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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51화 (51/136)
  • 051화 내가 가는 길이 맞다.

    - 띠링

    - 파인랭스의 성장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 과장 권한이 차장 권한으로 변경됩니다.

    - 차장 고유 권한으로 보안 문서 열람이 가능합니다. (반출 불가)

    귓속을 때리는 시스템의 알람 소리와 함께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지만, 박주혁의 머릿속은 백지상태였다. 이유인즉슨, 벤타 인비테이셔널에 박주혁이 LPGA 프로들과 9홀을 돌 수 있는 식전 이벤트에 초대되었기 때문이다.

    파독 근로자로 구성된 한인회에서도 몇 분 초청되었다고 하니, 손승찬이 만들어낸 이벤트라는 것을 알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어제 처음 7번 아이언을 잡아봤는데···.’

    골프채를 처음 잡아본 박주혁, 본인이 문제였다. 아무리 식전 이벤트라지만, 망신을 당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앞으로 3주밖에 남지 않은 시간, 박주혁은 갈급한 마음에 수화기를 들었다.

    “네. 요키아 백연주 이사입니다.”

    “백 이사님. 파인랭스 박주혁입니다. 저···.”

    “아! 박 사장님. 그렇지 않아도 연락드리려고 했습니다.”

    골프 레슨을 부탁해보고자 전화했는데 백연주가 특유의 차가운 말투로 박주혁의 말을 잘라버렸다. 어제는 분명 어딘가 아팠던 것이리라···.

    “어제 얘기했던 더블백이요. 3,000개 구매 가능한지 확인할 수 있으십니까?”

    “네, 확인해보겠습니다.”

    “좋습니다. 아, 그리고 무슨 할 말이 있으셨던 것 같은데요?”

    “아. 사적인 부탁입니다만···.”

    “사적이요?”

    사적이라는 말에 백연주의 목소리가 갑자기 한 톤이 올라갔다. 박주혁은 백연주의 말투에서 뭔지 모를 위화감을 느끼고 입을 닫아 버렸다.

    “아닙니다. 제가 실수한 것 같네요.”

    “아, 아니. 뭔데요?”

    “아닙니다. 그럼, 더블백 확인해보고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박···.”

    - 뚝.

    전화를 끊고 박주혁은 양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사적인 부탁이라니···. 내가 경솔했어.”

    백희나는 중고교 골프대회 출전으로 시간이 없음을 알기에 백연주에게라도 부탁하려 했던 것이 실수였다. 사적인 부탁을 언급한 순간 밉보이게 되는 것인데···. 벤타 인비테이셔널 식전 이벤트에 초대되었다는 사실에 눈앞이 캄캄했던 탓이다. 재빨리 사태를 수습하고 전화를 끊었으니 망정이지 잘못했으면 백연주에게 큰 실수를 할 뻔했다.

    - 뚜─.

    백연주는 이미 끊긴 수화기를 귀에 댄 채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뭐···. 뭐야.”

    사적인 부탁이라길래 내심 설렜었는데, 박주혁이 별안간 전화를 끊어버렸다. 다시 전화하자니 박주혁에게 지는 느낌이라 다시 전화도 못 해보겠다. 영락없이 한대 얻어맞은 이 찜찜한 기분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라 백연주는 입술을 질겅질겅 깨물었다. 이 어이없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그녀가 선택한 것은···.

    “신 과장. 일 이렇게 밖에 못 해!”

    날벼락이 떨어진 신지수 과장이 어안이 벙벙하여 이사실로 들어왔고, 백연주의 벼락같은 호통에 울상이 되어 자리로 돌아왔다.

    “아. 한동안 잠잠하더니 왜 또···.”

    “과장님. 왜요?”

    “몰라 임마. 모두 회의실로 집합!”

    “하아.”

    팀원들이 어떤 일이 터졌는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시무룩한 표정으로 회의실로 들어갔다.

    한편 백연주는 책상 위에 있는 전화기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한참을 노려보던 그녀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구멍가게 사장 주제에···. 감히 날 기다리게 해?”

    그나저나 박주혁은 알고 있을까? 지금 하는 이 행동이 밀당이라는 것을 말이다.

    #

    박주혁은 배정산업의 주배정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저 박주혁입니다.”

    “아! 박 사장. 무슨 일인가?”

    “한가지 문의드리려고요.”

    “말해 보게!”

    박주혁은 주배정에게 더블백 3,000개 주문할 수 있냐고 물었다. 이제 막 시장에 출시했으니 생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주배정은 구매처가 무척 궁금했나 보다.

    “생산은 하면 된다지만, 대체 발주처는 어딘가?”

    “우선 가능하다는 것이죠? 구매 확정되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허허. 이거 박 사장에게 한턱내야겠는 걸?”

