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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56화 (56/136)
  • 056화 홀인원은 라운딩 중 몇 번이나 나와요?

    손승찬이 얼마나 메르헨 엘리넥을 잘 보필했는지 그녀는 한국 사람에 대한 호감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최고의 대우를 해드리죠.”

    “네? 하하하.”

    박주혁은 그저 웃어넘길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작은 회사라지만, 일개 회사의 대표에게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는 말을 저렇게 서슴없이 하다니.

    ‘장난이 심하잖아?’

    박주혁은 장난이라 생각했지만, 벤타의 부사장 씩이나 되는 사람이 좋게 평가한다니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박주혁은 웃으며 위스키를 들이켰다. 그런데 메르헨 엘리넥이 다시 한번 정색하며 말했다.

    “미스터 박. 지금 당장 답하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지요.”

    “진심이십니까?”

    박주혁의 물음에 메르헨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뭘 믿고?’

    박주혁이 의아한 눈으로 메르헨을 쳐다보자, 그녀는 상체를 쇼파에 기대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왜 이런 제안을 하는지 궁금한 눈치군요.”

    “···”

    박주혁은 대답 없이 위스키만 홀짝였다.

    “DD 자동차와는 기술협약 때문에 여러 차례 미팅을 진행했습니다···.”

    메르헨 엘리넥은 DD 자동차 임원뿐 아니라 실무진과도 수 차례 만나봤다는 얘기로 시작했다.

    경영자로서 메르헨의 눈에는 DD 자동차는 미래가 없어 보였다. 기술력도 부족했을 뿐 아니라, 임원들이 시장을 보는 눈이 너무 없었고 안일했다. 반면 실무진들은 열의가 있었으며 DD 자동차를 아끼는 모습 때문에 메르헨의 마음이 움직였다. 즉, 경영진을 갈아치운다면···. 어쩌면 DD 자동차가 달라질 수 있진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스터 박은 제 생각과 완벽히 일치하는 경영전략을 얘기했습니다. 솔직히 놀랐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하지만, 전 자동차 산업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거짓말이다.

    파인랭스는 미래 자동차와 그 계열사인 미래모비스, 미래오토에버의 전담 번역파트너이기도 했거니와 심지어 EH슬라의 특허권도 번역하지 않았던가.

    “미스터 박. 제가 무슨 학과를 전공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무용?”

    “무용이요?”

    메르헨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피식 웃었다. 분명 박주혁의 말이 싫지 않았으리라.

    “전 미대를 졸업했습니다.”

    “그러시군요. 예체능 쪽이지 않을까 짐작했습니다.”

    박주혁은 대충 둘러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과가 무슨 상관입니까? 당신은 성골인걸.’

    메르헨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경영은 해당 분야의 깊숙한 부분까지 몰라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번역회사를 경영하는 것과 DD 자동차를 경영하는 것이 다를 것이라 보십니까?”

    “음···.”

    분명 경영이라는 단어만 놓고 본다면 틀린 말은 아니다. 작은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것과 대기업을 경영하는 것은 규모의 문제일 뿐, 사실 맥락은 같은 법이니까.

    박주혁은 위스키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턱을 쓸며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파인랭스에는 저만 바라보고 있는 식구들이 있습니다. 전 그들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직원들을 식구라 표현하시다니···. 더욱 욕심나게 만드시는군요.”

    메르헨의 말에 박주혁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

    다음날.

    벤타 인비테이셔널의 사전 이벤트는 1조에 배정된 백희나의 우아한 티샷으로 시작되었다.

    - 깡!

    부드러운 백스윙 후 이어지는 피니시는 이제 막 골프에 입문한 박주혁이 봐도 아름다웠다.

    “굿 샷!”

    공이 하늘을 가르며 쭉쭉 날아갔지만, 백희나는 웬일인지 피니시 자세 그대로 멈춰있었다. 그 이유를 박주혁은 알 수 있었다. 왼쪽 어깻죽지에 떡하니 박혀있는 파인랭스의 로고. 백희나는 파인랭스의 홍보까지 신경 쓰고 있는 것이었다.

