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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44화 (44/136)
  • 044화 등록금은 매년 인상되죠.

    고희명 장관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외무부에서 이런 의뢰를 한다는 것이 조금 민망하군요.”

    “아닙니다. OECD 일로 인력이 부족하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박주혁의 말에 고희명 장관이 허허거리며 웃더니 말했다.

    “조만간 중앙청이 철거됩니다. 그에 대한 보도자료를 번역해서 각 공관에 보내야 합니다. 특히 일본어 번역이 중요한데 말이죠.”

    옛 조선총독부로 사용되었던 건물.

    잔혹한 일제 침략의 역사를 상징하는 총독부 건물은 일본이 조선을 통치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려고 일부러 경복궁 앞에 지었었다. 나라의 경제가 어려워 총독부 철거를 미루다 보니 총독부 건물은 어느새 중앙청으로 사용되었고 심지어 나라의 보물들을 전시하는 국립 중앙박물관으로까지 사용 중이었다.

    그러한 치욕적 역사를 끊고자, YS 대통령은 93년 철거를 지시했고 그로부터 2년 뒤 95년 8월 15일 총독부 건물의 중앙 돔의 첨탑을 끊어내면서 철거가 시작된다.

    이런 역사적 일의 보도문을 파인랭스가 번역할 수 있다니. 박주혁은 가슴 한편이 벅차오르고 있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희가 번역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면 영광이겠습니다.”

    “영광까지야. 사실 그대로 번역해서 전달해주면 되는 겁니다. 조금 시간이 촉박하겠지만···.”

    “문제없습니다.”

    박주혁이 고희명 장관의 말을 자르며 힘차게 대답했고, 그의 목소리에서 확신이 느껴진 고희명 장관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보도문과 외무부 공식 서한이 완성되면 보내드리리다.”

    “예. 맡겨만 주십시오.”

    고희명 장관과 통화가 끝난 후 박주혁이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내려놨다.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외무부 장관까지 연결되어 역사적 사건과 함께 할 수 있다니 말이다. 박주혁이 흥분된 마음을 진정하기도 전에 사장실의 전화기가 다시 한번 울렸다.

    “사장님. 한기훈 과장입니다.”

    “한 과장님. 무슨 일입니까?”

    한기훈 과장이 지멜스에서 연락이 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조금 이른 감이 있었지만, 박주혁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멜스에서요? 강상우 부장입니까?”

    “예. 기술부에서도 나온다고 시간 좀 내달라고 했습니다.”

    박주혁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좋은 일들은 연달아 온다더니. 틀린 말은 아니었던가?”

    #

    박주혁과 한기훈은 신촌 로터리를 지나 약속 장소인 포석정으로 향했다.

    포석정(鮑石亭).

    통일신라 시대. 돌로 만든 구불구불한 도랑을 일컫는 말이다. 도랑을 따라 물이 흐르고 그 위에 술을 채운 잔을 띄워 시 한 수 읊조리며 마시는 조상님들의 풍류의 엿볼 수 있는 시설이다.

    주점에 들어서자 홀 한가운데 포석정을 그대로 본뜬 틀이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젊어서는 이런 고풍적인 곳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듯 싫어했었다. 당시는 서구 문물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을 때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 재끼는 곳들보다는 이런 고풍스런 곳이 좋았다. 박주혁은 한기훈을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분위기 좋네요.”

    “아. 그러십니까?”

    한기훈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박주혁을 힐끔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젊은 나이의 박주혁이 이런 곳을 좋아한다니 이상하다 느끼고 있을 터. 하지만, 취향은 존중해줘야 하지 않겠나?

    - 띵디딩 띵띵!

    가야금인지 거문고인지 알 수 없었지만, 주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더욱 고취시켰다. 음악이 흘러나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연주자가 현을 뜯고 있었다. 그야말로 라이브 공연이었다. 박주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연주자를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군가 박주혁을 불렀다.

    “박 사장님. 오셨습니까?”

    “아, 강 부장님.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정말 분위기가 좋네요.”

    “다분히 저기 있는 선임님 취향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강상우 부장은 짐짓 미안한 표정으로 박주혁과 한기훈을 자리로 안내 후 강상우 부장이 박주혁과 한기훈을 소개했다.

    “안녕하십니까? 파인랭스 박주혁 대표입니다.”

    “기술부 최종승 선임입니다.”

    지멜스 강상우 부장과 최종승 선임 그리고 박주혁과 한기훈이 포석정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물이 흐르고 잔이 떠 있어야 할 곳엔 뽀얀 막걸리가 젖줄처럼 흐르고 있었다. 지금 아니면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없다. 비위생적이라고 하여 이 시설은 폐쇄조치가 되니까 말이다.

