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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52화 (52/136)
  • 052화 세계로 뻗어 가보자!

    “왜 안 와!”

    눈을 날카롭게 뜬 백연주가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자신의 팔을 두드렸다. 일찍 퇴근하여 여성미가 돋보이는 복장까지 갖춰 입고 박주혁을 기다렸지만, 그는 7시 20분을 넘어가는 지금까지 코빼기도 안 비추고 있었다. 백연주가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벤치에 앉아 투덜댔다.

    “내가 진짜 미쳤지.”

    참을성이 한계에 달했는지, 백연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신경질적으로 클럽을 챙기려는데 낮고 깔끔한 목소리가 들렸다.

    “백 이사님! 죄송합니다. 회사 일이 좀 늦게 끝나서요.”

    박주혁의 목소리였다. 한껏 좁혀졌던 백연주의 미간이 순간 팽팽하게 펴졌다. 그녀는 목을 가다듬더니 태연한 표정으로 박주혁을 돌아보며 살짝 미소를 띠었다.

    “어머, 괜찮아요. 저도 지금 막 왔거든요.”

    백연주는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연기를 한다는 상상을 해본 적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시간 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람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그런 여자였다. 그게 백연주였는데···.

    ‘나 정말 왜 이러니···?’

    속으로 어이없어하면서도 박주혁을 마주하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이사님. 잘 부탁드립니다.”

    박주혁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자, 조금 전까지 짜증으로 가득 찼었던 기분은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음음. 자, 먼저 그립부터 볼까요. 희나가 어떻게 잡는다고 했었죠?”

    박주혁은 기억을 더듬어 골프채를 쥐었다.

    “그게 아니잖아요!”

    백연주의 날카로운 말에 박주혁이 흠칫 놀라 손이 어지러워졌다. 험난한 레슨이 될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

    박주혁은 출근하자마자 커피를 들고 사장실로 직행했다. 어제 시스템 권한이 한 단계 풀려 보안문서 열람이 가능해졌으니 밀린 시스템 개발에 박차를 가해야 했다.

    “시스템 온. 검색, 파인랭스 시스템 소스 코드.”

    외계어 같은 소스 코드를 열어둔 채 박주혁은 개발팀을 불러들였다. 심영찬 대리를 필두로 공대 3인방이 사장실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네. 심 대리. 일전에 공유한 개발 일정에 관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예.”

    박주혁은 미리 준비해둔 자료를 스크린에 쏘며 말했다.

    “파인랭스 베타 기간이 벌써 한 달을 넘어가고 있습니다만, 디자인이 달라진 것 외에는 개선점을 찾기 어렵습니다.”

    박주혁의 날카로운 지적에 심영찬이 살짝 고개를 떨궜다.

    “어떤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최적화에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열심히 뜯어보고 있습니다만···. 아닙니다. 곧 해결하겠습니다.”

    심영찬의 자신감 없는 말투에서 그의 고심이 느껴졌다. 하드웨어의 성능과 인터넷 속도가 올라가면서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도 있겠지만, 주어진 상황 내에서 최적화를 해야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을 터.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파인랭스 시스템을 사용하길 바라지만, 현실은 강제 사용 권고였다.

    “소스 코드를 좀 열어보시죠.”

    박주혁은 컴퓨터에서 비키며 심영찬에게 지시했고 그는 스크린에 현재 파인랭스 시스템의 소스 코드를 띄웠다.

    박주혁은 창가에 서서 심영찬이 띄운 현재 파인랭스 시스템 소스 코드와 눈 앞에 떠 있는 소스 코드를 대조했다.

    ‘음. 저기군.’

    세월이 흐르며 다른 언어로 치환되었지만, 기본적인 뼈대는 같았다. 그리고 최적화는 박주혁의 눈앞에 떠 있는 시스템의 소스 코드가 확실했던 만큼 박주혁은 스크린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잠깐, 올려보세요. 거기. 스톱.”

    박주혁은 스크린에 다가가 손가락으로 한 부분을 짚으며 말했다.

    “여기가 이상한 것 같군요. 이 부분 때문에 연산에 과부하가 걸리는 것 아닐까요?”

    박주혁이 지적한 곳을 심영찬과 공대 3인방이 뚫어지라 쳐다봤다. 그리고 곧 토론의 장이 열렸다.

    “좀 이상하긴 하네요. 중복 연산인가?”

    “대리님. 여기 이렇게 바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지. 그럼 연계된 부분에 문제가 발생 될 거야.”

    “그렇다면 그 윗단부터 수정하면 어떻겠습니까?”

    “으음···. 일리 있어.”

