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화 너나 잘하세요.
- 띠리리.
전화벨 소리에 권선호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는 잠시 전화기를 노려보더니 짧은 한숨과 함께 수화기를 들었다.
“네, 베스트 번역원 권선호 대표입니다.”
“아. 권 사장님. ANT 구매부 방대혁 부장입니다.”
“안녕하십니까?”
“현업에서 언제 납품되냐고 독촉해서 그러는데 언제 납품할 수 있으십니까?”
예상대로 납기 독촉 전화였다. 최소 5일은 걸린다고 안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일인지 어제부터 ANT와 알파텔이 독촉하기 시작했다. 권선호는 굳은 얼굴로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겨우 3일밖에 지나지 않았을 텐데, 대체 왜?’
권선호는 잠시 심호흡을 한 뒤 최소영을 불렀다.
“최 상무.”
“예.”
“ANT쪽 제안요청서 언제쯤 끝날 것 같습니까?”
권선호의 질문에 최소영은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어제도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무슨 기계에요? 아직 이틀은 더 남았잖습니까?”
“저도 일정은 알고 있습니다. 고객의 요청이 있으니 확인해야 할 것 아닙니까?”
최소영은 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국통신 제안요청서 이제 50% 정도 완료되었습니다.”
“그럼 다른 문서들은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
최소영이 답답하다는 듯 크게 소리쳤고 권선호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하게 변했지만, 그는 최대한 감정을 억제한 채 말했다.
“5일 안에 끝내야 하는데. 지금 한국통신 제안요청서도 50% 끝냈다면 나머진 어떻게 납기에 맞출 생각입니까? 지금 당장 프리랜서들 연락해서 번역 나가세요. 최 상무가 끌어안고 있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검증도 안 된 녀석들을 써서 품질 개판이면 그 책임은 누가 집니까?”
최소영의 답변에 권선호가 오만상을 찌푸리더니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일단 프리랜서에게 번역을 맡겨야 품질이 좋은지 아닌지 판단을 할 것 아닙니까?”
“그 시간에 번역해야죠!”
권선호는 입에서 쌍욕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생각했다.
‘일단 ANT에 한국통신 제안요청서 완성된 부분을 가지고 들어가서 시간을 좀 더 확보해보자. 아무리 파인랭스라지만, OECD가 맞물려 있으니 시간이 부족한 건 마찬가지야.’
생각이 정리되자, 얼굴의 붉은 기가 점점 가라앉았고 권선호는 곧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우선 완성된 분량을 중간납품하고, 시간을 벌어봅시다.”
권선호의 말에 최소영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서를 인쇄시키고 플로피 디스켓을 넘겨줬다.
“대략 50% 완성된 겁니다.”
권선호는 말없이 플로피 디스켓을 받으며 말했다.
“최 상무. 품질에 대한 자신감도 좋지만, 납기도 중요하다는 것 알고 계실 거로 생각합니다. 정 못 믿겠으면 검증된 심형직씨에게라도 연락해 보세요.”
진한 다크써클이 드리워진 얼굴을 모니터로 옮기며 최소영이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휴. 알겠습니다.”
“ANT 다녀올 테니 수고 좀 하세요.”
“네. 시간 좀 넉넉히 받아오세요.”
권선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사무실을 나오며 중얼거렸다.
‘후. 애초 계획은 이게 아니었는데.’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얼굴 전반적으로 깔린 불안감의 그늘은 여전했다.
#
요키아에 한국통신 제안요청서를 납품한 후부터 다른 업체에서 독촉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3일 만에 요키아에 번역본이 납품됐다는 사실이 업계에 퍼진 것이 분명했다. 딱히 이상한 것도 없었다. 보안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따지고 보면 동기, 후배, 선배들이 흩어져 근무하는 것 아니겠는가?
- 띠리리.
“네. 파인랭스 박주혁 대표입니다.”
“아, 박 사장님. ANT 방대혁 부장입니다.”
“방 부장님. 안녕하십니까?”
“예. 다름 아니라···.”
주저하는 말투에서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혹시 납품할 문서 없냐는 것이리라.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현업에서 다른 회사는 이미 번역본이 나왔다고 성화여서 말입니다.”
