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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53화 (53/136)
  • 053화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

    뮌헨에 도착하니 오후 4시경이었다.

    한국 시각으로는 자정쯤이라 시차 때문인지 하품이 계속 나오려 했다. 벌어지려는 입을 억지로 짓누르니, 눈물이 살짝 맺혔다.

    미하일은 고맙게도 처음 몇 마디를 주고받은 후부터는 그다지 말을 걸지 않았다. 아마도 시차 때문에 힘들어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하긴, 지멜스 처럼 다국적 회사에서 본사로 출장 오는 사람이 한둘이었겠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미하일의 배려에 박주혁은 살짝 감동하려는 찰나, 미하일이 입을 열었다.

    “미스터 박. 맥주 좋아하십니까?”

    “네?”

    ‘대낮부터 맥주라니? 완전 환영이지.’

    “한잔 마시고 싶긴 하네요.”

    피곤했지만, 몸은 청량감을 원하고 있었다. 미하일은 박주혁의 심리를 잘 알고 있다는 듯 피식 웃으며 차를 몰아갔다. 호텔에 도착해 박주혁이 차에서 내릴 때 미하일이 말했다.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짐풀고 내려오세요. 독일에 왔으면 독일 맥주로 시작해야하는 겁니다!”

    “아, 알겠습니다. 곧 내려오겠습니다.”

    “옙!”

    체크인을 하고 방으로 간 박주혁은 짐을 풀고, 바로 뜨거운 물로 샤워부터 했다. 빠르게 시차에 적응하려면 몸을 각성시켜 독일 시각에 끼워 맞춰야 한다. 샤워하고 나오자, 몸이 나른해졌지만, 박주혁은 환복하고 재빨리 로비로 내려갔다.

    “미스터 박!”

    미하일이 박주혁을 반갑게 불렀다. 박주혁은 웃으며 미하일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독일 하면 떠오르는 바로 그곳이었다.

    [호프브로이]

    오래된 건물을 푸르른 담쟁이넝쿨들이 감싸고 있어서 꼭 숲속에 만들어 놓은 커다란 맥주 창고 같았다. 호프브로이 앞 야외 원목 테이블에 이른 시간임에도 독일인들이 커다란 맥주잔을 입에 가져가며 웃고 있었다. 왜 이렇게 여유로워 보이는 것인지···. 부러웠다.

    호프브로이에 들어가니 내부는 광활했다. 독일인들은 원목으로 만들어진 테이블에 큼직한 돼지고기나 슈니첼, 두툼한 소세지 또는 빵들을 안주로 삼아 먹고 있었는데, 음식을 보니 갑자기 뱃속이 요동쳤다. 역시 아무리 좋은 재료로 만들었다고 홍보하지만, 기내식은···. 손이 안 간다.

    점원의 안내로 창가 테이블에 앉은 박주혁은 라거 맥주만 고르고 안주는 미하일에게 일임했다.

    “당케!”

    점원이 고맙다는 말과 함께 사라졌고, 잠시 후 거대한 불판에 배구공 크기만 한 잘익은 고기가 나왔다. 만화에서나 볼 것 같은 큰 뼈가 달린 고깃덩어리였다.

    “워.”

    박주혁이 푸짐한 양과 비쥬얼에 입을 살짝 벌리며 감탄하자, 미하일이 씩 웃으며 말했다.

    “미스터 박. 호프브로이에서는 이게 제일 유명하죠.”

    “비쥬얼만 봐서는 그런 것 같네요.”

    침이 고였다. 매우.

    - 쿵!

    그리고 뒤이어 거대한 유리잔에 가득 담긴 맥주를 테이블에 내려놨는데 맥주잔이 얼굴보다 컸다.

    “이야!”

    문화 충격이었다. 게르만의 후예들이라 그런지 살짝 야만스럽기는 했지만, 원래 식욕은 살짝 야만스러운 법이지.

    박주혁은 미하일과 건배 후 맥주를 입에 가져갔다. 풍미 가득한 향긋함과 쌉쌀함 거기에 입안 가득 짜르르한 탄산미까지. 박주혁은 눈을 크게 뜨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YB와 하이팅은···. 맥주가 아니었구나.’

    새로운 맥주 맛에 놀랄 무렵 미하일이 테이블에 있는 고기에 손을 뻗었다. 뼈째 들어 입으로 뜯어 먹어야 할 것 같았는데 막상 미하일이 뼈를 잡아 빼니 고기만 남기고 쏙 빠졌다. 큼직한 뼈를 옆에 두고 미하일은 칼로 고기를 갈랐다. 엄청난 김과 함께 육즙이 팬 위로 흘러내렸다.