    박주혁에게 답이 있었지만, 이 정도 선에서 끝내야 한다. 어차피 파인랭스 시스템은 심영찬 혼자 개발했던 만큼 이렇게 살짝 터치해주는 것만으로도 분명 도움이 될 터. 심지어 생전에는 없던 추가 개발자 3인까지 합세했으니 그 속도는 더욱 빠를 것이다.

    한참 토론을 버리던 심영찬이 갑자기 눈을 빛내며 박주혁을 돌아봤다.

    “그런데 사장님 어떻게 아셨습니까?”

    “사용하다가 보니 막히는 곳이 있어서 혹시 저기 아닐까 한 겁니다.”

    “역시···. 실사용을 하면서 에러를 찾는 것이 가장 빨라.”

    심영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을 하더니 팀원들을 데리고 나가며 말했다.

    “곧 최적화시키겠습니다.”

    “믿고 있습니다.”

    문을 닫으려던 심영찬이 갑자기 얼굴을 사장실로 들이밀었다.

    “사장님.”

    “음?”

    “랭귀지패스트 0.4 버전 최근에 만들었는데 한번 사용해 보시겠습니까?”

    “좋죠. 보내세요.”

    “넵!”

    처음 랭귀지패스트를 만들었을 때 0.1 버전이라고 불렀으니 벌써 4번이나 업그레이드를 했다는 뜻이다. 박주혁은 아직 스크린에 떠 있는 개발 일정을 보며 미소 지었다.

    “전혀 문제없겠어.”

    파인랭스 최적화는 곧 될 테고, 랭귀지패스트는 일정표보다 앞서 있었다. 번역연구팀에서는 짬짬이 TM을 만들고 있으니 랭귀지패스트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일도 머지않았다.

    #

    일과를 마치고 박주혁은 송파로 향했다. 독일로 떠나기 전까지 박주혁에게는 고작 2주의 시간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오늘도 골프 레슨을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야만 했다.

    “박 사장님!”

    대회가 끝났는지 오늘은 다행히도 백희나 선수가 연습장에서 박주혁을 맞이했다. 백연주의 시니컬한 레슨에 신물이 날 지경이었는데 마침 잘됐다. 박주혁은 백희나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백 선수 대회는 어땠습니까?”

    “당연히 우승이죠. 헤헤.”

    “와. 대단하군요.”

    박주혁이 손뼉을 치며 축하를 전했고, 백희나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동안 언니에게 레슨 받으셨다면서요?”

    백희나의 뒤에 있던 백연주가 앞으로 나오며 퉁명스럽게 답했다.

    “기본기만 알려줬어. 생각보다 운동신경이 있으신 것 같다.”

    “오호! 그래요?”

    ‘웬일로 칭찬이래?’

    박주혁이 백연주를 빤히 쳐다보자,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콧방귀를 꼈다. 한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는 옛말이 딱 맞다.

    백희나는 박주혁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어디 한번 볼까요?”

    박주혁의 스윙을 보고 백희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팔짱을 꼈다. 몇 차례 박주혁의 스윙을 바라보던 백희나는 왼손으로 턱을 쓰다듬더니 백연주를 쳐다봤다.

    “언니. 웬일이야?”

    “뭐가.”

    “아니. 제대로 가르칠 마음이 생겼나 싶어서.”

    백희나의 말에 백연주는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을 할 뿐이었다. 그런 백연주의 반응에 백희나는 피식 웃더니 박주혁에게 다가갔다.

    “엄청난데요? 이제 일주일째죠?”

    “그 정도 됐겠네요.”

    “폼은 다 잡혔어요. 이제 이대로 유지하는 것이 숙제겠네요.”

    “정말입니까?”

    백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더니 박주혁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박 사장님. 사실 언니가 엄청난 골퍼였어요.”

    “예?”

    “사실 저도 언니한테 배운 거라고요.”

    박주혁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백연주를 힐끔 쳐다봤다.

    백연주는 미국에서 촉망받는 쥬니어 골프 선수였지만, 대회에만 나가면 성적이 곤두박질치는 것이 문제였다. 심리적 압박감을 떨치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지는 일이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골프 선수의 꿈을 접고 공부에 매진한 케이스였다.

    “그랬군요.”

    “그러니까, 잘 배우세요.”

    백희나는 혓바닥을 쑥 내밀더니 백연주와 함께 박주혁의 스윙을 매의 눈으로 살폈다. 박주혁의 스윙을 가만히 보고 있던 백연주가 갑자기 앞으로 나가더니 빽 소리쳤다.

    “옆구리가 들렸잖아요!”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저 히스테리는 참기 힘들었다.

    #

    2주가 흘러 광복절이 되었다.

    어떤 채널을 틀어도 TV에서는 총독부 철거와 관련된 뉴스만 흘러나왔다. YS 대통령의 연설이 끝나고 드디어 총독부 중앙 돔의 첨탑을 크레인으로 들어냈다.