    ‘저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고마웠지만, 백희나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시합에 온전히 집중해야 할 터인데 파인랭스를 홍보해야 한다는 잡념이 끼어들어 혹시나 경기력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지···.

    박주혁은 티박스에서 내려오는 백희나에게 박주혁이 슬그머니 다가가 속삭였다.

    “희나야. 신경이 쓰이면 우리 로고 떼버려.”

    “음?”

    백희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왼쪽 어깻죽지를 어루만지며 웃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인데 이걸 떼라고요? 너무하네. 전혀 신경 안 쓰이니까 걱정 붙들어 매세요.”

    박주혁이 무슨 의미로 로고를 떼버리라고 했는지 알고 있었기에 백희나는 최대한 밝게 웃어 보이며 세컨드 볼 지점으로 걸어 나갔다. 백희나가 티박스에서 멀어진 후 몇몇 LPGA 프로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아이. 폼 봤어?”

    “느린 듯하지만, 임팩트는 강력하던데? 비거리가 한 260야드 나오겠는걸?”

    “뭐? 260! 맙소사. 아니카만큼 날린다는 거야?”

    선수들에게는 생소한 한국의 아마추어 골프 선수 백희나. 그녀의 티샷이 LPGA 선수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식전 이벤트는 순조롭게 진행됐고 드디어 박주혁의 조가 출발할 차례였다.

    “다음 출발하실 선수는 아니카 쇠렌스람!”

    박수와 함께 티박스에 올라선 아니카는 목표하는 방향을 날카롭게 쳐다보고는 티샷을 날렸다. 그런데 박주혁이 알던 자세와는 사뭇 달랐다.

    ‘헤드업?’

    백연주와 백희나가 그렇게 고개를 들지 말라며 빽빽 소리쳤었는데, 아니카는 임팩트 순간 고개를 벌떡 들며 일어났다. 그런데도 공은 똑바로 날아갔다.

    “굿 샷!”

    다른 사람들은 특이한 아니카의 스윙 폼을 알고 있었는지 대수롭지 여기는 것 같았다. 다음 순서는 박주혁이었다. 박주혁은 잔뜩 굳은 얼굴로 티박스에 올랐다. 그런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아니카가 곁을 스치며 속삭였다.

    “맘 편히 해요.”

    아니카의 격려 때문이었을까? 티를 꼽고 공을 올리는 순간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 깡!

    “나이스!”

    박주혁의 호쾌한 드라이버 샷에 주변에 있던 갤러리와 선수들이 흠칫 놀랐다.

    “뭐야. 아까 그 한국 꼬마랑 폼이 비슷한데?”

    “그러게···. 한국은 저런 폼을 구사하나?”

    박주혁이 티를 뽑아 티박스를 비우자, 화려한 옷을 입은 럴커펠트가 티박스로 올라섰다. 드라이버도 기하학적 무늬가 섞인 황금색이었다.

    - 탕! 데구르.

    화려한 옷과 골프채와는 달리 럴커펠트의 공은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갤러리들은 웃으며 외쳤다.

    “나이스 샷!”

    ‘저게···. 나이스 샷이라고?’

    박주혁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사전 이벤트는 그야말로 축제였다. 웃고 떠들고 심지어 술까지 마시며 라운드를 진행했다. 문화충격이었다.

    진지한 것은 내일 경기에 참여할 선수들 뿐인 것 같았다. 하기야 그들은 코스를 미리 익힐 기회였으니까. 럴커펠트가 내려가고 같은 조의 마지막 귀빈이 티박스에 입장했다. 그런데 어딘가 낯이 익었다. 럴커펠트가 같은 조라는 생각에 마지막 사람에 대해 무관심했었는데···. 사실 마지막 귀빈도 럴커펠트 못지않은 사람이었다.

    ‘메르헨이잖아!’

