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대표님-37화 (37/136)
  • 037화 한국의 하만몰리.

    올림픽대로.

    정체가 심해 차가 가다 서기를 반복했고 운전대를 잡은 권선호의 눈빛이 매우 사납게 빛났다.

    - 빵!

    앞서가는 차량이 조금만 미적대도 권선호는 미간을 좁혔고 거침없이 크락션을 눌러댔다. 그러다 무엇이 그리 불만인지 권선호가 운전대를 거세게 내려치며 버럭 소리쳤다.

    “젠장!”

    차가 성난 황소처럼 울컥거렸다. 권선호는 이를 갈며 말했다.

    “박주혁이 문서를 끝내는 바람에 독촉이 왔던 거였어!”

    평소 냉철했던 권선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오로지 박주혁을 향한 분노로 점철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계획했던 것이 모두 수포가 된 상황이지 않나. 애써 고객을 확보했음에도 그를 뒷받침할 인력이 없다는 것이 뼈아팠다.

    “왜, 왜! 분명 나를 따르겠다는 녀석들이었는데!”

    악을 쓰며 운전대를 쳐봐야 자신의 손만 아플 뿐이다.

    정체를 뚫고 사무실에 도착한 권선호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자리에 털썩 앉으며 최소영을 불렀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과 날이 선 목소리였다.

    “최 상무. 프리랜서 연락해봤습니까?”

    “예. 했습니다.”

    권선호가 예사롭지 않은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지만, 최소영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형직씨는 몸이 안 좋아서 번역 불가하답니다.”

    “그래서요?”

    “끝입니다.”

    “하!”

    권선호의 탄식과도 같은 외침에 최소영이 표독스럽게 권선호를 노려보며 말했다.

    “뭐, 마음에 안 드세요? 심형직씨 연락하라고 해서 연락했고, 안된다고 사실대로 보고했습니다.”

    이미 일그러져있던 권선호의 표정에 어둠이 깔려 섬뜩하게 변했지만, 최소영은 눈도 깜작하지 않았다. 되레 당당하게 말했다.

    “사장님. 제가 일하는 게 무척 못마땅하신 것 같습니다.”

    “그,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합니까?”

    권선호가 이를 드러내며 버럭 소리치자, 최소영이 눈을 두어 번 끔벅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그만두겠습니다.”

    “뭐···. 뭐?”

    “번역 커리어를 쌓게 해준다더니, 혼자 번역하는 상황이 저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번역회사가 파인랭스와 베스트 번역원만 있는 것도 아니고. 급여는 일할 계산해서 보내주세요.”

    말과 함께 최소영은 자신의 짐을 챙겨 사무실 밖으로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권선호는 입을 떡 벌린 채 최소영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씨발!”

    권선호의 외침에 인테리어 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화들짝 놀라, 멍한 표정으로 권선호를 빤히 쳐다봤다.

    #

    요키아와, ANT에 납품을 마치고 회사로 복귀하자마자 박주혁은 경영지원팀 허인아 과장의 보고를 받아야 했다.

    “사장님. 말씀하신 더블백 견적서가 도착하였습니다.”

    “아, 그렇군요. 원하시던 협상은 잘 됐습니까?”

    허인아는 살짝 웃어 보이더니 견적서를 내밀었다. 견적서를 내미는 그녀의 손에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박주혁은 견적서를 확인하고 눈이 살짝 커져 허인아와 견적서를 번갈아 봤다.

    “20% DC? 사실입니까?”

    “예. 아직 정식 출시 전이라, 특별가로 공급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추가 5개는 무상입니다.”

    “이야. 허 과장. 생각보다 협상 능력이 좋군요?”

    허인아는 볼을 살짝 붉히며 멋쩍은 듯 웃었다. 박주혁도 허인아를 향해 웃으며 힘주어 말했다.

    “좋습니다. 집행하시죠.”

    “네. 그리고 배정산업에서 사장님을 좀 뵙고 싶다고 했습니다.”

    박주혁은 견적서에 향해 있던 시선을 허인아로 옮기며 되물었다.

    “배정산업에서요? 흠. 약속을 잡아보시죠.”

    “알겠습니다.”

    허인아가 사장실을 나간 후, 박주혁은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흠. 배정산업이 우리와 거래했었지만, 계속 이어지지는 않았단 말이지···.’

    박주혁은 배정산업 대표와 만나면 어떤 내막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뒤 허인아가 배정산업과 약속 시간을 알려왔다.

    “사장님. 오늘 저녁도 괜찮냐고 하십니다. 식사하면서 얘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시는데요.”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하죠. 장소는···.”

    박주혁이 장소를 고민할 무렵, 허인아가 불쑥 답했다.

    “연안부두에 목포횟집에서 7시라고···.”

    “하하하. 허 과장. 약속 장소 협상은 잘 안 됐나 보죠?”