    “성사되면 그때요. 참, 더블백 이론 특허 관련 번역은 진행 중입니다. 그것도 완료되는 대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다만, 특허 번역이라 시간은 좀 걸릴 것 같네요.”

    “급한 것 아니니. 완료되는 대로 전달해주면 돼. 그나저나 3,000개라··· 하하하!”

    주배정은 대량 발주 의사가 있다는 얘기만으로도 기분이 좋은지 껄껄 웃었다. 아직 확정이 아니라지만, 생산업자는 구매 의사가 있다는 얘기만으로도 힘이 나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구매 의사가 있다는 얘기는 곧 잠재적 고객이라는 얘기니까.

    주배정과 통화를 끝낸 박주혁은 다시 요키아 백연주 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백연주 입니다.”

    조금 전 통화할 때보다 몇 배는 차가운 말투였다. 박주혁은 사적인 부탁을 했던 실수로 인해 백연주의 기분이 좋지 않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사님. 박주혁입니다.”

    “네.”

    단답형에 감정이 전혀 섞이지 않은 딱딱한 말투, 누가 봐도 언짢은 사람이었다. 박주혁은 미간을 좁히며, 최대한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배정산업에서 더블백 3,000개 생산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부 품의 올린 후 확정되면 다시 연락하는 것으로 하죠.”

    “알겠습니다.”

    지극히 업무적인 멘트에 박주혁도 형식적인 대답으로 일관했다. 그러자 백연주가 상당히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뭐, 더 할 말은 없고요?”

    백연주의 말에 박주혁은 미간을 좁히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사과하라는 얘긴가? 까다로운 여자군.’

    박주혁은 잠시 눈을 지그시 감고 답했다.

    “아까는···.”

    “그러니까 아까 부탁하고자 했던 것이 대체 뭡니까?”

    결국 참지 못하고 꼬리를 내린 것은 백연주였다. 죄송하다고 말하려던 박주혁의 확장되더니 고개를 떨궜다. 박주혁은 관자놀이를 한 손으로 지그시 누르더니 입술을 뗐다.

    “골프를 배워야 하는데, 백희나 선수가 대회 출전 중이니 이사님께라도 가르침을 받아볼까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

    대답 대신 수화기 너머로 거칠었던 백연주의 숨소리가 점차 차갑게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백연주가 상당히 언짢아한다고 박주혁은 생각했다.

    ‘아. 제대로 실수했네.’

    박주혁이 실수를 자책하고 있는데 백연주의 반응은 예상과 사뭇 달랐다. 목소리도 차갑지 않고 한결 부드러워졌다.

    “희나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골프는 좀 하죠. 오후 7시 연습장으로 오세요.”

    - 뚝.

    박주혁이 뭐라 답하기도 전에 백연주가 전화를 황급히 끊어버렸다. 박주혁은 끊긴 전화기를 살짝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이더니 말했다.

    “음. 급한 일이 있으신가 보네. 잘됐다. 오후 7시라고 했지?”

    박주혁은 백연주와의 통화를 곱씹으며 미소 지었다.

    한편, 백연주는 박주혁보다 먼저 전화를 끊었다는 승리감에 취해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감히 구멍가게 사장 주제에···.”

    그러다 문뜩 이런 일로 승부욕을 불태웠다는 것에 자괴감이 몰려왔는지 그녀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중얼거렸다.

    “아. 뭐야···. 진짜 유치해.”

    마음을 뺏기면 평소와는 다른 모습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법이다. 평생 완벽함과 도도함을 추구했던 백연주는 180도 다른 자신의 모습에 놀라 스스로를 다그쳤다.

    “백연주. 정신 차려!”

    #

    점심 식사 이후 박주혁은 팀장들이 제출한 팀별 업무 리스트를 꼼꼼히 살펴봤다.

    “음. 예상처럼 번역연구팀에 보틀넥 현상이 있군.”

    박주혁은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고민을 거듭했다. 파인랭스에서 가장 많은 인력을 확보한 번역연구팀이지만, 그만큼 업무 집중도가 높았다.

    “업무분장을 해야겠어.”

    박주혁은 번역연구팀의 업무 리스트에 붉은색 펜으로 표기하며 한참을 씨름했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이 났는지 눈을 빛내며 정리된 업무분장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사람을 조금 더 보충해야겠지만, 이렇게 하면 격주 휴무가 가능할지도···.”

    박주혁은 붉게 충혈된 눈을 비비고 일어나 과장급 직원들을 회의실로 불러 모았다.

    “여러분들이 제출한 업무 리스트를 바탕으로 새로이 업무분장을 해봤습니다.”

    직원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박주혁을 쳐다봤다. 박주혁은 웃는 얼굴로 화이트보드에 자신이 정리한 업무분장을 간략하게 그렸다.

