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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49화 (49/136)
  • 049화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다.

    요키아 백연주 이사와 통화를 끝내고 박주혁은 조광연 차장과 오해영을 불렀다.

    조광연과 오해영은 사장실에 들어와 양손을 깍지낀 채 턱을 괴고 고민에 빠져있는 박주혁을 맞이했다.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박주혁을 빤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박주혁이 눈을 번뜩이더니 말했다.

    “조 차장. 일전에 백희나 선수와 계약했던 내용 기억합니까?”

    “예. 언어 지원을 하는 대신 왼쪽 어깨 쪽에 우리 회사 배너를 붙이기로···.”

    조광연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오해영을 빤히 쳐다보더니 소리쳤다.

    “설마!”

    “예?”

    오해영은 갑자기 자신을 쳐다보며 소리치는 조광연을 빤히 쳐다보며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그때 박주혁이 차분한 목소리로 오해영을 불렀다.

    “해영 씨, 백희나 선수 아십니까?”

    “몇 번 들어본 것 같아요. 여고생 골프 천재던가?”

    박주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광연에게 말했다.

    “조 차장. 담뱃갑 줘보세요.”

    “예. 여기 있습니다.”

    박주혁은 담뱃갑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조광연의 왼쪽 어깨에 슬그머니 대봤다.

    “음. 딱 이 사이즈 정도겠네요. 파인랭스 로고를 제작해야겠습니다.”

    “로고요?”

    파인랭스의 로고가 있긴 했지만, 그저 활자의 조합일 뿐이었다. 작은 디자인으로도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TV나 신문에 백희나 선수의 모습이 잡힐 텐데, 그때 파인랭스의 로고가 눈에 띄도록 디자인을 해야 합니다.”

    오해영은 담뱃갑을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물었다.

    “파인랭스 기존의 로고는 관계없이 디자인 해도 될까요?”

    “그럼요. 기왕이면 시안 여러개를 받아봤으면 좋겠군요. 직원들에게 투표도 돌려보고요.”

    “으음.”

    오해영이 긴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좋습니다.”

    오해영이 사장실을 빠져나가고, 박주혁은 조광연에게 넌지시 물었다.

    “조 차장. 일전에 골프 친다고 했었죠? 시간 있으면 골프 좀 배워봅시다.”

    “저야 환영이죠. 하하하.”

    순간, 조광연의 눈에서 사악한 빛이 넘실대다 사라졌다. 아마도 박주혁을 입문시켜 벗겨 먹을 심산이라 지레 짐작됐다. 조광연을 물리고 박주혁은 번역연구팀으로 향했다.

    “박 팀장님. 외무부 문서 준비됐나요?”

    “예. 영문은 검수까지 완료됐고, 중문, 일문을 검토 중입니다.”

    박영희가 일문, 중문 감수자를 힐끔 쳐다봤고, 감수를 맡은 직원이 소리쳤다.

    “거의 다 됐습니다!”

    “좋아요.”

    박주혁은 박영희의 어깨를 토닥이고 심영찬에게 다가갔다.

    “심 대리. 개발 일정 언제쯤 공유 가능합니까?”

    “오늘 중으로 러프한 계획 짜서 드리겠습니다.”

    “이제 개발에 속도 좀 붙겠지?”

    “기대하십시오!”

    ‘파인랭스 시스템의 보안 권한만 풀려도 정말 뚝딱일 텐데···.’

    파인랭스의 권한이 업그레이드되지 않은 것이 아쉬웠지만, 우선은 최선을 다해 파인랭스를 성장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 사장실로 돌아온 박주혁은 외무부 공보팀장 한율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공보팀 한율입니다.”

    “안녕하십니까? 파인랭스 박주혁 대표입니다.”

    “아, 대표님 번역은 완료되셨습니까?”

    “예. 이제 곧 찾아뵈려고 합니다. 괜찮으시면 점심시간 비워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조금 뒤에 뵙겠습니다.”

    박주혁이 한율 팀장과 전화를 끝내자, 박영희가 대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사장님. 외무부 문서 완료하였습니다.”

    “수고했습니다. 검수까지 완료했겠죠?”

    “당연한 말씀을···.”

    “혹시나 해서 그럽니다.”

    박주혁은 웃으며 대봉투를 넘겨받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

    외무부에 도착한 박주혁은 한율 공보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팀장님. 박주혁입니다. 도착했는데 올라갈까요?”

    “아, 대표님. 올라오시죠. 2층 공보실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점심시간 언저리라 그런지 공보실은 어수선했다. 기자실에서 나오는 기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담배에 절은 기자실을 지나칠 때는 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공보실로 들어서자 파인랭스와 마찬가지로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들려왔다. 언론담당관이라고 적힌 팻말 아래 못해도 25명이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 토도독 토독.

