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38화 (38/136)

038화 파독 근로자 복지사업.

배정산업.

‘고객의 편안함이 곧 우리의 행복’이라는 이타즉자리(利他卽自利)라는 모토로 1987년 설립된 의자 전문 제조업체다.

95년 독일로부터 더블백이론을 의자에 적용하는 조건으로 국내 독점 생산 및 판매에 대한 전용실시권을 취득하여 더블백을 탄생시켰다. 그렇게 출시된 더블백은 메가히트 상품이 되어 배정산업의 성장을 견인했다. 한국인의 체형에 맞게 설계를 현지화한 전략이 주요했다.

미래는 그러했지만, 더블백의 탄생 스토리는 알지 못했다. 더블백의 신화를 쓴 당사자에게 탄생 스토리를 듣게 된다니 왠지 모르게 설레는 박주혁이었다.

“박 사장. 혹시 등산 좋아하나?”

“취미로 삼지는 않았지만, 싫어하진 않습니다.”

“그래. 젊은 사람들이 가질 취미는 아니긴 하지.”

주배정이 소주잔을 들며 최지훈을 슬쩍 쳐다봤다. 그의 눈이 너는 어떠냐고 묻고 있었고 최지훈은 영업맨답게 바로 잔을 들며 말했다.

“저는 등산 좋아합니다. 일요일마다 산을 탑니다.”

영업맨들은 입만 뻥끗하면 구라를 친다고는 하지만, 주배정 같은 노련한 사람 앞에서 통할리 만무하다. 최지훈의 발언에 박주혁은 살짝 긴장하며 주배정을 빠르게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최지훈의 말은 사실이었는지 주배정이 눈웃음을 치며 잔을 비웠다.

“최 대리, 얼굴을 보니 산을 좋아할 것 같았어. 정상에 올랐을 때 그 쾌감, 시원한 바람! 좋지 않나?”

“예. 그 맛에 등산하죠. 뭐 물론 등산 후에 마시는 막걸리···.”

“그렇지! 막걸리, 파전. 그것 때문에 산에 가는 사람도 있어. 맞네, 맞어. 하하하.”

최지훈이 주배정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슬슬 농담을 던졌고 주배정이 그것을 받아주면서 분위기가 좋아졌다. 나이 지긋한 주배정의 비위를 맞추는 최지훈을 보며 박주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권선호한테 제대로 배우긴 했군. 내치지 않길 잘했어.’

주배정은 회 한 점을 입에 넣어 삼키더니 말을 이어갔다.

“산에 오를 때 말이야. 등산 배낭을 묵직하게 하고 올라가면 덜 힘들다는 것 혹시 아나?”

주배정의 말에 박주혁과 최지훈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지 않나?

“하하하. 노망났냐는 표정들이구먼?”

주배정이 테이블을 손으로 내려치며 유쾌하게 웃더니 말했다.

“등산 배낭에는 일반 가방과 달리 허리를 조여주는 벨트가 있는 건 다들 알고 있지?”

박주혁과 최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 대리도 나중에 한번 해보라고. 허리를 단단히 조이고 배낭이 등에 밀착되도록 조정하면 확실히 덜 피곤해. 무게가 나가더라도 말이지.”

주배정의 말에 최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박주혁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게 혹시 더블백 이론입니까?”

“오! 박 사장. 더블백 이론을 알고 있어? 정말 예상을 벗어나는 친구군.”

주배정이 호탕하게 웃더니 말했다.

“맞네. 배낭이 등 근육을 지지하며 마사지하는 효과가 생기 때문에 피로도가 덜한 것이지.”

최지훈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지 눈을 끔벅이며 박주혁과 주배정의 대화를 듣기만 했다.

“그 이론을 적용하여 등 근육을 지지하는 더블백을 만드신 거군요.”

“그렇지! 단순한 더블백 이론을 의자에 적용한 거지. 직장인들이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이 얼마야? 분명 더블백은 시장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거야. 그리고 그 결과는 곧 매출이겠지? 하하하.”

주배정은 더블백의 성공을 확신하고 있었다. 리더가 저런 뚝심과 야망이 있다면, 분명 배정산업 전 직원이 한 목표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분이 아니구나.’

주배정에게 살짝 감탄한 박주혁이 소주잔을 입에 가져가며 말했다.

“분명, 시장에서 큰 반응이 있을 겁니다.”

확신 어린 박주혁의 말에 주배정이 껄껄 웃었다. 박주혁이 입안에 소주를 털고 잔을 테이블에 내려 놓는 순간, 주배정이 목소리를 키우며 말했다.