    [여러분. 드디어 50년 동안 경복궁을 가리던 총독부의 첨탑이 철거되는 순간입니다!]

    아나운서도 흥분되는지 목소리가 갈라지며 소리쳤다.

    박주혁은 뉴스를 보며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제 곧 파인랭스가 번역한 보도문이 세계 각지에 실릴 것이며, 각 공관에 송부될 것이다. 특히 일본의 반응이 무척 궁금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일본은 겉으로는 아무 일도 아닌 척 쓰린 속을 부여잡을 것이다.

    박주혁은 다시금 가슴이 벅차오르는지 살짝 떨리는 입술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런 순간을 다시 보다니···.”

    옆에서 함께 TV를 보던 최효정 여사가 시계를 힐끔 보더니 다그치듯 말했다.

    “주혁아, 늦겠다.”

    최효정 여사의 말에 박주혁도 시계를 힐끔 쳐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몸조심해서 다녀오고, 도착하면 꼭 연락하고!”

    “네, 알겠습니다.”

    최효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박주혁의 휴대폰이 울렸다.

    - 띠리리.

    “여보세요?”

    “박 사장님. 어디세요. 우리 도착했는데.”

    “지금 내려갑니다.”

    박주혁은 최효정 여사에게 손을 흔들며 캐리어를 끌고 황급히 집 밖으로 나갔다. 검정 그랜져 한대가 서 있었는데 박주혁이 다가가자 운전석 창문이 내려갔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이 특유의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빨리 타요. 이러다 늦겠어요.”

    백연주에게 2주간 레슨을 받으며 자주 마주쳤더니 백희나는 박주혁을 이제 오빠라고 불렀다.

    “오빠랑 독일행을 같이 할 줄은 몰랐네요? 저야 대회 준비 때문에 컨디션 조절하기 위해 먼저 간다지만, 왜 일주일 전부터 가시는 거예요?”

    “그러게. 어쩌다 보니 약속들이 잡혔네.”

    박주혁의 말에 백연주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아니, 무슨 번역회사가 독일에서 미팅을 잡아요?”

    “독일 고객이라서요.”

    박주혁의 말에 백연주가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벤타와 미팅도 아니라면서요.”

    “네. 자세한 건 기밀이라.”

    박주혁이 선을 긋자, 백연주가 입을 삐죽였다.

    김포공항에 도착한 박주혁은 백연주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후 백희나와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무려 12시간에 이르는 비행 끝에 박주혁은 베를린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백희나 선수는 지정된 숙소가 있어 공항에서 헤어졌고, 박주혁은 비행기를 갈아타고 뮌헨으로 날아갔다. 뮌헨 국제 공항에 내리니 Mr. Park이라고 써진 피켓을 들고 있는 독일인이 있었다. 그에게 박주혁이 다가가자 그가 눈웃음을 치며 물었다.

    “미스터 박?”

    박주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악수를 청하며 명함을 내밀었다.

    [지멜스 철도부 미하일]

    “반갑습니다. 지멜스 철도부 미하일 부장입니다.”

    “박주혁입니다.”

    미하일은 박주혁을 픽업하여 뮌헨 시내로 향했다.

    “미스터 박. 이번 한국 철도 신호 관련 번역에 모두 놀랐습니다.”

    “그렇습니까?”

    “91년인가 92년도에 번역했던 것은 정말 엉망이라, 다들 고생이 많았는데 이번에는 딱히 손볼 곳도 없더라고요. 우리 상무님이 감명받았다며 꼭 한번 만나 뵙고 싶다고 했습니다.”

    “감사한 일이군요.”

    박주혁이 독일에 일주일 먼저 온 이유는 바로 지멜스 본사 임원과 만남이 잡혔기 때문이었다.

    의정부 경전철 독일어 번역 프로젝트는 박주혁의 예상대로 품질에 이상이 없게 진행됐다. 그도 그럴 것이 독일어에 능통한 파독 근로자와 그 자제들이 번역했으며 마지막 감수는 현업 기술부에서 진행했기에 문제가 있을 수 없었다. 이러한 내막까지 알 수 없었던 지멜스 본사는 파인랭스의 실력에 감탄하고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때마침 박주혁이 벤타 인비테이셔널에 초대되어 독일로 간다고 하니, 지멜스가 항공권까지 지급하며 급하게 약속을 잡았다. 한국지사도 아닌 본사에서 불렀다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전개를 예상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한 단계 더 뛰어오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가만히 차창 밖을 바라보던 박주혁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이제 세계로 뻗어 가보자. 파인랭스는 글로벌 번역회사가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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