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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42화 (42/136)
  • 042화 품질, 납기를 모두 잡는 방법.

    디자이너 오해영은 박영희의 면접을 무사히 통과했다. 회사생활이 시집살이와 진배없을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합격 소식에 오해영도 기뻐했으니 그것으로 됐다.

    “출근은 언제부터 가능하십니까?”

    박주혁의 질문에 오해영은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지금부터 할 수 있습니다!”

    뭔지 모르게 심영찬과 비슷한 구석이 있는 오해영이었다. 당장이라도 일하겠다며 엉덩이를 들썩이는 오해영을 겨우 다독여 집으로 돌려보냈다. 면접을 마치고 사장실로 복귀하자, 누군가 사장실 앞을 서성였다. 안 봐도 CCTV.

    “심 대리. 들어와요.”

    “네! 네네.”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박주혁은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디자이너 면접 결과가 궁금한 거죠?”

    “네에···.”

    “사람이···.”

    박주혁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뜸을 들였다. 그 모습에 심영찬이 긴장하여 마른침을 삼켰다.

    “참 좋더군요. 열의도 있고 심성도 착하고.”

    “아. 아하하.”

    주먹을 말아쥐며 좋아하는 심영찬을 보니 왠지 모르게 흐뭇했다.

    “다음 주부터 출근하라고 했으니, 심 대리가 신규 개발자들과 잘해보십시오.”

    “감사합니다. 파인랭스 시스템과 랭귀지패스트의 개발에 차질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박주혁은 흐뭇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주혁은 심영찬을 돌려보낸 후 두툼한 배정산업의 문서를 내려봤다.

    ‘생각보다 양이 많네.’

    앞으로 번역할 것이 더 많을 수도 있다. 배정산업은 더블백이론을 아예 사들일 기세였기 때문이다. 이정도 규모와 향후 번역량을 고려해보면 파인랭스의 성장 가능성이 올라간 것일 텐데 웬일로 시스템의 알람이 울리지 않았다. 아마도 독일어 번역사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라 그럴 것이라고 박주혁은 미뤄 짐작했다.

    독일어 프로젝트를 수주했으니 이제 번역사를 확보해야 한다. 박주혁은 지갑에서 정필구 사무관의 명함을 꺼내 수화기를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파인랭스 박주혁 대표입니다.”

    “아. 박 대표님. 그렇지 않아도 기획안이 막 승인되어서 연락드리려고 했었는데요.”

    “그렇습니까? 타이밍이 좋군요. 저희도 마침 독일어 프로젝트를 착수해야 해서 파독 근로자분들의 연락처 좀 알려주십사 전화했습니다.”

    “대표님 말씀처럼 정말 타이밍이 좋군요. 잘되었네요. 최혜나 주무관에게 정리해서 이메일 보내라고 하겠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

    박주혁은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미소 지었다.

    ‘이제 곧 시스템 권한이 올라가겠지.’

    내심 기대했지만, 시스템은 무반응이었다. 박주혁은 고개를 갸웃하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시스템 온. 매뉴얼.”

    박주혁은 처음 파인랭스 시스템을 접했을 때 살짝 보았던 매뉴얼을 열어 하나하나 읽어내려갔다. 그리고 박주혁의 눈이 점점 커졌다.

    [시스템의 권한은 파인랭스 성장도와 비례하여 추가로 열리게 되지만, 일정 수준이 권한을 얻는 데 필요한 성장도가 높아지게 됩니다.]

    ‘이제는 이정도 성장으로는 권한이 열리지 않는다는 소리네. 보안이 해제되길 바라고 있었건만.’

    아직 열리지 않은 보안 해제의 권한.

    파인랭스 시스템과 관련된 자료들을 열람할 수 있다면 개발 속도를 획기적으로 올릴 수 있을 테지만, 아직 박주혁의 권한으로는 열람조차 되지 않았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박주혁은 국제협력단 최혜나 주무관으로부터 파독 근로자들의 연락처가 오길 기다렸다.

    #

    박영희는 번역연구팀 전원을 회의실로 소집시켰다.

    “모두 모였나요?”

    “예. 팀장님.”

    “지금부터 OECD 프로젝트의 편집 가이드를 설명할 테니 모두 잘 따라주기를 바랍니다.”

    박영희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스크린에 문서 하나를 띄웠다. 폰트, 글씨 크기, 여백 심지어 표의 폭과 넓이까지 세세하게 적혀있었다. 하지만, 편집 가이드를 보고 열심히 메모하는 것은 기존 감수팀 직원들 뿐이었고, 기존 번역부 직원들은 눈을 끔벅이며 스크린을 빤히 쳐다봤다.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박영희가 고개를 갸웃하며 몸을 돌려 물었다.