“맞아. 분명 국내 시장에서는 파급력이 있을 거야. 그런데, 난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싶지 않거든.”

주배정은 박주혁의 빈 잔에 소주를 채우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말인데, 박 사장 자네가 좀 도와주게.”

이번에는 반대로 박주혁이 주배정의 잔을 채웠다.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

한눈팔 시간도 없는 출근 시간.

박주혁은 운전대를 잡은 채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배정산업과 이어지지 않은 이유가 고작···.”

배정산업의 주배정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왜 파인랭스와 관계가 지속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바로 독일어 때문이었다. 더블백 이론이 독일에서 특허권이 있었기에, 배정산업은 무엇보다 독일어의 지원이 필요했다. 하지만, 파인랭스는 한참 IT 번역에 몰두하고 있던 터라 독일어를 지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박주혁이라면···.

“시스템 온. 검색, 독일어 프리랜서.”

- 검색 중···.

- 검색 완료. 총 211명이 검색되었습니다.

이상은 / 베를린대학교 / 공대 / 010-****-****

홍영선 / 한국외대통번역대학원 / 독일어 / 010-****-****

이맑은 / 독일유학생 / [email protected]

Frank / 원어민 / [email protected]

...

..

.

프리랜서 리스트가 주르륵 나열됐지만, 지금 당장 연락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지금은 95년도인데 시스템이 출력하는 자료들은 2020년 자료들이니 전혀 쓸모가 없었다. 박주혁은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제3외국어는 찬밥이었구나.”

영어, 일본어, 중국어의 경우 프리랜서가 언어별로 많게는 3천 명에 육박했다. 그런데 독일어는 고작 211명이라니. 박주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독일어 인력풀을 어떻게 구한담?’

한창 고민하고 있는데, 무심결에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사연이 박주혁의 이목을 끌었다.

- 부천시 외국인 노동자의 집에서 봉사하시는 황자영님의 사연입니다.

- 저는 ‘파독 간호사’로 올해 영구 귀국하기 전까지 30년 넘게 독일 병원에서 일했습니다. 타국에서의 고행을 알아서일까요? 한국의 외국인 노동자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박주혁의 눈이 순간 번뜩였다.

‘이거다.’

박주혁은 사무실로 들어 루틴대로 커피와 신문을 들고 사장실로 들어섰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둥 마는 둥 한 박주혁은 신문을 한쪽으로 밀치고는 수화기를 들었다.

“네. 외무부 국제협력기구 유명한 국장입니다.”

“국장님. 안녕하십니까? 파인랭스 박주혁입니다.”

“아! 박 사장. 잘 지냈나?”

“예. 국장님 덕분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네요.”

“하하하. 바쁘면 좋은 거지! 그래 오늘은 무슨 일로?”

“다름이 아니라···.”

박주혁은 유명한에게 독일어 번역이 필요한데 혹시 도움을 구할 수 있냐고 운을 뗐다.

“독일어?”

“예. 아시겠지만, 영어, 일어, 중국어 외에는 인력을 구하기가 어렵네요.”

“흠. 하기야 그렇겠지. 그래서 내가 뭘 도와주면 되는 건가?”

“혹시, 파독 근로자분들께 연락을 취할 방법이 있을까요?”

파독이라는 말에 유명한이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파독 근로자? 아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난 독일 대사관에 연락해서 교민을 소개해줘야 하나 싶었는데.”

“그것도 좋겠지만, 기왕이면 고생하신 파독 근로자분께 경제적 혜택도 드리고 경제에 이바지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를 드릴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요?”

박주혁의 말에 유명한이 혀를 내두르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내가 한번 알아보겠네. 정말 좋은 생각이야.”

“부탁드립니다. 국장님.”

“또 밥을 한번 얻어먹을 수 있겠군?”

“왜 그러십니까. 이런 일 아니어도 국장님께 밥은 사드릴 수 있습니다.”

“하하하. 알았네, 알았어. 내 곧 연락하지.”

유명한과 전화 통화를 마친 박주혁이 햇살이 쏟아지는 창가를 바라보며 커피잔을 들었다.

“고생하신 분들께 작은 도움이라도 된다면 더 좋겠지.”

- 후룩.

오늘의 커피는 단맛이 강했다.

#

점심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니 회의실에 못 보던 얼굴이 앉아 있었다. 박주혁은 그들을 힐끔 쳐다보고 사장실로 향하는 데 경영지원팀 허인아 과장이 뒤따라 들어왔다.

