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화 혹시 저와 함께 할 생각 없습니까?
패션 거장인 럴커펠트의 안목을 따라갈 수는 없었지만, 그와의 친분은 필요했다. 미래를 위해서. 사람들의 환호하는 사이 박주혁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시스템 온. 검색, 챠넬”
- 검색 완료.
- 총 12,024건이 검색되었습니다.
럴커펠트와 원할한 대화를 하려면, 깔깔이 같은 단어를 쓸 수는 없지 않겠나? 박주혁은 재빨리 프로젝트들을 살피며 챠넬이 애용한 단어들을 확인했다.
[신비로운], [절묘한], [파리지엥], [빛을 발하는], [환상], [기하학적] 등등. 쉽사리 쓰지 않는 단어들을 곱씹으며 박주혁이 아니카 쇠렌스람을 칭찬했다.
“아니카씨 그 옷을 걸치니 정말이지 눈이 부시게 빛나는 것 같군요.”
여타 사람과는 다른 감탄사에 럴커펠트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박주혁을 향해 고개를 슬그머니 돌렸다.
‘일단, 관심 끌기는 성공.’
박주혁은 살짝 미소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기하학적 패턴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신비롭고 환상적인 느낌을 연출하는 것 같습니다. 파리지엥이랄까요?”
박주혁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럴커펠트의 눈썹이 요동쳤다. 그는 몸을 돌려 박주혁을 바라보며 갑자기 박수 치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야. 극찬이군요. 미스터···?”
“박주혁입니다.”
“미스터 박.”
분명 초반에 이름을 말했건만, 럴커펠트는 박주혁의 이름을 귓등으로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박주혁의 이름을 확실히 기억했을 것이다. 럴커펠트가 박주혁에게 다가와 가만히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했다.
“미스터 박. 혹시 모델?”
“예?”
럴커펠트는 환하게 웃더니 박주혁 주위를 천천히 한 바퀴 돌며 말했다.
“생각보다 비쥬얼이 좋아.”
“그게 무슨···.”
럴커펠트는 박주혁의 말을 자르더니, 또다시 경호원을 향해 손짓했다.
“안목 있는 분을 못 알아보고 제가 실수할 뻔했습니다. 사죄의 의미로 옷을 선물하겠어요.”
“예?”
박주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당황할 때 럴커펠트는 어느새 가져왔는지 줄자로 박주혁의 신체 사이즈를 쟀다.
‘이···.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지?’
럴커펠트는 줄자로 박주혁의 어깨에 대보더니 갑자기 다소곳하게 손을 모으더니 말했다.
“마이 갓. 수영했었어요?”
“아니요.”
럴커펠트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수치를 경호원에게 읊조렸다.
“미스터 박. 제가 그대의 안목에 맞는 옷을 선물하면 피날레 때는 입어주시겠죠?”
어깨, 허벅지에 뽕이 들어간 럴커펠트의 옷을 보고 있자니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지금 여기서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그렇다면 저야 영광이죠.”
“좋아요. 좋아. 글로리, 글로리~”
알 수 없는 노랫말을 흥얼거리더니 럴커펠트는 전야제 행사장을 경호원들과 빠져나가 버렸다. 럴커펠트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버렸다. 그때 아니카 쇠렌스람이 박주혁을 보며 환하게 웃더니 말했다.
“미스터 박, 축하합니다.”
‘축하?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어리둥절해 있는데 주위 사람들이 전부 박주혁에게 축하한다며 한마디씩 건넸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박주혁에게 아니카 쇠렌스람이 다가와 속삭였다.
“미스터 박이 럴커펠트에게 영감을 준 것 같아요.”
럴커펠트의 퍼포먼스덕에 박주혁은 졸지에 주인공 반열에 올라버렸다. 너 나 할 것 없이 박주혁에게 다가와 자신을 소개하며 명함을 건넸다. 명함을 주고받으니 준비했던 박주혁의 명함도 어느새 동이 나버렸다.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는데 한 젊은 여자가 박주혁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미스터 박.”
세련된 흰 드레스와 절제된 액세서리가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였다. 박주혁이 금발의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녀가 자신의 소개를 했다.
“메르헨 엘리넥이라고 합니다.”
엘리넥이라는 말에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또 한 번 집중됐다. 주변 시선이 불편했지만, 박주혁은 태연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파인랭스의 박주혁 대표입니다. 반갑습니다.”
메르헨은 싱긋 웃으며 박주혁의 손을 맞잡았다.
“손슈찬의 보스죠.”
