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59화 (59/136)

059화 차라리 잘됐네.

퇴사하겠다는 요키아 백연주 이사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으며 박주혁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희나가 LPGA 진출하게 되면 제가 캐디를 하기로 했거든요.”

“···”

백연주가 요직에 있을 때 단독 벤더로 등록했으니 망정이지 자칫하다간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칠 뻔했다.

“애초에 계획이 다 있었군요···.”

박주혁이 말끝을 살짝 흐리자, 백연주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희나가 골프에 입문할 때부터 약속했던 거라서요.”

“그렇군요. 예상하지 못했던 거라 좀 당황스럽네요.”

“요키아와 거래는 문제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백연주가 당장 퇴사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계약도 이미 되어 있었고 말이다. 요키아 구매부 이사에서 골프 캐디로 변신이라니 의외의 선택이었지만, 걸어 다니는 기업이라는 소리를 듣던 백희나였던 만큼 큰 문제는 없을 터.

박주혁은 전화를 끊고 커피잔을 입에 가져갔다.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그때 사무실 전화기가 울렸다.

“네, 파인랭스 박주혁 대표입니다.”

“박 사장, 잘 지냈나? 나 주배정이네.”

“아, 사장님 안녕하세요.”

“독일에 갔었다며?”

“소문이 빠르군요.”

주배정은 요키아에서 정말 3,000개를 주문했다며 무척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박 사장, 덕을 톡톡히 봤어. 내 성격상 도움을 받으면 그냥은 못 넘어가지. 소개해 줄 사람이 있는데 시간 좀 비워 줘.”

“주 사장님 소개라면 당연히 가야죠.”

박주혁은 주배정과 약속을 정한 후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당장 점심에 만나자고 할줄은 몰랐네. 하긴, 주 사장님 스타일은 이런 식이었지.”

박주혁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장실을 열고 나오니, 허인아 과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어디 가세요?”

“배정산업에서 좀 만나자고 해서요.”

“아.”

“무슨 일 있습니까?”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잠깐 시간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허인아 과정이 자못 비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박주혁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손목시계를 힐끔 쳐다본 박주혁은 허인아 과장에게 사장실로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사장실 문이 닫히고 허인아 과장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사장님, 저···.”

“말씀하십시오.”

“이런 말씀 드리는 것이 조심스럽긴 합니다만···.”

비장한 얼굴과 달리 허인아 과장이 쉽사리 본론을 꺼내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무슨 얘기길래 저러지?’

박주혁이 고개를 갸웃할 때쯤, 허인아 과장이 결심이 섰는지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고생한 직원들에게 성과급을 지급하면 어떻겠습니까?”

막상 말을 뱉어놓고 허인아 과장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박주혁은 미소지으며 허인아 과장의 어깨를 툭툭 내려치며 말했다.

“먼저 말해줘서 고맙군요. 기안 올려보세요.”

“경영지원팀은 안 주셔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팀이 고생한 것을 알기에 사기진작 차원에서···.”

누군가가 등 떠밀어서 한 말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고생한 동료를 위하는 마음으로 제안한 것이리라. 박주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부드럽게 말했다.

“다 같이 고생한 겁니다. 경영지원팀도 뒤에서 서포트 한 것 아니겠습니까? 팀원들과 상의해서 기안 올려보세요.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

박주혁은 강남구 선릉으로 향하며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먼저 얘기를 꺼내주다니 정말 고맙군.”

박주혁도 OECD 프로젝트 마감과 동시에 성과급을 고려하고 있었다. 곧 얘기하려 했는데 허인아 과장이 먼저 성과급을 언급할 줄이야. 솔직히 좋았다.

허인아 과장이 공개적으로 성과급을 언급함으로 인해 직원들의 기대감이 더욱 커질 뿐 아니라, 경영지원팀의 위상도 높아지는 좋은 수였다. 경영자와 직원 간 수직적 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를 맺어가는데도 긍정적인 효과를 나타낼 터. 성과급을 언급한 허인아 과장이 흡족할 수밖에···.

허인아 과장이 어떤 기안을 가져오더라도, 박주혁은 서명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모두의 노력이었던 만큼 성과는 나눠야 한다. 물론, 기여도에 따라 차등은 있겠지만 말이다. 성과급을 받고 좋아할 직원들을 생각하니, 박주혁의 마음 한쪽 편이 따뜻해졌다.

강남구로 접어들며 박주혁은 주배정 사장이 뜬금없이 소개한다는 사람을 떠올렸다.

“SB 그룹이라고 했었지?”

시스템에서 SB 그룹을 검색해 봐도 전혀 이력이 없었다. 생전 파인랭스와 거래가 전혀 없었다는 뜻이었다. 웬만한 기업이 한 번쯤은 거쳐 갔을 법한데 말이다.

