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45화 (45/136)

045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토요일 오전, 박주혁은 출근길에 올랐다.

애마인 소나타2에 시동을 걸고 나니 문뜩, 고희명 외무부 장관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운전대를 잡은 박주혁의 손에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갔다.

“그런 중요한 일을 맡게 된다니.”

어찌 보면 단순한 보도자료와 간단한 공식서한의 번역이었지만, 그 의미가 남달랐다. 무려 이 나라를 침략한 대표적인 일제의 잔재를 폐기하는 역사적인 일이다.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폐기하지 말고 비용을 모두 지급할 테니 건물의 원형 그대로 이전하겠다는 뜻을 전했다지만, 국민감정을 생각했을 때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때마침 라디오에서 총독부 철거에 대한 방송이 흘러나왔다.

- 지난 3월 1일 YS 대통령의 명으로 옛 조선총독부를 철거한다고 했었는데요.

- 맞습니다. 8월 15일 광복절에 맞춰 중앙 돔의 첨탑을 시작으로 철거에 들어가게 됩니다.

- 50년간 남아있던 일제 강점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이었는데요. 그 결정까지 왜 이렇게 오래 걸린 겁니까?

박주혁은 라디오의 대담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래. 너무 오래 걸렸어.”

라디오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덧 사무실에 도착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박주혁은 밝게 인사하며 커피와 신문을 들고 사장실로 향했다. 월요일부터 출근한 개발자와 디자이너의 자리를 세팅하던 심영찬이 박주혁에게 인사하며 다가왔다.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심 대리. 좋은 아침입니다.”

“한가지 말씀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뭔가요?”

“개발자들이야 컴퓨터 하나 던져주면 알아서 세팅하지만, 디자이너는 좀 다른 컴퓨터가 필요해서요.”

박주혁이 커피와 신문을 자리에 내려놓으며 심영찬을 쳐다봤다.

“무엇이 필요합니까?”

“맥 컴퓨터와 드로잉 패드 등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박주혁이 심영찬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아직 출근도 하지 않은 직원이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계시군요?”

“예? 아···. 그, 그게.”

심영찬이 얼굴이 붉히며 말을 더듬자, 박주혁이 피식 웃더니 사장실 밖으로 상체를 빼고 허인아 과장을 불렀다.

“예. 사장님.”

“심 대리에게 법인카드 내어주세요. 신입사원들 필요한 용품을 구매하겠다는군요.”

“알겠습니다.”

허인아 과장이 심영찬을 데리고 나간 후 박주혁은 차분히 햇살을 안주 삼아 커피를 들었다.

“음. 오늘따라 커피 향이 좋은데?”

#

허인아 과장은 서랍에서 법인카드를 꺼내 카드번호와 유효기간 등을 정리한 뒤 심영찬에게 내밀며 말했다.

“영수증은 꼭 챙겨오시고요. 카드 잃어버리시면 곤란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과장님.”

심영찬은 카드를 받아들고 상기된 얼굴로 박주혁에 감사를 표했다.

“사장님.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커피잔을 들고 창밖을 보던 박주혁이 몸을 돌려 대답했다.

“영업팀에서 차 하나 달라고 해서 타고 다녀오세요.”

“아닙니다. 전철 타고 왔다 갔다 하면 됩니다.”

“시간 버리지 말고 차 끌고 가세요.”

“아, 안 그래도 되는데요.”

“편하게 다녀오래도?”

박주혁이 미간을 살짝 좁히며 목소리를 높이자, 심영찬이 쭈뼛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면허가···.”

“면허가 왜요?”

“면허가 아직 없습니다.”

심영찬의 말에 박주혁이 한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으로 눈을 끔벅였다.

“여태껏 면허도 안 따고 뭐 했어요?”

“커, 컴퓨터만 부여잡고 있느라···.”

“어휴.”

박주혁이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커피잔을 책상에 내려놨고 영업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심영찬은 고개를 숙인 채 박주혁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최 대리.”

“예. 사장님.”

“오늘 외근 스케줄 있나?”

“예, 외무부에 들어갔다 올 예정이고 한 과장님과 극성텔레콤 들어갈 계획입니다. 조 차장님은 이미 ANT와 알파텔로 납품하러 가셨습니다.”

박주혁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김진우를 불렀다.

“김진우 씨는 오늘 외근 있습니까?”

“없습니다!”

박주혁은 심영찬의 어깨를 두어 차례 두드리며 말했다.