    “배정산업 대표님이 좀 막무가내셔서.”

    박주혁은 난색을 보이는 허인아을 향해 웃어 보이며 그 약속에 응하겠다고 답했다. 허인아 과장이 나간 후, 박주혁은 최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파인랭스 최지훈 대리입니다.”

    “최 대리. 오늘 저녁에 약속 있습니까?”

    “예?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하세요.”

    “정말 없습니다.”

    박주혁은 최지훈과 통화를 끝낸 후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오늘 저녁도 먹고 들어갈 것 같습니다.”

    “그러니? 술···. 적당히 알지?”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전에 알아보라고 했던 사무실들 몇개 알아놨고, 구로공단 쪽을 돌아볼 참이다.”

    “아! 그렇군요. 적당한 곳이 있으면 좋겠네요.”

    “주혁아. 강남 쪽 얘기할 때는 뜨뜻미지근하더니 구로공단 얘기하니까 목소리가 달라지는구나?”

    “제가 그랬나요?”

    박주혁은 눈을 살짝 크게 뜨고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최효정 여사와 전화를 끊고 얼마 뒤 박영희 팀장이 사장실을 노크했다.

    “사장님. 일전에 개발자 리스트 다시 한번 뽑아봤습니다.”

    “아! 고맙습니다. 심 대리도 같이 얘기했으면 좋겠는데요.”

    “잠시만요.”

    박영희가 종종걸음으로 심영찬을 사장실로 불렀고, 셋은 테이블에 이력서를 펼쳐놓고 난상토론을 시작했다. 뭐 주로 박영희와 심영찬이 얘기했고, 박주혁은 지켜보는 것이었지만.

    “심 대리. 이 선수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많아서 도움이 될 겁니다. 생활패턴이 남다르긴 하지만···.”

    “그러니까 안된다는 겁니다. 회사 생활에는 적합하지 않아요. 회사에서 숙식을 해결할 녀석입니다.”

    심영찬의 말에 박영희가 눈을 표독스럽게 뜨더니 중얼거렸다.

    “그러는 지는···.”

    심영찬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얘기라는 듯 박영희의 날카로운 눈길을 자연스럽게 받아넘겼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 박주혁은 절로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투덕거리던 박영희와 심영찬은 최종 후보군 5명의 이력서를 박주혁에게 내밀었다.

    이력서를 살피는 박주혁에게 심영찬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중에 2~3명 정도 뽑아 주시면 랭귀지패스트 개발을 문제없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3명이면 되는 겁니까?”

    박주혁이 심영찬을 바라보며 되묻자, 옆에 있던 박영희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프로그램 개발이야 심 대리와 선수들 몇 붙여 놓으면 알아서 지지고 볶을 테지만, 디자이너가 필요합니다.”

    “디자이너요?”

    “예. 아무리 잘 만들어도 디자인을 입히지 않는다면, 골격만 있는 격이죠.”

    박주혁이 박영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때 심영찬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는 디자이너가 있긴 한데···.”

    심영찬의 말에 박영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심영찬을 바라봤다.

    “심 대리.”

    “예?”

    “디자이너는 개발자의 고혈을 빨아먹는 것이라고 그렇게 경멸하던 자가 디자이너를 안다고요.”

    “팀장님. 디자이너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데 개발자의 고혈을 빨아먹는다니요.”

    박영희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심영찬을 노려봤다. 이번에는 박영희의 눈길을 받아넘기기 힘들었는지 심영찬은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둘이 아웅다웅하는 모습에 박주혁은 절로 웃음이 났다.

    “그 디자이너도 면접을 보고 싶군요.”

    박주혁의 말에 심영찬이 얼굴을 붉히며 다급하게 말했다.

    “꼬, 꼭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말을 더듬는 심영찬을 향해 박영희가 심영찬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너 수상해!”

    그러자 심영찬이 얼굴을 붉히며 안절부절못했다. 정말 수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박주혁은 박영희와 심영찬이 고른 개발자 5명과 수상한 디자이너와 면접을 보기로 했다.

    “아, 그···. 디자이너는 다른 분으로 해도 됩니다.”

    이미 결정이 났음에도 심영찬은 안절부절못하며 계속 중얼거렸다. 심영찬이 저러니 더욱 그 디자이너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니요. 꼭 그분을 봐야겠습니다.”

    박주혁이 정색하며 말하자, 심영찬이 고개를 털썩 떨궜고, 박영희는 박주혁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아마도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허 과장에게 면접 일정 잡으라고 할 테니까. 심 대리는 디자이너에게 연락해서 이력서 보내라고 하세요.”

    “예···.”

    심영찬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

    박주혁은 6시가 임박해 사장실을 나와 경영지원팀 허인아 과장에게 말했다.

    “허 과장. 배정산업과 약속이 연안부두였죠? 같이 가실까요?”

