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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43화 (43/136)
  • 043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장관님.

    1960년대부터 한국의 수출산업단지로 조성되었던 구로공단.

    92년도에 산업단지 내에 수출의 다리라 명명된 고가차도가 놓일 정도로 수출의 거점이기도 했다. 그러던 곳이 불과 3년 사이 과거의 영광만 남긴 채 폐업한 공장들로 을씨년스러웠다. 물론, 아직 운영되는 곳이 더 많긴 했지만, 최효정 여사가 기억하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최효정 여사는 수첩을 든 채 미간을 좁히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한산해?”

    그도 그럴 것이 노동집약형인 어패럴 산업이 인건비 상승을 버티지 못하고 셔터를 내리면서 한때 11만 명에 육박했던 구로공단의 노동자 수가 4만여 명까지 떨어진 상태다. 최효정 여사의 기억은 과거에 머물러 있었기에 구로공단의 몰락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많던 사람들이 다 어디 가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최효정은 수첩에 뭔갈 열심히 적어 내려갔다.

    수출의 다리를 조금 벗어난 곳으로 이동하자, 극성정보통신을 비롯하여 전기, 전자 분야 회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곳에 이르러서야 최효정 여사의 눈이 살짝 빛났다.

    “여긴 또 다른 분위기네.”

    하지만, 구로공단의 대표적인 수출 품목은 가발을 비롯한 어패럴 산업이었다. 아무리 전기, 전자 분야 회사들이 그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지만, 예전의 활력을 찾을 수는 없어 보였다.

    “왜 이런 곳으로 회사를 옮기겠다는 건지···.”

    최효정 여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구로공단 이곳저곳을 둘러봤지만, 그녀의 안색에 낀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 구로공단에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겠지만, 97년 외환위기 이후, 공단 내 대표기업인 태우, 한국합섬, 세계로 물산 등이 줄줄이 도산하며 그 온기마저 식어버리게 될 터. 최효정이 그 사실을 알 리 없었지만, 그녀의 눈에도 구로공단은 생명력이 꺼져가고 있었다.

    “구로공단은 끝났구나.”

    최효정 여사는 입술을 앙다물며 가산동에서 구로동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패럴 산업의 메카였던 구로동, 최효정 여사도 젊은 시절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몇 차례 방문했었던 곳이기도 했다. 당시에도 낙후한 환경이긴 했지만, 이정도는 아니었다.

    문 닫은 공장들은 세월의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이곳저곳 쓰러져 가고 있었고 안전을 위해 공장 주변에 철조망까지 처져 있었다. 그래도 전기, 전자 분야 회사들이 가산동을 지탱하고 있었다면, 구로동 쪽은 폐허와 다름없었다. 최효정 여사는 구로공단의 몰락을 눈으로 직접 마주하고는 입을 떡 벌렸다.

    “이럴 수가.”

    세월의 변화를 실감하며 최효정 여사는 실망한 표정으로 지하철 2호선 구로공단 쪽으로 이동했다. 구로공단역으로 향하는 길이 언덕이라 최효정 여사의 숨이 차올랐다. 그녀는 언덕 중턱에서 잠시 숨을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언덕 정상 쪽에 위치한 중소기업은행 건물이 보였고, 맞은편 한 모피제조업체의 창고가 눈에 들어왔는데 때마침 그곳에 햇빛이 드리웠다. 그리고 최효정 여사는 상체를 숙였던 허리를 펴며 눈을 키웠다.

    “어머. 저렇게 양지바른 곳이 있었어?”

    음침했던 구로공단 폐공장들을 지나다 보니 마음도 울적했는데, 햇빛을 받아 유독 밝아 보이는 저 창고가 눈에 띄었다. 최효정 여사는 한참을 모피 창고를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주혁이가 구로공단만 고집한다면.”

    거친 숨을 내쉬면서도 최효정 여사는 수첩을 꺼내며 다시 한번 창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펜을 끄적였다.

    “구로공단역과도 가깝고, 양지바르고, 은행도 마주하고 있네. 여기 말고는···.”

    최효정 여사는 펜과 수첩을 넣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역시 강남으로 가야 해.”

    #

    한편 지멜스 회의실에 있던 강상우 부장은 눈을 끔벅이며 박주혁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감수를 저희보고 하라고요?”