“그렇군요. 그렇지 않아도 납품할 생각이었습니다.”
“오! 그렇습니까?”
박주혁은 방대혁과 전화를 끊자마자 수화기를 들어 전화를 돌렸다.
“네. 파인랭스 조광연 차장입니다.”
“조 차장. 요키아에 한 번 더 가야 할 것 같군요.”
“예? 요키아에는 어제 한국통신 제안요청서를 이미 납품하셨습니다만···.”
“요키아가 가장 먼저 의뢰했는데 다른 회사부터 납품하면 의리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조광연은 박주혁의 말이 뜻하는 바를 알아듣고 곧장 되물었다.
“아, 그럼 요키아 다음 행선지는 어디입니까?”
“ANT에 들어갑니다.”
“알겠습니다. 일정 잡겠습니다.”
박주혁의 오더가 떨어지고 프린터가 돌아가자, 최지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제본 준비를 했다. 조광연이 그런 최 대리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권 부장 없으니 아주 잽싸네. 짜식. 이제야 원래 모습이 나오는구만.’
조광연은 피식 웃으며 최지훈을 향해 말했다.
“최 대리. 고마워. 제본 이쁘게 부탁하마!”
“네! 차장님.”
최지훈이 배시시 웃는 모습이 싫지 않았다. 문서가 준비되고 잠시 뒤 박주혁이 성큼성큼 걸어 영업팀으로 왔다.
“조 차장. 출발할까요?”
“네!”
박주혁은 미리 제본된 문서를 보며 최지훈을 향해 한마디 툭 뱉었다.
“제본은 최 대리가 정말 잘하는군요?”
“하하. 감사합니다!”
작은 칭찬이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다. 사소하지만, 이런 말 한마디가 직원들의 사기를 좌지우지한다.
박주혁과 조광연은 요키아에 들려 한설텔레콤 제안요청서를 제출했다. 신지수와 황기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서로를 마주 봤다. 놀라운 속도가 아닐 수 없었다. 100페이지에 달하는 문서를 하루걸러 하나씩 납품하는 업체가 어디 있겠는가? 신지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박 사장님. 오늘 또 다른 문서를 납품하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지금도 번역은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마 오늘 저녁 하나가 더 완성될 겁니다.”
조광연도 랭귀지패스트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박주혁의 말이 공수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자신감이 잠시 어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죽을상을 하며 말했다.
“과장님. 사장님이 이렇게 말씀은 하시지만, 정말 다들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시간 조금 더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조광연의 실감나는 연기에 신지수는 순간 할 말을 잃고 황기태를 쳐다봤다. 황기태는 턱을 만지며 잠시 고민하더니 신지수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했다. 그들이 귓속말하는 사이 박주혁은 조광연을 힐끔 쳐다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조 차장. 그새 배웠군요.’
“저희도 5일 안에 모든 문서가 되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내일 완성되는 문서가 혹시 어떤 것일까요?”
“오늘 밤에 완성되는 문서는 크트프리텔입니다. 무리긴 하지만, 내일까지 모두 완성하겠습니다.”
조광연과 달리 박주혁은 완성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내며 강하게 나갔다. 박주혁이 망설이지 않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자, 신지수와 황기태의 눈이 살짝 떨렸다.
“직원들이 혹사하면 오래 못 버팁니다. 내일 크트프리텔 납품하시고, 신세기와 극성은 다음 주 월요일까지로 연장하는 것은 괜찮을 것 같습니다. 조 차장님 일정 어떠세요?”
박주혁에게 말해봤자, 내일 완성하겠다며 호언장담할 터. 신지수는 눈치껏 조광연에게 물었다.
“그래 주시면, 정말 감사하죠.”
박주혁과 조광연은 신지수와 황기태를 손바닥 위에 놓고 주무르듯 했다. 납품을 마치고 일어나 서로 악수하는데 박주혁이 불쑥 말했다.
“납기 연장은 감사하지만, 완성되는 대로 보내겠습니다.”
“아, 예. 박 사장님.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박주혁과 조광연은 다음 생선지인 ANT로 향했다. 조광연이 안내 데스크로 가서 방대혁 부장을 호출했는데 이미 접견실에서 미팅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사장님. 지금 접견실에 계신다는데요?”
