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58화 (58/136)
  • 058화 이제, 요키아를 퇴사할 수 있겠어요.

    일찍 퇴근한 박주혁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 TV를 틀었다.

    조금 이른 시각이었지만, 1시간 빠른 뉴스를 표방하는 한 방송사가 있어서 원하던 뉴스를 시청할 수 있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관심을 두지 않았을 뉴스가 오늘따라 박주혁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자동차 업계에서 대규모 구조조정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보도에 맹규형 리포터 입니다.]

    “판매 부진, 경쟁 심화로 자동차 재고가 누적되며 경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자구책으로 인원 감축과 사업본부를 통합하고 있지만, 노조의 반발로 그마저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DD 자동차 경영진은 각성하라!]

    [적자 속에도 성과급 1,000%를 받아 챙긴 경영진은 물러나라!]

    [직원을 사지로 몰아가는 악덕 사장은 물러나라!]

    “사정이 이럴진대 정부는 저번 달 삼송중공업의 상용차 진출을 허용하면서 기름을 부었습니다. 자동차 업계는 모두 반대성명을 발표했지만, 큰 성과는 없는 것 같습니다.”

    뉴스를 보던 박주혁이 미간을 좁히며 팔짱을 낀 채 턱을 쓰다듬었다.

    ‘음. 큰 관심이 없던 사안이었는데, 조사를 좀 해볼까?’

    “시스템 온. 검색, 보도문, DD 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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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주혁은 허공에 손가락을 올리며 스크롤 해 보도문들을 훑어봤다. 그중 눈에 띄는 제목들이 더러 있었다.

    [DD 자동차, 벤타사와 기술제휴로 승용차 시장 진출 / 93년 2월]

    [DD 자동차 상용차 트랙스타 유럽 진출 타진 / 94년 10월]

    [벤타 엔진 내년 부터 국내 생산 예정 / 94년 5월]

    [스포츠카 ‘칼스타’ 생산 재개할 수도 있다 / 95년 3월]

    박주혁은 스포츠카 ‘칼스타’라는 말에 고개를 잠시 갸웃거렸다.

    ‘DD가 스포츠카도 만들었었나?’

    자세한 히스토리는 모르겠지만, 기어 자동차에서 로터스 사의 스포츠카도 생산했었던 전례가 있었으니 시장에서 빛도 보지 못한 스포츠카가 있었을지도···.

    박주혁은 계속 보도문들을 훑었다. 그리고 앞으로 행보를 결정지을 수 있는 몇 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DD 그룹 만년 적자 계열사인 DD 자동차 벤타에 매각 추진 / 97년 4월]

    [DD 자동차 태우에 합병되나? /97년 12월]

    “벤타에서 인수를 위해 움직이긴 했었구나. 하지만, 시기가 너무 안 좋았네.”

    97년은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빙하기였다.

    1월 HB 그룹의 부도를 시작으로 3월 SM그룹, 4월 JR그룹 부도 유예, 10월 기어 자동차 법정관리, 11월 HT 부도 그리고 DD 그룹도 구조조정을 거쳐 해체 절차를 밟게 된다. 국내에 내놓으라 하는 대기업들이 줄도산하면서 정부는 산업계의 구조조정을 주도하게 된다. 그 틈을 유동성 위기에 놓인 태우그룹이 대출을 목적으로 DD 자동차를 품는다.

    애초에 목적이 대출이었기 때문에 깡통 인수였지만, 그 당시 정부는 미처 태우가 망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DD 자동차를 살리려면 지금이 적기이긴 태우에 인수되기 전인 지금이 적기였다. 박주혁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검색, EH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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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주혁은 EH슬라의 특허 번역을 살펴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걸 DD 자동차에 녹인다면···.”

    상상만 했을 뿐인데 박주혁의 볼이 상기됐다.

    과일을 들고 오던 최효정 여사가 박주혁의 벌건 얼굴을 보고는 다급하게 말했다.

    “주혁아! 열나니?”

    최효정 여사의 차가운 손이 박주혁의 이마에 올려졌다.

    “아니에요. 뉴스 때문에 흥분해서 그래요.”

    “뉴스? 무슨 뉴스길래 얼굴을 붉혀?”

    최효정 여사가 고개를 돌려 TV를 바라봤다.

    [자동차 노조는 연계하여 총파업을 시행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최효정 여사는 과일을 박주혁에게 건네며 혀를 찼다.

    “아주 연례행사네. 회사가 받아 주니까 더 저러는 거야.”

    박주혁은 날카로운 최효정 여사의 말에 진심으로 놀랐다. 분명 그런 부분이 있었다. 생산에 차질을 주면서 경영진을 압박하여 받아내는 임금인상과 성과급 인상은 피로가 누적되며 귀족노조라는 별명이 생긴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게 사람이다.

