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화 당신은 부모님께 어떤 자식입니까?
프로젝트들의 진행 상황을 확인하는 것은 총괄자로서 당연한 일이었기에 박주혁은 번역연구팀의 박영희 팀장, 구경숙 과장과 함께 오전 미팅을 진행했다. 박주혁이 번역연구팀과 마주 앉았는데 평소에 맡아보지 못한 싸구려 분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항상 은은한 샴푸향이 전부였는데 말이다.
‘뭐지?’
박주혁이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회의를 시작했다. 점심시간에 맞춰 배정산업 주배정 대표의 방문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금 서둘러야 했다.
“OECD 프로젝트 진행률은 어떻습니까?”
박주혁의 물음에 오늘따라 유독 얼굴이 창백해 보이는 박영희가 답했다.
“OECD 진행율은 현재 약 30%입니다.”
박영희의 보고에 박주혁이 달력을 흘깃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좀. 늦군요.”
박주혁의 말에 박영희가 살짝 고개를 떨궜다. 팀장이 고개를 떨구는 것을 보자, 구경숙 과장이 눈에 힘을 주고 박주혁을 쳐다봤다.
“진행률은 조금 늦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구경숙의 힘 있는 목소리에 박주혁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심형직 번역사가 컨디션 난조로 3일 정도 번역을 못 해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오늘부터 다시 복귀하실 테니 곧 목표치에 도달할 겁니다.”
재미있었다.
서로 앙숙처럼 으르렁대던 번역 1부와 감수팀의 팀장들이었는데 어느새 서로의 뒤를 받쳐주고 있지 않나? 세상일은 참 알다가도 모른다더니.
“그랬군요. 현재 진행 속도로도 마감은 문제없어 보이는데, 맞나요?”
박영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OECD 프로젝트는 중간 납품을 해야 하니 현재 상태에서 당분간 편집에 집중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박영희가 수첩에 메모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박주혁이 구경숙에게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제안요청서 번역은 어떻습니까?”
“사장님도 알고 계시다시피 마무리 단계입니다. 신세기만 남아 있는데 60%이상 완료되었기 때문에 오늘 또는 내일 완료될 것 같습니다.”
구경숙의 자신감 있는 보고에 박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랭귀지패스트 사용해 본 소감도 궁금합니다.”
구경숙이 잠시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
“반복이 많은 문서의 경우 그 효용성이 엄청날 것 같습니다. 5개 사의 제안요청서를 번역하는데 저 혼자 해도 무리가 없었습니다.”
박주혁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개선사항을 심 대리에게 잘 전달해주세요. 랭귀지패스트가 개발되면 우리의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박주혁은 회의를 마치며 말했다.
“박 팀장은 잠시 남아주시고, 구 과장은 제안요청서 마감에 집중해주십시오.”
박영희는 일어나려다 말고 자리에 앉으며 덮었던 수첩을 다시 펼쳤다. 박영희의 창백한 얼굴이 은근 신경 쓰였던 박주혁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박 팀장님. 무슨 문제 있나요?”
박주혁의 질문에 박영희가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답했다.
“예? 아니요. 문제없습니다.”
“오늘따라 유독 지쳐 보입니다.”
“그런가요?”
박영희는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영희가 손을 내리자 회의 초창기에 맡았던 분 냄새가 퍼졌다. 박주혁의 코를 살짝 벌름거리더니 이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박영희에게 말했다.
“힘드시면 무리하지 마시고, 일찍 퇴근하세요.”
“아닙니다. 저 정말 괜찮습니다.”
“그런가요...”
박영희를 바라보던 박주혁이 턱을 매만지다 말고 말했다.
“그나저나, 오늘 디자이너 면접 말인데요···.”
디자이너라는 단어가 나오자, 박영희의 눈이 일순간 번뜩이며 얼굴에 홍조가 돌았다. 그 모습에 박주혁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음? 평소답지 않게 신경 쓰고 있군요?’
아무래도 심영찬이 마음에 둔 사람이 온다니 박영희가 신경이쓰이는 것 같았다. 평소 하지 않던 화장도 그렇고, 지금 보니 옷차림도 달랐다. 평소 박영희와는 다른 모습에 박주혁은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그녀가 왜 이런 행색을 했는지 그 마음을 알기에 차마 웃을 수 없었다.
“디자이너 면접은 처음이라 무엇을 확인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박주혁의 말에 박영희가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기본적으로 인성을 확인하고, 포트폴리오를 봐야겠죠.”
“포트폴리오요?”
“예. 디자이너가 현재까지 해왔던 작업을 보면서 우리와 어울리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아무리 심영찬의 일이라지만, 일은 일이라는 것이군요.’
