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48화 (48/136)

048화 회사는 작아도 그릇은 큰 건가?

박주혁은 팀장들을 둘러보며,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들을 일일이 확인했다.

OECD는 전체 공정률이 50%로 오늘 오후 외무부로 중간 납품이 예정되어 있었다. IT 쪽 번역은 완료되어 있었고, 이제 의뢰한 고객별로 순차 납품하는 일만 남은 상태였다.

“모두 고생하셨군요.”

박주혁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확인한 후 화이트보드로 몸을 돌렸다.

“이제는 신규로 진행될 프로젝트들을 얘기해보겠습니다. 배정산업 독일어 번역은 현재 파독 근로자분들의 도움으로 진행만 하면 됩니다. 번역연구팀에 이관할 테니 진행하시면 되고요.”

박영희가 화이트보드에 적힌 내용과 박주혁의 말을 부리나케 적어 내려갔다.

“마찬가지로 독일어 프로젝트인 지멜스가 있습니다. 의정부 경전철 입찰 문서로 봄바디어와 같은 분량이죠.”

박주혁의 말에 다들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선순환되는 회사의 조직은 위기에 강한 법이다. OECD가 계속 진행되는 와중에 신규 프로젝트가 들어온다는 것은 상당한 부담일 테지만, 최소한 파인랭스 직원들에게는 부담이 아니라 도전해야 할 목표인 것 같았다.

“그 외 백희나 선수의 언어 지원도 있고···.”

박주혁은 화이트보드에 백희나 선수의 이름을 적으며 말끝을 흐리더니 심영찬을 쳐다봤다

“번역 프로젝트 외, 파인랭스 시스템과 랭귀지패스트도 있죠?”

자신에게 질문이 올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는지 심영찬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예! 오늘부터 합류한 개발자들과 함께 개발에 박차를 가하겠습니다.”

“이제 막 합류했으니 팀 회의를 거쳐 일정을 공유해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현재 진행 중인 사항을 전사가 공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회사가 나아가는 방향과 비전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행 중인 사항은 이 정도인 것 같고. 구 과장님?”

박주혁의 부름에 구경숙 과장이 고개를 들어 박주혁을 바라봤다.

“이번 달 시험 결과가 나왔나요?”

“예? 시험이요?”

구경숙 과장이 시험이라는 소리에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제 영어시험 본 것 아닙니까?”

“아아!”

구경숙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는 듯 탄식하듯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팀장들의 표정이 가지각색으로 변했다. 특히나 조광연의 표정이 볼만했다.

“조 차장. 성적이 별로였나 봅니다?”

“영어는 정말이지···.”

조광연 차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번쩍 들고 힘주어 말했다.

“그래도. 구 선생님 덕분에 인생 최고 점수를 기록했을 겁니다!”

“오! 조 차장. 축하할 일이군요.”

박주혁이 웃으며 손뼉을 쳤고, 팀장들이 모두 웃으며 함께 축하했다.

“그래서 몇 점입니까?”

“아···. 그. 그건···.”

조광연의 자신감 없는 말투에서 대충 점수를 유추할 수 있었다. 구경숙 과장도 얼굴을 붉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박 팀장님은 직원들 시험 성적을 제출해주세요. 그래야 월급 인상 및 황금돼지를 받을 사람을 선정하죠?”

“알겠습니다.”

영어 점수 얘기에 잠시 회의실이 뜨거워졌다. 분위기를 환기한 박주혁이 칠판에 숫자들을 쓰기 시작했다.

[6, 48, 12]

아무 의미 없는 숫자들이 나열되자, 팀장들이 눈을 끔뻑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주혁은 팀장들의 표정을 보며 미소 짓더니 말했다.

“이 숫자들이 무엇인 것 같습니까?”

“...”

다들 꿀 먹은 벙어리인 냥 아무 말이 없었다. 박주혁은 화이트보드에 적힌 숫자들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숫자 6은 우리가 주간에 근무하는 횟수를 뜻합니다. 주 6일 근무란 말이죠. 그리고 48은···.”

박주혁이 말하는 와중에 허인아 과장이 뭔가를 알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설마? 주 48시간 근무입니까?”

“정답입니다. 근로기준법에 정하는 주 48시간 근무한다는 뜻입니다.”

그제야 다들 숫자를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마지막 숫자 12는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다들 고개를 갸웃하는 가운데 조광연이 입을 열었다.

“점심시간 아닙니까?”

뜬금없는 소리에 다들 박장대소했다. 그사이 생각을 끝낸 박영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현재 우리들의 일 근무시간일까요?”

