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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47화 (47/136)

047화 이름이··· 박주효기?

박주혁이 사장실을 나와 중국어, 일본어 프리랜서 번역가들의 자리를 확인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사무실이 비좁아.”

권선호가 직원들을 우르르 데리고 나가면 좀 나아질 것 같았는데···. 최소영 과장만 덜렁 따라갈 줄 누가 알았겠나? 사무실을 한번 둘러본 박주혁이 중국어와 일본어 프리랜서와 함께 있는 박영희 팀장에게 다가갔다.

“박 팀장님. 그럼 부탁합니다.”

“예. 걱정하지 말고 주말 잘 쉬세요.”

“번역사님들도 잘 부탁드립니다. 특히나 중요한 일이잖아요..”

박주혁의 말에 번역사들도 눈을 빛내며 답했다.

“사장님.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주혁은 번역사들에게 사람 좋은 미소를 흘리며 박영희 팀장의 팔을 잡아당겨 속삭였다.

“박 팀장님. 프리랜서 번역사님들 식사도 챙겨드리고 돌아가실 차비도 챙겨드리세요.”

박영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집에 도착하자 현관문 밖에서부터 비릿하면서도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익숙한 냄새였다.

‘고등어?’

박주혁은 군침을 삼키고 현관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이제 왔니? 어서 씻고 저녁 먹자.”

“예.”

부리나케 샤워하고 식탁에 앉자, 역시나 예상대로 구릿빛으로 변한 고등어가 먹음직스럽게 식탁 위에 누워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 앉아 과일을 먹는 이런 평범한 일상이 박주혁은 너무도 좋았다. 그러다 문뜩 회사에서 복닥거리는 직원들이 떠올랐다. 박주혁이 잠깐 미간을 좁히더니 입을 열었다.

“어머니. 그 일전에 구로공단에서 보셨다던 창고부지요.”

“응.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강남이 좋겠지?”

“예? 아니요. 그 땅 매물로 나와 있던가요?”

“글쎄 부동산을 끼고 간 건 아니라···.”

“한 번 알아봐 주세요.”

최효정 여사가 과일을 먹다 말고 박주혁을 빤히 쳐다봤다.

“강남이 아니고?”

“예. 강남 아니고요.”

“주혁아 내가 가봤는데 구로공단은 이미 쇠락해서 유동 인구도 없고 말이야···.”

최효정 여사가 걱정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지만, 구로공단으로 가는 이유는 차고 넘쳤다. 박주혁은 웃는 얼굴로 최효정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머니. 구로공단에는 게임회사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IT 기업들이 자리를 잡게 돼요. 꼭 가야 합니다. 특히나 말씀하신 그곳은···. 구로 디지털 단지의 중심이에요.’

“알아봐 주세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번에는 임대가 아니라 건물을 지을 생각이에요.”

“주혁아···. 원대한 꿈을 갖고 도전하는 것은 매우 좋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렴. 번역회사로 무슨 돈을 벌어 건물을 짓겠다는 거니? 아버지 때부터 겪어봐서 나도 회사의 자금 흐름 정도는 알고 있다. 건물을 짓는 것은 무리야.”

박주혁은 사과를 한입 베어 물며 말했다.

“어머니. 할 수 있습니다. 파인랭스는 이제 단순한 번역회사가 아니에요.”

“음?”

최효정 여사가 눈을 끔벅였고, 박주혁은 미소 지었다.

“랭귀지패스트라는 번역 툴도 만들고 있고, 지멜스라는 다국적 기업과도 곧 거래하게 될 겁니다.”

“랭?스트? 지멜스?”

박주혁은 빙그레 웃으며 가만히 최효정 여사의 손을 잡았다.

“다 생각이 있으니까. 한번 알아봐 주세요. 파인랭스의 지금 사무실은 너무 비좁아요.”

박주혁의 말은 최효정 여사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하지만, 아들의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신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최효정 여사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아는 보겠다만···. 그래도 강남이.”

“어머니!”

“그래. 알았다. 알았어.”

최효정 여사가 무척 아쉽다는 듯 고개를 살짝 흔들며 사과를 한입 베었다. 진한 아쉬움이 느껴지는 어머니를 보며 박주혁은 피식 웃었다.

“두고 보세요. 구로공단은 천지개벽할 테니까요.”

“어휴. 이 세상 물정 모르는 녀석!”

