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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39화 (39/136)
  • 039화 그만큼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파독 근로자 복지사업이라···.’

    박주혁이 생각에 잠겨 의자에 몸을 기대는 순간 조광연 차장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사장님. 알파텔에서 독촉 전화가 왔습니다.”

    “그래요? 염세훈 과장이었죠?”

    “예.”

    박주혁은 허리를 숙여 한국통신 제안요청서를 인쇄시키며 말했다.

    “제본하세요. 소프트카피는 제가 준비하죠.”

    “알겠습니다!”

    어제 ANT를 방문했던 조 차장의 업무보고서를 확인한 바로는 ANT는 베스트 번역원이 납기를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해 계약을 파기 절차를 밟고 있다고 했다. 계약 파기가 된다면 남은 물량은 자연스럽게···.

    정통부 이연호 서기관의 도움으로 일이 쉽게 풀렸다. 에릭숀, 너텔, 루센트은 찾아가지 않아도 알아서 파인랭스로 왔으니 말이다.

    파일이 플로피디스크에 다 옮겨지자, 박주혁은 디스크를 챙겨 사장실을 나섰다.

    “조 차장님. 출발합시다.”

    “네!”

    최지훈이 서둘러 제본을 마감하여 조광연에게 건넸고 조광연은 제본된 제안요청서를 대봉투에 담아 헐레벌떡 박주혁의 뒤를 따랐다.

    #

    박주혁과 조광연의 차가 양화대교에 진입할 때쯤 박주혁의 휴대폰이 낮게 울었다.

    - 띠리리.

    “네. 파인랭스 박주혁 대표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유명한 국장님 소개로 연락한 국제협력단의 정필구 사무관입니다.”

    국제협력단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정필구 사무관은 나라를 위해 희생한 파독 근로자분들을 위한 복지사업을 구상 중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분들께 현실적인 지원이 가능한 사업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파인랭스에서 독일어 번역사를 찾는다는 소식에 바로 전화를 드렸습니다. 혹시 시간이 되시면 만나 뵙고 말씀을 나누고 싶은데요.”

    “좋은 일에 함께 할 수 있는 일이라는데 시간 내야죠.”

    “감사합니다! 편하신 시간 말씀해 주시면 저희가 찾아뵙겠습니다.”

    박주혁이 정필구와 통화를 끝내자, 조광연이 호기심이 어린 눈으로 박주혁을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좋은 일이라니 어떤 일입니까?”

    “최 대리에게 어제 미팅했던 배정산업에 대해 보고 받으셨나요?”

    “예. 얼추 받았습니다. 좋은 일이긴 한데 독일어라···.”

    주배정 대표와 헤어진 직후 박주혁도 똑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에 조광연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박주혁이 피식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독일어뿐이 아니지. 전 세계 언어를 취급해야 한다. 그 시작이 독일어일 뿐이야.’

    “독일어 인력이 없어 문제죠?”

    “맞습니다. 독일어 번역 의뢰가 없다고 봐야 하니까요.”

    조광연의 말에 박주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리고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독일어 인력풀을 생각하다 보니 문득 파독 근로자분들이 떠올랐습니다.”

    “파독이라면···. 설마?”

    “그 설마가 맞아요.”

    1960년대부터 70년 후반까지 광부와 간호사로 독일로 파견된 인력만 2만여 명이었다. 차관을 빌미로 먼 타국으로 떠나야만 했던 그들이 30년이 넘어 고국으로 귀국하는 사람도 많았다. 박주혁은 그들을 준원어민 수준의 인력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실제로 파독 근로자 중 일부는 현지인과 혼인하여 함께 귀국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의 2세는 독일어를 모국어로 사용했을 터.

    조광연이 눈을 살짝 크게 뜨며, 놀라워할 때 박주혁이 이어서 말했다.

    “나라를 위해 봉사한 그분들을 위해 국제협력단에서 복지사업을 펼치려고 한답니다.”

    “복지사업이요?”

    “상세한 것은 만나봐야 알 수 있겠죠. 아마도 번역일을 복지사업에 포함할 생각인 것 같더군요.”

    “아. 직업 소개 같은 것일까요? 생각해 보니 은퇴한 분들이시잖아요? 소일거리로 번역이면 나쁘지 않겠네요. 사회에 기여도 할 수 있고요.”

    박주혁도 조광연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세한 것은 국제협력단을 만나봐야겠지만···. 얘기하다 보니 어느덧 차가 알파텔에 도착했다.

    “사장님. 도착했습니다.”

    “네. 염세훈 과장과 또 한판 붙어야겠군요.”

    “예? 또요?”

    조광연이 놀랄 때 박주혁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하차했다. 건물로 들어서자, 염세훈 과장이 먼저 마중을 나왔다. 반갑게 웃으며 손을 내미는 염세훈 과장이 자못 어색했지만, 박주혁은 태연하게 악수하며 분위기를 맞췄다.