    - 촤르르!

    달궈진 불판에 육즙이 끌어버리며 고소한 향이 코와 위를 자극했다.

    - 꿀꺽.

    미하일은 고기를 대충 갈라놓고 다시 맥주잔을 들며 박주혁을 쳐다봤다.

    “독일에 온 걸 환영합니다. 미스터 박.”

    “건배!”

    맥주 한모금을 마시고, 고기 한접을 입에 넣은 박주혁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게슴츠레 뜨며 탄식했다.

    “으음.”

    “괜찮습니까?”

    미하일의 질문에 박주혁은 엄지를 올리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고기가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버렸기 때문이다.

    ‘대박이다.’

    독일에서의 첫날을 인상 깊은 맥주와 음식으로 시작하니, 여행의 피로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

    다음 날 아침. 박주혁은 개운하게 일어났다.

    시차 때문에 잠이 오지 않을 법도 했지만, 미하일과 함께한 맥주가 효과가 있었는지 꿀잠을 잤다. 로비로 내려오자, 미하일이 벌써 기다리고 있었다.

    “미스터 박. 여깁니다.”

    미하일은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로 박주혁을 맞이했다.

    지멜스 본사는 뮌헨 시내에 있었다. 허세를 부리기 좋아하는 한국에서는 높은 빌딩을 본사로 두는 경우가 많았지만, 미하일이 박주혁을 데리고 온 곳은 오래된 저택들이 밀집된 곳이었다. 당연히 높은 현대적인 빌딩을 예상했건만···.

    이색적인 광경에 박주혁이 주변을 둘러보는데 미하일이 한 건물로 박주혁을 안내했다. 어느 귀족이 쓰던 저택이라고 하면 딱 맞을 그런 건물이었다. 이곳이 지멜스 본사라는 것은 정문에 도착한 후에 알 수 있었다. 정문 옆 기둥에 작게 ‘지멜스’라고 판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건물에도 놀랐지만, 세계적인 기업인 지멜스가 이렇게 티 안 나게 판각만 새겨 놨다는 것도 충격적이었다.

    ‘옛것을 그대로 살리려는 이들의 노력은 본받을 만하구나···.’

    문뜩 박주혁은 사무실이 위치한 신촌을 떠올렸다. 아무리 떠올려보려 해도 옛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지 않나? 빽빽한 건물들로 들어찬 서울 시내···.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중후한 외형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물론 건물에 있는 기둥과 벽체 등은 옛것 그대로였지만, 그 외의 것은 현대를 넘어 미래적인 느낌이었다. 첨단 보안장치와 지멜스의 기술력을 홍보하는 디스플레이들까지···. 그런고로 박주혁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와.”

    “생각과는 아주 다르죠?”

    “그러네요.”

    박주혁은 미하일의 안내에 따라 지멜스 본사를 투어했다. 외관과 달리 건물 내부가 넓어서 투어만으로도 반나절이 걸렸다. 지멜스의 사세를 확인시켜주며 협상에 우위를 점하려는 전형적인 수법이었지만, 박주혁은 위축되지 않았다. 독일에 지멜스가 있다면 한국에겐 삼송과 극성이 있지 않나? 미래를 알지 못했다면 위축될 만도 했겠지만···. 박주혁에게는 소용없는 일이다.

    엄청난 규모의 구내식당에서 점심까지 먹은 후에야 미하일은 철도부 상무실로 박주혁을 안내했다.

    - 똑똑.

    “상무님. 파인랭스 박주혁 사장님 오셨습니다.”

    박주혁도 180cm 중반으로 키가 큰 편이었는데 상무실 문을 열고 등장한 사람은 족히 190cm는 돼 보였다.

    “오! 반갑습니다. 빌리발트라고 합니다. 편하게 빌리라고 하십시오.”

    빌리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고 박주혁은 그 손을 맞잡았다. 자리를 안내한 빌리가 상석에 앉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미스터 박.”

    빌리는 처음부터 파인랭스를 추켜세우며 박주혁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번역본이 너무 완벽해서 감동했습니다.”

    “과찬이십니다.”

    “미스터 박이 한국 번역계의 거물이라는 얘기는 나중에 들었습니다.”

    “예?”

    어디서 이상한 소문을 들었는지 빌리가 낯뜨거운 말을 서슴없이 뱉었다. 분위기를 끌어올리려는 빌리의 칭찬은 애피타이저일 뿐. 박주혁은 어서 본론을 듣고 싶었다.

    “빌리, 그래서 어쩐 일로 절 보자고 하신 겁니까?”

