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60화 (60/136)

060화 호박이 넝쿨째 들어온다.

럴커펠트가 박주혁에게 입힐 디자인을 완성했을 때는 박주혁이 이미 독일을 떠난 뒤였다. 그는 박주혁이 없다며 벤타에 난동아닌 난동을 피웠던모양이다. 그를 진정시키는데 메르헨 엘리넥이 직접 나서야 할 정도였다니 박주혁은 왠지 미안해졌다.

“그래서 럴커펠트가 한국에 간다던데요?”

“뭐라고요?”

손승찬의 말에 박주혁이 적잖이 당황했는지 목소리가 떨렸다.

“홀인원 상품도 배달해야 해서 메르헨도 갈 겁니다. DD 자동차와 미팅도 있고요.”

“···”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박주혁은 말을 할 수 없었다.

“가신 김에 박 사장님도 만난다고 했으니까요. 시간 비워 두십시오.”

“언제 오시는 겁니까?”

“메르헨 부사장이랑 럴커펠트씨, 그리고 백희나 선수와 함께 가실 겁니다요.”

화제가 백희나로 넘어가자, 손승찬의 목소리가 살짝 흥분했는지 한 톤 올라갔다. 한국인 아마추어가 우승을 했으니 그럴만도 하다.

“백희나와 같이 온다면 다음 주 월요일?”

“일요일 비행기니까 그렇겠네요.”

“그렇군요. 그런데 홀인원 상품은 뭐였습니까?”

“모르셨어요? 벤타 E클라스 최고급형이었어요.”

손승찬의 말에 박주혁은 입을 떡 벌렸다.

‘홀인원 했다고. 차를 준다고? 라운드 중 몇 번 나오는 것 아니었어?’

박주혁이 당황할 사이 손승찬이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박 사장님 하나 물어봅시다요. 대체 어떻게 하셨길래 부사장님과 럴커펠트 씨의 마음을 훔친 겁니까요?”

“···글쎄요.”

잘 모르겠다. 왜들 그렇게 박주혁을 찾는지 말이다. 심지어 럴커펠트는 모델로써 자신의 무대에 서달라고도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박주혁은 미간을 좁히며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메르헨이 한국에 온다라···.”

그렇지 않아도 DD 자동차, SB 전지 등 머릿속이 복잡했었는데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인물이 온다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어떤 식으로든 결말이 날 테니 말이다.

“부딪혀보는 거다. 밑져야 본전이니까.”

잠시 생각을 정리한 박주혁이 수화기를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네, SB 전지 김현옥 부장입니다.”

“안녕하십니까? 파인랭스 박주혁 대표입니다.”

“아! 박 사장님.”

박주혁은 벤타의 부사장이 한국에 방문한다는 사실을 넌지시 흘리며 말했다.

“김 부장님. 혹시 SB 전지에서는 리튬배터리 쪽으로는 개발 계획이 없습니까?”

“리튬배터리요? 당연히 있죠. 그런데 왜요?”

너무도 당연하다고 말하는 김현옥 부장의 말에 박주혁이 아차 싶었는지 황급히 말을 바꿨다.

“아, 죄송합니다. 2차 전지를 말씀드린 겁니다.”

“2차 전지면, 리튬 이온 전지 말씀이시군요···.”

김현옥 부장이 그제야 말끝을 흐렸다.

역시 박주혁의 예상대로 SB 전지는 리튬 이온 쪽으로 개발 계획이 없다는 확신이 섰다. 하기야 납축전지만으로도 세계 1위를 점유하는 SB 전지 입장에서야 기술개발에 투자할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전기차에도 이 납축전지는 기본적으로 들어가니···.

그로 인해 극성, 삼송, SJ가 세계를 호령할 때 SB는 빠져있었던 것이겠지. 추후 SB 전지도 리튬배터리만 개발 및 생산하는 계열사를 만들지만, 너무 뒤늦은 시장 진입이었다.