    ‘분위기가 변했군.’

    염세훈이 안내한 접견실로 가니 중년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알파텔 구매부 이준 상무입니다.”

    “파인랭스 대표 박주혁입니다. 이쪽은 영업팀 조광연 차장이고요.”

    인사가 끝나고 자리에 앉자마자, 이준 상무가 입을 열었다.

    “5개 통신사의 제안요청서 중 한 개 사의 번역을 진행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단순 납품하는 자리에 상무가 나왔다는 것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방증이었다. 그리고 지금 안절부절못하는 염세훈 과장을 보고 있으니 확신이 들었다. 베스트 번역원이 스케쥴을 못 맞추고 있다고 말이다.

    “예. 한국통신의 제안요청서를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납품을 위해 왔고요.”

    박주혁의 말에 조광연이 가방에 들어있던 대봉투를 꺼내 염세훈 과장 앞으로 밀었고, 박주혁은 품에서 플로티 디스크를 꺼내 봉투 위에 얹었다. 이준 상무는 눈을 가늘게 뜨며 염세훈을 흘깃 바라봤다. 눈빛에 강한 분노가 서려 있는 것이 누군가 곧 시말서를 작성할 것만 같았다. 이준 상무는 곧 분노 어린 눈빛을 거두고 박주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짧은 시간이었을 텐데 완성하셨군요.”

    박주혁이 입을 열기전 조광연이 잽싸게 끼어들더니 죽는시늉을 하며 이준 상무에게 어려운 일이었음을 어필했다.

    “상무님. 약속한 시간 내에 완성하기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연기력도 이제는 수준급이네?’

    박주혁은 속으로 피식 웃으며 이준 상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다른 통신사의 제안요청서를 의뢰하면 언제쯤 받을 수 있겠습니까?”

    올 것이 왔다.

    하지만, 박주혁은 쉽게 넘어가 줄 생각이 없었다. 염세훈은 권선호의 끄나풀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확실히 알게 해줘야 한다. 어느 줄에 서야 할지 말이다.

    “상무님. 제가 알기론 베스트 번역원에서 다른 회사의 제안요청서를 도맡아 진행 중인 것으로 압니다.”

    “예. 맞습니다. 하지만, 시각을 다투는 일인데 아직 번역본이 오질 않아 현업에서 난리입니다.”

    이미 업계에는 소문이 돌고 있을 것이다. 요키아는 이미 3개 사의 제안요청서가 번역 완료되어 내부 검토 중이고 ANT 역시 1개 사의 제안요청서가 번역 완료되었다는 소식이 말이다. 덕분에 여타 기업들의 번역 의뢰가 앞당겨지는 효과도 있었지만, 알파텔 입장에서는 속이 쓰린 상황일 것이다. 제안요청서를 재빨리 수급하여 번역을 의뢰한 탑 3였는데 번역본은 단 1개도 받지 못했으니 말이다.

    “베스트 번역원에서도 곧 납품하겠지요.”

    박주혁의 말에 염세훈 과장의 얼굴은 흙빛이 됐고 이준 상무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으며 염세훈을 바라보며 물었다.

    “일주일. 아니 2주를 더 달라던가?”

    이준 상무의 영혼 없는 말투에 염세훈 과장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2주···. 입니다. 상무님.”

    “하하하.”

    염세훈의 말에 이준 상무가 호탕하게 웃어버렸다. 그리고 눈에 힘을 주며 박주혁을 바라봤다.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박주혁은 고심하는 표정을 지으며 조광연을 쳐다봤다. 조광연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겠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박주혁을 쳐다봤다.

    “4개 업체. 약 400페이지. 지금 의뢰하신다면 최소 5일은 필요합니다.”

    “후. 일주일이란 말입니까?”

    이준 상무가 실망한 듯 짧게 한숨을 내뱉으며 되묻더니 곧 염세훈 과장을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며 소리쳤다.

    “염 과장. 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이준 상무의 말투와 행동에 조급함을 느낀 박주혁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현업에서 아주 닦달하고 있나 보군요. 그렇다면 돈을 좀 더 쓰셔야죠?’

    박주혁은 고개 숙인 염세훈 과장을 두둔하며 말했다.

    “상무님. 염 과장님이 일이 이렇게 될 줄 아셨겠습니까? 더 급하게 필요하시다면 저희가 급행으로 진행해보겠습니다. 다만, 비용이···.”

    박주혁이 말끝을 살짝 흐리며 이준 상무를 쳐다봤다. 그는 눈을 부릅뜬 상태로 박주혁의 입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박주혁이 천천히 입을 뗐다.

    “급행료는 총 번역료의 30%입니다.”

    박주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준 상무가 염세훈 과장을 쳐다봤다. 그 금액이 얼만지 당장 보고하라는 듯 말이다. 염세훈 과장이 재빨리 암산하더니 이준 상무에게 귀띔하자, 이준 상무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습니다. 급행료를 지불하기로 하죠. 그럼 언제까지 받을 수 있겠습니까?”