    박주혁은 표주박으로 포석정에서 막걸리를 퍼내며 중얼거렸다.

    ‘이야. 이거 뭐 신선놀음이 따로 없네.’

    표주박의 막걸리가 몇 차례 비워진 후 기술부 최종승 선임이 본격적인 얘기를 시작했다.

    “박 사장님. 강 부장님께 들었습니다. 정확히 어떻게 하고자 하시는 겁니까?”

    박주혁은 표주박 잔을 입에서 떼며 말했다.

    “선임님께서도 경험이 있으시겠지만, 독일어 번역사들이 경험이 적어 품질에 문제가 있을 겁니다.”

    “뭐. 그랬었죠.”

    당시가 떠올랐는지 최종승 선임의 미간이 좁혀졌다. 박주혁은 그의 표정을 살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최종본을 번역사들께 보내셨었나요?”

    최종승 선임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표주박을 입에 가져갔고 박주혁은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똑같은 일의 반복일 겁니다.”

    박주혁의 말에 최종승 선임이 미간을 좁힌 채 가만히 눈을 감으며 막걸리를 들이켰다.

    “크으. 어차피 해야 하니 감수료를 주겠다는 겁니까?”

    박주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상우 부장은 최종승 선임과 박주혁을 번갈아 보며 초조하게 그들의 입을 쳐다봤다. 최종승 선임의 올곧은 성격상 박주혁의 제안을 거절할 터. 그런데 최종승의 반응이 평소와는 달랐다. 최종승은 표주박을 내려놓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강 부장님.”

    “예?”

    “지금 나오는 얘기는 수면 아래 묻어야 한다는 것 알고 계시겠죠.”

    “아. 당연하죠. 제가 그 정도로 둔하진 않습니다.”

    강상우 부장에게 확답을 받은 최종승이 표주박을 들어 포석정의 막걸리를 퍼마셨다. 그러더니 박주혁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박 사장님. 다 좋습니다. 좋은데. 말씀하신 감수료는 제 밑에서 개고생하는 연구원들에게 주십시오.”

    “그럼 선임님께서는···?”

    “전 필요 없습니다.”

    최종승은 정색하며 다시 한번 표주박에 막걸리를 담아 잔을 들었다. 박주혁도 재빨리 잔을 들어 건배하며 말했다.

    “그럼 감수료를 선임님께 현금으로 드릴 테니···.”

    “뭐요!”

    최종승은 박주혁의 말을 자르고 버럭 소리쳤다. 오해한 것이 분명했다. 박주혁이 다시 해명하려는데 강상우 부장이 황급히 잔을 들고 다가오며 말했다.

    “자, 자. 건배합시다.”

    강상우가 억지로 건배를 하고는 최종승 선임에게 상체를 기울여 속삭이듯 말했다.

    “선임님. 통장으로 거래를 하게 되면 흔적이 남으니 박사장이 현금으로 준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너무 기분이 나쁘게 듣지 마세요. 서로에게 안전하게 해야하는 법입니다. 직접 받으셔서 부하직원들에게 나눠주시면 될 일입니다. 화내실 일이 아니에요.”

    “크흐음.”

    강상우의 말에 최종승이 침음하며 표주박에 남아있는 막걸리를 마저 들이키고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오해가 있었군요.”

    “예. 그러신 듯합니다. 저는 단지 선임님께서 부하직원들을 직접 챙기시는 것이 더 좋지 않겠냐는 의미였습니다.”

    최종승 선임은 민망한지 헛기침하며 파전을 입에 넣었다. 조금은 애매한 분위기 속에 술자리가 끝났고 강상우 부장이 박주혁을 따로 불러냈다.

    “박 사장님. 곤란하게 해드린 것 같습니다.”

    “별말씀을요. 이런 자리를 만들어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 일입니다.”

    “최 선임님이 좀 고지식한 분이라,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어쨌든 최 선임도 다 알아들었을 겁니다. 91년도에 그 고생을 했는데 본사에서는 별다른 보상이 없었거든요. 자기 사람은 끔찍이 챙기는 분이니 무뚝뚝해도 속으로는 좋아하고 계실 겁니다.”

    박주혁이 고개를 살며시 끄덕이자, 강상우 부장이 옅은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견적 내실 때, 올려서 내세요.”

    “예?”

    박주혁이 당황하여 눈을 크게 뜨자 강상우는 미소 띤 얼굴로 속삭이듯 말했다.