박주혁은 전화를 끊으며 중얼거렸다.

“극성화학이 정보전자소재 쪽으로 시선을 돌린 상태가 아니라, 지금이 SB 전지에 적기이긴 할 텐데···.”

극성화학이 리튬이온전지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것보다 축전지 기술을 이미 확보한 SB 전지가 기술개발 속도에서 훨씬 앞설 것이다. 가능성은 충분했다.

“퍼즐 조각은 모이는 것 같은데···.”

박주혁은 주먹을 가볍게 말아쥐며 눈을 빛냈다.

#

박주혁이 DD 자동차에 신경을 쓰고 있는 동안, 파인랭스 개발팀은 어느덧 랭귀지패스트를 1.0 베타까지 개발했다. 아직 시장에 내놓기에는 미흡하지만, 번역연구팀의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결과 기능적으로 트레이도스와 유사한 수준까지 올라왔다. 물론 초기 버전 트레이도스 말이다.

- 똑똑.

“사장님.”

“아. 심 대리. 무슨 일이죠?”

심영찬이 미소를 머금은 채 박주혁에게 다가와 말했다.

“랭귀지패스트 1.0을 완성했습니다. 확실히 디자이너가 있으니, 프로그램이 더 직관적이고 좋긴하네요.”

박주혁은 심영찬이 오해영을 추켜세우는 모습을 보니 아직 그녀에 대한 애정이 식지 않았나 보다. 박주혁은 피식 웃더니 답했다.

“벌써 1.0이라니···. 많이 발전했나 보군요.”

“조금만 더 손보면 시장에 내놓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 정도까지?”

박주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심영찬을 쳐다봤다. 그의 해맑은 웃음에서 자신감이 엿보였다.

“어디 봅시다.”

“넵!”

“박 팀장과 구 과장도 들어오라고 하시죠. 함께 얘기 나눠보고 싶군요.”

“알겠습니다.”

심영찬은 황급히 사장실을 열고 얼굴을 빼꼼히 내민 후 소리쳤다.

“박 팀장님, 구 과장님 잠시만요.”

“왜?”

“랭귀지패스트 시연좀 하려는데 사장님께서 의견을 들어보고 싶으시다고 해서요.”

“아. 오케이.”

박영희 팀장과 구 과장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 개발팀 공대 3인방과 오해영의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들의 작업이 회사 선임자들에 의해 평가받는다고 생각하니 당연히 긴장될 터.

- 꿀꺽.

박주혁이 호출한 사람들이 모이고, 심영찬은 랭귀지패스트의 첫 화면을 스크린으로 옮겼다.

첫 화면은 오해영이 디자인한 파인랭스 로고가 큼지막하게 나타났다. 박주혁이 로고를 보며 씩 웃으며 말했다.

“누가 로고를 만들었는지 참 마음에 드는군요.”

“하하하.”

사장실에 있던 일동이 모두 큰 소리로 웃었다. 심영찬은 랭귀지패스트가 가동되자 화면을 보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우선, 컨텐츠메모리가 구축된 제안요청서로 랭귀지패스트를 시연해보겠습니다.”

TM(Translation memory)대신 CM이라는 용어까지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박주혁은 피식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트레이도스에 대해 얼핏 설명한 것으로 여기까지 오다니. 실로 심영찬의 재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시연을 확인한 박영희 팀장과 구경숙 과장의 얼굴이 상기되는 것이 상당히 업그레이드된 듯했다.

“수고했습니다. 박 팀장님, 구 과장님 어떠십니까? 실제로 사용할 사람들의 의견이 궁금하군요.”

먼저 구경숙 과장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심 대리님. 이거 언제 배포할 수 있나요? 번역사들도 사용해야 제대로 된 효과가 날 것 같은데요.”

“구 과장님. 예리하시네요. 오늘 시연한 목적도 사실 그것 때문입니다.”