“흠. 부딪혀보는 수밖에···.”

선릉에 도착한 박주혁은 주배정 사장에게 전화를 했다.

“사장님. 선릉에 도착했습니다.”

“어! 박 사장. 여기가 어디냐면···.”

주배정 사장의 안내에 따라 이동하는데, 마침 SB 그룹의 빌딩을 앞을 지나게 됐다. 그리고 빌딩 앞에는 박주혁의 시선을 사로잡는 캐릭터가 서 있었다. 만화에서나 봤을 법한 캐릭터로 눈이 얼굴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특이한 헬멧까지 쓴 살짝은 유치한 느낌의 남자 캐릭터였다. 박주혁은 캐릭터를 지나치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디서 많이 봤었는데···?’

박주혁의 시선은 캐릭터에 고정됐고 가슴과 헬멧에 새겨진 ‘R’자를 확인하자, 박주혁이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아! 로보트 밧데리.”

SB 그룹은 로보트 밧데리로 세간에 알려졌지만, 사실 SB 그룹의 주 사업은 물류였다. 수출입 컨테이너의 하역, 운송 보관 등 국가 경제의 핏줄과 같은 역할을 해온 기업이었다. 오늘 만날 사람도 SB 그룹 사람임을 가정해 봤을 때 물류 쪽일 것이라 짐작됐다. 박주혁은 주배정 사장이 말한 식당의 문고리를 잡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수출입 관련 문서라면, 직접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텐데... 굳이 번역을?’

현장에서 바로바로 처리해야하는 물류업 특성상 번역을 하게 되면 시간 낭비였다. 그런데 번역이 필요하다? 조금 의아한 일이었다.

“어! 박 사장. 여기야 여기!”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주배정 사장이 큰 목소리로 박주혁을 불렀다.

“안녕하십니까?”

“박 사장. 여긴 김현옥 부장이라고 하네.”

주배정 사장의 소개로 박주혁은 김현옥 부장과 악수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파인랭스 박주혁 대표입니다.”

“SB 전지 해외 영업 김현옥 부장입니다.”

김현옥 부장의 명함을 받아든 박주혁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물류가 아니라 전지였군? 그렇다면 말이 다르지.’

의문을 품고 있던 박주혁의 눈빛은 돌변해 번뜩였다. 박주혁의 눈빛을 읽어서였을 까? 주배정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 SB 전지에 더블백을 납품했지. 김 부장님이 적극 추천했다더군.”

“아, 그러셨습니까?”

박주혁이 빠르게 답하며 김현옥 부장을 바라봤다. 김현옥은 씹고 있던 음식을 삼키며 말했다.

“더블백 집에서 써봤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안 그래도 허리가 고질병이었는데 말이죠. 그래서 건의를 했더니···. 직접 알아보고 기안을 올리라고 하는 통에 고생 좀 했습니다.”

박주혁의 경우는 시스템을 통해 배정산업을 알고 있었지만, 김현옥 부장에게는 제한된 정보만 있었을 것이다. 가구점에서는 직거래를 막기 위해 배정산업의 존재를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고, 인터넷에는 정보가 없었다. 백방으로 수소문을 했을 김현옥 부장의 고됨이 이해가 갔다. 박주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희도 구매에 애를 먹었었죠.”

“박 사장님도 더블백을 구매하셨군요?”

좋은 제품을 알아본 사람들끼리의 동질감일까? 박주혁을 바라보는 김현옥 부장의 눈길이 살짝 부드러워졌다. 김현옥 부장의 물음에 주배정이 칼같이 답했다. 마치 자랑스럽다는 듯 말이다.

“우리 1호 고객님이시지.”

“정말입니까? 아. 파인랭스를 알았으면 일이 쉬웠겠네요.”

김현옥 부장이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더블백 구매하면서 주 사장님과 몇번 만났는데 계속 파인랭스를 말씀하셔서 소개해달라고 했습니다.”

“주 사장님께서요?”

“예. 아주 괜찮은 녀석이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는 통에 꼭 한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마침 번역할 일도 있고 말이죠.”

김현옥 부장의 말에 주배정 사장이 갑자기 어깨가 쫙 펴진 것 같았다. 박주혁은 주배정 사장의 모습에 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애써 참으며 김현옥 부장을 바라봤다.

“이번에 SB 전지에서 유럽에 진출하려고 합니다. 저희가 차량용 전지에 강점이 있는 것은 아시죠?”

“자동차 배터리는 로보트 배터리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국내에선 그렇지만, 해외에서는 아직 입니다.”