    “번역료에, 감수료 지불하고 나면 뭐가 남겠습니까? 지멜스가 그렇게 쪼잔한 회사가 아닙니다. 견적은 넉넉히 내십시오. 파독 근로자분들께도 좀 더 얹어드리시고요. 물론, 최 선임님 쪽도 더 챙기시고요.”

    박주혁은 말없이 강상우를 바라봤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박주혁의 눈빛을 읽었는지 강상우가 피식 웃었다.

    “박 사장님도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어차피 번역해야 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기술부에서 검토도 다 해야 하고요.”

    강상우는 말하면서 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 치이익.

    강상우가 담배를 박주혁에게 건넸다. 담배는 피고 싶지 않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거절은 좋은 선택지가 아님을 알기에 박주혁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둘은 동시에 담배 연기를 내뿜었고, 강상우가 천천히 입을 뗐다.

    “이런 말씀까지 드리면 좀 웃기긴 한데, 91년도에 그 난리를 겪으면서 본사에서 번역 예산을 좀 높게 잡아뒀더라고요.”

    “그렇군요.”

    박주혁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는 미간을 좁히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얘기를 왜 하는 거지?’

    “그러니까 넉넉히 내세요. 그리고···. 이번에 큰 녀석이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

    박주혁의 묵묵부답에 강상우는 머쓱한지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요즘 대학등록금이 왜 이렇게 비싼 건지 모르겠습니다.”

    “등록금은 매년 인상되죠.”

    박주혁이 동의를 표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챙겨달라는 거군. 나쁘지 않아. 이게 올가미가 될 테니까.’

    박주혁은 담배를 비벼끄고는 강상우 부장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문서 기다리겠습니다.”

    “하하하.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

    썩 유쾌한 자리는 아니었기에 술자리는 금방 끝났다.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넘었다. 박주혁은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내 땄다.

    - 췻!

    탄산이 새어 나오는 소리에 벌써 식도가 따끔거리는 것 같았다. 박주혁이 막 맥주를 입에 대는데 최효정 여사가 안방에서 나오며 나지막이 말했다.

    “속 버릴라. 안주랑 먹어야지.”

    “저 때문에 깨셨어요?”

    최효정 여사는 냉장고를 뒤적이더니 가스 불을 켜며 말했다.

    “아니. 나도 고민이 있어서 잠이 오지 않았어.”

    “고민이요?”

    박주혁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최효정을 근심 가득한 얼굴로 쳐다봤다. 최효정 여사는 묵묵히 오징어를 구워 접시에 담아 식탁에 올리며 말했다.

    “주혁아.”

    “예.”

    “내가 구로공단을 다녀왔는데 말이지.”

    “아. 어떠셨어요?”

    최효정의 고민이 무엇인지 간파한 박주혁이 걱정을 내려놓고 오징어를 잘게 찢었다. 잠시 망설이던 최효정 여사는 작심한 듯 수첩을 꺼내며 말했다.

    “구로공단으로는 도저히 갈 수 없겠더구나.”

    “음.”

    박주혁은 맥주를 마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 있다. 미래의 정보를 알 수 없다면 말이다.

    “그래도 구로공단을 고집한다면, 여기 밖에 없어 보이는구나.”

    박주혁은 최효정 여사가 내민 수첩으로 시선을 천천히 옮겼다. 약도와 함께 특정 위치를 볼펜으로 여러겹 동그라미를 쳐놨다. 박주혁은 수첩을 들고 유심히 바라봤다. 그리고 이내 눈을 크게 떴다.

    ‘구로공단 근처, 중소기업은행 건물···. 이곳은?’

    박주혁도 잘 아는 곳이었다.

    바로 옆에는 호텔이 들어서고 1층에 거대한 별다방이 들어서며, 우체국과 은행 심지어 은행 옆에는 대형 마트까지 들어서는 환상의 입지였다. 박주혁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최효정 여사를 바라봤다. 최효정은 수첩을 내려보며 한숨 쉬듯 말했다.

    “응. 이 땅 말고는 다른 곳은 거의 문 닫은 공장들이라···. 여기도 사실 창고인데. 그나마, 이곳이 볕도 잘 들고. 괜찮아 보이더구나.”

    ‘어머니. 답사 한 번으로 노른자를 찍으신 거예요.’

    입이 근질거렸지만, 박주혁은 애꿎은 오징어만 질겅질겅 씹을 뿐이었다. 박주혁이 수첩을 내려놓자, 최효정 여사가 황급히 수첩을 몇 장 넘기며 박주혁에게 다시 내밀었다.

    “강남에서는 말이야.”

    분명 노른자를 찍었음에도 최효정 여사는 강남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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