    지멜스와 거래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원어민 감수는 옵션이라지만, 번역과 감수는 번역회사의 공정에서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런데 감수를 고객에게 직접 하라니. 이 무슨 막말이란 말인가?

    강상우가 황당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박주혁을 쳐다봤지만, 그는 태연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아시겠지만, 독일어의 경우 전문 번역사라고 부를 수 있는 경력자들이 없습니다. 물론, 고가의 통번역 대학원 출신자라면 가능할 수 있겠지만, 단가가 맞지 않죠.”

    박주혁의 설명을 듣던 강상우가 눈썹을 꿈틀대며 불쾌감을 표했다. 파독 근로자 지원 사업을 파인랭스가 시행하는 것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것이다. 박주혁은 강상우의 심리를 아는지 모르는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납기에 맞춰 번역하는 것은 파독 근로자분들과 함께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려하시는 품질은 해결되지 않겠죠.”

    뻔한 얘기가 듣고 싶지 않았는지, 강상우가 목소리를 키우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다 아는 사실을 말씀하지 마시고 본론을 말씀하세요. 감수를 지멜스에서 한다면 그게 번역을 의뢰한 것입니까?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는군요.”

    박주혁은 강상우의 역정이 이해한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부장님. 번역의 품질을 결정하는 요소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갑작스러운 박주혁의 질문에 강상우의 한쪽 눈썹이 격하게 꿈틀댔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강상우의 목소리에 한기훈이 안절부절못하며 박주혁의 팔목을 붙잡았다. 그만하라는 신호였지만, 박주혁은 한기훈의 손을 살며시 뿌리쳤다. 박주혁이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는지, 한기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멜스가 감수를 봐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드리려고 하는 겁니다.”

    박주혁의 말투는 한없이 차분했고 확신에 차 있었다. 강상우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평정심을 되찾으며 말했다.

    “박 사장님. 절 가르치려 하지 마시고, 그 이유에 대해 말씀해 보시죠.”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럼 이유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번역의 품질을 결정짓는 요소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번역에 친절한 원문이다.

    작성자가 아니고선 이해할 수 없도록 내용이 심하게 축약되었거나, 전문용어와 약어들이 난무하는 원문 그리고 비문이 많아 이해할 수 없는 원문 등이 여기에 속한다. 번역가는 번역의 전문가이지 어떤 분야 및 기술의 전문가일 수는 없다. 따라서, 너무 축약되거나 부가 설명이 없는 용어 및 약어들은 친절하게 풀어져 있어야만 한다.

    두 번째는 용어 및 스타일 가이드의 제공이다.

    기술 문서의 특성상 용어나 약어가 필수적이라면, 해당 용어들에 대한 용어집을 반드시 제공해야 한다. 그리고 원하는 문체 스타일이 있다면 번역의 톤 엔 매너를 사전에 안내해야만 원하는 품질이 나올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가 고객의 피드백이다.

    앞서 서술했듯 번역가는 번역의 전문가이지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는 문서를 의뢰한 고객이기 때문에 반드시 최종 검수하고 피드백을 해줘야만 한다.

    이러한 과정이 종합적으로 뒷받침되어야 비로소 원문의 퀄리티가 번역본에서도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강상우 부장은 박주혁의 설명을 경청한 후 입을 열었다.

    “직접 감수를 봐야 하는 이유는 지멜스가 전문가이기 때문입니까?”

    “맞습니다. 91년도에 번역본을 내부에서 힘들게 감수하신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박주혁의 말에 강상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고민에 잠겼다. 분명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찜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번역 의뢰를 했는데 반쪽짜리 결과물을 손에 쥐어야 한다니. 박주혁은 강상우 부장의 표정 변화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래서는 91년도와 다를 바가 없다고 느끼시겠죠. 하지만···.’

    강상우가 고민하는 찰나, 박주혁이 잽싸게 말을 이어갔다.

    “현업에 계신 분들이 직접 수정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으실 겁니다. 문서를 의뢰하는 부서를 파인랭스와 연결시켜 주십시오.”

    “예에?”

    예상하지 못한 방식이었는지 강상우 부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쳤다.

    “기술자들의 연락처를 알려달라는 말입니까?”

    “어차피 그분들이 봐야 하는 상황인 것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여태까지는 무보수였겠지만, 파인랭스는 기술자분들께 감수료를 지급하겠습니다.”