박주혁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영희가 나가고 얼마 뒤 휴대폰이 울렸다.
- 띠리리.
“네. 파인랭스 박주혁 대표입니다.”
“박 사장. 이제 출발하니까. 12시 조금 넘으면 도착할 거야.”
“알겠습니다. 식사는 뭐로 하시겠···.”
- 뚝.
박주혁이 말하는 와중에 주배정은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그의 성격을 알기에 박주혁은 피식 웃어 버렸지만, 점심 메뉴라는 어려운 숙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한식이겠지?”
박주혁의 얼굴에 고심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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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곗바늘이 12시를 향하자, 박주혁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영업부로 향했다.
“조 차장님. 근처에 괜찮은 한정식집이 있던가요?”
“음···. 백반집은 있는데. 한정식은 못 본 것 같습니다.”
“역시···.”
박주혁의 생각에도 마땅한 장소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사이 누군가 사무실 문을 벌컥 열며 들이닥쳤다.
“안녕하시오! 박···. 어? 박 사장 여기있었구만?”
“주 대표님.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차가 안 밀리더라고?”
주배정이 호탕하게 웃으며 박주혁의 어깨를 두드렸다. 영업팀에서 안면이 있던 최지훈이 재빨리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주 대표님.”
“오! 최 대리. 어때 배낭 메고 산을 타봤나?”
“이번 주말에 해보려 합니다.”
“그래? 어디로 갈 생각인가?”
“예? 그건 왜?”
“같이 가려고 그러지. 내가 막걸리를 두둑이 배낭에 넣어줄 테니 함께 올라가 보자고.”
주배정의 말에 최지훈의 얼굴이 하얗게 떴고 주배정은 껄껄 웃어 재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분간이 어려웠던 박주혁이 최지훈을 불쌍한 눈으로 잠시 바라보다 말했다.
“차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아니. 의자부터 나르지. 최 대리. 힘쓰는 사람 몇 내려보내 줘.”
번역회사에 힘쓰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지만, 최지훈은 우렁차게 대답하며 영업팀의 한기훈 과장과 김진우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배정산업의 트럭에는 조립 전의 더블백 박스가 한가득 실려있었다. 겉면에 의자가 그려진 것을 본 한기훈이 눈을 크게 뜨며 최지훈에게 물었다.
“최 대리. 이게 대체 뭐야?”
“사장님이 전 직원의 의자를 바꿔주시는 겁니다.”
옆에 있던 김진우가 살짝 놀랍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며 끼어들었다.
“의자요?”
“오래 앉아서 일하는 데 의자는 편해야 한다고 하시더라고.”
“와. 대박!”
김진우가 얼굴에 홍조를 띠며 유독 좋아했다. 원래 그런 것 아니겠나? 막내에게는 항상 가장 질이 떨어지는 물품이 대대로 내려지는···. 군대도 아니고 진짜. 김진우가 아이처럼 좋아할 때 박주혁이 주배정과 함께 지하로 내려왔고 주배정이 트럭 운전수를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6층으로 올리자!”
“예! 사장님.”
트럭이 오픈되고 주배정도 짐을 나르기 시작했다. 박주혁이 나이가 좀 있는 주배정이 걱정되어 한마디 했지만, 되레 핀잔만 잔뜩 들었다.
“박 사장! 내가 노인네인 줄 알아?”
“걱정돼서 그렇습니다.”
“어허! 이 사람이.”
주배정은 박주혁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커다란 더블백 상자를 번쩍 들어 옮겼다. 젊은 직원들이 한 상자에 두 명씩 붙어 옮기는 것을 말이다. 박주혁이 살짝 놀라 눈을 끔벅일 때 배정산업의 직원이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저희 사장님은 늙은이 취급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예? 그렇군요. 정말 건장하시네요.”
직원이 피식 웃으며 상자를 박주혁에게 건넸다. 더블백을 모두 옮기고 난 후 박주혁은 아이처럼 좋아하는 김진우에게 지시했다.
“진우씨가 책임지고 의자를 조립해서 전직원에게 나눠주세요.”
“알겠습니다!”
김진우가 신이 나서 큰소리로 대답했다. 주배정은 자신의 제품을 흐뭇하게 한번 쳐다보더니 말했다.
“박 사장. 못 쓰는 의자는 내가 폐기해줄 테니 지금 내려보내.”
“그래도 되겠습니까?”
“가전제품 사면 폐가전을 수거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야.”
그렇게 파인랭스의 의자는 모두 더블백으로 교체되었다.