“아아! 그러셨군요.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파독 근로자분들을 돕는 일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메르헨과 대화를 이어가는데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어서 대화가 끝나길 간절히 기다리는 것 같았다. 손승찬의 상사면 이사나, 상무급 임원일 텐데 이런 관심을 받다니 뭔가 이상했지만, 박주혁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메르헨과 대화를 이어갔다.
“원래는 한국내 파독 근로자분들을 위한 사업이었는데, 그분들이 독일에 거주 중인 분들에게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하여 이렇게 일이 커졌네요.”
“아. 그러셨군요. 손슈찬 덕분에 파독 근로자 분들의 어려움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저도 그분들을 위해 작게나마 도움을 주고 있고요.”
임원치고는 메르헨 엘리넥의 스케일이 큰 것 같았다. 그녀와 대화할수록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마침 손승찬이 헐레벌떡 메르헨에게 다가와 머리를 조아렸다.
“부사장님 한참 찾았습니다.”
“이런 날은 그냥 즐기랬더니 또 절 보좌하겠다고 찾아다니셨군요?”
“부하 된 자로서,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하긴, 제가 당신의 이런 모습을 높게 사긴 했죠.”
메르헨이 웃으며 손승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릴 때, 박주혁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부사장이라고? 잠깐···. 아, 맞다!’
왜 이제야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벤타의 창업주의 이름이 하밀 엘리넥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 눈앞에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메르헨 엘리넥은 창업주의 직계 가족이란 뜻 아닌가?
‘그래서 시선이 집중됐던 거군.’
벤타의 차기 회장으로 유력한 메르헨 엘리넥이 박주혁 앞에 있었던 것이다.
“미스터 박. 여긴 사람들이 많으니, 자리를 좀 옮길까요?”
“그러시죠.”
박주혁은 메르헨을 뒤따라갔다. 그녀와 대화를 바라던 사람들은 아쉽다는 듯 메르헨과 박주혁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봐야만 했다.
#
한편, 한국에서는 회의실에 서류들이 쌓여가고 있었다.
인쇄된 번역본을 제본하던 최지훈 대리가 김진우를 향해 소리쳤다.
“진우씨! 인쇄된 것 가져오세요.”
“예. 갑니다. 대리님!”
사무실은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최지훈이 제본을 끝내면 한기훈 과장이 회의실로 날라 차곡차곡 분류대로 쌓았다. 드디어 OECD 납품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번역연구팀 박영희 차장이 DTP팀을 향해 소리쳤다.
“편집이 이게 뭐야!”
“죄송합니다.”
“표 번호, 그림 번호 확인 똑바로 안 합니까?”
“바로 다시 하겠습니다!”
박영희 부장이 신경질적으로 자리에 앉으며 구경숙 과장을 쳐다봤다.
“구 과장.”
“예. 팀장님.”
“얼마나 남았어요?”
“막바지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곧 끝납니다. 납기 지킬 수 있습니다.”
구경숙 과장의 말에 박영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소리쳤다.
“모두. 집중하세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할 수 있습니다!”
“네!”
모든 직원이 한마음으로 OECD 프로젝트 마감을 위해 달리고 있었다. 그때 허인아 과장이 사무실로 뛰어 들어오며 소리쳤다.
“트럭, 준비됐습니다!”
그 말이 신호였다는 듯 아직 마감하지 못한 몇몇 직원들을 빼고 전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두르자!”
누구의 말인지도 모르겠다. 직원들은 하나 같이 회의실에 정돈된 서류를 들고 주차장으로 줄지어 갈 뿐이었다.
조광연 차장은 직원들이 전달한 문서를 트럭에 차곡차곡 쌓다 말고 손목시계를 힐끔 쳐다봤다.
“박 팀장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요.”
직원들이 건네는 서류를 다 쌓았지만, 아직 출발신호가 떨어지지 않았다. 조광연은 초조했는지 손목시계를 쳐다보며 운전대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최지훈 대리가 조광연의 팔에 손을 올리며 차분하게 말했다.
“차장님. 괜찮을 겁니다.”
“괜찮긴! 납기 준수 몰라?”
조광연이 버럭하는 찰나, 박영희 팀장이 헐레벌떡 뛰어와 마지막 번역본을 건네며 소리쳤다.
“조 차장님. 출발!”
- 탕탕!
박영희가 트럭을 손으로 치며 신호하자, 트럭은 매연과 함께 주차장을 떠났다.
드디어 2달여를 고생했던 OECD 프로젝트가 끝을 보이고 있었다.
#
리조트 최상층 팬트하우스.
- 땡그렁.