“바로 맞혔습니다. 회의가 끝난 후 여러분들의 업무일지를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 파인랭스의 일 평균 근무시간은 12시간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루의 절반 이상을 파인랭스에 쏟아붓고 있습니다.”

박주혁의 말에 팀장들이 어깨를 으쓱하며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게 당연하면 안되는 것인데 말이다. 팀장들의 반응에 박주혁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더니 말을 이었다.

“여러분이 행복해야, 회사가 성장하는 것입니다. 초기에 말했지만, 여러분들의 정시에 퇴근하여 저녁이 있는 삶을 살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한 가지 숙제를 내겠습니다.”

박주혁의 말에 팀장들은 눈만 끔벅였다. 정시퇴근을 하는 것은 모두의 꿈이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일이 많아서도 그렇지만, 그 외 잡무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하는 일들을 쭉 나열해서 제출하세요.”

“지금 하는 일들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박주혁의 숙제는 바로, 지금 하는 일들을 리스트업한 후 중요도에 따라 순위를 매기는 것이었다.

“리스트는 세세한 부분까지 작성해야 합니다. 중요도와 일과 중 차지하는 비율까지 정리해보십시오.”

정시에 퇴근하는 삶을 바란다더니 잡무를 던져주는 박주혁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시키면 하는 것이 직장인의 비애였으니까.

“리스트가 만들어지면, 업무분장도 다시 할 수 있고, 더 효율적인 조직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생각하는 일도 가능할 수 있겠죠.”

박영희 팀장이 박주혁의 생각이 궁금했는지 손을 들며 물었다.

“사장님이 생각하시는 그 일이 무엇입니까?”

박주혁은 답하는 대신 몸을 돌려 화이트보드에 적혀있는 숫자를 지우고 새로운 숫자를 적었다.

[5, 40, 8]

“주 5일 40시간 근무. 일 8시간. 파인랭스가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에이···.”

팀장들은 터무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분위기를 살피던 조광연은 혹여나 박주혁이 민망할까 싶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사장님. 저희를 생각하시는 그 마음만 받겠습니다.”

분위기에 편승해 박영희와 구경숙 그리고 허인아도 조광연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네. 사장님. 감사합니다.”

다들 현실 불가능한 일이라 믿고 있는 듯했다. 박주혁도 그들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다.

“맞습니다. 지금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분명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맞습니다. 여러분들이 리스트를 작성해 주면 제가 그것을 분석하여, 완전한 주 5일제는 아니지만, 격주로 토요일을 쉴 방법을 강구할 생각입니다.”

“겨, 격주요?”

다들 놀랐는지 회의실이 순간 웅성거렸다.

“주 5일 근무는 어렵더라도 격주로 토요일 쉬는 것은 정말로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게···. 토요일을 쉰다니. 생각도 못 해본 건데.”

“토요일, 일요일 이틀을 쉰다고? 격주로? 와.”

상상만으로도 좋은지 웅성이는 그들의 얼굴이 상기됐다. 그리고 팀장들의 잠재의식 속 어딘가에 파인랭스 사장에 대한 인식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직원의 행복이 곧 회사의 성장이라고 믿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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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가 끝나자마자, 최지훈이 박주혁을 찾았다.

“사장님!”

“예. 최 대리. 무슨 일인데, 얼굴을 붉히고 있습니까?”

“아, 그게 혹시 손의권이라는 분 아십니까?”

최지훈의 말에 박주혁이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파독 광부이신 분인데? 왜요?”

“그분의 아드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아들이라면···. 벤타?”

“맞습니다!”

박주혁은 급히 최지훈을 끌고 사장실로 들어갔다.

“최 대리. 얘기해보세요.”

“벤타에서 한국어 번역 의뢰하겠다고 했습니다.”

박주혁은 눈을 살짝 키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벤타와 연결되는 건가?’

손의권 선생님의 배려가 감사하긴 했지만, 기대도 하지 않았던 것이었는데···. 놀란 마음이 채 진정되지도 않았는데, 최지훈이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벤타 인비테이셔널 여자 골프대회에 한국인 선수를 추천해달라고 했습니다.”

“네? 골프선수요?”

“예. 아마도 파독 근로자 관련 이벤트로 한국 골프선수를 초빙할 생각인 것 같았습니다.”

“으음?”

골프선수라면···. 심지어 여자라면 유망주 백희나 선수의 언어 스폰을 하고 있었기에 충분히 연락해볼 수 있다. 박주혁은 지그시 눈을 감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것도 손의권 선생님 작품일까?’

“최 대리. 고생했어요. 제가 직접 연락해보죠.”

“예. 연락처 여기 적어두었습니다.”

최지훈이 메모한 내용을 박주혁에게 건네고 사장실을 나갔다. 박주혁은 의자에 살짝 기대며 곰곰히 생각에 빠졌다.

