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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57화 (57/136)
  • 057화 구린내가 진동하는 통상산업부

    자리를 비운 사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귀국하자마자 보고를 한단 말인가?

    ‘고객 클레임? 아니, OECD 프로젝트 납기를 못 지킨 것인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다. OECD 프로젝트 난이도와 분량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박주혁은 천천히 마른 입술을 뗐다.

    “말씀하십시오.”

    “OECD···”

    조광연 차장의 첫마디에 박주혁은 미간을 와락 구겼다. 우려했던 일이 터진 것이니까 말이다. 박주혁은 조광연의 말을 잘랐다.

    “클레임 강도는 어느정도입니까?”

    “예? 아니요. 납품 완료했고 오늘로 수금까지 끝났습니다.”

    “네?”

    예상과는 다른 전개에 박주혁이 잠시 눈을 끔벅이더니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수금까지 완료했다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박주혁은 짧은 한숨과 함께 전화를 끊고는 휴대폰을 잠시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큰 프로젝트를 마감했는데, 그냥 끝내면 곤란하지···.”

    박주혁은 휴대폰을 열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저 방금 도착했습니다.”

    “피곤하지? 어서 집으로 오려무나.”

    “그게 오늘 OECD 프로젝트 최종 마감이 됐다더라고요.”

    “그러니? 다들 고생했겠구나.”

    “···그래서 회사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

    아들 걱정이 앞섰던 최효정 여사는 입이 얼어붙었다. 하지만, 아들의 지위를 알기에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박주혁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최효정 여사는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그래. 직원들의 사기도 중요하지. 너무 늦지 않게 들어오너라.”

    “예. 어머니. 죄송합니다.”

    “아니. 너의 어깨에 있는 짐을 내가 덜어주지 못해 내가 미안하다.”

    최효정 여사의 말에 박주혁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울컥거리는 마음을 겨우 달래며 박주혁이 말했다.

    “사랑합니다. 어머니.”

    #

    사무실에 도착하니 해가 서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었다. 손목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후 5시였다.

    - 드르륵.

    캐리어를 끌고 박주혁이 사무실로 들어서자, 직원들의 눈을 휘둥그레 뜨며 박주혁을 쳐다봤다.

    “어, 사장님?”

    “아니 오늘은 귀가하시지 않고?”

    “왜 오셨어요?”

    직원들은 다들 박주혁의 등장이 놀랍다는 듯 한마디씩 했지만, 박주혁은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사장실에 캐리어를 내려두고 박주혁은 직원들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모두 회의실로 모이세요!”

    직원들이 비좁은 회의실에 모이자 박주혁은 갑자기 박수를 쳤다. 직원들이 모두 박주혁을 바라볼 때쯤 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OECD 프로젝트를 성공리에 끝마치다니, 여러분들이 자랑스럽습니다.”

    박주혁의 말에 직원들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박주혁은 직원들의 눈을 하나하나 맞추더니 말했다.

    “큰 프로젝트가 마감됐는데 그냥 집에 가면 섭섭하죠. 오늘은 회식입니다!”

    “오오!”

    직원들의 환호가 잦아들 때쯤, 박주혁이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독일에서 좋은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박주혁의 말에 직원들이 귀를 쫑긋거렸다.

    “챠넬의 수석 디자이너 럴커펠트를 직접 만나, 동아시아에 배포되는 챠넬 관련 번역을 우리가 맡기로 했습니다.”

    박주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직원들이 난리가 났다.

    “방금 챠넬이라고 하셨지?”

    “그, 그런것 같은데요?”

    “코코 챠넬 할 때 그 챠넬?”

    박주혁은 직원들의 반응을 보며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이 상상하는 그 챠넬 맞습니다. 아직 한국어 번역은 없지만, 일본어 번역을 우리에게 맡기기로 했습니다. 번역연구팀에서 신경을 좀 써주셔야 할 것 같네요.”

    박주혁의 말에 박영희 팀장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고, 직원들은 모두 감탄사를 내뱉었다. 기쁜 마음은 알겠지만, 번역하면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것이다.

    [황홀한 빛에 감싸인 듯한 엘레강스의 정수!]

    위 문장처럼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지만, 단가가 높은 만큼 확실한 매출처임은 분명했다.

    박주혁은 직원들이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모습이 눈에 선했지만, 여직원들이 이렇게도 좋아하니 그것으로 됐다.

    “여러 가지 축하할 일이 많군요. 오늘은 업무를 일찍 정리합시다.”

    “예!”

    경의선 철로 근처 신촌소금구이집은 파인랭스가 마치 전세를 낸 것 같았다.

    - 땡! 땡! 땡!

    화물기차가 지나가자, 경보음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조광연 차장이 소주병을 숟가락으로 때리며 소리쳤다.

    - 탱탱!

