠?”
“재미있었어요. 내가 모델이 된것 같기도 하고···.”
메르헨이 갑자기 모델 포즈를 취하며 활짝 웃었다.
“어때요?”
메르헨의 질문에 럴커펠트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박수 쳤다.
“퐌타스틱!”
럴커펠트와 함께 있다보니 메르헨도 살짝 이상해진 것일까? 박주혁 혼자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았다. 한동안 웃고 떠든 후에야 비로소 메르헨이 본 모습으로 돌아왔다.
“DD 자동차 때문에 오셨다면서요?”
“손슈찬에게 들었나 보군요. 맞아요. DD 자동차와 미팅이 있죠.”
메르헨이 갑자기 정색하더니 박주혁을 뚫어지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어때요? 미스터 박. 아직도 제 제안은 유효합니다만···.”
메르헨 엘리넥은 눈을 빛냈고 박주혁은 그 눈빛을 담담히 받아내며 말했다.
“조건이 뭡니까?”
박주혁의 힘 있는 말에 메르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