더블백의 배송이 끝나고, 박주혁은 주배정을 포함한 고생한 영업팀을 이끌고 식당으로 향했다. 가정식 백반을 파는 집이었는데 고급스러움과는 거리가 조금 있었다. 박주혁이 그 점이 조금 신경 쓰였는지 맞은편에 있는 주배정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대표님. 누추한 곳에 모시게 됐습니다.”
“무슨 소리야? 점심으로 이 정도면 훌륭하지.”
주배정이 호탕하게 말하는 순간, 코끝을 찌르는 시큼한 김치찌개가 상에 놓였다. 주배정은 코를 벌름거리며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야. 묵은지가 제대로 내?”
주배정의 말에 중년의 가게 아줌마가 배시시 웃더니 말했다.
“저희가 직접 담근 거예요. 맛있게 많이 드세요.”
주배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숟가락을 들어 김치찌개 맛을 봤다.
“크아. 죽인다!”
몸을 쓴 탓에 밥 한 공기를 뚝딱해치운 후 주배정이 박주혁에게 넌지시 말했다.
“박 사장. 일전에 얘기했던 독일어 번역은 어떻게 할 수 있겠나?”
“예. 할 수 있습니다.”
박주혁은 힘주어 말했고, 주배정이 흡족한 듯 씩 웃으며 박주혁의 어깨를 쳤다.
“그럴 줄 알고 내가 문서를 가져왔지. 잘 좀 부탁함세.”
“여부가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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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혁은 주배정 사장이 건넨 두툼한 문서를 받아들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특허권 관련한 내용이라 그런지 양이 상당했다. 사장실로 향하는데 허인아 과장이 박주혁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사장님. 면접자가 회의실에서 대기 중입니다.”
“벌써 왔나요?”
“예. 일찍 도착했더군요.”
“알겠습니다.”
박주혁은 사장실 문고리를 잡은 채 고개를 돌려 심영찬을 쳐다봤다. 그는 고개를 모니터 쪽에 푹 박은 채 뭔가에 열중하고 있는 척했다. 평소에 저러지 않았는데 말이다. 디자이너가 일찍 온 것도 심영찬과 점심을 함께했기 때문이겠지. 박주혁은 피식 웃으며 배정산업의 문서를 내려놓고 수화기를 들었다.
“박 팀장. 새로운 프로젝트입니다.”
“예? 또요?”
“부담되세요?”
“아, 아닙니다. 놀란 것뿐입니다. 지금 들어가겠습니다.”
박영희는 두툼한 배정산업의 문서를 보고 입을 떡 벌렸다.
“대체 사장님 이건 어떻게 수주하신 겁니까? 심지어 독일어인데요?”
박주혁은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본인도 일이 이렇게 연결되리라고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독일어 번역사가 문제일 텐데. 제게 방법이 있으니 우선 견적부터 진행해주세요.”
“이번에 프리랜서 모집하면서 제3외국어도 조금 확보해두긴 했습니다만, 양을 보니 한두 사람으로 해결될 것 같진 않군요.”
“앞으로 독일어 번역이 생길 것 같으니 프리랜서 확보는 지속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박영희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 박주혁도 함께 일어나며 말했다.
“견적은 다른 분께 맡기시고 면접 진행해야죠?”
“아. 넵.”
박영희의 눈에 결연함이 엿보였다.
회의실을 열고 들어가자, 하얀 피부, 오뚝한 코, 우수에 젖은 눈 그리고 칠흑같이 어두운 긴 생머리가 인상적인 아가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오해영이라고 합니다.”
누가 봐도 호감이 가는 미인상의 여인이었다. 박주혁과 박영희는 오해영의 외모에 살짝 놀라 서로를 한번 마주 보고는 피식 웃었다. 심영찬이 그래도 제대로 된 사람을 좋아하는 것아 안도한다고 해야할까?
박주혁과 박영희는 오해영의 맞은편에 앉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오해영씨? 이름이 이쁘군요. 반갑습니다. 파인랭스 대표 박주혁입니다.”
“반갑습니다. 번역연구팀 박영희 차장입니다.”
박주혁과 박영희의 소개가 끝나고 면접이 시작됐다. 그리고 박영희의 압박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오해영씨는 부모님께 어떤 딸입니까?”
첫 질문부터 뭔가 의미심장했다.
박주혁이 미간을 찡그리며 박영희를 힐끔 쳐다봤다. 딱딱하게 굳어있는 박영희를 보니 절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게 됐다.
‘첫 질문부터 사심이 가득하네. 시누이가 따로 없어.’
박주혁은 혀를 내두르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