    박주혁의 당찬 말에 강상우 부장이 한대 얻어맞은 듯 눈을 끔벅이며 실소했다.

    “허. 허허.”

    #

    한기훈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장님. 수명이 단축된 것 같습니다.”

    “뭘 이런 일로 수명이 단축됩니까?”

    박주혁의 말에 한기훈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몸을 돌리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사장님! 지멜스를 상대로 어떻게 그렇게. 당당하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지멜스와 첫 거래에서는 이윤을 남기지 않겠다고 이미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허. 투자하실 생각이셨군요.”

    한기훈이 탄식하듯 박주혁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박주혁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의자에 몸을 기대더니 말했다.

    “어서 출발합시다. 지멜스에서 고민해본다고는 했으나,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겁니다.”

    한기훈이 차에 시동을 걸면서 되물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요? 분명 강상우 부장이 영어로 번역 후 독일어로 하겠다고 했는데요.”

    “한 과장.”

    “예.”

    “지멜스가 노리고 있는 프로젝트가 뭐였죠?”

    “용인 경전철이죠.”

    한기훈이 말하면서 차를 출발시켰다.

    “맞습니다. 헌데 용인 경전철도 입찰 방식입니다. 즉 시간이 한정적이란 뜻이죠. 영어로 번역하고 다시 독일어로 번역한다? 시간이 2배 넘게 걸리는 일입니다. 지멜스가 그렇게 할 리 없는 것이죠.”

    “뻥카였군요.”

    한기훈이 살짝 놀랍다는 듯 어깨를 움찔거렸고 박주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분명히 연락이 올 거다.’

    사무실에 도착한 박주혁을 조광연이 발견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사장님 오셨습니까?”

    “네. 조 차장님. 별일 없었죠?”

    “있었습니다.”

    “음?”

    예의상 한 말이었는데 문제가 있었다고 하니 박주혁이 고개를 갸웃하며 조광연을 빤히 쳐다봤다. 조광연은 배시시 웃더니 자리에서 살짝 비켜 더블백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런 의자가 생겼는데 별일이 없었다고 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아. 그런 겁니까? 하하하. 의자는 어떻던가요?”

    조광연은 말없이 가만히 엄지를 치켜들었다. 최지훈과 김진우도 조광연 곁으로 다가와 엄지를 치켜들며 배시시 웃는 모습이 가관이었다. 박주혁은 피식 웃더니 그들의 어깨를 한번씩 두드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영업팀 덕분에 박주혁이 복귀했다는 사실을 안 번역연구팀은 박주혁이 다가오자, 소리쳤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깜작이야. 뭡니까? 놀랐잖아요.”

    직원들은 하나같이 생글생글 웃으며 박주혁을 쳐다봤다. 박주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정색하는 얼굴로 말했다.

    “더 열심히 하라고 드린 겁니다. 다들 의자값은 해야죠?”

    자못 근엄한 표정과 목소리를 낮게 깔아 분위기를 잡았지만, 번역연구팀은 박주혁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밝게 웃으며 답했다.

    “네!”

    피식 웃음이 나와버렸다. 박주혁은 사장실로 들어가 자신의 자리에 있는 더블백에 앉아봤다.

    쿠션감도 적당했고 무엇보다 두 개로 갈라진 등 쿠션이 허리 근육을 밀착해 받쳐주니 자연스럽게 바른 자세로 앉게 되는 효과가 있었다.

    “확실히 오래 앉아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좋겠어.”

    더블백 의자의 기능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주혁이 잠시 더블백 의자에 감탄하고 있을 때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네. 파인랭스 대표 박주혁입니다.”

    “번역회사입니까?”

    울림이 있는 낮은 목소리였다.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적 있는 목소리였다. 박주혁은 고개를 갸웃하며 답했다.

    “예. 맞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외무부 고희명 장관인데 조금 급한 일이라 이렇게 연락했습니다.”

    박주혁은 순간 얼음이 되어 수화기를 든 채 눈을 끔벅였다.

    ‘외무부 장관···. 이 직접? 왜?’

    박주혁이 당황하여 대답을 하지 않자, 수화기 너머로 다시 한번 낮고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그제야 박주혁이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아. 말씀하십시오. 장관님.”

    “음. 극비 사항이니 외부에 유출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네. 장관님.”

    박주혁의 표정이 굳어 목소리에 각이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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