    - 깡!

    역시 성골답게 그녀의 스윙은 간결하고 깔끔했다.

    #

    아니카 쇠렌스람은 럴커펠트에게 바짝 붙어 원포인트 레슨을 하고 있었다. 럴커펠트는 그다지 배우고 싶은 생각이 없는 듯 보였지만, 아니카는 성심껏 알려주려 했다. 골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기회가 평생 있을까 말까 한 엄청난 일이겠지만, 럴커펠트에게는 그저 하루 재미있게 노는 날이었다. 럴커펠트와 아니카가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보며 피식 웃고 있는데 메르헨이 다가와 말했다.

    “미스터 박. 어제 말씀드린 제안 생각해 보셨나요?”

    “말씀드렸다시피 파인랭스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박주혁의 말에 메르헨 엘리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혹시라도···.”

    메르헨이 박주혁에게 뭔가 제안하려 했지만, 럴커펠트가 소리치는 통에 말을 끝맺지 못했다. 럴커펠트는 우아하게 양손을 흔들며 박주혁과 메르헨을 향해 뛰어왔다.

    “미스터 박! 메르헨 양. 좀 도와줘! 아니카가 날 골프 선수로 만들 생각인 것 같아!”

    “럴커펠트씨!”

    소리치는 럴커펠트 뒤로 아니카가 진지한 얼굴로 쫓아왔다.

    성실함과 예술적 천재성은 물과 기름 같은 것일까? 한바탕 소동이 있은 후, 럴커펠트가 박주혁에게 말을 걸었다.

    “미스터 박. 정말 모델 일해 본 적 없습니까? 아르바이트로라도?”

    “없습니다.”

    “거참, 아쉽군. 비율도 좋고 페이스도 좋은데···.”

    럴커펠트는 걷는 내내 박주혁의 주변을 돌며 입맛을 다셨다.

    “번역회사를 한다고요?”

    “네. 맞습니다.”

    참고 기다린 끝에 드디어 럴커펠트에게서 원하는 질문이 나왔다.

    “감상을 언어로 풀어내는 기술이 뛰어나다 싶었는데 그래서였군요.”

    ‘아니요. 그건 제가 살짝 커닝한 겁니다.’

    박주혁만 아는 사실이었지만, 럴커펠트가 그렇게 느꼈으면 된 거 아니겠나?

    “한국은 일본과 감정이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일본어는 혹시 번역 안 합니까?”

    “감정과 일은 별개라고 배웠습니다.”

    “미스터 박은 마인드까지 좋군요?”

    럴커펠트는 감탄한 듯 손뼉을 치더니 박주혁을 쳐다보며 말했다.

    “챠넬의 번역을 맡기면 번역할 수 있겠습니까? 패션업계는 좀 독특한 문장이 많아요.”

    “네, 접해봐서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톤 엔 매너를 찾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문제없을 겁니다.”

    “솔직히 말해줘서 고맙군요. 일본 얘들은 무조건 하이!라고 외치던데 말이죠.”

    럴커펠트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하더니 손을 불쑥 내밀었다.

    “미스터 박. 챠넬의 번역을 당신과 함께해보겠습니다. 단, 조건이 하나 있는데···.”

    박주혁은 손을 맞잡으며 럴커펠트를 쳐다봤다.

    “혹시 말입니다. 모델 일 한번 해볼 생각 없습니까?”

    “전 모델이 아닙니다.”

    “말을 바꾸겠어요. 제 무대에 한 번 서주세요.”

    “···!”

    박주혁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뜰 찰나, 럴커펠트는 자신의 샷을 위해 저만치 멀어져갔다. 그는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샷을 준비하더니 박주혁을 향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미스터 박! 약속한 겁니다?”

    럴커펠트의 무대에 서달라니! 챠넬 패션쇼에 일반인을 세운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린가? 너무도 황당한 제안에 박주혁은 쉽사리 답할 수 없었다. 박주혁이 우물쭈물하는데 메르헨이 다가와 나긋나긋 말했다.