    “혹시 번역부에서는 편집을 다루지 않았었나요?”

    감수와 함께 문서 편집까지 다뤘던 감수팀과 달리 번역부에서는 생소한 것들이었다. 다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박영희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편집 매뉴얼을 시스템에 올려둘 테니 모두 확인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당장 OECD 편집을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기본적인 설명을 할 시간이 없었다. 박영희는 그대로 편집 가이드를 설명했다.

    “모든 폰트는 Arial로 고정합니다. 제목 1은 23pt 볼드체. 제목 2는 16pt 볼드체, 여백은···.”

    설명을 마치고 박영희가 미간을 좁히며 직원들을 바라봤다. 기존 감수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일이 번역부에게는 생소할 터. 잠시 고민하던 박영희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갑자기 스크린을 옆으로 치우더니 직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존 감수팀을 조장으로 3인 1조로 편집 조를 짜겠습니다. 조장들은 편집에 오차가 없도록 해주세요. 현재 도착한 분량을 차주 월요일에 영업팀에 전달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예! 팀장님.”

    박영희가 회의를 끝내고 회의실을 나서는데 굳은 표정의 박주혁을 마주했다.

    “사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아. 박 팀장. 신규고객과 급하게 미팅이 잡혔어요.”

    박주혁의 말투에 다급함이 묻어 있었다.

    “한 과장!”

    박주혁은 한기훈 과장을 큰 소리로 불렀고 한기훈이 서둘러 외투와 서류 가방을 챙기며 황급히 일어났다.

    “준비됐습니다!”

    “어서 출발합시다. 아 박 팀장. 무슨 할 말 있는 건 아니고요?”

    “예. 아닙니다. 다녀오십시오.”

    박영희는 박주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박영희가 몸을 돌려 번역연구팀으로 향했는데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박영희가 고개를 갸웃하며 걸음을 재촉하자 영업팀 김진우 사원이 번역연구팀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열심히 설명하는 것이 보였다.

    “자, 이렇게 하는 겁니다.”

    “우와. 의자에 이런 기능도 있었어요?”

    “그럼요! 최신식 더블백 아닙니까? 이 등판이 허리를 지지해서 장시간 앉아 있어도 허리 통증이 완화된다더라고요.”

    박영희는 순간 김진우가 배정산업의 영업사원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김진우의 설명에 따라 직원들이 하나둘 자리에 앉아보더니 감탄하듯 말했다.

    “어머, 허리 받쳐주는 것 봐.”

    “쿠션감도 좋은 것 같아요.”

    “허리를 곧추세워주네. 물리치료비 굳겠다.”

    새로운 사무실 의자에 좋아하는 직원들의 모습을 보며 박영희가 미소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리 작은 사장님. 수주 많이 하셔야겠네···.’

    잠시 직원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박영희가 웃으며 직원들 틈으로 끼어들었다.

    “의자 그렇게 좋아?”

    “예! 팀장님 앉아보세요. 소파에요 소파.”

    “소파라니. 소파는 심했잖아.”

    “하하하.”

    일에 치이고 있었지만, 사무실 분위기는 어느 때 보다 좋았다.

    #

    한기훈은 운전대를 만지작거리며 박주혁을 힐끔 쳐다봤다. 그의 굳은 표정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저, 사장님. 그런데 지멜스는 어떻게 연락이 된 겁니까?”

    “스토리가 좀 긴데···. 배정산업 얘기는 들었죠?”

    박주혁은 배정산업과 파독 근로자, 그리고 외무부 산하 국제협력단까지 이어지는 얘기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러자 한기훈 과장이 입을 살짝 벌리고 놀라워했다.

    “파독 근로자분들을 떠올리시다니···. 예상 밖이네요.”

    “저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지멜스도 외무부에 연락을 했으니까요.”

    “지멜스가 파독 근로자분들을 생각하고 외무부에 연락했던 것은 아닐 겁니다.”

    한기훈의 말에 박주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차가 충정로 한국 지멜스 본사에 멈췄다.

    차에서 내린 박주혁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평소와 달리 박주혁이 살짝 긴장한 듯했다. 파인랭스와 단 한 번도 거래하지 않았던 기업, 그리고 세계의 산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업이라는 사실이 박주혁을 압박하고 있었다.

    ‘반드시 고객으로 만든다. 공장자동화, 인프라 그리고 엔지니어링. 심지어 헬스케어까지 손을 뻗을 기회야!’