    “모두 주목! 회식에 앞서 우리 사장님의 한 말씀을 듣고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조광연이 소주병에 숟가락을 꽂아 양손으로 공손히 박주혁에게 건넸다. 우스꽝스러운 그의 모습에 직원들이 웃었다. 마이크 소주병을 받아든 박주혁은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직원들을 향해 말했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원, 투!”

    “잘 들립니다. 사장님!”

    “그렇습니까?”

    “예!”

    박주혁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모든 직원의 이름을 부르며 천천히 칭찬하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고기 냄새가 너무 좋습니다.”

    “하하하.”

    “파인랭스 식구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미숙한 절 따라오시느라 앞으로도 좀 힘들 겁니다.”

    박주혁의 말에 직원들이 씩 미소를 지었다.

    “더 길어지면, 평생 먹을 욕을 다 먹을 것 같으니 이만 줄이겠습니다. 그전에, 이모님!”

    박주혁이 난데없이 이모님을 크게 외치자, 직원들이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박주혁과 이모를 번갈아 봤다. 이모님은 다가오며 목소리를 높였다.

    “예. 몇인 분 드릴까요?”

    이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박주혁이 답했다.

    “그만 달라고 할 때까지 끊기지 않게 계속 주세요!”

    “우와아!”

    직원들의 환호 속에 이모님은 웃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

    시차 때문이었을까? 박주혁은 회식 자리를 끝까지 함께 할 수 없었다. 양해를 구하고 일찍 빠져나오긴 했지만, 푹 잤음에도 피로는 쉬 풀리지 않았다. 그래도 직원들 앞에서 항상 활력 넘치는 모습이어야 한다. 박주혁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큰 소리로 말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평소 루틴대로 커피와 신문을 들고 사장실로 향한 박주혁은 의자에 앉으며 기지개를 켠 후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 호록.

    ‘그래 역시 커피는 믹스지.’

    신문을 펼치자 익숙한 얼굴이 대문을 장식하고 있었다.

    [백희나! 아니카와 공동 1위!]

    박주혁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기사를 살필 때 사무실 전화기가 울렸다.

    “네, 파인랭스 박주혁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지멜스의 강상우 부장입니다.”

    “아. 강 부장님!”

    “본사에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궁금했을 게다. 리베이트를 요구한 입장으로서 살짝 불안하기도 했겠지. 박주혁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예.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본사와 협상이 잘되었나요?”

    “글쎄요. 다만, 최 선임님께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고 전해주십시오.”

    “하하하.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강상우가 잘 부탁한다는 말을 무척이나 강조하는 것이 꼴사나웠다. 박주혁은 알겠다고 답하고 전화를 끊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강 부장님 미안하지만, 파인랭스는 이제 본사랑 다이렉트로 거래하게 될 겁니다.”

    중국어와 일본어 샘플만 통과하게 되면 파인랭스는 지멜스 본사의 벤더로 등록된다. 그 말인즉슨, 한국 지사의 구매팀과는 더는 부딪힐 일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박주혁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유명한 국장님. 저 박주혁입니다.”

    “오! 박 사장. 독일 갔었다며?”

    “아니 국장님은 제 소식을 어찌 그렇게 잘 아십니까?”

    “가만히 있어도 그냥 들려오던데? 하하하.”

    유명한 국장은 사람 좋은 목소리로 웃었다.

    “OECD 프로젝트 대금이 어제 지급되었다고 보고 받았습니다.”

    “아. 당연히 줘야 하는 것 아니겠나? 선수금도 주지 않았는데 파인랭스에게 큰 짐을 지울 순 없지.”

    유명한 국장의 세심한 배려 덕에 번역사들에게 제때 번역료를 지급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월말에나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분명 유명한 국장이 힘을 쓴 것일 터.

    “OECD 프로젝트도 마감되었으니, 이원희 지사장님과 한번 뭉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좋지! 아 참, 봄바디어에서 한국 지사 설립을 추진 중이라고 하더군 올해 안에 아마도 설립될 것 같아.”

    “좋은 소식이네요.”

    “그렇긴 한데 이원희 선배는 걱정인 모양이더라고.”

    “어떤 게 말입니까?”

    “독일 기업인 지멜스가 의정부 쪽에 군침을 흘리는 모양이야. 일이 틀어지면 선배도 지사장 자리가 위험하니 걱정일 수밖에.”

    지멜스가 의정부 경전철에 군침을 흘리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의정부 경전철은 봄바디어 손에 떨어지니 큰 문제는 없을 터. 박주혁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이원희 지사장님을 위로하는 차원에서라도 만나야겠습니다. 일전에 골프 치자고 하셨죠? 머리도 식힐 겸 라운딩 가시죠.”

    “파인랭스의 스폰인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좋지! 좋아.”

    유명한 국장과 이원희 지사장에게 골프 스폰을 한다는 것은 은혜를 갚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기에 전혀 아깝지 않았다. 박주혁은 유명한 국장의 스케쥴을 확인한 후 이원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사장님! 저 박주혁입니다.”