“심 대리가 비품 구매로 용산을 가야 하는데 손이 좀 필요하답니다.”

“아, 알겠습니다.”

박주혁은 심영찬의 어깨를 다시 한번 치더니 말했다.

“심 대리. 잘 다녀와요. 면허는 이른 시일 안에 따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장실로 돌아온 박주혁이 다시 커피잔을 들 때 전화기가 울렸다.

“네. 파인랭스 박주혁 대표입니다.”

“박 사장님. 외무부 공보팀장 한율입니다. 장관님께서 어제 연락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예. 안녕하십니까?”

한율 팀장은 2주 뒤 있을 총독부 철거 관련된 보도자료와 서한의 초안을 보내겠다고 말하더니 한껏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박 사장님. 잘 아시겠지만, 이 문서들 컨피덴셜입니다. 절대 외부로 유출되어서는 안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필요하시면 보안각서도 작성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보안각서는 OECD 프로젝트 때 제출한 것으로 갈음할 테니 잘 부탁드립니다.”

전화를 끊고 식어가는 커피를 마시자 곧 컴퓨터에서 알림이 울렸다.

[[기밀문서] 총독부 철거 보도문 초안]

박주혁은 이메일을 클릭해 파일들을 확인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 팀장, 구 과장 잠시 들어오세요.”

박주혁의 호출에 다크써클이 진하게 드리워진 박영희와 구경숙이 사장실로 들어왔다.

“앉으세요. 우리에게 도전적인 일이 들어왔습니다.”

박영희와 구경숙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박주혁을 쳐다봤다. 지금도 바쁜데 또 일을 받아왔다니 기함할 노릇이었다.

박주혁은 오늘따라 초췌한 두 사람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래서는 능률이 안 오른다. 주 5일 근무를 앞당겨야 할까?'

90년대 중반은 아직 주 5일 근무제도가 공론화되지 않았었다.

IMF 이후 공론화되어 2003년이 돼서야 근로기준법이 개정되어 단계적 시행에 들어갔으니 토요일을 쉰다는 것은 아직 먼 얘기였지만, 주 5일제의 장점을 잘 알고 있는 박주혁의 생각은 달랐다.

'우선 격주로 쉬는 것을 검토해보자.'

박주혁은 결심한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말했다.

“2주 뒤가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박영희가 잠시 고개를 뒤로 젖혀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음. OECD 프로젝트 50% 달성하는 날인가요?”

예상 밖의 대답에 박주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래도 OECD 프로젝트에 대한 부담감이 번역연구팀 전반에 걸쳐 있는 듯했다.

‘이런, 생전에 수주했던 프로젝트라면 부담감을 줄일 수 있을 텐데. 방법이 없군.’

안타까운 마음에 잠시 뜸을 들인 박주혁이 말했다.

“광복절입니다.”

“아아.”

박영희와 구경숙이 영혼 없이 대답했다. 박주혁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말을 이어갔다.

“광복절이기도 하지만,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날이죠.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는 날이니까요.”

생기 없던 박영희와 구경숙이 갑자기 눈을 빛내며 얼굴에 홍조를 띠었다.

“맞다. 철거한다고 했죠?”

“그게 광복절이었습니까? 타이밍 어쩔?”

국민적 관심사가 쏠렸던 만큼 박영희와 구경숙이 눈을 빛내며 박주혁을 바라봤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외무부도 OECD 프로젝트로 손이 모자라서 보도문과 서한 번역을 우리에게 요청했습니다.”

“예?”

“진짜입니까?”

박영희와 구경숙이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역사의 순간에 흔적을 남길 기회다. 문제는 보안이 철저히 유지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박주혁은 한가지 묘안을 냈다.

“영어, 일어, 중국어 3개 국어로 번역을 해야 하는데, 이번 번역은 기밀이 무엇보다 중요하니 사내에서 번역이 될 수 있도록 조치했으면 합니다.”

박영희와 구경숙이 서로를 마주 보더니 답했다.

“프리랜서를 회사로 부른다는 뜻입니까?”

“맞습니다. 기밀에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문서를 외부로 보내지 않는 것이죠.”

“으음. 알겠습니다. 영어는···.”

박영희가 대답하며 구경숙을 쳐다보자, 구경숙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빛냈다.

“중국어와 일본어 번역사를 섭외해보겠습니다.”

“좋습니다. 구 과장님은 번역 잘 부탁드리고, 박 팀장이 감수 보면 문제없겠죠?”

“예! 사장님. 맡겨주십시오.”

“든든하군요.”

