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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50화 (50/136)

050화 나도 독일로 초대한다고?

백연주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통화가 끝날 때까지 적응하기 어려웠다. 박주혁은 전화를 끊고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감긴가? 왜 코맹맹이 소리를···.”

박주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백희나 선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파인랭스의 박주혁 대표입니다.”

“어? 안녕하세요. 잘생긴 사장님.”

“예···?”

박주혁은 순간 말문이 막혀 멍하니 수화기를 들고 눈을 끔벅였다. 백희나가 까르르 웃자, 박주혁은 헛기침과 함께 말을 이었다.

“흠흠. 백연주 이사님께 전해 들으셨겠지만, 이번에 벤타 인비테이셔널에 참가하신다고요.”

“네. 독일에서 한다던데요? 전 독일어 전혀 모르는데···.”

“그건 파인랭스에서 해결해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 그리고 백 프로에게 드릴 선물이 하나 있는데···.”

“선물이요?”

백희나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가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부피가 좀 있어서 제가 직접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시면 주소 좀 알려주시겠어요?”

“부피가 있어요? 대체 무슨 선물이길래···. 저 잔뜩 기대합니다?”

“네? 뭐 대단한 건 아닙니다.”

박주혁은 백희나의 발랄함에 살짝 당황했지만, 치기 어린 여고생임을 알기에 피식 웃어넘겼다. 전화를 끊고 나니 사장실 문을 열고 조광연 차장이 들어왔다.

“사장님.”

“네. 조 차장님.”

“OECD 중간 납품 잘하고 왔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별다른 말 없었나요?”

“편집이 깔끔하게 되어 있어 고맙다고 하더군요. 피드백은 추후 주신다고 했습니다.”

양이 워낙 많았으니, 현재로서는 피드백할 수 없으리라. 소프트카피였으면 편집과 인쇄 그리고 제본에 이 정도 노력이 들지 않아도 됐을 텐데···. 아직은 효율적이지 못한 프로세스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박주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조광연이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예. 백희나 선수에게 오늘 더블백을 선물하기로 했거든요.”

“배, 백희나 선수요!?”

눈이 휘둥그레진 조광연이 간절한 눈빛으로 박주혁을 바라봤다.

“사, 사장님. 저도···.”

“조 차장님은 아직 할 일이 많지 않으세요?”

“예? 아, 그렇긴 한데···.”

조광연의 말끝을 흐리더니 별안간 박주혁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사장님. 그럼 사인이라도 받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부탁해보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치근덕대는 조광연을 물린 박주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차량에 시동을 거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사장님! 저 한기훈 과장입니다.”

“네. 한 과장님.”

박주혁은 시동을 건 채 고개를 갸웃했다. 한기훈 과장의 목소리가 상당히 격앙되어 있고 다급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입니까?”

“지멜스! 지멜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아아.”

흥분한 한기훈 과장과 달리 박주혁은 감정의 변화 없이 덤덤했다. 이미 강상우 부장과 구두 합의를 마친 상태였기 때문에 시간만이 문제였을 뿐. 박주혁은 차를 출발시키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봄바디어가 의뢰했던 문서와 같을 겁니다.”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의정부 경전철 입찰에서 봄바디어와 경쟁하고 있으니까요.”

“허···.”

박주혁의 차분한 말투에 한기훈이 혀를 내두르며 탄식하는 사이 박주혁이 입술을 뗐다.

“견적은 봄바디어의 두 배로 내세요.”

“두, 두 배요?”

“예. 그래도 진행할 겁니다.”

“하, 하지만···.”

강상우 부장에게 예산이 많다는 얘기를 들어서 알고 있던 박주혁과 달리 정보가 없는 한기훈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감수를 지멜스에서 한다고 하더라도 두 배라니.

감수 비용이야 파인랭스가 해야 할 일 중 일부를 고객에게 이관했으니, 지급할 명분이 있었다. 하지만, 강상우 부장에게 리베이트를 준다는 사실은 직원들에게 알려서 좋을 것이 없다. 박주혁은 말을 아꼈지만, 한기훈에게 견적을 두 배 올릴 그럴싸한 명분을 줘야만 했다. 그리고 이미 시나리오는 짜여있었다.

“지난 미팅 때 영어 번역 후 독일어 번역한다고 했었죠?”

“그랬었죠.”

“그렇기에 예산은 충분할 겁니다. 감수료도 지불하기로 협의한 상태라 견적서에 큰 저항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파독 근로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많이 받을수록 그분들께 혜택이 가는 겁니다. 제 말을 믿고 진행하세요.”

“음···. 알겠습니다. 견적서 보내고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한기훈 과장과 통화를 끝내고 박주혁은 미간을 좁히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강상우 부장, 사람 곤란하게 만드네···. 쯧.”

