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40화 (40/136)
  • 040화 지멜스와의 연결고리

    박주혁이 종로에 도착할 때쯤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조 차장. 저녁에 약속이 있는데 저 때문에 틀어진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노총각에게 약속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더욱 약속이 있어야죠.”

    “예? 하하.”

    박주혁의 핀잔 섞인 말에 조광연이 머쓱하게 웃었다. 박주혁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살짝 흔들더니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서기관님. 박주혁 대표입니다. 종로에 도착하였는데 어디로 가면 될까요?”

    “아. 대표님! 시간이 늦었으니 저녁 식사하시면서 얘기하시죠. 종로 3가 쪽에···.”

    종로 3가.

    박주혁과 조광연은 코끝을 자극하는 돼지고기의 고소한 향에 뱃속이 요동쳤다. 많은 종류의 식당이 운집해 있었지만, 특히 보쌈 가게가 많았다. 조광연이 군침을 한번 삼키며 박주혁에게 물었다.

    “사장님. 어떤 가게라고 하셨습니까?”

    “흥부네라고 했는데···.”

    박주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답했다. 잠시 뒤 조광연이 멀리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저깁니다!”

    보쌈 가게 중 제법 규모를 자랑하는 흥부네에 박주혁이 들어서자 점원이 큰소리로 외쳤다.

    “어서 오세요!”

    “정필구님으로 예약이 되어 있을 겁니다.”

    박주혁의 말에 점원이 노트를 뒤적이더니 말했다.

    “이쪽입니다!”

    왁자지껄한 홀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가니 방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여닫이 창호지 문을 열자, 이제 막 40대로 접어든 것 같은 정필구와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정필구 사무관입니다.”

    “최혜나 주무관입니다.”

    통성명이 끝나고 자리에 앉자, 곧 상 가득 보쌈과 홍어를 비롯한 각종 밑반찬이 깔렸다. 점원이 상을 다 깔고 나서 조심스럽게 정필구를 향해 물었다.

    “술은 어떤 것으로?”

    정필구가 손을 들어 잠시 점원의 말을 끊더니 박주혁에게 물었다.

    “박 대표님. 술은 뭐로 하시겠습니까?”

    “음. 안주로 보건대 막걸리 아니겠습니까?”

    박주혁은 안면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고 정필구는 점원을 향해 고개를 한번 끄덕여 보이더니 말했다.

    “안주에 맞는 술이라···. 아직 젊으신 것 같은데 생각보다 운치를 즐기시나 봅니다.”

    정필구가 박주혁을 띄우며 말했고 조광연이 맞는 말이라는 듯 고개를 몇 차례 끄덕였다. 저물어가는 해를 응시하며 캔 커피를 마시던 박주혁이 떠올랐던 듯싶다. 박주혁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람 사이에도 궁합이 있듯 음식과 술에도 궁합이 있는 법이죠. 모든 것을 떠나 홍어가 있는데 막걸리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박주혁의 말에 정필구가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혹시 홍어 싫어하시면 어쩌나 걱정했습니다.”

    “홍탁삼합을 어찌 싫어할 수 있겠습니까?”

    막걸리가 배달된 후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됐다. 코끝을 찌르는 홍어의 암모니아향을 보니 제대로 삭힌 것을 주문한 모양이었다. 삼합 덕분에 막걸리의 소비가 빨랐다. 식사가 얼추 마무리되고 본격적인 대화가 오갔다.

    “박 대표님. 오늘 이렇게 뵙자고 한 것은 현재 기획 중인 파독 근로자 복지사업 때문입니다.”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박주혁은 가만히 정필구의 말을 경청했다.

    “여러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만, 우선 파독 근로자분들의 가정이 고국에서 자리 잡으실 수 있도록 지원하자는 것이 시급하다는 판단입니다.”

    박주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필구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그래서 파인랭스에서 독일어 번역사를 찾는다는 소식이 무척 반가웠습니다.”

    “그러셨군요. 저희가 무엇을 지원하면 되겠습니까?”

    박주혁의 질문에 막걸리를 마시고 잔을 내려놓던 최혜나가 입을 열었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독일어 번역을 파독 근로자분들께 의뢰하시면 저희가 사업비를 지원해 드리는 방식을 고민 중입니다.”

    “사업비 지원이라면, 파독 근로자분들께 번역을 의뢰하면 번역료를 지원하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최혜나가 박주혁의 빠른 이해력에 살짝 놀라며 눈을 키웠다.