모두를 물리고 박주혁은 더블백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파독 근로자분들께도 연락을 취해야겠지.”

국제협력단 최혜나 주무관으로부터 받은 연락처를 열고 박주혁은 수화기를 들었다. 신호음이 잠시 들리는가 싶더니 한 여인이 전화를 받았다.

“할로?”

낯선 외국어에 박주혁이 당황하여 눈을 크게 떴다. 왜 한국말로 전화를 받으리라 생각했던 것일까? 박주혁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파인랭스의 박주혁 대표라고 합니다.”

“아. 아령하세요. 한쿡말 잘 못 해요.”

‘어? 이럴 리가 없는데.’

아무리 독일 생활을 30년 가까이 하신 분들이라지만, 한국말을 못 할 리 없지 않나? 그렇다면···.

“아. 혹시 어머니 안 계십니까?”

“마마 밖에.”

‘이런···.’

“캔유 스피크 잉글리쉬?”

“Yes. I Can.”

여인의 목소리가 밝아지는 것이 수화기 너머로 느껴졌다. 하지만, 박주혁의 얼굴은 살짝 굳었다. 얼마 만에 영어를 쓰는 것인지 숫자를 셀 수조차 없었다. 손과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하지만, 잔뜩 긴장한 것과는 달리 박주혁의 입에서는 영어가 술술 나왔다. 아마도 24세의 박주혁의 영어 실력은 그대로 인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저희는 번역회사입니다. 외무부에서 연락처를 받아 연락드렸습니다.”

“번역회사요? 아 독일어 번역?”

“예. 맞습니다.”

“저도 할 수 있을까요?”

“가능하죠. 저희 쪽으로 이력서와 주민등록증 사본, 통장 보내주시겠습니까? 그래야 번역사 등록이 가능해서요.”

미나 슈네라는 여성은 아무래도 최숙자 여사의 딸인 것 같았다. 최숙자 여사도 독일어를 능숙하게 하겠지만, 그녀의 자식은 원어민 수준일 터. 박주혁은 속으로 쾌재를 외치며 다음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로!”

이번에는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였는데, 박주혁이 얼굴을 굳히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아, 또 야?’

살짝 긴장감이 돌았지만, 한 번 입이 터진 후로는 문제없었다.

“Can you speak English?”

“Oh. Yes.”

다행히도 영어는 다들 하는 것 같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박주혁은 자신을 소개하고 번역프로젝트에 대해 안내했다. 흥미로웠던 점은 파독 근로자분들 당사자보다는 그들의 자녀들이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한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원어민 수준의 실력자들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순조로울 리 없다.

‘잠깐만. 한국어를 못하면 독-한 번역은···?’

박주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

오전 내내 파독 근로자들과 연락을 취한 박주혁은 식사를 끝내자마자 파독 근로자 연락처를 수정했다. 가공되지 않은 자료였기에 일일이 연락을 취해 확인해서 업데이트해야만 했다. 박주혁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리스트를 수정해 갔다.

“미나 슈네는 독문화만 가능. 지수 프랭크는 양방향···.”

업데이트를 끝내고 박주혁은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번역회사 파인랭스의 박주혁이라고 합니다.”

“번역회사?”

“예. 이번에 외무부에서 파독 근로자분들의 복지를 위해 번역일을 알선하고 있습니다.”

“얘기 들었습니다. 그런데 외무부가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예?”

박주혁은 고개를 갸웃하며 수화기 너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파독 근로자 연합회 회장 하태경인데. 귀국한 사람들보다 독일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도와야 합니다.”

하태경 회장의 말에 박주혁은 머리를 한대 얻어맞는 느낌이었다.

귀국조차 하지 못하고 독일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파독 근로자들을 생각 못 했다. 박주혁은 자신의 부족함을 한탄하며 하태경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군요. 제가 외무부에 회장님의 뜻을 전달해보겠습니다.”

“내가 몇 번 얘기했지만, 공무원들이란···. 쯧. 어쨌든 번역이라면 독일에 있는 사람들이 더 필요할 수도 있을게요.”

“회장님 혹시 가능하시면 그분들의 연락처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음. 좋은 일 하겠다는데 안될 것도 없지. 팩스 번호가 뭐요? 아! 그리고 난 번역 안 합니다. 해봤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더라고.”

하태경 회장의 말에 박주혁은 씩 웃으며 팩스 번호를 차근차근 말했다.

‘그렇죠. 어르신, 번역이라는 것이 아무나 할 수 있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