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화 그냥 여성용 깔깔이잖아?
미하일 덕분에 뮌헨 일일 투어를 마친 박주혁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베를린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베를린에 도착하자, 낯익은 얼굴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오빠!”
“어! 희나야. 공항에 왜 나와 있어?”
“3일 뒤에 온다고 했잖아. 할 일도 없고···.”
“할 일이 왜 없어. 연습해야지.”
“텃세가 심해서 못하겠어요.”
백희나의 투덜거림에 박주혁이 고개를 갸웃할 찰나, 한 노신사가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박 사장님. 반갑습니다. 손의권입니다.”
“아아. 손 선생님!”
손의권이라는 말에 박주혁이 활짝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선생님 덕분에 지멜스 프로젝트를 잘 마감할 수 있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을 한 겁니다. 뭐 사실 아들 녀석의 도움을 많이 받았죠.”
“예?”
박주혁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손의권을 쳐다보자, 그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이 순간 박 사장님을 가장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아들 녀석일 겁니다. 하하하.”
“아, 예···.”
상당히 미심쩍은 말이었지만, 프로젝트가 잘 마감되었고 덕분에 지멜스를 고객 리스트에 추가할 수 있었으니 상관없었다.
“희나야. 선생님께서 통역 잘해주시지?”
“네.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없었어요. 아저씨 덕분에 맛집도 알아냈는걸요?”
갑자기 백희나가 박주혁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건넸다.
“손 선생님이 제 왕 팬이래요.”
박주혁은 익히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지만, 눈을 커다랗게 뜨며 놀라는 백희나의 기분을 맞춰줬다. 박주혁의 표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백희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마침 점심 식사 때니까 맛있는 것 먹으러 가요.”
“그럴까? 손 선생님, 시간 괜찮으시죠?”
베를린 시내의 한 식당에 도착한 박주혁은 백희나와 마주 앉으며 물었다.
“근데 희나야. 아까 텃세라니 무슨 소리야?”
“아아. LPGA 선수 중에 콧대 높은 선수가 있는데 연습장이랑 필드를 독차지하다시피 해서요. 연습을 못 하는 것은 아닌데, 좋은 시간대는 꿈도 못 꿔요. 특히나 저 같은 아마추어는···.”
아무래도 LPGA 선수들의 명성에 따라 연습장과 연습코스를 할당한 듯싶었다. 주최 측에서는 선수 보호와 대회 참가에 대한 답례였겠지만, 아직 세상 물정 잘 모르는 백희나에게는 불합리함이라고 느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박주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마도 LPGA 상금 랭킹에 따라 편의를 봐준 거겠지.”
“피.”
백희나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는 듯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술을 이죽거렸다.
“아직 희나는 퀄리파잉도 안됐고, 어리잖아? 곧 그 사람들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를 테니 신경 쓰지 마.”
박주혁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담담하게 말할 수 있었지만, 듣는 백희나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제가 LPGA에요?”
“그럼. 당연한 거 아냐?”
“에이. 오빠가 LPGA 선수들 못 봐서 그래요. 덩치도 좋고 힘도 엄청난다고요. 무리에요. 무리.”
박주혁과 백희나가 대화하는 사이 주문을 마친 손의권 선생이 갑자기 불쑥 끼어들더니 말했다.
“백 선수. 그런 자신감 없는 소리 하면 쓰나. 골프는 힘이나 기술로 하는 것이 아니지.”
손의권이 힘주어 말하자, 박주혁과 백희나가 자연스럽게 그를 쳐다봤다.
“골프란 자고로 담력 싸움이야.”
“담력이요?”
백희나가 호기심이 간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손의권을 쳐다봤다.
“그럼. 수많은 갤러리가 보는 앞에서 오로지 내 공에만 집중해야 하는 게 골프 아닌가? 심지어 한 타에 몇천에서 몇억이 왔다 갔다 하잖아? 보통 담력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지.”
손의권 선생의 말에 틀린 점이 하나도 없었다.
실제로 한 타 차이로 우승과 준우승이 결정되는 기록경기기 때문에 보통 강심장이 아니고선 선수 생활을 지속할 수 없다. 백희나를 골프에 입문시킨 백연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그녀가 오죽하면 골프를 포기하고 공부를 했겠는가? 그런 냉혈한에게도 골프 대회에서 가해지는 부담감은 상상 이상인 것이다. 괜히 백희나가 담력을 쌓기 위해 밤에 공동묘지를 산책한다는 루머가 돌았겠는가?
박주혁도 손의권 선생의 말에 동의하며 말했다.
“내가 볼 때 담력은 희나가 최고지.”
“예? 오빠. 그게 무슨 말이에요?”