    “예, 맞습니다. 파독 근로자뿐 아니라 직계가족까지는 인정할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실무는 최혜나 주무관이 맡은 것 같았다. 박주혁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독일어 프로젝트를 많이 수주할 수 있다면 높은 마진율을 가져갈 수 있다는 소리지만···.’

    매출액 대비 외주비율(번역사 지급 비율)이 평균 40%에 육박한다. 국제협력단에서 이 번역료의 몇 프로를 지원하는지 알 수 없지만, 독일어 프로젝트의 경우 마진율을 상당히 높일 수 있는 조건이다.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지만, 박주혁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지원 사업에 저희가 함께 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겠으나, 아시겠지만 독일어 번역 시장은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박주혁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정필구와 최혜나를 바라봤다. 그들도 그 사실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정필구가 살짝 상체를 숙이며 속삭이듯 물었다.

    “지멜스라고 알고 계십니까?”

    “지멜스라면···!”

    박주혁이 안광을 빛내며 정필구를 똑바로 바라봤다.

    지멜스.

    독일과 유럽을 대표하는 최대 기업이다. 손을 안 뻗친 분야가 없어 해가 지지 않는 기업이라는 별명도 있다. 한국전쟁 이후 종전 재건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한국에 처음 발을 들였다. 발전 설비, 공장, 케이블 설치 등 인프라 사업을 수주하며 한국에서 그 영향력을 확대해온 회사다.

    “요키아가 사실 지멜스와의 합작 회사라는 것 아십니까?”

    박주혁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지만, 박주혁은 정필구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눈을 살짝 키웠다. 정필구는 박주혁이 모르는 정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뿌듯했는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지멜스는 통신만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진출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노리는 사업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공장자동화부터 의료기기 그리고 우주산업 및 소프트웨어까지 지멜스의 기술이 들어가지 않은 분야가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한국에서 노리는 사업이 있다니? 박주혁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정필구를 바라봤다.

    “봄바디오가 이미 파인랭스와 거래하고 있다죠?”

    정필구의 뜬금없는 말에 박주혁은 유명한 국장을 떠올렸지만, 조광연은 얼굴을 굳히며 목소리를 높였다.

    “기밀 사항입니다. 저희가 어떤 고객과 거래하고 있는지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박주혁은 자신의 말을 가로챈 조광연을 살짝 쳐다보며 속으로 웃었다.

    ‘조 차장님. 때와 장소는 가리셔야죠.’

    정색하며 말하는 조광연에게 살짝 당황하면서도 정필구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 전 정부 사람이라 관계없지 않나요? 어쨌든, 지멜스가 91년도 대구 지하철의 제어 시스템을 공급했었습니다. 그리고 의정부 경전철 쪽에도 관심을 두고 있죠.”

    정필구의 말에 박주혁이 손으로 턱을 슬쩍 매만졌다.

    ‘그래서 봄바디오를 언급했었군.’

    분명 의정부 경전철 프로젝트는 봄바디오가 수주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지멜스도 참여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지멜스는 독일국적 기업으로 독일어 번역이 필요했지만, 90년대에 독일어 인력풀을 구축한 번역회사는 없었다. 필요한 번역은 아마도 자체 인력으로 처리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임기응변이었을 테지만.

    ‘지멜스까지 연결이 된다면···. 파인랭스는 한 단계 더 뛰어오르는 것이다.’

    정필구를 바라보고 있던 박주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멜스에서 독일어 번역이 나올 것이라는 말씀이신데, 저희가 수주하지 못하면 소용없는 것 아닙니까?”

    박주혁의 말에 정필구가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말했다.

    “대구 지하철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지멜스가 그 많은 번역 물량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었겠습니까?”

    “...!”

    박주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정필구를 쳐다봤다.

    91년 대구 지하철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지멜스는 자체 인력 및 독어독문학과 학부생까지 동원했지만, 번역 경험이 없던 터라 프로젝트 일정을 맞출 수 없었다. 결국, 지멜스는 인해전술이라는 승부수를 띄웠고 외무부에까지 도움을 요청했었던 것이다.

    “그렇군요.”

    “예. 그때는 그저 단발성 일이라 생각했었습니다만···.”

    “이번엔 정부에서 지원 사업에 편입시켜서 파독 근로자분들을 돕겠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뜻은 잘 이해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저희 파인랭스가 지멜스와 연결되는 것이겠군요.”