    시장 점유율 1위인 미래 자동차가 생산 차질을 두려워한 나머지 노조의 요구를 받아 주다 보니 최효정 여사의 말처럼 연례행사가 되어버렸다. 높은 연봉에도 불구 노조는 매년 파업했다. 그럼 사측은 임금 인상율을 최대한 낮추는 대신 상여금을 지급하는 악순환을 지속했다.

    오죽하면 자동차 공장에 취업하기 위해 노조위원장에게 뇌물을 쓰더라도 들어가려고 하겠는가? 몇 년만 일하면 뇌물보다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EH슬라의 특허로 DD 자동차를 부흥시키는 상상은 달콤했지만, 강성 노조와 부딪힐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안된다는 말은 아니지.’

    - 와삭!

    박주혁은 사과를 베어 물며 눈을 번뜩였다.

    #

    안태희 주사는 밤 10시가 돼서야 퇴근 준비를 했다. 자동차 업계에서 이번 구조조정에 많은 관심이 있는 만큼, 로비스트들이 통상산업부에 들끓었다. 각 자동차 업체에서 하도 귀찮게 하기에 일부러 늦게 퇴근하는 선택을 한 것인데···. 정말 집요한 녀석이 하나 있었다.

    “안 주사님!”

    “...”

    안태희는 미간을 좁히며 몸을 획 돌렸다.

    “제발, 좀 그만합시다.”

    “주사님 그러지 마시고 술 한잔하시죠?”

    “됐습니다.”

    안태희가 무시하고 차로 가려는데, 이 로비스트가 갑자기 안태희 곁에 붙더니 자동차 키를 건넸다.

    “이, 이게 뭡니까?”

    “나라를 위해 일하시는 안 주사님께 드리는 선물이지요.”

    안태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광택이 나는 자동차 열쇠를 빤히 쳐다봤다. 자동차 키에는 삼각별이 새겨져 있었다.

    “이런 식이면 곤란합니다.”

    “아, 주사님. 태우차에 힘 한번 실어 주시는데 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그 약조만 하신다면 이 키는 주사님 것입니다.”

    “이봐요. 곽철우씨. 태우차가 DD 자동차를 노리는 이유가 뭔 줄 아세요?”

    “예?”

    곽철우는 무슨 말을 하냐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 큰 자동차 회사가 되기 위한 것 아닙니까? 당연한 걸 묻고 그러세요.”

    하긴 단순히 자동차과 사람들을 로비해서 어떻게든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역할만 수행하는 사람이 뭘 알겠나. 안태희는 곽철우를 쳐다보다 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차에 탑승했다.

    “안 주사님! 저 절대 포기 안 합니다.”

    곽철우가 차 옆에서 빽 소리쳤다.

    안태희는 자동차 문에 윈도우 크랭크를 열심히 돌려 창문을 내리곤 말했다.

    “곽철우씨. 태우는 안돼.”

    “아, 제 오기를 시험하시는 겁니까? 벤타면 최고 대우입니다. 뭘 더 바라시는 겁니까?”

    “그딴 거 필요 없으니까. 헛수고하지 마세요. 그리고 내일부턴 찾아오지 마세요.”

    “아, 진짜. 이렇게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곽철우가 미간을 와락 좁히며 가슴팍으로 손을 넣었다. 순간 긴장한 안태희가 윈도우 크랭크를 다급히 역으로 돌렸다. 창문이 올라가는 것을 본 곽철우가 손으로 창문을 짚으며 상체를 차에 밀착시켰다. 그러더니 두툼한 봉투 하나를 툭하고 차 안에 떨어트리며 말했다.

    “더는 못해요. 이제 회의 때 태우차가 적임이라는 그 말 한마디만 하십시오.”

    “이, 이게 뭡니까!”

    곽철우는 봉투를 차 안에 떨어트리더니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 정도면 아무리 씹선비라도 넘어올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안태희는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그는 봉투를 열어보지도 않고 주워 곽철우의 얼굴을 향해 냅다 던졌다.

    - 퍽!

    “야 이놈아! 내가 거지인 줄 알아? 꺼져! 하여간에 이놈 저놈 다 돈에 팔려서 아주 정신을 못 차리지. 어휴 구린내!”

    면상에 묵직한 돈다발 뭉치를 얻어맞은 곽철우가 멍하게 서 있는 사이, 안태희는 시동을 걸고 유유히 주차장을 빠져나가 버렸다.

    곽철우는 땅에 흩뿌려진 돈을 주섬주섬 챙기며 미친 듯 웃었다.

    “하하하. 살다 살다 별꼴을 다 보네. 아주 혼자 깨끗하시지?”

    돈을 다 챙긴 곽철우는 안태희가 사라진 방향으로 몸을 있는 힘껏 발길질하더니 버럭 소리쳤다.

    “야 이 개새야! 너만 잘났냐? 어! 어휴 진짜.”

    #

    아직 시차 적응이 덜 됐는지 박주혁은 새벽같이 눈을 떴다. 일찍 일어난 김에 주말을 대비해 새벽부터 근처 연습장에서 공을 쳤다.