    “오. 박사장. 잘 지냈나?”

    “예. 요새 봄바디어에서 번역을 많이 줘서 저희 직원들을 괴롭히신다고 들었습니다?”

    “음? 내가 괴롭혔군. 미안하네. 하하하.”

    “앞으로도 괴롭혀 주십시오.”

    박주혁은 자연스럽게 유명한 국장과 라운딩 얘기를 꺼냈고, 이원희는 기분 좋게 알겠다고 말하더니 뜻밖의 얘기를 꺼냈다.

    “정통부 이연호 서기관도 함께하면 어떻겠나?”

    “아, 그럴까요?”

    첫 만남에서는 조금 불편해하더니 어느덧 둘은 상당히 가까워진 듯했다.

    “요새 CDMA 때문에 번역이 많을 거야.”

    이래서 유명한 국장과 이원희 지사장에게 스폰하는 것이 전혀 아깝지 않은 것이다. 지멜스의 강상우처럼 그저 일만 맡기고 리베이트를 챙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원희와 전화를 끊고 박주혁은 바로 이연호 서기관에게 전화를 돌렸다.

    “서기관님. 저 파인랭스의 박주혁입니다.”

    “오. 박 사장. 오랜만입니다.”

    이연호는 파인랭스가 링크번역원이었다는 사실을 안 후로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박주혁이 라운딩 얘기를 꺼내자, 이연호는 잠시 스케쥴을 확인하는 것 같더니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아, 그날은 선약이 있는데···. 이거 매우 아쉽구만.”

    “그러시군요. 그럼 다음에 함께하시죠.”

    “그래야 할 듯하네. 미안해.”

    “아닙니다.”

    “그런데, 자리가 하나 비지 않나? 3인 플레이 요즘 잘 안 받아 줘. 가만있자···.”

    수화기 너머 이연호가 수첩을 뒤적이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이연호가 목소리를 키우며 말했다.

    “그렇지. 이 사람이라면 박 사장에게도 도움이 될 거야. 골프도 이제 막 입문했다니까. 내가 한번 연락해보겠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연호가 연결해주는 사람이라면···. 전화를 끊고 잠시 기다리니 이연호에게서 전화가 왔다.

    “박 사장. 시간 괜찮다는군. 통상산업부 안태희 주사라고 나와 가까운 사이야.”

    “통상산업부. 안태희 주사요? 알겠습니다. 연락해보겠습니다.”

    “그래. 다음에는 라운딩 꼭 같이하자고.”

    “예.”

    전화를 끊고 박주혁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통상산업부라···.”

    #

    통상산업부 자동차과 회의실.

    안태희 주사는 오늘도 같은 의제를 발의했다.

    “DD 자동차는 이미 92년부터 적자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자동차 업계의 구조조정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안태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이 의견이 쏟아져 나왔다.

    “DD 자동차를 태우 그룹 합병시켜야 합니다.”

    “태우라니! 미래 자동차에 힘을 실어줘야 국익에 부합된다니까요!”

    “맞습니다. 태우라니요. 이미 수치가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미래에 힘을 실어 줘야 자동차 산업에 힘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미래에 합병되면 독과점인데, 그 비난을 감수할 수 있습니까? 태우에 합병되어야만 건강한 시장 체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안태희는 서로 물고 뜯는 사람들을 멍한 눈으로 쳐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망할 새끼들. 돈 처먹고 아주 쇼를 하네.’

    회의실은 태우파와 미래파로 갈려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다. 안태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싸우지들 마시고, 대안을 내세요. 대안을!”

    “지금 대안을 내기 위해서 이렇게 얘기하는 거 아닙니까? 안태희 주사! 지금 우리가 놀고 있어요?”

    ‘후우.’

    회의는 또 그렇게 팽팽한 줄다리기 끝에 성과 없이 끝났다. 안태희는 미간을 좁힌 채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혼잣말을 했다.

    ‘결국 누가 돈을 더 많이 뿌리냐에 따라 결정되겠군. 아무도 미래를 보려 하지 않아.’

    미간을 잔뜩 좁힌 채 인상을 쓰고 있는데 책상 위, 전화기가 울렸다.

    - 뜨르릉.

    “네, 통상산업부 자동차과 안태희 주사입니다.”

    “안녕하십니까? 파인랭스의 박주혁 대표입니다.”

    ‘파인랭스 박주혁···? 아! 조금 전 연호가 말했던 사람이군.’

    “아, 안녕하세요. 이 사무관에게 연락은 받았습니다.”

    탈출구가 필요했는데 마침 잘됐다. 이연호 덕분에 기업 스폰으로 골프도 쳐볼 기회도 생기고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안태희는 피식 웃으며 수첩에 골프 라운딩 스케쥴을 적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콧바람 좀 쐬자. 여긴 구린내가 진동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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