    박주혁의 말에 최혜나가 품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지멜스 구매부 강상우 부장]

    “얼마전에도 파독 근로자분들 다시 한번 연락해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박주혁은 명함을 살핀 후 정필구와 최혜나를 보며 말했다.

    “파독 근로자분들에게는 어떻게 연락을 취하면 됩니까?”

    “복지사업이 확정되는 순간 넘겨드리겠습니다.”

    “지멜스가 국제협력단에 연락해왔다는 것은 사업이 진행중이라는 얘긴데 서둘러야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박주혁의 말에 정필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파인랭스의 참여 의지만 있다면 사업은 시작될 겁니다.”

    #

    다음 날 아침.

    박주혁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커피와 신문을 들고 사장실로 향했다. 어제 오후 내내 자리를 비웠던 탓일까? 아침부터 사장실로 보고하러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경영지원팀 허인아 과장이 첫 단추였다.

    “사장님. 오늘 배정산업에서 더블백을 보내온다고 연락이 왔었습니다.”

    “드디어 의자를 바꿀 수 있겠군요.”

    허인아 과장의 말에 백주혁이 미소지으며 자신의 의자를 슬쩍 밀었다.

    - 삑!

    고막을 긁는 소리에 박주혁과 허인아가 동시에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어제 면접 결과 보고드립니다.”

    심영찬과 허인아는 소프트웨어 개발팀에 3인의 개발자를 채용하기로 했다며 결재판을 내밀었다. 박주혁은 결재판을 열어 채용될 사람들의 이력서를 살폈다.

    ‘음? 이 친구는... 회사에서 숙식을 해결할 사람이라 안된다더니···. 뽑았네?’

    박영희와 심영찬이 투덕대더니 결국은 뽑기로 했나 보다. 박주혁은 피식 웃으며 결재판에 서명한 후 허인아 과장에게 넘겼다.

    “역시 생각은 비슷한가 봅니다. 이력서를 보고 괜찮겠다 싶은 사람들은 전부 채용됐군요. 수고했습니다.”

    박주혁의 칭찬에 허인아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결재판을 받아든 허인아가 사장실을 나가려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아, 사장님. 그리고 배정산업 대표님이 오늘 직접 배달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오후 2시 도착예정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요? 연락 한번 해야겠군요. 감사합니다.”

    허인아가 나간 후 박주혁은 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주배정입니다.”

    “대표님. 파인랭스 박주혁입니다.”

    “오. 박 사장. 바빴나봐?”

    “어제 오후 내내 미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직접 더블백을 가져오신다고요?”

    “첫 출하인데 대표가 직접 가야지.”

    “그럼 조금 일찍 오셔서 점심을 같이하시죠?”

    “그거 좋겠군. 그럼 이따 보지.”

    주배정 대표는 여전히 호탕하게 말하고 전화를 끊어버렸고 곧 심영찬이 사장실로 들어섰다.

    “사장님. 허인아 과장에게 모두 채용하신다고 얘기 전달받았습니다.”

    “그래요. 파인랭스 시스템과 랭귀지패스트 개발에 박차를 가해주십시오.”

    박주혁이 웃으면서 말했는데, 심영찬의 표정은 살짝 어두웠다. 박주혁이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물었다.

    “왜요? 마음에 들지 않는 인선이 있었습니까?”

    “예?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다만?”

    심영찬이 입을 달싹거렸지만,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 모습이 답답했던 박주혁이 심영찬을 닦달했다.

    “뭔데 그럽니까? 속 시원하게 말씀하세요. 지원할 수 있는 것이면 지원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게 아니라···.”

    심영찬이 이마에 맺힌 땀을 쓸어내니 겨우 입을 뗐다.

    “오후에 디, 디자이너 면접 말입니다.”

    디자이너라는 말에 박주혁은 오늘 디자이너 면접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짐짓 어떤 상황인지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지만, 박주혁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다.

    “디자이너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피, 필요합니다! 단지, 그게···. 하아.”

    심영찬이 어울리지 않게 깊게 한숨을 내쉬더니 결심한 듯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제,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게 영 불편할 것 같습니다!”

    박주혁은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삼키며 애써 담담한 척 말을 이었다.

    “사내 커플이 탄생해 결혼하게 되면 최신형 냉장고를 쏘도록 하죠.”

    “에에? 아니. 그 말씀이 아니라.”

    “궁금하군요. 심 대리의 마음을 훔친 분이 누군지.”

    “아아악.”

    심영찬이 얼굴을 붉히며 도망치듯 사장실을 나가버렸고 박주혁은 오랜만에 호탕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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