    “역시 예상대로 번역연구팀에 보틀넥 현상이 있습니다. 이걸 풀어주지 못하면 조직이 유기적으로 흘러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림과 박주혁의 설명을 듣던 박영희가 손을 번쩍 들었다.

    “사장님. 그렇다면 사람을 더 충원하시겠다는 겁니까?”

    “맞습니다. 새로 창설되는 DTP(Desktop publishing)팀은 문서 편집을 전문적으로 하는 팀으로 번역연구팀의 업무 일부를 도맡게 될 것입니다.”

    분명 편집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은 맞지만, 박영희는 무엇인가 염려스러운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사장님. 지금 파인랭스의 규모로 인원 충원이 가능한 상황일까요? 물론, 물량이 많아 지금 허우적대고 있긴 합니다만···.”

    박영희의 말에 몇몇 직원이 ‘풉’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박주혁이 파인랭스에 합류한 이후부터 물밑 듯 들어오는 번역에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번역업 특성상 한번 일감이 끊기면 인건비를 감당하지 못해 무너지는 경우가 많았다. 박영희는 더 먼 미래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박영희의 걱정을 미뤄 짐작한 박주혁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말했다.

    “박 팀장의 지적은 매우 날카롭군요. 그러니 영업팀에서 더욱 힘을 내야겠죠.”

    박주혁은 조광연과 한기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고, 그들은 흠칫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박주혁은 피식 웃더니 말을 이어갔다.

    “DTP팀은 번역연구팀의 보틀넥을 해소하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것도 있습니다.”

    “미래를 대비한다고요?”

    “그렇습니다. DTP 팀명이 왜 데스크톱 퍼블리싱이겠습니까?”

    팀장급 직원들은 박주혁의 말을 이해 못 하겠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주혁은 그들의 반응이 이해되는지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번역의뢰 시 하드카피 문서의 비중이 높죠. 인쇄해서 배달도 해야 하고, 프리랜서들은 문서를 수령하기 위해 회사로 들어와야 합니다. 하지만, 조만간 문서는 전부 소프트카피로 전환될 겁니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말이죠.”

    박주혁의 말에 직원들은 서로를 마주 보며 의견을 교환했다.

    “그럼 이메일로만 문서를 주고받게 되려나?”

    “그래도 중요한 문서는 인쇄할 것 같은데.”

    “인터넷이 빨라지면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죠. 지금은 너무 느려서···.”

    잠시 서로 의견을 교환하게 시간을 준 박주혁이 입을 열었다.

    “자칭 IT 전문번역업체에서 일하는 분들이 그것을 못 믿으시면 어떻게 합니까? 곧 1인 1 휴대폰 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을 부정하실 분 혹시 여기 계십니까?”

    ‘네’라고 대답할 사람은 없었다. 지금 파인랭스에서 번역하고 있는 문서들이 무엇인가? CDMA 이동통신 사업의 전반적인 제안서부터 답변서까지 전부를 번역하고 있었다. 심지어 TDX와 같은 전자교환기도 번역한 파인랭스였다. IT가 어떻게 발전할지 다들 어느 정도 예측할 터.

    “인터넷은 지금보다 100배, 1,000배는 빨라질 겁니다. 기업들이 언제까지 인쇄해서 문서를 가지고 있겠습니까? 미리 대비한 자만이 시장을 차지할 수 있는 법이죠.”

    박주혁의 말에 직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박 팀장이 염려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향후 1~2년만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파인랭스는 사양길에 접어든 것입니다. 여러분과 함께라면 저는 적어도 5년에서 10년 후 까지도 바라보고 대비할 자신이 있습니다.”

    박주혁의 말에 직원들의 얼굴이 상기되며 눈을 빛냈다. 확실히 박주혁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이끄는 힘이 있었다. 짧은 회의를 끝내고 박주혁은 허인아 과장에게 DTP팀에 입사할 공고를 내라고 지시했다.

    모든 업무지시가 끝나자 박주혁은 사장실에 홀로 앉아, 가볍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내가 가는 길이 맞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보안 권한이 풀렸으니 시스템개발도 속도를 낼 수 있다.”

    박주혁은 몇 년 뒤 찾아올 외환위기가 걱정되긴 했지만, 분명 타개할 방법은 있다. 그 프로젝트를 반드시 수주해야만 지금 인력을 끌고 갈 수 있겠지만 말이다. 박주혁은 눈을 빛내며 다시 한번 주먹을 힘껏 쥐었다.

    ‘그래, 이번엔 할 수 있어.’

    사장실에서 굳은 결심을 하던 박주혁이 벽시계를 힐끔 보더니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이런. 백연주 이사가 7시까지라고 했는데···. 좀 늦겠는걸?”

    벽시계는 6시 3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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