백희나가 볼멘소리했지만, 박주혁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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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박주혁은 벤타 인비테이셔널 전야제에 참석했다. 백희나도 자리를 함께했는데 연습을 막 끝내고 왔는지, 땀이 밴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반면 전야제에 참석한 사람들은 형형색색의 드레스와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박주혁도 정장을 입고 왔으니 망정이지 민망할 뻔했다.
벤타 인비테이셔널.
총상금 50억 원, 우승 상금 9억 원에 달했으며, 우승자에게는 향후 1년간 LPGA투어 대회 출전 자격 혜택이 부여되는 상당한 규모의 대회였다. 이런 대회에 백희나가 초대되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다.
‘아무리 골프 후진국이지만, 희나는 여고생 신분으로 프로를 이기고 우승했었으니까···.’
백희나에게 놀라고 있을 때쯤 점원이 박주혁에게 다가와 샴페인을 건넸다. 모든 초대 손님이 샴페인을 들자, 벤타 그룹의 회장이 무대에 올라 연설을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귀빈 여러분. 이렇게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벤타 그룹은···.”
회장의 일장 연설이 끝나고, 손승찬이 마이크를 잡더니 전야제 행사를 진행했다.
“식전 행사로 대회 참가 선수 중 10명과 여기 계신 여러분 중 30분을 추첨하여 9홀을 돌 수 있는 행운을 드립니다. 그럼 추첨을 시작할까요?”
손승찬의 말에 다들 환호했지만, 박주혁은 표정을 굳힌 채 중얼거렸다.
‘뭐야. 추첨이었어?’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데 식전 행사에 참여할 선수로 백희나의 이름이 불렸다.
“한국의 백희나!”
백희나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운동복 차림으로 무대에 올라 귀빈에게 인사했다. 귀빈들도 백희나의 존재를 몰랐기에 어리둥절하긴 매한가지.
“한국?”
“88올림픽!”
“아아! 거기서도 골프선수가 있었나?”
‘그래. 그럴 수 있지. 하지만, 곧 백희나는 세계 정상에 오른다.’
박주혁은 눈에 힘을 주며 백희나를 향해 박수 쳤다. 선수들의 호명이 끝나고 곧이어 귀빈들을 추첨하기 시작했다.
“백희나 선수와 함께 할 귀빈은···. 손의권, 산드라 불혹 그리고 마지막으로 율리아입니다.”
귀빈들이 박수로 축하를 전하는 사이 박주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손승찬을 노려보고 있었다.
‘참나. 이런 것도 짜고 치나?’
결국 박주혁은 식전 행사에 추첨 될 운명이었고 이제는 누구와 조가 되는지 궁금해졌다.
“자 이번에는 올해 US 오픈 우승자인 아니카 쇠렌스람과 같은 조가 되실 분들입니다.”
‘이름 참···. 소란스럽네.’
심기가 불편했던 박주혁이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는데, 그의 이름이 불렸다.
“파인랭스의 박주혁!”
손승찬은 무대에서 박주혁을 향해 손을 뻗었고, 귀빈들의 시선이 박주혁에게 쏠렸다. 다른 조와는 달리 박수 소리가 유달리 컸기에 박주혁은 상체를 숙이며 감사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왜들 난리지?’
US 오픈 우승자와 라운딩을 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영광이었지만, 박주혁은 쇠렌스람이 누군지도 몰랐다.
95년 US 오픈 우승자 아니카 쇠렌스람.
LPGA의 역사를 썼던 사람 중 한 명이다. 백희나의 전성기를 함께 했던 골퍼이기도 했고, 백희나를 포함해 칼리 웹과 함께 상금 랭킹에서 치열하게 다퉜던 3인방이었다. 백희나가 자신의 전성기 동안 상금 랭킹에서 아니카 쇠렌스람을 한 번도 이기지 못했을 만큼 대단한 선수였지만, 박주혁은 그녀의 존재를 몰랐다.
박주혁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었고 손승찬은 다음 사람을 호명했다.
“이야. US 오픈 우승자답게 유명인사가 같은 조가 됐군요. 독일의 자랑 럴커펠트!”
박주혁도 아는 이름이었다. 챠넬의 부흥을 이끈 패션계의 대부, 럴커펠트. 박주혁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승찬이 손을 뻗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뢰와 같은 환호와 박수 속에 모습을 드러낸 럴커펠트는 검은 선글라스에 백발의 꽁지머리, 어깨와 허벅지 뽕이 들어간 괴상한 검은 슈트 차림이었다. 누가 봐도 한눈에 알 수 있는 독특한 패션감각, 럴커펠트가 확실했다.
박주혁의 놀람도 잠시, 그는 눈을 빛내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기회다. 영업의 시작과 끝이 골프가 맞긴 맞네.’
