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46화 (46/136)
  • 046화 직원의 행복이 곧 회사의 성장!

    박주혁은 파독 근로자 연합회 하태경 회장과 통화를 마치자마자, 굳은 표정으로 국제협력단에 전화를 넣었다.

    “네. 최혜나 주무관입니다.”

    “주무관님 파인랭스의 박주혁입니다.”

    “아 네! 대표님. 얼마전 지멜스에 방문하셨다고요?”

    최혜나 주무관은 자신의 사업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믿었는지 목소리가 밝았다.

    “네. 그런데 문제가 좀 있습니다.”

    “문제요? 설마, 파독 근로자분들께서 번역을 거부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문제는 아니고···.”

    박주혁은 하태경 회장과의 전화 내용을 최혜나 주무관에게 전달했다. 그러자, 최혜나 주무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음. 회장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금으로 외국 국적자인 파독 근로자분들께까지 지원한다는 것은 형평성 문제가 있습니다.”

    “으음. 그럴 수 있겠군요. 방법 없겠습니까?”

    “지금으로서는 없네요.”

    최혜나 주무관의 단호한 말에 박주혁은 실망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려놨다. 분명 같은 시기 자신의 젊음을 담보로 외화를 송금했을 그분들께 행정적 문제로 지원이 불가하다니. 물론 최혜나 주무관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는 가는 상황이었지만···.

    “방법이 없을까?”

    박주혁이 한참 고민에 빠져있을 때, 허인아 과장이 결재판을 들고 사장실로 들어왔다.

    “사장님. 결재 부탁드립니다.”

    박주혁은 허인아 과장이 내민 결재판을 펼쳤다.

    [번역사 외주비 지급 명세서]

    월말 지급될 번역사들의 고료 지급에 대한 결재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박주혁은 가만히 명세서를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저번 달 대비 새로운 번역사들이 늘어났군. 번역사 활용은 이제 자리를 잡은 것 같아.’

    박주혁은 흡족한 표정으로 명세서에 서명한 후 결재판을 덮어 허인아 과장에게 내밀었다. 허인아 과장이 고개를 숙이며 결재판을 받으려는데 박주혁이 갑자기 멈칫거리더니 결재판을 움켜쥐었다.

    “사, 사장님? 무슨 문제라도?”

    박주혁이 미간을 좁힌채 잠시 허공을 응시하더니 허인아 과장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허 과장. 프리랜서 중에 해외에 거주하는 사람 있습니까?”

    “예? 아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 계좌에서 해외 송금은 가능합니까?”

    “은행에 확인해 보겠습니다.”

    박주혁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결재판을 허인아 과장에게 넘겼다. 그녀가 사장실 문을 닫고 나가려는 순간, 박주혁이 허인아 과장을 다급히 불렀다.

    “허 과장.”

    “예?”

    “해외 송금 가능해야 합니다.”

    “네. 처리하겠습니다.”

    허인아 과장에게 업무를 지시한 박주혁은 수화기를 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부가 할 수 없다면 내가 하면 된다.’

    “여보세요.”

    “회장님. 저 파인랭스의 박주혁입니다.”

    “아. 박 사장님. 팩스 안 들어갔나요?”

    “아니요. 팩스는 잘 받았습니다. 조금 전에 국제협력단과 얘기해봤는데···. 행정적 문제가 있어 독일에 계시는 분들께는 혜택을 드릴 수 없다고 하네요.”

    “후. 매번 똑같은 말. 쯧. 안타깝네. 독일에서 잘살고 있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 번 돈은 거의 다 송금했고, 연금으로 근근이 버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뭐 한국에 있다고 해서 더 좋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정부는 현실을 너무 몰라줘.”

    박주혁은 하태경 회장의 하소연과 같은 넋두리를 가만히 들었다. 그의 말이 마무리되자 그제야 박주혁은 입술을 뗐다.

    “회장님.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물론, 회장님께서 도와주셔야 가능한 일이긴 합니다만.”

    “방법이 있다니? 어떻게 하면 되나? 동료들을 위하는 것인데 할 수 있다면 해야지.”

    하태경 회장의 목소리가 올라가며 살짝 흥분하는 것 같았다.

    “번역에 참가하지 않는 분들의 명의를 빌려주십시오.”

    “명의를 빌려달라고?”

    뜬금없는 소리에 하태경 회장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목소리를 높여 되물었다.