    “연안부두 목포 횟집입니다. 오늘은 집에 일이 있어서요.”

    직장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 1위는 “집에 일이 있어서요”, 2위가 “몸이 좀 안 좋아서요.” 그리고 3위가 “괜찮아요”다. 4위가 상당히 충격적이었는데 바로 “죄송합니다.”라고 한다.

    박주혁은 허인아의 거짓말을 웃음으로 넘기며 말했다.

    “그럼. 최 대리와 가야겠군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허인아가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배정산업의 대표라는 사람에게 얼마나 휘둘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박주혁은 피식 웃으며 허인아를 지나쳐 영업팀으로 향했다. 박주혁은 최 대리에게 차 키를 넘기며 말했다.

    “연안부두로 갑시다.”

    “네! 사장님.”

    연안부두로 향하는 동안 박주혁은 최지훈에게 파인랭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최지훈은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파인랭스에 입사할 때 박찬희 사장님의 따뜻한 품성에 반했었습니다.”

    “그랬군요.”

    “권 부장도 차가웠지만, 잘 대해주셨고요.”

    박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권선호가 처음부터 그렇게 스네이크 마인드는 아니었을 터.

    “직장생활에 중요한 것이 회사의 비전일 텐데. 최 대리는 파인랭스의 비전을 어찌 봅니까?”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진솔한 얘기가 듣고 싶어서 함께 가자고 한 겁니다.”

    최지훈은 운전대를 살짝 움켜잡으며 입을 뗐다.

    “사장님. 솔직히 처음에는 권 부장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파인랭스가 얼마 못 가 흔들릴 것 같았죠. 솔직히 사장님은 젊고···. 경험도 적고···.”

    말하면서도 최지훈이 박주혁을 곁눈질하며 망설이는 것이 느껴졌다. 박주혁은 따뜻하게 웃으며 계속 얘기하라며 왼손을 몇 바퀴 돌렸다.

    “그런데, 제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회사를 생각하는 사장님의 진심이 느껴졌달까요?”

    “고마운 일이군요.”

    박주혁은 최지훈의 진솔한 얘기를 들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음. 그래. 진심은 언젠가 통하는 법이지.’

    최지훈과 얘기하는 사이 어느덧 차는 연안부두, 목포횟집 주차장에 들어섰다.

    연안부두의 횟집들이 휘황찬란한 네온싸인으로 홍보하는 것과 달리 목포횟집은 단순하게 ‘회’라는 글자에만 붉은색 조명이 켜져 있어 단출했다. 가게로 들어서자 깔끔하게 차려입은 점원이 일행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배정산업이라고 예약이 되어 있을 겁니다.”

    “잠시만요. 아, 주 사장님 손님이시군요. 이쪽입니다.”

    배정산업의 대표 주배정.

    연안부두의 목포횟집이 단골이었는지 점원이 아는 척을 했다.

    - 드르륵.

    점원이 안내한 방의 문이 열리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주배정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나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반갑네! 내가 배정산업 대표 주배정이네.”

    “안녕하십니까? 파인랭스 대표 박주혁입니다. 여긴 저희 직원 최지훈 대리입니다.”

    형식적인 인사치레와 명함교환이 끝나자, 주배정이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성격이 급해서 말이야. 반말을 하더라도 이해 좀 하게.”

    “예. 괜찮습니다.”

    박주혁의 대답에 주배정이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박 사장. 생각보다 젊네?”

    “그런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박주혁의 태연한 거짓말에 주배정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더블백은 어떻게 알고 연락했어?”

    “신문에서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의자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에 연락했습니다. 미국의 하만몰리처럼요.”

    박주혁의 말에 주배정이 눈을 빛냈다.

    “음? 하만몰리를 알다니. 가구 쪽에 관심이 많나 봐?”

    “아닙니다. 직원들의 사무환경에 관심을 두다 보니 자연스럽게···.”

    “와하하! 박 사장.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구먼! 자, 한잔하지.”

    주배정은 박주혁이 마음에 들었는지, 환하게 웃으며 잔을 채운 후 건배했다. 주배정이 잔을 깨끗하게 비운 후 박주혁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직원들에게 듣기론 파인랭스가 번역업계를 대표한다던데···. 맞나?”

    “번역업계를 대표하고 싶다고 정정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 같습니다.”

    “하하하! 박 사장. 재미있는 사람이고만. 사실은 말이야. 내가 욕심이 좀 있거든? 박 사장이 번역업계를 대표하고 싶어 하듯, 배정산업도 가구업을 대표하게 할 거야. 미국의 하만몰리처럼 말이야.”

    박주혁은 들고 있던 소주잔을 천천히 내려놓고 주배정의 얘기에 집중했다. 반드시 번역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한국의 하만몰리. 되지 말라는 법은 없죠. 주 사장님의 목표하신 바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박주혁이 눈을 빛내며 주배정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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