최효정 여사는 못 참겠는지 박주혁의 정수리를 쥐어박았다. 물론, 주먹에는 자식을 걱정하는 마음이 가득 들어있었지만 말이다. 박주혁은 머리를 쥐어 잡고 엄살을 피며 말했다.

“어머니. 이건 폭력인데요?”

“이놈이!”

최효정 여사의 매서운 꿀 주먹이 다시 한번 정수리에 별을 꽂았다.

“아!”

박주혁은 정수리를 부여잡고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 내일은 우리 동해 보러 갈까요? 가서 싱싱한 회도 먹고요.”

“어휴. 속없는 녀석.”

말은 그렇게 해도 최효정 여사도 박주혁의 말이 싫지는 않았는지 미소를 지었다.

#

월요일 이른 아침.

어머니와 함께 동해에 다녀오느라 피곤할 법했지만, 아침일찍 박주혁은 눈을 번쩍 떴다. 처음 출근하는 개발자와 디자이너를 맞이할 생각에 긴장한 탓이다.

오전 8시를 조금 넘긴 시각.

평소 출근이 8시 55분 경임을 고려하면 상당히 일찍 출근한 것인데 이미 사무실의 문이 열려있었고 창문이 모두 활짝 열려있었다. 누군가 환기를 위해 열어놓은 것이 분명했다.

‘누가? 내가 하려고 했는데.’

박주혁이 고개를 갸웃하며 사무실로 들어서자, 예상외의 인물이 박주혁을 반갑게 맞았다.

“어? 사장님. 일찍 나오셨네요?”

“최 대리? 이 시간에 웬일입니까?”

“아. 신입사원 때부터 하던 버릇이 몸에 배서요.”

“그럼···. 매번 이렇게 해왔다는 겁니까?”

몰랐던 사실이었다. 최지훈이 이렇게 성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권선호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은 아니었는지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최지훈에게 살짝 놀라는데 누군가 헐떡거리며 사무실로 뛰어 들어왔다.

영업팀 막내 김진우였다. 그는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큰 소리로 소리쳤다.

“죄, 죄송합니다. 또 늦었습니다!”

김진우의 외침에 박주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최지훈을 바라봤다. 최지훈도 지금 상황이 민망했는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김진우에게 다가가 발을 툭툭 찼다. 그제야 이상함을 느꼈는지 김진우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헉!”

김진우는 박주혁이 있으리라는 상상도 못 했는지 엄청나게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김진우 씨, 뭘 그렇게 놀라요.”

“예? 아, 아니. 사장님이 계실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오늘 신입사원들이 오니까 좀 일찍 와서 사무실 정리 좀 하려고 했는데···. 영업팀 출근 시간이 8시인 줄은 몰랐네요?”

박주혁의 말에 최지훈과 김진우가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 박주혁은 최지훈과 김진우의 팔을 토닥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아껴줘서.”

“예? 아닙니다. 하고 싶어서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요. 회사를 아끼는 그 마음이 고맙단 말입니다. 진우 씨도 마찬가지고.”

“아, 아닙니다. 사실 전 매번 늦어서요.”

“음? 지금이 몇 신데요? 최 대리. 너무 빡빡한 거 아닙니까? 앞으로 8시 30분으로 합시다.”

박주혁의 말에 최지훈이 머쓱하게 웃으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최지훈의 답에 얼굴에 꽃이 피는 사람은 김진우였다. 그 모습을 본 박주혁이 피식 웃더니 탕비실에서 진공청소기를 꺼내 사무실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최지훈과 김진우가 달려들어 청소기를 뺏으려 했지만, 박주혁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런 것은 대표가 하는 거예요. 여러분은 더 생산적인 일을 하세요.”

우물쭈물하며 서로를 마주 보던 최지훈과 김진우에게 박주혁이 다시 한번 정색하며 말했다.

“고객 방문일지, 업무일지 보강 등 할 일 많잖아요?”

“그, 그렇긴 하지만···.”

“원래 회사 대표가 하는 일은 여러분들이 일을 잘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어서 하던 일이나 마저 하세요.”

최지훈과 김진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로 돌아가고, 박주혁은 사무실 구석구석을 청소했다. 30분 정도 지나자, 직원들이 하나둘 출근했다. 그리고 쭈뼛거리며 사무실로 들어선 뉴페이스 3인방이 다짜고짜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입사한 김홍진입니다!”

“류관수입니다!”

“홍자라고 합니다.”