    “역시! 한국 사람은 빨리 빨리라더니 하하하. 좋습니다.”

    빌리가 호탕하게 웃더니, 상체를 살짝 숙이며 박주혁을 쳐다봤다.

    “아시겠지만, 지멜스는 전 세계에 지사가 있습니다. 그만큼 번역에 민감한 기업이죠.”

    예상했던 일이었다. 독일에서 개발된 기술을 해외 곳곳에 팔려면 필히 번역이 필요할 터.

    “유럽인들은 기본적으로 3개 국어 정도는 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언젠가 들었던 것 같습니다.”

    “저만 해도 독일어, 영국어, 스페인어를 하죠.”

    빌리의 말에 박주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는 척을 했다. 대단한 것 같지만, 사실 유럽의 언어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기에 실생활에서 자주 접하는 경우가 많았다. 학교에서 어려서부터 가르치기도 하고 말이다.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가 서로 영향을 받은 것과 같은 이치다.

    빌리는 박주혁의 표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씩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지멜스 본사에는 언어지원부가 별도로 있습니다. 보통 그들은 유럽과 미주 쪽을 담당하고 있죠. 반면 동아시아 쪽은···. 무주공산입니다.”

    “한국지사가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지만, 그들도 일해야지 번역만 하고 있을 순 없지 않습니까? 번역이라는 것이 매우 많은 시간이 들고 숙련도를 올리기 어려운 직종인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역시 번역의 역사가 긴 유럽답게 번역업의 특성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미스터 박에게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분명 파인랭스에도 나쁜 얘기는 아닐 겁니다.”

    드디어 서론이 나왔다. 박주혁은 눈을 빛내며 빌리의 입술을 쳐다봤다.

    “파인랭스는 몇 개 국어까지 번역할 수 있으십니까?”

    본사에 언어지원부가 있으면서도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선뜻 이해할 수 없었지만, 박주혁은 자신이 있게 답했다.

    “모든 언어를 지원할 수 있습니다.”

    빌리는 박주혁의 말이 허세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크게 웃으며 말했다.

    “미스터 박의 자신감은 인정하겠습니다. 질문을 바꿔보죠. 동아시아 쪽 언어 전부 커버 가능합니까?”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건 기본 아니겠습니까?”

    이번 대답에는 허세를 느끼지 않았는지 빌리는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일본에 있는 번역업체들은 너무 틀에 박힌 번역이라 매번 매끄럽지 않습니다. 반면에 이번 파인랭스의 번역은 실무진이 번역한 것처럼 아주 부드럽게 읽히더군요.”

    빌리의 말에 가슴 한쪽이 뜨끔했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재미있는 것은···. 비용이었습니다.”

    비용이라는 말에 박주혁이 살짝 긴장했다. 지멜스 강상우 부장이 요구한 리베이트로 인해 견적을 2배 올려서 냈던 것이 마음에 걸렸던 탓이다. 박주혁은 최대한 태연한 척하며 빌리를 똑바로 응시했다.

    “품질은 좋은데···. 비용은 더 저렴하단 말이죠.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품질과 비용은 비례해야 정상인 것을···.”

    빌리의 말에 박주혁은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앞으로 지멜스와의 단가는 타 회사 대비 2배 많게 책정해도 문제가 없다는 소리였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말입니다. 파인랭스에 동아시아 언어 번역을 전부 의뢰해보고 싶습니다.”

    “전부 말입니까?”

    “예. 물론 평가를 거친 후 정식적인 절차를 밟아 본사의 벤더로 등록해야겠죠.”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빌리는 살짝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건 어마어마한 기회였다.

    “한-독의 능력은 확인했으니, 중국어와 일본어만 한번 확인해보는 것으로 하죠.”

    빌리의 말에 박주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곤 물었다.

    “한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원문은 독일어로 제공하시는 겁니까?”

    “아! 중요한 얘기를 안 했군요. 기본적으로는 영문입니다만, 시일이 촉박할 경우 독일어로 의뢰하거나 번역하는 케이스가 상당히 있을 겁니다.”

    빌리의 말에 박주혁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문제없습니다.”

    “미스터 박의 그 자신감이 무척 마음에 드는군요. 일본업체와는 전혀 다르군요.”

    “어떻게 다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박주혁의 말에 빌리가 눈을 살짝 크게 뜨더니 말했다.

    “그들은 매번 하이! 하이! 로봇처럼 답해서 재미가 없습니다.”

    빌리는 말을 끊더니 자신의 가슴을 툭툭 치며 말했다.

    “마음.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죠. 하지만, 미스터 박의 눈빛과 말에는 제 마음이 움직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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