“사장님.”

“네.”

“오늘 면접 잊지 않으셨죠?”

잊고 있었다. 배정산업의 주배정 대표와 미팅 이후 너무 독일어만 생각했던 것 같다. 속으로는 뜨끔했지만, 박주혁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누구부터 면접이죠?”

“여기, 이력서 순입니다. 제가 응시자들의 특성을 별도로 메모해 두었으니 참고하시면 됩니다.”

박주혁은 허인아 과장이 내민 서류를 받아 살펴봤다. 허인아는 이력서상 눈여겨봐야 할 이력이나, 경력 등에 별도로 표시해두었고, 그 사람에게 물어봐야 할 질문들도 몇 가지 뽑아 메모를 달아놨다. 박주혁은 허인아의 일 처리를 보고 살짝 감탄했다.

‘여기 또 꼼꼼한 능력자가 있었네.’

권선호를 따라 나갔던 허인아 과장이었지만, 이번에 같이 일하면서 새삼 느끼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얼마나 사람을 잘 뽑았는지 말이다. 박주혁은 이력서를 보다 말고 허인아를 올려보며 말했다.

“허 과장.”

“네.”

“심 대리와 함께 면접을 진행하시죠.”

“네? 전 그저, 사장님의 시간을 덜어드리기 위해 준비한 것뿐입니다.”

박주혁은 씩 웃으며 손에 있던 이력서를 다시 허인아에게 내밀며 말했다.

“자, 심 대리와 회사에 필요한 인재를 뽑아 주세요. 전 허 과장과 심 대리의 안목을 믿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중요한 연락이 올 것도 있어서 조금 곤란하군요.”

“네? 아. 네.”

허인아는 뭐라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박주혁이 너무도 단호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허인아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력서를 들고 나가려는데 박주혁이 다급하게 허인아를 불러세웠다.

“아 참. 오늘 디자이너 면접은 없는 거죠?”

“예. 디자이너는 내일입니다.”

박주혁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알겠습니다. 내일은 저도 면접에 참여할 테니 오늘은 잘 부탁합니다.”

박주혁의 말에 허인아가 고개를 잠깐 갸웃하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고 사장실을 나갔다. 그렇게 소프트웨어 개발팀의 면접은 박주혁 없이 시작됐다.

한참 면접이 진행 중일 때 박주혁의 전화기가 울렸다.

- 띠리리.

“네, 파인랭스 박주혁 대표입니다.”

“박 사장. 나 유명한 국장일세.”

“아, 국장님 알아보셨습니까?”

“그러니까 연락하지 않았겠나? 좋은 소식이 있네.”

박주혁이 귀를 쫑긋하며 수화기에 귀를 밀착했다. 하지만 유명한은 박주혁을 놀리듯 엉뚱한 소리를 했다.

“이런 얘기를 전화로 하긴 좀 그런데?”

유명한의 장난기 섞인 말에 박주혁이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마침 잘됐습니다. OECD 프로젝트 관련해서 드릴 말씀도 있고 오늘은 이상하게 술도 당깁니다.”

“하하하. 내가 졌네! 졌어. 외무부 산하에 국제협력단이라고 있는데···.”

유명한은 친절하게도 직접 외무부 산하기관에까지 연락해 파독 근로자들과 연락할 수 있는 길을 알려줬는데 그뿐이 아니었다.

“마침 국제협력단에서 파독 근로자들의 복지를 위해 사업을 펼칠 예정이었다더군. 내가 독일어 번역사업을 얘기했더니 엄청나게 좋아하더군. 그래서 박 사장 연락처를 알려줬어.”

“그러셨군요. 감사합니다.”

“아마 곧 연락이 갈 것 같으니까. 잘해보시게.”

“매번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난 그저 다리를 놓았을 뿐. 모든 것은 박 사장이 만들어가는 것이지.”

유명한의 한결같은 말이 가슴을 울렸다.

“제가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좋지. 이원희 선배도 보고 싶고 말이야.”

유명한이 뜻하는 바를 눈치챈 박주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국장님과 이원희 지사장님은 실과 바늘이잖습니까? 당연히 함께 모셔야죠.”

“하하하. 그럼 끊겠네. 수고하시게.”

유명한과 통화를 끝낸 박주혁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파독 근로자 복지 사업?”

예상과 다른 전개였지만, 뜻밖의 기회가 박주혁에게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