    익숙한 소리에 박주혁이 살짝 미소 지으며 공보실을 두리번거릴 때 누군가 다가와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안녕하십니까. 파인랭스에서 왔습니다. 한율 팀장님과 약속이 있습니다만···.”

    “아, 그러시군요. 저쪽으로 가시면 팀장실이 있습니다.”

    박주혁은 파티션으로 만들어진 좁은 통로를 따라 이동해 팀장실에 도착했다.

    - 똑똑.

    “들어오세요.”

    전화로 들었던 날카로운 한율 공보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박주혁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네모 각진 금테 안경을 쓴 한율이 안경을 치켜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 사장님 되시죠?”

    “예. 박주혁입니다.”

    “반갑습니다.”

    한율이 내민 손을 박주혁이 맞잡았다.

    “앉으시죠.”

    박주혁은 자리에 앉자마자, 대봉투를 한율에게 내밀며 말했다.

    “영, 중, 일 3개 국어로 번역했습니다.”

    한율은 대봉투를 들고 가만히 서류를 꺼내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한율은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번역본을 읽더니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영문은 아주 마음에 드는군요. 공보팀 에디터 보다 더 잘된 문장도 있어 솔직히 좀 놀랍네요.”

    “과찬이십니다.”

    박주혁의 말에 한율은 씩 웃더니 중국어 번역본도 펼쳐 읽었다.

    “중국어도 깔끔하군요.”

    “중국어도 하십니까?”

    “잘하진 못하지만, 읽는 것은 가능하죠···. 잠시만요.”

    한율은 일본어 번역본까지 마저 확인한 후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우리 에디터들 다른 일 시키고 파인랭스에 번역 맡겨야 할 것 같습니다. 아주 만족스럽네요. 특히 일본어는 누가 했는지 모르겠는데 우리 의도도 잘 숨겨두었군요. 이런 번역본을 받아보리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는데 바로 써도 무방하겠는데요?”

    한율은 흡족한 표정으로 번역본을 다시 대봉투에 넣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식사하러 가시죠.”

    박주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율을 뒤따랐다.

    #

    박주혁은 한율과 식사를 마치고 유명한 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국장님. 박주혁입니다.”

    “아! 박 대표. 무슨 일이신가?”

    “외무부 온 김에 생각나서 전화했습니다. 안 바쁘시면 커피라도 한 잔 주시겠습니까?”

    “좋지.”

    박주혁은 3층 국제기구국 국장실로 향했다. 몇 번 마주쳤다고 비서가 고개를 까닥이며 아는 척 했다.

    “국장님 뵈러 왔습니다.”

    “네. 얘기 전해 들었습니다.”

    비서를 지나쳐 국장실로 들어가자 유명한 국장이 반갑게 박주혁을 맞이했다.

    “이야. 박 사장님. 얼굴 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근래에 일이 휘몰아쳐서 연락도 자주 못 드렸네요.”

    “무슨 그런 말을···. 앉지.”

    박주혁은 푹신한 쇼파에 앉았고, 곧 비서가 커피 2잔을 내왔다. 뜨끈한 커피를 한모금 한 유명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오늘은 무슨 일인가? 정말 나 보고 싶어서 온 건 아닐 테고?”

    “아닙니다. 정말 외무부에 납품하는 김에 국장님 뵈러 온 겁니다.”

    “정말인가? 내가 뭐 또 다리 놔줘야 하는 일은 없고?”

    “에이. 섭섭하게 왜 그러십니까? 누가 들으면 일이 있어야만 연락하는 사이인 줄 오해하겠습니다.”

    “그러면 또 뭐 어떤가? 하하하.”

    유명한이 호탕하게 웃으며 커피를 입에 가져갔다. 박주혁도 미소지으며 커피를 마시는데 유명한이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OECD 문서는 오후에 온다고 연락을 받았는데, 오늘 납품은 다른 건이었나 보지?”

    “예. 기밀이라 말씀드리긴 뭐하고···.”

    “음? 기밀이라···.”

    유명한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물었다.

    “뭐 설마 우리 장관님이 직접 의뢰 한 건 아니겠지?”

    박주혁이 흠칫거리자, 유명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물론, 잘했을거라 생각하지만, 기회는 늘 있는 것은 아니니 잘 잡아보세요.”

    “국장님!”

    “하하하.”

    결국 이번 보도문과 서한도 유명한 국장의 작품이었다. 박주혁은 놀란 토끼 눈을 뜨고 유명한에게 물었다.

    “장관님께는 어떻게 말씀하신 겁니까?”

    “얼마 전에 외무부 국장급 라운딩이 있었는데 장관님도 함께 했었지. 거기서 우연히 내가 장관님과 같은 조가 됐지 뭔가?”

    유명한의 말에 박주혁은 그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라운딩이 뭐야?’

    단어의 뜻을 유추하면서 유명한에게 거듭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데 유명한이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박 사장도 골프 치지?”

    “배워보려고 합니다.”