“우연일까? 아니면 필연?”

베를린의 시차는 지금 자정을 훨씬 넘은 시각. 독일 쪽에 전화는 오후에 하기로 하고, 박주혁은 우선 요키아의 백연주 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여전히 송곳처럼 날카로운 말투였다.

“안녕하십니까? 파인랭스 박주혁입니다.”

“아! 대표님. 안녕하세요. 오늘은 무슨 일로 연락하셨습니까? 요키아의 번역은 파인랭스에 전부 의뢰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예.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전화한 것은 번역 때문이 아니고 백희나 선수와 관련된 일입니다.”

“우리 희나요? 무슨 일인데요?”

일과 관련된 얘기를 할 때는 한없이 날카로운 백연주 이사였지만, 백희나의 이름이 등장하니 한층 말투가 부드러워졌다.

“유럽에서 벤타 인비테이셔널 여자 골프 대회가 개최될 예정입니다.”

“아, 벤타 인비테이셔널 알죠. 그런데 그건 왜···?”

“우연히 독일 쪽과 프로젝트 진행하는 건이 있는데 벤타 인비테이셔널 주최측에서 한국 선수를 초빙하고 싶다는 연락을 해와서요.”

“네에?”

백연주 이사가 화들짝 놀라 목소리를 키우며 다급하게 말했다.

“박 사장님. 제가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

백연주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한동안 미동도 없이 허공을 쳐다봤다.

골프를 잘 모르는 박주혁은 이게 얼마나 큰 기회인지 몰랐겠지만, 백연주는 잘 알고 있었다. 벤타 인비테이셔널은 상금 규모가 상당하여서 LPGA 선수들이 대거 참가한다는 것을 말이다.

백희나에게 LPGA 선수들과 경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은 요키아의 요직에 있는 그녀로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나이도 어렸거니와 아직 LPGA 무대를 밟을 수 있는 퀄리파잉도 치르지 않았기에 더욱 그러했다. 올가을에 열리는 요키아 인비테이셔널에 어떻게든 끼워보려 했었는데···. 일개 번역회사에서 벤타 인비테이셔널을 물어오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박 사장···. 회사는 작아도 그릇은 큰 건가?”

백연주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어, 희나야 너 다음 경기 스케쥴이 어떻게 되니.”

“아. 언니, 잠깐만.”

아마추어 유망주인 백희나였기에 주말마다 스케쥴이 잡혀 있었다. 백연주는 백희나의 스케쥴을 확인한 후 정색하며 말했다.

“희나야 잘 들어. 벤타 인비테이셔널에서 한국 선수를 초빙한다고 한다.”

“벤타? 그 자동차 회사 말이야?”

“그래. 그리고 그걸 파인랭스에서 알려왔어.”

“그 잘생긴 젊은 박 사장님 말이야?”

“자···. 잘생겼다고? 흠흠.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벤타 인비테이셔널 갈 수 있도록 스케쥴 조정해야겠다.”

“알겠습니다! 이사님~”

백희나와 통화를 끝낸 백연주가 수화기를 들더니 순간 멈칫했다.

“그 기회주의자가 잘 생겼다고···?”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백희나의 말이 떠올라서인지 백연주의 얼굴이 순간 화끈거렸다.

“그래 봐야 구멍가게 번역회사 사장이지.”

백연주의 얼굴이 순간 돌변해 차갑게 변했다.

“네, 파인랭스 박주혁 대표입니다.”

“박 사장님. 희나와 통화했는데요. 벤타 인비테이셔널이 언제 열리는지 알 수 있습니까? 스케쥴이 너무 빡빡해서 조정해야 할 것 같네요.”

“아. 알겠습니다. 우선 백희나 선수 참가 가능하다고 알고 있으면 될까요?”

“당연하죠. 박 사장님은 이 기회가 얼마나 좋은지 정말 모르고 계시는 겁니까?”

“아···. 제가 이제 골프에 입문해서 무지했군요. 일단 알겠습니다. 확인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백연주는 박주혁과 통화를 끝내고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말을 좀 심하게 했나?”

박주혁이 잘생겼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뭔지 모를 감정이 백연주를 뒤흔들었다. 정말로 박주혁의 첫 만남에서 어떤 생각도 하지 않았었는데 말이다.

백연주 이사는 부정하고 있었지만, 박주혁과의 강렬한 첫 만남이 마음 한구석 호감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박주혁은 실제로 훤칠한 키에 호감형 얼굴이었으니···. 백희나의 한마디가 잔잔한 호수에 물결을 일으킨 것이었다. 백연주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구멍가게 사장 주제에 무슨!”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을 마시는 것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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