    박주혁이 주먹을 말아쥐며 지멜스 건물을 올려봤다. 긴장하고는 있었지만, 박주혁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번뜩이고 있었다.

    “지멜스 구매부의 강상우 부장입니다.”

    “파인랭스 박주혁 대표입니다.”

    박주혁과 강상우가 악수를 주고받은 후, 한기훈 과장이 명함을 내밀며 말했다.

    “파인랭스 영업팀 한기훈 과장입니다.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상우는 한기훈의 말이 싫지 않았는지 부드럽게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박주혁은 한기훈의 넉살에 놀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조 차장과는 또 다른 스타일이군.’

    회의실에 서로 마주 앉자, 강상우 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최혜나 주무관에게 들었습니다. 이번에 파독 근로자분들을 위해 지원 사업을 파인랭스를 통해 시행한다고 하던데.”

    “소식이 참 빠르군요.”

    최혜나 주무관이 지멜스에 연락해두겠다고 했음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했다.

    “박 사장님께서 더 잘 아시겠지만, 독일어 번역 물량이라면 지멜스가 독보적일 테니까요.”

    강상우 부장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담당하고 있는 사업부가 인프라와 통신입니다. 장담하건대 이번에 번역할 물량이 좀 됩니다. 자체 번역으로는 소화하기 힘든 부분이 있어서 몇 년 전부터 외주업체를 찾으려 했지만, 독일어를 취급하는 번역회사를 찾기란 쉽지 않더군요.”

    “아무래도 현재 번역회사들은 영어, 일어, 중국어에 치중되어 있으니까요.”

    박주혁의 말에 강상우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안타깝다고 생각합니다. 조금만 돌아보면 많을 텐데 말이죠.”

    지멜스에서 나올 번역 물량이 상당하다는 것을 강상우 부장이 넌지시 드러내고 있었다. 박주혁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저희도 그 점이 아쉬워 번역사를 확보하기 위해 뛰다 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강상우 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박주혁의 말에 동의를 표하고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런데 본사 방침이 좀 바뀌었습니다. 91년도쯤이었죠? 대구 전철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엄청 애를 먹었습니다. 독일어 번역의 품질도 문제였고 번역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이 만만치 않았죠. 가성비가 떨어진달까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본사에서는 영어로 번역 후 독일어로 번역하겠다더군요. 그게 더 효율적일 거라는 판단입니다.”

    강상우 부장의 말에 박주혁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품질과 시간을 맞출 수 있겠냐고 날 떠보는군?’

    그때 한기훈이 상체를 앞으로 내밀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한기훈이 허락을 요하자, 박주혁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분명 독일어 번역에 있어 지적하신 문제점들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파인랭스는 15년간 번역 외길을 걸어온 회사입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려하시는 사항들을 충분히 핸들링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강상우 부장이 한기훈을 빤히 쳐다보더니 박주혁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한 과장님의 패기가 느껴져서 좋군요.”

    “패기가 아니라 사실을 말한 것입니다.”

    박주혁은 한기훈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며 한기훈을 슬쩍 쳐다봤다. 조광연이 친밀함과 추진력으로 일을 성사시킨다면 한기훈은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스타일이었다. 서로 상반되지만, 그렇기에 호흡이 잘 맞을 수 있었으리라.

    ‘호흡이 좋았던 이유가 있었네.’

    강상우 부장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많은 번역사를 컨트롤 하기가 쉽지는 않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분명히 파인랭스가 잘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다만 제가 걱정하는 것은···.”

    갑자기 박주혁이 강상우 부장의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품질과 납기를 우려하시는 거겠죠. 제게 방법이 있다면 어떠시겠습니까?”

    “방법이요? 아무리 파독 근로자분들이라도 전문적인 용어를 알지는 못하십니다. 그 부분을 어떻게 커버하시겠다는 것인지···.”

    강상우 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박주혁은 강상우 부장의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의 경우 번역 공정에 따라 번역이 이루어진다. 그로 인해 원문검토, 사전감수 및 최종 감수에 이르는 과정을 거치며 품질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독일어의 일련의 과정이 생략되고 1차 번역본을 납품하기 때문에 품질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편법이긴 하지만, 박주혁은 1차 번역을 납품해도 품질에 문제가 없는 방법을 한가지 알고 있었다.

    “품질과 납기를 모두 잡을 방법이 있습니다.”

    확신에 찬 박주혁의 말에 강상우 부장이 호기심이 일었는지 눈을 크게 키우며 물었다.

    “그게 대체 뭡니까?”

    “감수를 지멜스에서 하는 겁니다.”

    박주혁은 강상우 부장을 똑바로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고 강상우는 순간 얼굴을 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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