3인방은 피골이 상접한 몰골이었고 약속이라도 한 듯 체크무늬 남방과 베이지색 면바지, 그리고 책가방을 메고 있었다. 누가 봐도 영락없는 공대생 3인방이었다. 자신들의 이름을 소개한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잘 부탁드립니다!”

박주혁은 피식 웃으며 그들을 미소로 맞이했다.

“반갑습니다. 파인랭스 박주혁 대표입니다. 우리 함께 잘해봅시다.”

박주혁은 3인방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는 자리를 안내하려는데 굳은 얼굴의 심영찬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심 대리. 좋은 아침입니다.”

“예. 사장님.”

말투가 뭔가 딱딱했다. 3인방을 인솔해가는 그의 뒷모습도 제법 늠름했다. 상당히 어색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뒤이어 디자이너인 오해영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아, 안녕하십니까? 새로 입사한 오해영 디자이너입니다.”

은쟁반 위에 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목소리에 3인방에게는 별 반응이 없던 영업 팀원들이 벌떡 일어나 격렬히 환영했다.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직원들의 출근을 모두 지켜본 박주혁은 미소 지으며 사장실로 들어가 이메일을 작성했다.

[팀장급 회의 오전 10시에 하겠습니다.]

이메일을 발송하며 박주혁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현황 파악도 하고 근무 환경도 환기해야겠어.”

오전 10시.

잠시 들떴던 분위기가 가라앉고 팀장급 인사들이 하나둘 회의실로 모였다. 박주혁은 팀장들을 둘러보고 입술을 뗐다.

“모두 모인 것 같군요. 우선 토요일 밤늦게까지 번역사들과 함께 자리를 지켰던 번역연구팀께 감사를 전합니다. 현재 진행 상황은 어떻죠?”

박주혁의 주도하에 회의가 시작됐다.

#

- 띠리리.

팀장급 회의가 시작되고 얼마 후, 사장실의 전화기가 울렸다. 최지훈 대리가 재빨리 전화를 당겨 받았다.

“네. 파인랭스 최지훈 대리입니다.”

“할로?”

생소한 발음의 언어에 최지훈이 순간 굳으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핼로우.”

“아차. 한쿡말로 해야 하는데요. 죄송합니다요.”

“아···. 예. 무슨 일이십니까?”

“저희 아버지가 손의권입니다요.”

최지훈은 메모하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의권이라는 사람은 들어본 적도 없고, 이 어색한 억양은 영어 발음도 아닌 것이 매우 어색했다. 최지훈은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중얼거렸다.

‘아, 아침부터 장난 전화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단은 응대해주기로 마음먹었지만, 일그러진 표정은 펴질 생각이 없었다.

“네. 말씀하세요.”

“제가 벤타 법무부에서 근무하는데요. 아버지께서 연락해놨다던데요. 이름이···. 박주효기?”

벤타 자동차 법무부라는 소리에 헛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했지만, 애써 참았다. 그런데 박주혁이라는 이름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자,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박주혁 사장님이요?”

“아! 옙. 옙.”

박주혁이라는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장난 전화로 오인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장난 전화였다면 단단히 혼내줄 요량이었는데···. 어쨌든 손승찬은 최지훈에게 엄청난 소식을 하나 안겨줬다.

“그러니까. 벤타 자동차의 계약서를 한국어로 번역하고 싶으시다고요.”

“옙! 맞습니다요.”

“그리고 벤타 자동차 주최하는 여자 골프 대회에 한국 선수를 초빙하고 싶고요···?”

“옙!”

최지훈은 미간을 좁힌 채 메모하며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그런데 저흰 번역회사라서 골프선수는 잘 모릅니다.”

“아. 그러니까요. 한번 알아봐달라는 겁니다요. 한국에는 아직 벤타 지사가 없어서요. 최근에 한국에서 아주 핫한 여자 선수가 있다던데요? 이름이···. 배키나?”

“예.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우선 사장님께 보고하겠습니다. 성함과 연락처를 알려주시면 전달하겠습니다.”

“옙! 당케! 손슈찬이고요. Son···.”

최지훈은 손승찬이 불러준 이메일주소를 적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 벤타 자동차네. 사장님은 언제 독일까지 연락하신 거지?’

최지훈은 박주혁의 행동반경에 혀를 내두르는데 때마침 회의가 끝났는지 사람들이 우르르 나왔다. 최지훈은 메모지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박주혁에게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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