    “예. 한국에 계신 파독 근로자분들의 명의가 있어야 지원금을 받을 수 있습니다. 회장님 이하 번역 안 하시는 분들이 명의만 빌려주시면, 저희가 독일로 송금하겠습니다.”

    “아. 그런 뜻이구먼.”

    “예. 물론 국제협력단에서 연락이 오면 잘 받았다거나 번역하고 있다는 식의 입맞춤은 필요하겠죠.”

    하태경 회장은 흔쾌히 알겠다고 답했고 심지어 명의를 빌려줄 사람들을 모아 별도로 연락해 주기로 했다. 그렇게 통화가 마무리될 때쯤 박주혁이 목소리에 힘주며 말했다.

    “아. 만약의 횡령을 방지하기 위해 저희가 회장님께 독일에 계신 분들의 번역 분량과 금액을 공개하겠습니다.”

    박주혁의 진지한 말에 하태경 회장이 갑자기 껄껄거리며 웃더니 답했다.

    “이보게. 박 사장. 번역료 횡령해봐야 얼마겠나?”

    “예? 아닙니다. 이런 일은 정확해야 합니다. 엄연히 파독 근로자분들을 위한 사업인데 허투루 쓰여서야 하겠습니까?”

    “껄껄. 박 사장이 그렇게 생각해준다니 내가 다 고맙네. 하지만 잘 생각해보게 유명 정치인, 경영인들은 몇십억, 백억을 횡령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고 있어. 박 사장이 설사, 횡령했다고 한들 아무도 뭐라 할 사람 없네. 그런 걱정이란 말고 우리 동료들을 잘 챙겨주시게나.”

    하태경 회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박주혁은 목 뒤를 손으로 주물렀다. 박주혁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는 것 같았으나, 그는 벽에 걸린 사훈을 바라봤다.

    [정직, 신뢰, 존중]

    사훈을 보던 박주혁의 눈이 번뜩였고, 그는 목을 주무르던 손을 내려 주먹을 힘껏 쥐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정부 돈이 눈먼 돈이라지만···. 안될 말이지.”

    각오를 다진 박주혁이 컴퓨터를 바라보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제목: 친애하는 파독 근로자분들께···.]

    [대한민국은 짧은 기간에 경제발전과 민주화라는 경이로운 성과를 이뤄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 가족과 나라를 위해 타지에서 젊음을 불사른 여러분들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여러분의 노고와 헌신, 피와 땀에 작게나마 보답하고자, 외무부 산하 국제협력단과 파인랭스가 여러분들이 다시 한번 국가의 경제에 이바지할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작성된 이메일을 다시 읽어본 박주혁이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위아래로 살짝 끄덕이고는 이메일을 발송했다.

    - 딸깍.

    경쾌한 클릭음과 함께 이메일은 독일로 날아갔다.

    #

    독일 베를린.

    오전 8시를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손의권은 올 초 서비스가 시작된 한국 포털사이트인 ‘넥스트’에 접속했다. ‘넥스트’에 접속해 한국 소식을 접하는 것이 그에겐 유일한 낙이었다. 은퇴 후 하릴없이 컴퓨터로 한국 뉴스를 확인하고 독일어 책을 읽는 일과가 따분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그의 일상에 한줄기 빛 같은 이메일이 하나가 도착했다. 손의권은 눈을 빛내며 메일함을 열어 제목을 확인했다.

    “친애하는 파독 근로자분들께?”

    일반사람에게는 스팸메일처럼 느껴질 제목이었지만, 파독 광부였던 손의권에게는 남다른 제목이었다. 그는 눈을 살짝 크게 뜨며 이메일을 클릭했다. 이메일을 읽어내려가는 그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지는 듯했다. 그는 소매로 눈가를 훔치더니 바로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번역이라는 일이 생소하긴 했지만, 독일어와 한국어에 능통한 본인이라면, 무엇인가 도움이 될 터.

    [파인랭스 박주혁 대표 귀하.]

    파독 근로자 중에는 상당한 고학력자가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었다. 외국인 노동자가 본국에서는 대학, 대학원까지 졸업한 고학력자들임을 상기해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손의권은 메일을 발송한 후, 황급히 수화기를 들었다.

    “아들. 좋은 아침이다.”

    “바티? 구텐 모르겐.”

    “아빠랑 통화할 때는 한국말로 하랬지!”

    “아, 좋은 아침입니다요. 아버지.”