포석정 만남이 유쾌하지 않았던 이유, 넌지시 리베이트를 요구했던 강상우 때문이지 않았던가? 박주혁은 혀를 차며 차를 몰았다.

#

송파구 선수촌 아파트에 들어선 박주혁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여보세요? 박주혁입니다.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아. 사장님 16동으로 오시면 됩니다. 제가 내려가 있을게요.”

“알겠습니다.”

박주혁은 천천히 차를 몰아 아시아 공원과 밀접해 있는 16동에 주차하고 뒷좌석에 실려있는 더블백 상자를 낑낑대며 꺼냈다. 그때, 앳된 목소리의 백희나 선수가 박주혁을 부르며 뛰어왔다.

“박 사장님!”

더블백 상자를 꺼내 조심히 땅에 내려논 박주혁이 고개를 돌렸는데 백희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차가운 아우라룰 뿜어내는 요키아의 백연주 이사도 함께 있었다.

“안녕하세요. 박 사장님.”

“안녕하세요.”

사촌지간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백연주가 여기에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박주혁의 의아한 표정을 읽었는지 백연주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같이 살아요.”

“아. 그러시군요.”

가까운 친척이면 같이 살 수도 있겠지···.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며 박주혁은 백희나 선수에게 물었다.

“아직 학생이시니까 허리에 좋다는 의자를 선물로 드리고 싶어서요.”

“의자요? 에이. 전 공부 잘 안 하는데···.”

박주혁이 살짝 당황하자, 백연주가 불쑥 끼어들었다.

“희나야. 애써 선물 가져오셨는데 그렇게 말하면 무안하지.”

“아. 죄송해요. 어쨌든 감사합니다! 무거워 보이는데 같이 들까요?”

“괜찮습니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박주혁은 백희나를 따라 아파트로 들어갔다.

대문이 열리고 박주혁은 더블백을 집안으로 들이며 큰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분명 집안에 어른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인사한 것인데 백연주와 백희나가 갑자기 피식거리며 웃었다.

‘뭐냐?’

박주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웃고있는 그들을 빤히 쳐다보자, 백연주가 헛기침하며 말했다.

“박 사장님. 여긴 저희 둘만 살아요.”

“예?”

“희나 부모님은 지방에 계시고, 저희 부모님은 미국에 계시죠.”

“아, 그렇군요.”

박주혁이 그제야 둘이 같이 사는 이유를 알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백희나에게 물었다.

“의자는 어디에 놓으실 건가요? 제가 조립까지 해드리겠습니다.”

박주혁은 박스를 풀어 의자를 하나하나 조립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백연주가 음료수를 가져와 박주혁에게 내밀었다.

“박 사장님. 웬 의자입니까?”

“아. 더블백 이론을 적용해서···. 암튼, 허리에 좋다고 합니다. 사무실 의자도 전부 이것으로 바꿨죠.”

“오, 그래요?”

백연주가 그제야 관심이 간다는 듯 조립되고 있는 더블백을 유심히 바라봤다.

“정말 등받이가 2개로 되어 있군요. 그래서 더블백 인가 봅니다.”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음. 우리도 더블백으로 교체하자고 얘기해봐야겠네요.”

백연주의 말에 박주혁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정말 그러실 생각이시면 제가 연결해드릴 수 있습니다. 더블백 제조사가 저희 고객이기도 하거든요.”

“아, 정말요? 잘됐네요. 이 건 관련해서 조만간 연락드리겠습니다.”

백연주의 친절한 태도가 신경 쓰였지만, 배정산업에게도 좋은 기회일 터.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니겠는가? 파인랭스는 두 회사와 강력히 연결될 테니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다. 백연주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 더블백의 조립이 끝났다.

“백 선수. 다 됐습니다. 한번 앉아 보세요.”

“와! 의자가 독특하게 생겼네요?”

백희나는 낼름 의자에 앉아 뱅그르 돌며 환하게 웃었다.

“생각보다 편하네요. 박 사장님 감사합니다.”

“골프에서는 허리가 생명이라던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에이 저 공부 안 한다니까요. 이 의자는 우리 언니가 더 잘 쓰겠는데요?”

백희나는 배시시 웃더니 혀를 삐죽 내밀었다. 여고생은 정말 어디로 튈지 모른다더니···. 박주혁은 피식 웃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백희나 선수에게 선물한 것이니, 사용은 알아서 하십시오.”

박주혁이 박스를 치우며 정리하자, 백연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벌써 가세요?”

주변 정리를 하다 말고 박주혁이 고갤 들어 백연주를 빤히 쳐다봤다. 그저 바라봤을 뿐인데 백연주는 시선을 살짝 피하며 얼굴을 붉혔다. 박주혁은 붉어진 백연주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디 아픈가? 얼굴에 열감도 있는 것 같고···.’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몸이 아프면 그렇게 서러울 수 없는 것이다. 박주혁 자신도 그 서러움을 잘 알고 있었기에 백연주가 안쓰러워졌다.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백연주의 이마에 슬그머니 손을 올려 열을 확인했다. 그러자 백연주가 화들짝 놀라 작게 소리쳤다.