메르헨이 크리스털 잔에 얼음을 채우자, 맑고 투명한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그녀는 얼음에 위스키를 들어 흔들며 박주혁에게 물었다.
“괜찮죠?”
“아, 네 괜찮습니다.”
박주혁의 말에 메르헨은 빙긋 웃으며 위스키를 따랐다. 메르헨은 박주혁 앞에 위스키 잔을 살포시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는 드레스가 불편했는지 다리를 꼬았다. 새하얗고 매끈한 다리는 탄력 있었다. 평소에 꾸준히 운동을 하는 것 같았다.
“미스터 박.”
메르헨이 나긋나긋 박주혁을 부르자, 그는 위스키 잔을 매만지며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독일로 초대한 것은 다름 아니라···.”
메르헨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했지만, 그녀의 말은 무거웠다.
“DD 자동차를요?”
메르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박주혁도 DD 자동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자동차에 관심이 없는 남자는 없으니까 말이다.
더블 드래곤 자동차.
“Korea Can do”라는 뜻을 가진 SUV와 사장님들이 최고라 칭했던 승용차를 만들었던 자동차 회사다.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어서며 많은 부침을 견뎌냈지만, 결국 존폐위기에 놓이게 된다. 그런데 메르헨이 뜻밖의 얘기를 했다.
“DD 자동차를 인수할 생각이시라고요?”
“현재는 기술 협약 차원에서 엔진 공장에 인력을 파견했습니다만, 아시아 거점을 잡기 위해 인수하는 것은 어떻겠냐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얼핏 들어본 것도 같다. DD 자동차의 엔진이 벤타의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인수라니?
“내부에서 잠깐 나온 얘긴데, 저는 나쁘지 않다고 보는데···. 제삼자 관점에서 미스터 박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메르헨의 스케일은 박주혁의 상상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어쨌든 DD 자동차를 인수한다면···. 박주혁은 DD 자동차의 운명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벤타가 인수한다면 잘해야 생산기지로 전락할 것이다.
DD 자동차의 미래는 암울하다. 태우차가 DD 자동차를 인수하여 설비를 담보로 돈을 빌리는 바람에 DD 자동차는 깡통이 돼버린다. 그 후 상하이 사기차가 DD 자동차를 인수하였지만, 그들은 애초부터 DD 자동차의 기술만 노린 것이었기에 기업 회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DD 자동차의 운명을 생각해 본다면, 벤타가 인수하는 것도 좋은 방향이겠지만···.
‘내가 DD 자동차를 맡게 된다면 다른 얘기긴 할 텐데···.’
헛된 망상에 잠시 빠졌던 박주혁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국에는 미래자동차가 굳건히 버티고 있어서, DD 자동차는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회사죠.”
“네. 그런 정보는 알고 있습니다. 디젤과 4WD에 강점이 있다는 것도요.”
“그렇군요. DD 자동차 안타까운 회사죠. 제가 DD 자동차의 CEO라면···.”
머릿속에 맴돌던 말이 순간 입 밖으로 튀어나왔고 박주혁이 당황하여 위스키를 입에 가져갔다. 박주혁의 말을 기다리던 메르헨도 위스키를 한 모금 하더니 미간을 살짝 좁히더니 말했다.
“미스터 박이 DD 자동차의 CEO라면···.”
메르헨은 박주혁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는지 토씨도 안 틀리고 되물었다. 박주혁이 살짝 놀라 눈을 크게 뜨자, 메르헨이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사업을 펼칠 생각인가요?”
“죄송합니다. 실언했군요.”
“아닙니다. 정말 궁금합니다. 얘기해 보세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박주혁은 다시 한번 위스키를 입에 가져갔다. 그가 막 입술을 떼려 하는데 메르헨이 상체를 들어 박주혁에게 접근했다. 박주혁의 의견이 무척이나 궁금했던 모양이다.
“DD 자동차의 강점은 프레임과 디젤엔진에 있죠. 엔진이야 벤타의 기술이니 당연하고요.”
메르헨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때마다 향긋한 향이 코를 간질였다.
“저라면 트럭과 SUV로 사업을 재편할 것 같습니다.”
박주혁의 말을 듣자마자 메르헨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잔을 내밀었다. 박주혁이 건배를 하려 다가오자 메르헨이 꼬았던 다리를 풀어 박주혁에게 더욱 다가가 말했다.
“미스터 박. 혹시 저와 함께 할 생각 없습니까?”
메르헨이 난데없이 직구를 던지는 바람에 박주혁이 마시던 위스키를 뿜을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