추첨이 끝나고, 본격적인 전야제가 시작됐다.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곧 점원들이 샴페인과 캐비어를 쟁반에 들고 열심히 돌아다녔다. 이런 분위기가 낯선 박주혁이었지만,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사람들에 둘러싸인 아니카 쇠렌스람과 럴커펠트는 단연 전야제의 주인공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박주혁은 샴페인을 원샷하고는 아니카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박주혁은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 아니카에게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십니까? 같은 조가 된 파인랭스의 박주혁이라고 합니다.”
아니카 쇠렌스람은 굳은 얼굴이었지만 애써 웃으며 박주혁과 손을 맞잡았다.
“아! 저와 내일 같은 조가 되신 분이시군요. 반가워요.”
“US 오픈 우승. 정말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니카가 눈웃음을 지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다른 조원분들도 만나보셨습니까?”
아니카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슬쩍 쳐다보더니 윙크하며 박주혁에게 속삭였다.
“음. 보시다시피 아직입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박주혁이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아니카의 팔을 잡아끌어 인파를 헤치고 나왔다. 그러자 아니카가 웃으며 말했다.
“오? 미스터 박, 박력 있으시군요.”
“곤란해하시는 것 같아서요.”
“네. 이런 거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도 조원분들은 만나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요. 저도 그러고 싶었는데···.”
아니카가 어깨를 한번 으쓱이며 배시시 웃었다.
물론, 박주혁의 목표는 럴커펠트였지만, 무작정 다가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여 같은 조의 프로 골퍼 아니카 쇠렌스람이라는 카드를 먼저 손에 쥔 것이었다. 마침 아니카 쇠렌스람이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기도 했고 말이다.
박주혁은 아니카와 수많은 인파에 둘러싸인 럴커펠트를 향해 갔다. 아니카 쇠렌스람 덕분에 사람들은 길을 터주었고, 박주혁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럴커펠트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누구···?”
“파인랭스의 박주혁이라고 합니다. 내일 같은 조입니다.”
“아아! 반갑습니다.”
“그리고 이쪽은···.”
“알고 있죠. 고~져스한 아니카 쇠렌스람 양.”
썬글라스 너머 어떤 눈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입은 웃고 있었다. 아니카도 럴커펠트를 향해 미소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럴커펠트는 아니카의 손등에 입맞춤하며 말했다.
“US 오픈 우승자의 손에 입맞춤하다니! 영광이군요. 하하하.”
럴커펠트의 말에 아니카는 쑥스럽다는 듯 입을 가리며 웃었다.
챠넬은 파인랭스의 미래의 고객이었다. 다만, 마케팅 외주 업체를 통해 챠넬 관련 번역을 한 것일 뿐,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다. 지금 럴커펠트에 접근하는 것은 미래를 위한 투자다. 절대 기계번역은 절대 할 수 없는 난이도 있는 고부가가치 번역이라는 것을 알기에 반드시 연결고리를 만들어 둬야 했다. 챠넬과 연결된다면 다른 명품 업체들과는 쉽게 컨택할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지금은 일본만 신경 쓰고 있겠지만···. 조만간 챠넬을 비롯한 몽브렝, 로이비텅, 판디, 삐아젯, 구띠 등등 수많은 명품 업체들이 한국에 보도자료 및 패션쇼 관련 내용을 앞다퉈 번역하여 배포할 것이다.
박주혁이 럴커펠트와 대화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가 손을 들어 경호원에게 손짓했다. 럴커펠트는 다가온 경호원에게 뭐라 속삭였다. 그러자 경호원이 럴커펠트에게 깍듯이 인사하고는 어딘가로 뛰듯 걸어갔다. 그리고 돌아온 그의 손에는 쇼핑백 여러 개가 들려있었다.
“아니카 쇠렌스람양의 우승을 축하하며!”
랄커팰트는 활짝 웃으며 경비원에게 손짓하자 그가 쇼핑백을 럴커펠트에게 건넸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
아니카는 럴커펠트가 건넨 쇼핑백을 받았고,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쏠렸다. 부러움과 관심의 대상이 된 아니카가 멋쩍은 표정으로 쇼핑백을 열어 내용물을 꺼냈다.
“어머. 이걸 제가 받아도 될까요?”
“물론이죠. 아니카 쇠렌스람양을 생각하며 디자인한 것입니다.”
퀼트 문양이 들어간 폴리에스터 질감의 점퍼였다. 사람들이 감탄사를 날렸다.
“어머! 너무 잘 어울리네요.”
“너무 이쁘네요. 아니카씨 좋겠어요!”
“와! 디자인이 너무 세련됐어요.”
주변 사람들의 칭찬에 아니카 쇠렌스람은 옷을 입고 럴커펠트 앞에서 한 바퀴 돌았고 럴커펠트가 흡족한 표정으로 박수 치며 소리쳤다.
“역시! 제 예상대로군요. 퐌타스틱!”
하지만, 옆에 서 있던 박주혁의 표정은 과히 좋지 못했다.
‘판타스틱은 무슨, 그냥 여성용 깔깔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