    - 딱!

    두 박스를 순식간에 친 박주혁이 집으로 돌아오자, 최효정 여사가 아침밥을 차려놨다.

    “잘 먹겠습니다!”

    흔히 볼 수 있는 된장국과 멸치볶음 그리고 계란말이는 맛있다. 정말.

    평소보다 조금 일찍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최지훈 대리와 김진우가 일찍 나와 사무실을 환기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 오셨습니까? 일찍 오셨네요.”

    최지훈의 인사에 고개를 살짝 끄덕인 박주혁은 잽싸게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봤다.

    8시 42분.

    “8시 30분으로 하자고 했는데 지켜지고 있는 겁니까?”

    박주혁이 김진우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고 김진우는 피식 웃으며 활기차게 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박주혁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더니 최지훈 대리와 김진우의 어깨를 두드리고 사장실로 향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박주혁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시스템 온. 검색, H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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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R(Human Resource), 인사팀 관련 번역이었다.

    “분명히 좋은 사례를 번역한 적이 있었는데···.”

    박주혁은 그렇게 한참을 파인랭스 시스템을 살폈다. 출근한 직원들이 사장실로 들어와 인사할 때는 스크롤 하던 손을 들어 자연스럽게 흔들었다. 계속 스크롤을 내리며 살피던 그때 드디어 박주혁이 원하던 자료를 찾았는지 주먹을 말아쥐며 외쳤다.

    “그렇지! 이거지.”

    [노사 협력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커뮤니케이션이다!]

    박주혁은 자신의 기억이 맞았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관련 번역을 클릭했다.

    많은 양의 글이었지만, 요지는 결국 투명한 결과 공유와 공감대 형성 그리고 정직한 대화에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한참을 읽어내려가던 박주혁은 한 구절에서 눈을 끔벅이며 스크롤을 멈췄다.

    [노동조합이 필요로 한다는 것 자체가 경영의 실패다.]

    ‘소름.’

    메르헨의 제안이 살짝 아쉬워질 찰나, 그의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네, 파인랭스 박주혁 대표입니다.”

    “오빠!”

    “어, 희나야. 지금 독일 새벽 아니야?”

    “맞아. 그런데 이걸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설마?”

    “헤헤.”

    백희나가 벤타 인비테이셔널에서 우승을 차지했다는 소식이었다. 물론, 아마추어라 상금은 단독 2위였던 아니카 쇠렌스람에게 넘어갔지만, 그래도 LPGA 1년 출전 보장권은 확보했다는 소식에 박주혁은 크게 소리쳤다.

    “이야! 정말 축하해 희나야. 이제 LPGA 선수네!”

    “헤헤 그렇게 되나?”

    “1년 출전 보장이잖아. 그럼 LPGA 선수지.”

    “오빠한테 축하받으니까 기분 좋네. 광고는 많이 나왔어?”

    이 상황에서도 파인랭스의 로고가 많이 노출됐는지를 걱정하다니···. 백연주와는 달리 인간미가 있다. 백희나와 통화를 끝내고 박주혁은 백연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단순히 고객 관리 차원에서 말이다.

    “네. 요키아 백연주 이사입니다.”

    “백 이사님. 박주혁 대표입니다.”

    “아, 대표님. 독일에서 돌아오시곤 연락도 없으시더니 살아계셨습니까?”

    “돌아오자마자 일들이 많아서요. 참, 소식 들으셨습니까?”

    백희나가 백연주가 아닌 박주혁에게 먼저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백희나의 우승 소식을 접한 백연주는 빽하고 비명을 질렀다.

    “저, 정말이에요? 우리 희나가 LPGA 선수들을 상대로 우승을 차지했다고요?”

    “네. 이런걸로 제가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곧 언론에 대서특필 될 겁니다. 축하드립니다.”

    “어머! 꿈 아니죠?”

    “꿈 아닙니다.”

    수화기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생의 우승이 그리도 기뻤을까?

    “고맙습니다. 박 사장님.”

    “예? 백희나 선수가 잘한거죠. 제가 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아니요. 벤타 인비테이셔널도 박 사장님이 만들어 내신 거잖습니까? 정말 고맙습니다.”

    박주혁으로 인해 연결된 것은 맞지만, 우승한 것은 백희나 아닌가?

    “백 이사님. 희나를 칭찬해 주십시오. 전 그저 다리만 놔드린 겁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었다. 유명한 국장의 단골 멘트, 이 멘트를 박주혁이 쓸 날이 오다니···. 누군가에게 희망과 행복을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성공한 것이라는 말이 있다. 박주혁은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훈훈하게 전화를 끊나 싶었는데, 백연주의 말에 박주혁의 표정이 굳었다.

    “덕분에 요키아를 퇴사할 수 있겠어요.”

    “···예?”

    아니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백연주의 비위 맞추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퇴사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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