심영찬이 말을 마치고 박주혁을 넌지시 쳐다봤다. 어떤 결단을 내려달라는 그의 눈빛에 박주혁은 씩 웃으며 말했다.

“우선은 내부에서 기능과 안정성 테스트를 지속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번역연구팀에서는 중복되는 일들도 있겠지만, 그게 먼저라 생각이 드는군요.”

심영찬은 박주혁이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구경숙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심형직 번역사에게만이라도 이 프로그램을 무료배포해보면 어떨까요?”

“음···.”

구경숙이 이렇게 나오는 것도 이해됐다. 아무리 내부에서 랭귀지패스트를 사용하려 한들, 번역사가 사용하지 않는다면 소용없는 일이니 말이다.

“틀린말은 아니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박주혁의 말에 심영찬이 귀를 쫑긋거렸고, 박영희 팀장도 궁금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쳐다봤다.

“현재 랭귀지패스트는 내부에서 사용하기 적합한 스튜디오 개념입니다. 모든 기능이 들어가 있죠. 예를 들어 CM 생성, 수정 그리고 적용까지요. 그런데, 과연 그런 기능까지 번역사들이 사용해야 할까요?”

박주혁의 말에 아차 싶었는지 심영찬이 자신의 손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탄식했다.

“맞네!”

박영희 팀장도 수첩을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화들짝 놀랐다.

“그렇네. 모든 기능이 있을 필요가 없잖아. 번역사들은 우리가 CM 돌려놓은 상태에서 시작해서 납품하고, 우린 그걸로 다시 CM을 업데이트하면 되는 것 아닌가?”

“맞아요. 팀장님.”

박영희 팀장과 심영찬이 서로를 마주 보며 프로그램 얘기를 할 때 박주혁은 구경숙에게 넌지시 말했다.

“구 과장.”

“예?”

“빨리 사용해보고 싶습니까?”

박주혁의 말에 구경숙이 배시시 웃더니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이미 랭귀지패스트의 효율을 체감했던 사람이라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리라. 박주혁은 구경숙 과장에게 웃어 보이며 넌지시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됩니다. 그전에 CM을 많이 만들어둬야 편할 겁니다.”

“예.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이제 1.0이 개발됐으니 조금씩 만들어둬야겠어요.”

박주혁은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심각하게 토론중인 박영희와 심영찬에게 말했다.

“자, 이제 개발팀과 번역연구팀이 회사용과 번역사용으로 프로그램을 어떻게 분할하는 것이 좋을지 조율해보십시오.”

“알겠습니다.”

“심 대리. 고생 많았고 조금 더 고생해주세요.”

회의가 끝나고 얼마지나지 않아, 허인아 과장이 결재판을 들고 비장한 얼굴로 사장실로 들어왔다.

“사장님.”

“네. 허 과장. 성과급 기안인가요?”

박주혁이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허인아 과장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결재판을 넘긴 박주혁이 기안지를 천천히 살폈다.

‘흠. 나쁘지 않군.’

너무 과하지도 적지도 않은 금액을 허인아 과장이 잘 정리해서 가져왔다. 박주혁은 기안지에 서명하려다 말고 넌지시 허인아 과장에게 물었다.

“그런데 하나 빠진 게 있네요.”

“예? 뭡니까?”

“왜 제 성과급은 없는 거죠?”

“예? 어! 아···.”

박주혁의 성과급을 자신이 챙긴다고 생각지 못했는지 허인아 과장이 멍하게 박주혁을 쳐다봤다. 평소 그리도 또랑또랑하던 그녀의 저런 표정을 바라보고 있으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허인아 과장은 민망했는지 결재판을 낚아채듯 챙기며 목소리를 높였다.

“바로 수정해오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얼굴을 붉히며 나간 허인아 과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박주혁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나도 성과급은 받아야죠. 고생했는데···.’