    “챠넬을 고객으로 만드셨군요.”

    “벤타 인비테이셔널에 초대해 주신 덕분이죠.”

    박주혁의 말에 메르헨이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기회를 잡은 건 미스터 박이죠.”

    기회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것이 마치 자신의 제안을 수락하라는 것 같았다. 메르헨의 말에 박주혁은 머리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원하는 것을 얻고야 말겠다는 건가?’

    메르헨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건만, 그녀는 아직 포기하지 않은 것 같았다.

    어느덧 사전 이벤트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마지막 파 3홀.

    아니카 쇠렌스람의 티샷이 그린 정중앙에 떨어져 홀컵 쪽으로 뭉그적뭉그적 굴러 가깝게 붙었다.

    “와! 대단하군요.”

    “언빌리버블!”

    아니카는 별일 아니라는 듯 씩 웃으며 티박스에서 나왔고, 박주혁이 다음 순번으로 올라갔다. 챠넬이라는 고객을 확보했기 때문일까?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그래서인지 티샷 또한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딱!

    공이 똑바로 날아가 눈송이 떨어지듯 천천히 그린을 향해 떨어졌다. 그런데 방향이···. 예사롭지 않았다. 같은 조에 있던 사람들이 박주혁의 공을 바라보며 동시에 외쳤다.

    “어어어!”

    - 땡그랑!

    홀인원.

    “미스터 박! 축하해요!”

    “와우! 퐌타스틱!”

    “정말 욕심나는 사람이야.”

    각양각색의 축하를 받으며 박주혁은 아니카 쇠렌스람에게 물었다.

    “아니카, 이런 건 라운딩 중 몇 번이나 나옵니까?”

    박주혁의 질문 때문에 축하하는 분위기가 빠르게 식어버렸다.

    식전 이벤트를 무사히 끝내고 박주혁은 짐을 챙겨 로비에서 백희나를 기다렸다.

    “오빠! 가는 거야?”

    “가야지.”

    “피. 나 경기하는 것 보고 가지.”

    “미안. 할 일이 많아서 말이야. 어쨌든 좋은 소식 기다릴게.”

    박주혁은 백희나의 손을 꽉 힘껏 잡으며 응원할 때 누군가 박주혁을 불렀다.

    “미스터 박!”

    손승찬과 손의권이 차량을 준비해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박주혁과 악수하며 작별 인사를 했다. 막 차에 오르려는데 누군가 다가와 박주혁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메르헨 엘리넥이었다.

    “미스터 박. 제 제안은 아직도 유효합니다.”

    “아, 메르헨. 초대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정중히 인사를 하며 즉답을 회피한 박주혁은 차에 올랐고 곧 공항으로 출발했다. 메르헨의 박주혁이 탄 차량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쉽군. 하지만, 호랑이가 언제까지나 우리에 갇혀있지는 못하지.”

    메르헨은 미소 지으며 리조트로 몸을 돌렸다.

    #

    박주혁은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가판대에서 신문을 사 펼쳤다. 신문을 황급히 펼친 박주혁은 스포츠면에서 손을 멈췄다.

    [골프 천재 백희나! 벡타 인비테이셔널 1라운드 4언더파로 1위!]

    커다란 제목과 함께 백희나가 티샷하는 장면이 대문짝만하게 신문에 실렸다. 사진 속 백희나의 어깻죽지에는 파인랭스의 로고가 자리하고 있었다.

    “정말로 잘 보이는 위치였네. 그나저나 희나 정말 대단한걸?”

    박주혁이 미소 지으며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 그의 휴대폰이 낮게 울었다.

    - 띠리리.

    “네 파인랭스 박주혁입니다.”

    “사장님! 도착하셨습니까?”

    “아, 조 차장. 별일 없었습니까?”

    “보고할 것이 있습니다.”

    진지한 조광연의 말투에 박주혁의 표정이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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