“어맛!”

백연주가 무척 당황하며 흠칫 놀래는 사이 박주혁은 덤덤하게 말했다.

“열은 없으신 것 같은데···. 춥거나 하지 않으세요? 얼굴에 열감이 있는데요.”

“아, 안 아파요. 뭐, 뭐 하시는 거에욧!”

백연주의 얼굴이 확 달아오르더니 뒷걸음질 치며 눈을 내리깔았다. 백연주의 모습을 보며 박주혁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다시 주변을 정리했다. 박주혁과 백연주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백희나는 눈에 호선을 그린 채 입을 가리고 어깨를 들썩였다.

이상한 분위기를 박주혁 혼자만 모르는지, 그는 덤덤하게 정리를 끝내고 손을 털며 말했다.

“자, 그럼 가보겠습니다.”

박주혁의 말에 백연주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지만, 이내 아무 말 못 하고 고개를 살짝 숙여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백희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말했다.

“사장님 왜 벌써 가세요. 식사는 하셨어요? 여기 오시느라 식사 못 하셨을 것 같은데?”

“아직 안 하셨습니까? 이미 하셨을 거로 생각했는데요.”

“저희도 식전이에요. 맛있는 것 사주세요. 사장님~”

“그럼. 그럴까요? 백 선수, 혹시 먹고 싶은 것 있나요?”

박주혁의 말에 백희나가 활짝 웃더니 말했다.

“피자헉!”

“좋습니다. 그럼, 가시죠.”

“아싸!”

백희나가 더블백에서 벌떡 일어났고 백연주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평상시 입는 옷과는 달리 여성스러운 원피스였는데 박주혁 눈에는 상당히 어색했다.

피자헉에서 식사를 마친 후 박주혁은 조광연과의 약속을 잊지 않고 백희나에게 사인을 부탁했다.

“이거면 돼요? 사인 처음이라 어색하네요.”

백희나가 부끄럽다는 듯 몸을 비비 꼬았다. 백희나가 사인한 종이를 가만히 내려보던 박주혁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처음 치곤 사인이 너무 자연스럽잖아. 하여간 여자는 다 여우라니까?’

박주혁은 백희나를 향해 웃어 보이고는 또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백 프로. 혹시 골프 좀 가르쳐 줄 수 있나요?”

“예에? 박 사장님. 골프 안 치세요?”

“예 아직 입문 전입니다.”

“헐.”

백희나의 입장에서 사장들은 모두 골프를 친다는 인식이 있었는지 무척 놀랐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가만히 박주혁을 바라보던 백희나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그럼. 소화도 시킬 겸 연습장에 가요.”

“바로요? 그래도 됩니까?”

“안될 건 또 뭐에요. 가요. 언니, 괜찮지?”

백연주는 박주혁이 이마에 손을 댄 후부터 부쩍 말수가 줄어 있었고 이번에도 고개만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박주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디 아픈가 본데···.’

“이사님은 몸이 안 좋으신 것 같네요. 백 프로는 제가 책임지고 안전하게 집에 모셔다드릴 테니 먼저 들어가시죠.”

“괘, 괜찮아요! 저도 골프 칠 줄 알거든요. 소화도 잘 안 되는 것 같고···.”

말끝을 흐리는 백연주가 상당히 어색했다. 어쨌든 셋은 골프 연습장으로 향했고 그렇게 박주혁은 앞으로 대한민국의 골프 여제가 될 백희나에게 골프 레슨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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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하던 운동을 해서 그런지 자고 일어나니 온몸 곳곳이 결렸다.

사무실에 출근한 박주혁은 컴퓨터를 켜고 커피 한잔을 마시며 뭉친 어깨와 다리를 풀었다. 그 사이 이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울렸다.

- 호록.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컴퓨터로 시선을 옮긴 박주혁은 재빨리 이메일을 클릭했다.

[벤타 오토 계약서 번역 의뢰]

손승찬이 보낸 계약서 번역이었다. 양이 많지는 않았지만, 이번 벤타 인비테이셔널과 관련된 보험 및 스폰서 계약 등이 주를 이뤘다. 벤타 자동차의 주력 사업은 아닌 곁다리 이벤트성 사업이었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연결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매사 최선을 다해 번역을 진행하면 언젠가 주력 번역도 맡을 수 있는 법 아니겠나?

“좋아. 첫 단추는 채워졌어.”

박주혁은 커피잔을 가져가며 옅은 미소를 지었는데 이메일을 읽어가면서 점점 그의 눈이 커졌다. 이메일을 다 읽고 난 박주혁이 커피를 뿜을 듯이 놀랐다.

- 쿨럭.

“뭐? 나도 독일로 초대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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