#

회사일을 챙기다 보니 어느덧 일요일이 되었다.

새벽같이 일어난 박주혁은 가평으로 향했다. 골프장에 도착하니 로비에서 먼저 도착해 있던 이원희 지사장이 환하게 웃으며 박주혁에게 다가왔다.

“어이! 박 사장.”

“지사장님. 정말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박주혁은 이원희 지사장의 손을 맞잡으며 반가움을 표했다. 커피와 함께 친분을 나누고 있으니 곧 유명한 국장과 안태희 주사가 들어왔다. 그들은 이미 서로 알고 있는 사이였던 것 같다.

“안녕하십니까!”

유명한 국장은 이원희 지사장에게 허리를 숙이며 깍듯하게 인사하자, 안태희 주사도 얼결에 함께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통상산업부 안태희 주사입니다.”

“반갑습니다. 이 사무관에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욕 아니면 다행이죠.”

“하하하.”

인사치례가 끝나고, 일행은 라운딩을 시작했다. 파인랭스의 스폰이었으므로 1번 홀 티샷은 박주혁이 먼저 하게 됐다. 사실 완전히 등 떠밀려서 한 것이지만, 그것이 뭐 중하랴.

티박스에 선 박주혁은 공을 올려놓고 목표를 쳐다본 후 어드레스를 취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유명한과 이원희가 박주혁의 어드레스를 보고 놀라 속삭이는 소리가 얼핏 들렸다.

“박 사장 골프 이제 배웠다며?”

“분명 제겐 그렇게 얘기했었는데요···. 하여간 영업하는 사람들 믿을 수 없다니까요.”

“그러게, 저 어드레스가 무슨 초보자야.”

“오늘 박 사장 벗겨 먹긴 글렀나 봅니다. 선배님. 돈 많이 챙기셨어요?”

유명한 국장의 장난스러운 말에 이원희 지사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하하. 선배님. 설마, 저희 주머니 털러 오신 겁니까?”

“당연하지.”

그래도 구력이 제법 있는 이원희가 돈좀 따는 재미를 보려나 했는데 박주혁의 폼을 보고 살짝 기가 죽어버렸다. 그들의 수다를 무시한 채 박주혁은 침착하게 티샷을 날렸다.

- 깡!

호쾌하게 날아가는 공을 보며 이원희와 유명한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뭐야.”

“헐.”

생각보다 폼이 좋은 박주혁 때문에 자연스레 유명한과 이원희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누군가 그랬다.

골프는 심리 게임이라고 말이다.

긴장한 표정으로 이원희가 티박스에 오르자, 박주혁이 소리쳤다.

“지사장님. 긴장 푸세요!”

박주혁의 호쾌한 장거리 티샷을 본 뒤라 그런지, 이원희의 몸이 경직됐다.

- 틱! 데구르르.

“아. 이런!”

이원희의 탄식이 오늘 경기가 뜻대로 풀리지 않을 거라는 암시였다.

18홀을 마치고 박주혁은 예약된 오리백숙 집으로 향했다. 경기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원희와 유명한은 벌써 술을 따라 마시고 있었다.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가자, 자연스럽게 일 얘기로 넘어가게 됐다. 다들 초면인 안태희의 얘기가 궁금했을 터.

“저는 요새 자동차산업 구조조정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아주 죽을 맛이네요.”

“업계에서 난리인가 보구만?”

유명한 국장이 지레짐작하여 말했고, 이원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구조조정 대상이 되는 것조차 꺼릴진대 대놓고 구조조정을 하겠다고 하면 난리일 것이 뻔하지 않나.

“예. 그것도 그런데, DD 자동차 합병 문제 때문에 아주 구린내가 납니다. 태우와 미래에서 어찌나 로비에 열을 올리는지···.”

진저리난다는 듯 안태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박주혁은 안태희의 얘기에 집중하며 중얼거렸다.

‘이거 호박이 넝쿨째 들어오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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