    박주혁은 차분한 어투로 조광연을 불렀다.

    “조 차장님?”

    “예!?”

    조광연이 당황한 듯 갈라진 목소리로 답했다. 박주혁은 여전히 차분한 어투로 조광연에게 물었다.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아. 그게···.”

    조광연이 이준, 염세훈 그리고 박주혁의 눈치를 살피며 손가락 세개를 펼쳐 보였다.

    “사···. 삼일?”

    조광연이 무척 망설이며 말했는데 이준 상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손을 내밀었다.

    “좋습니다! 삼일 안에 꼭 완성해 주십시오. 2주가 3일로 준다는데 현업에서 뭐라 하겠습니까?”

    박주혁은 이준 상무의 손을 맞잡으며 힘주어 말했다.

    “3일 안에 모든 문서를 받아 보실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염 과장. 당장 올라가서 계약서 작성해서 오세요!”

    “예!”

    이준 상무의 호통에 염세훈 과장이 부리나케 뛰어나갔다.

    #

    알파텔과 회의가 끝나고 건물 밖으로 나오니 해가 어느덧 서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이준 상무를 상대하느라 긴장했는지 박주혁의 목 뒷덜미가 뻐근했다. 박주혁은 뭉친 근육을 풀기 위해 스트레칭을 했고 그 옆으로 조광연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캔 커피를 내밀었다.

    “사장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당이 떨어졌었는데···. 고맙습니다.”

    박주혁은 서쪽으로 기울며 붉은빛을 발하는 태양을 바라보며 캔 커피 한 모금 들이켰다.

    들쩍지근하면서도 쌉싸래한 커피가 머리를 맑게 해 주는 것만 같았다. 가만히 해를 바라보고 있는데 조광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장님. 놀랐습니다.”

    “뭐가요?”

    “앉은 자리에서 30%를 더 올려받으셨잖습니까?”

    “아아.”

    박주혁은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하며 캔 커피를 다시 입에 가져갔다. 조광연은 뭔가 더 물어보고 싶은 눈치였지만, 커피를 음미하는 박주혁을 방해할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박주혁은 항상 중천으로 떠오르는 밝은 태양 빛을 벗 삼아 커피를 마셨었는데 서쪽 하늘에 걸린 붉은 해를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도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음미하면서 마셨는데도 캔 커피는 진한 아쉬움을 남긴 채 텅 비었다. 박주혁은 빈 캔을 휴지통에 넣으며 말했다.

    “이제 복귀할까요?”

    “예.”

    회사로 복귀하는 차 안.

    조광연이 아까 커피를 마실 때부터 계속 박주혁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그의 시선이 불편했던 박주혁이 먼저 물었다.

    “조 차장님. 왜 그러세요?”

    “아. 저, 그게 사장님. 정말 궁금해서 그럽니다.”

    “네 말씀해보세요.”

    “아까 제게 왜 며칠 걸리냐고 물으신 겁니까?”

    박주혁은 조광연의 물음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조 차장님이 며칠이라고 답할지 궁금했거든요.”

    “예? 단지 그것뿐입니까?”

    “뭐 그런 것도 있고···. 5일 걸린다는 것에 고객이 불만족했으니 5일 이하로 답하겠지 싶었습니다.”

    조광연은 황당하다는 듯 눈을 끔벅이며 운전대를 꽉 잡았다. 그 모습이 살짝 애처롭기도 했다.

    “조 차장님.”

    “예.”

    “사실 당장이라도 납품할 수 있는 것 알고 있죠?”

    “그럼요.”

    “오늘 제가 알파텔과 협상하는 것을 잘 기억해 두십시오. 유리한 상황을 어떻게 이용했는지 말이죠.”

    박주혁의 말에 조광연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고, 박주혁은 대시보드에 있는 시계를 한번 쳐다봤다. 오후 5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시계를 확인한 박주혁이 중얼거리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음. 이 시간이면 국제협력단을 만날 수 있으려나?”

    잠시 망설이던 박주혁은 휴대폰을 열어 정필구 사무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국제협력단 정필구 사무관입니다.”

    “안녕하십니까? 파인랭스 박주혁 대표입니다.”

    “아! 대표님.”

    “미팅이 끝나서 이제 좀 시간이 날 것 같은데요.”

    “그러시군요. 제가 어디로 가면 될까요?”

    “바쁘신 분을 어떻게 오라 가라 하겠습니까? 종로 쪽이시죠? 제가 가겠습니다.”

    박주혁이 말하며 조광연을 쳐다봤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종로 방향으로 차를 돌렸다.

    “아. 제가 가도 되는데요.”

    “국가를 위해 일하시는 분들은 그만큼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겁니다. 종로 쪽에 가서 다시 전화하겠습니다.”

    미팅 전부터 박주혁은 정필구 사무관에게 마음의 빚을 지게 만들어 협상에 우위를 점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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