    “그래? 열심히 연습해서 언제 한 번 같이 라운딩하자고. 이원희 선배도 같이 가면 더 좋고.”

    “알겠습니다. 열심히 칼을 갈아야겠군요.”

    “하하하. 기대하고 있겠네.”

    박주혁은 조만간 라운딩하기로 약속한 후 외무부 건물을 빠져나왔다. 차에 올라타며 박주혁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후. 라운딩이 골프 용어였군. 골프를 정말 배우긴 해야겠네. 권선호가 영업의 시작과 끝이 골프라더니 허언이 아니었어.’

    잠시 뒤면 직원들이 OECD 프로젝트 중간 납품을 위해 들이닥치겠지만, 박주혁은 다른 할 일이 있었다. 대시보드에 있는 시계를 힐끔 쳐다보니 벌써 3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박주혁은 서둘러 차를 몰아 사무실로 향했다.

    #

    사무실에 도착하니 오후 5시를 넘었다. 박주혁은 시계를 힐끔 쳐다보고 수화기를 들었다.

    “할로.”

    이제는 좀 익숙해진 독일어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박주혁은 한국어로 밝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손 선생님. 한국의 파인랭스 박주혁 대표입니다.”

    “어? 아! 박 대표님. 이렇게 전화까지 다 주시고?”

    “선생님의 이메일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이렇게 함께 해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손의권은 손승찬이 파인랭스로 연락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왠지 손의권 선생이 아들을 쥐잡듯 들들 볶았을 것만 같았다.

    “독일어 번역만 해주셔도 되는데, 또 이렇게 아드님까지 소개해주셔서 어떻게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감사는 무슨, 좋은 일 한다는데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건 아들 녀석밖에 없더라고. 하하하.”

    손의권은 별것 아니라는 듯 너털웃음을 짓더니 갑자기 정색하며 말했다.

    “그런데 박 사장님. 그 골프선수···. 혹시 얘기했나요?”

    “아. 골프선수 소개해달라는 얘기도 전달받았는데, 아직 확정된 것은 없습니다. 오늘 아드님과 통화해보고 정확하게 알아보려고 합니다.”

    “그렇군요. 그···.”

    손의권이 말끝을 흐리며 우물쭈물하는 것 같자, 박주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혹시 초빙하고 싶으신 골프선수가 있으신가요?”

    “아, 아. 그게 말이죠. 그 골프 천재가 한국에서 나왔다던데 이름이···. 백 뭐더라?”

    “혹시 백희나 선수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맞아. 백희나 선수. 혹시 가능하면 백희나 선수를 어떻게 연락해줄 수 없겠소?”

    박주혁은 입 모양으로 예스를 외친 후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꼭 좀 부탁합시다. 여기 한인회에서도 아주 난리야 난리.”

    “그렇습니까? 벌써 소식이 독일까지 갔나 보군요?”

    “말도 마요. 백희나 선수의 그 호쾌한 티샷을 보는 게 소원인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제가 한번 노력해 보겠습니다.”

    손의권과 통화를 마치고 박주혁은 드디어 손승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로. 다스 잇 손슈찬 본 벤타”

    유창한 독일어에 박주혁은 순간 얼음이 됐지만, 손슈찬이라는 단어는 확실히 들었다. 손승찬임을 확신한 박주혁은 용감하게 한국말을 내뱉었다.

    “여보세요?”

    “아. 여보세요?”

    살짝 어눌했지만, 한국말이 돌아오자, 그제야 박주혁의 굳은 얼굴이 펴졌다.

    “파인랭스 박주혁 대표입니다.”

    “아아! 반갑습니다요.”

    어색하지만, 알아들을 수 있으니 됐다.

    “계약서 번역 의뢰하시겠다고 들었습니다.”

    “옙! 오늘 중으로 정리해서 메일 보낼 겁니다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일 입니다요. 번역보다는 그, 골프선수 알아봐달라고 했는데요. 그 누구더라 백키나?”

    “백희나 선수요.”

    “맞아요. 아직 아마추어라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부탁합니다요.”

    박주혁은 손승찬에게 벤타 인비테이셔널에 대한 개괄적인 정보를 확인한 후 전화를 끊고 요키아 백연주 이사에게 바로 전화를 했다.

    “네. 요키아 백연주입니다.”

    역시나 차디찬 목소리였다.

    “이사님. 파인랭스 박주혁입니다.”

    “앗.”

    백연주가 작게 비명을 지르더니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무엇인가를 떨어트렸거나, 목에 사레가 들렸거나···. 이유는 많으니까. 박주혁은 대수롭지 않게 백연주가 말하길 기다렸다.

    “아~ 대표님.”

    ‘음?’

    백연주의 목소리가 여태 알던 차가움과는 살짝 궤가 달랐다. 차가움과는 어울리지 않는 나긋나긋한 콧소리에 박주혁이 잠시 혼란스러웠다.

    ‘이 여자는 또 왜 이래?’

    역시나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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