김현옥 부장의 말에 주배정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김 부장. 제품에 그렇게 자신이 없어서야 영업을 어떻게 하나? 로보트 배터리가 국내 기술로 만든 최초의 배터리인데 자부심을 가지라고!”

같은 제조업이라서일까? 주배정은 김현옥 부장의 자신 없는 태도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제품에 대한 자부심이야 있죠. 그래서 자동차 제조의 선두라 여겨지는 독일을 뚫어볼까 합니다.”

독일이라는 말에 박주혁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WV, ADIO, 벤타, BW 등 세계적인 제조사들에 로보트 배터리를 납품해볼 생각입니다.”

김현옥 부장의 포부를 듣던 주배정이 흡족한 듯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김 부장답군. 그런 야심이야말로 영업의 기본 아니겠어? 하하.”

번역도 번역이지만, 주배정은 김현옥 부장이 마음에 들어 박주혁에게 소개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독일이라면, 분명 파인랭스가 도울 수 있다. 심지어 벤타와 연결고리도 있고 말이다. 박주혁이 파인랭스의 강점을 얘기하려는 순간, 주배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배터리가 로보트 배터리면, 번역은 파인랭스지. 내가 한번 믿고 맡겨보라고 했어!”

주배정의 말에 박주혁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김 부장님. 어쩌면 제가 도와드릴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까? 우선 로보트 배터리 카다로그를 독일어로 번역해 주시면 제가 열심히 뛰어 봐야죠.”

“아니요. 번역도 번역이지만, 제가 다리를 놔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리를 놔준다는 말에 김현옥 부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박주혁을 빤히 쳐다봤다.

“다리요?”

“예. 말씀하신 독일 자동차 업체 중 한 곳과 연결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현옥 부장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박주혁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번역은 무조건 파인랭스라고 제가 약속하겠습니다.”

“같은 국내 기업끼리 돕는 것이죠. 별도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박주혁과 김현옥을 바라보던 주배정이 환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아직은 사람 보는 눈이 죽지 않았구만? 하하하.”

#

점심 식사를 끝내고 박주혁은 김현옥 부장의 권유로 세방 전지의 부서들을 돌며 파인랭스를 소개할 기회를 잡았다. 김현옥 부장을 쫓아 정신없이 인사를 한 후 주배정 사장이 왜 이 사람을 소개하려 했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똑 닮았다.’

추진력과 강단을 보아하니 분명 같은 성향이었다. 그렇기에 주배정 사장의 마음에 들었으리라. 김현옥 부장 덕에 기를 빨리고 회사에 복귀하니 어느덧 5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박주혁은 의자에 등을 기대어 잠시 한숨을 돌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가만, SB 전지면 리튬배터리도 충분히 개발할 수 있었을 텐데···. 왜 2차전지에서는 활약하지 못했지?”

극성화학, 삼송SDI, SJ화학 등 국내 배터리 제조업체가 향후 세계를 호령하겠지만, 거기에 SB 전지는 빠져있었다. 세계 시장 점유율 1위 축전지 로버트 배터리라는 명성에 취해 기술개발을 게을리했을 거로 추측됐다.

“음···.”

무슨 생각인지 박주혁이 한참 미간을 좁힌 채 털을 쓰다듬더니 수화기를 들었다.

“구텐탁. 손슈찬 본 벤타”

“손승찬씨 오랜만입니다. 박주혁입니다.”

“어? 박 사장님!”

손승찬이 목소리를 높이며 반갑게 답하더니 갑자기 버럭 소리쳤다.

“지금 난리가 났습니다요! 왜 그냥 그렇게 가셔서···. 절 이렇게 곤란하게 만드셨습니까요?”

“예? 분명 사전 이벤트 끝나면 복귀한다고 말씀드렸었는데요?”

“그래도 그렇지요. 하루나 이틀 정도 더 있다 가시지···.”

다짜고짜 목소리를 높이며 투정 부리는 손승찬이 낯설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박주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당황하는데 손승찬의 속사포 같은 하소연이 이어졌다.

“홀인원을 하시고 상품 수령도 안 하셨어요! 홀인원 했다고 왜 말씀 안 하신 겁니까요? 같은 조 사람들도 나중에나 말해서 제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십니까요? 럴커펠트씨는 또 얼마나 찾으셨는데요. 지금도 계속 전화가 온단 말입니다요.”

“아아···.”

홀인원 상품이 있는지는 꿈에도 몰랐고, 럴커펠트와의 약속은 잊고 있었다. 옷을 선물해주면 입기로 했었는데···.

‘차라리 잘됐네.’

아무리 챠넬의 수석 디자이너 럴커펠트라지만, 허벅지와 어깨 뽕이 들어간 괴상한 수트를 입고 싶진 않았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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