    손의권의 아들, 손승찬은 아무리 가르쳐도 말끝에 ‘요’를 붙이면 존댓말인지 알았다.

    “한국에서 메일이 왔다. 외무부 쪽에서 번역일을 소개해 준다더구나.”

    “번역이요? 잘 되었습니다요. 아버지도 한 번 해보세요.”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벤타에서는 한국어 번역할 것 없냐?”

    손의권의 말에 손승찬이 말 문이 막혔다.

    “나가 무슨 회사 임원인 줄 아세요?”

    “법무부에 있으면 그래도 정보가 있을 거 아니냐. 자동차 수출하려면 매뉴얼이나 계약서 같은 번역이 필요할 텐데.”

    손의권의 다그침에 손승찬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요.”

    손의권의 불도저 같은 성격을 알고 있던 손승찬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래. 알아보고 연락해라. 수고하고!”

    손의권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 나이에도 뭔가 할 수 있다니 좋구먼! 그것도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 하하하.”

    손의권의 웃음에는 그간 찾기 어려웠던 활기가 가득했다. 그러다 손의권이 갑자기 웃음을 멈추더니 정색하며 말했다.

    “가만, 이럴때가 아니라 타자 연습 좀 해야겠어! 속도가 느리면 곤란하지.”

    손의권의 눈에 열의가 가득했다.

    #

    한여름이라 그런지 해가 서쪽으로 넘어갔어야 할 시간임에도 아직 밝았다. 그래서인지 아직 퇴근을 못 한 직원들이 사무실에서 키보드 치는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 토도도독. 토독.

    퇴근 시간이 임박했음에도 아직 퇴근하는 직원은 없었다. 박주혁도 그 대열에 합류하여 사장실에서 답변이 오기 시작한 이메일들을 확인하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그중에 특히 눈에 띄는 이메일이 있었다.

    [제목: 파인랭스 박주혁 대표 귀하.]

    [이렇게 연락을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귀국한 파독 근로자들 챙기기도 내리기 바쁠 텐데 이렇게 독일에 있는 사람들까지 챙기느라 수고가 많습니다. 저는 Y 대 독어독문학을 전공하고 파독 광부로 25년을 근무한 손의권이라 합니다···.]

    Y 대 독어독문학을 전공한 사람이 파독 광부로 일했다니 아이러니한 일이었지만, 손의권이 독일로 향하게 된 이유를 읽어보니 어느 정도 납득이 됐다.

    [당시 독일어를 전혀 못 하는 사람들을 위해 누군가는 의사소통의 창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자원했는데···. 그게 벌써 30년이 넘었네요.]

    손의권의 절절한 사연에 가슴이 아파졌다. 메일을 담담히 읽어가던 박주혁의 눈이 갑자기 동그래졌다.

    “어?”

    [사실 제 아들 녀석이 벤타 자동차 회사의 법무부에서 근무하는데, 제가 다리를 한 번 놓겠습니다. 좋은 일하시는 회사에 나도 어떤 도움이라도 되고 싶군요.]

    “벤타 자동차와 연결된다면 파독 근로자분들께 더 많은 물량도 드리고 좋긴 하겠지만···.”

    박주혁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번역만이라도 잘해주십시오. 손의권 선생님.’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데 사장실 문을 열고 박영희 팀장이 들어섰다.

    “사장님. 일본어, 중국어 번역사 오셨습니다.”

    “아. 심 대리가 세팅한 컴퓨터를 쓰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박 팀장 오늘 퇴근이 늦겠네.”

    “오늘만 늦는 건 아닙니다만···.”

    박영희 팀장이 살짝 뾰로통한 표정으로 박주혁을 힐끔 쳐다봤다. 박주혁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조금만 더 고생해주세요.”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처음 뾰로통한 표정은 장난이었는지, 박영희가 환하게 웃으며 사장실을 나갔다. 하지만, 박주혁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정시퇴근을 약속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계속 야근이지 않나? 대표로서 직원들에게 약속한 말의 무게가 있을 진데···.

    “OECD 때문이긴 하지만···. 이대로는 몸과 정신이 견디질 못 할거야.”

    주 5일제를 먼저 시행하면 좋겠지만, 고객을 응대해야 하는 번역회사 처지에서는 이런 복지를 먼저 시행할 수 없었다. 고객사가 주 6일 근무를 하기 때문이다. 박주혁은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직원의 행복이 곧 회사의 성장인데 하루빨리 조치해야겠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