“그래요? 잠깐 기다리면 만날 수 있겠군요. 기다립시다.”
“알겠습니다.”
잠시 방대혁 부장의 미팅이 끝나길 기다리는데 박주혁이 조광연에게 넌지시 물었다.
“조 차장님. 아까 직원들 죽어간다는 얘기는 왜 하신 겁니까?”
“아. 일전에 사장님께 배운 겁니다.”
“저에게요?”
박주혁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조광연의 다음 대답을 기다렸다.
“그때 살짝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장님이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지 고민해봤는데, 결론은 하나였습니다.”
“흠. 어떤 겁니까?”
박주혁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조광연을 바라봤고, 조광연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고객 길들이기···. 아닙니까?”
조광연의 말에 박주혁이 씩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제대로 맞췄습니다.’
비지니스에서 을은 항상 갑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하지만, 갑이 항상 합리적인 요구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을도 나름의 생존전략을 세워야 하는데 그중 하나가 조광연이 말한 고객 길들이기다.
파인랭스의 역량을 보여주지만, 어렵고, 힘든 일임을 강조함으로써 고객은 일종의 경험치를 쌓게 된다. 지금 의뢰한 일이 무척 힘든 일이었구나 하고 말이다. 물론, 비지니스 맨들의 대화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지만, 이런 경험치가 쌓이게 되면 조금씩 영향을 받을 수밖에. 벽돌을 한장한장 쌓다보면 어느새 조금 더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다.
3일 안에 할 수 있지만, 고객은 그것이 어려운 일인 것을 알기에 5일의 말미를 줄 수 있다는 뜻이다. 오늘 요키아가 주말을 넘겨 납품해도 된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박주혁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는데, 접견실 문이 열리고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이 어느쪽도 흡족한 결과를 내지 못한 것 같았다.
‘안 봐도 CCTV지.’
박주혁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조광연이 황급하게 일어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권 부장님 오랜만입니다? 여기에는 무슨 일로?”
“아, 조광연 씨. 여기서 보는군요.”
권선호는 조광연과 악수를 하다 말고 박주혁과 눈을 마주치자 표정을 굳히며 박주혁 근처로 걸어왔다. 박주혁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아는 체를 했지만, 권선호는 목을 뻣뻣하게 세운 채 박주혁 옆을 스쳐 가며 속삭이듯 말했다.
“박주혁. 파인랭스가 언제까지 그 자리에 있나 지켜보겠어.”
권선호는 이를 갈며 박주혁을 스쳐 갔다. 하지만, 박주혁은 권선호를 쳐다보지도 않고 피식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너나 잘하세요.’
그때 방대혁 부장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박 사장님 여깁니다.”
“방 부장님. 요즘 자주 뵙는 것 같습니다?”
“하하. 일이니까요? 오늘 완성된 문서가 있다고요?”
권선호가 막 ANT 건물을 벗어나려는 순간 박주혁과 방대혁의 대화를 듣고 발걸음을 멈췄다.
‘뭐···. 뭐라고?’
박주혁은 권선호가 들릴 수 있도록 조금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럼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번역회사라면 무릇 품질과 납기를 맞춰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역시 박 사장님은 참, 믿음직스럽습니다. 접견실로 가서 더 얘기 나누시죠.”
“그러시죠.”
접견실 문이 닫히자, 더는 대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권선호는 자리에 우뚝 선 자세로 주먹을 말아 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변해있었다.
‘문서를 완성했다고? 마, 말도 안 돼.’
권선호는 고개를 돌려 굳게 닫혀 있는 접견실을 한번 노려보고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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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혁은 권선호와 미팅이 끝난 직후의 방대혁의 표정이 좋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며 물었다.
“조금 전 미팅이 혹시 베스트 번역원입니까?”
방대혁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한숨을 쉬었고 조광연은 깜짝 놀라 박주혁을 쳐다봤다. 번역연구팀을 제외하고 권선호가 베스트 번역원을 차렸다는 사실은 잘 몰랐기 때문이다. 조광연이 눈을 끔벅일 때, 방대혁이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납기 잘 지킬 수 있다더니 일주일을 더 달라고 해서 지금 문제가 심각합니다.”
“일주일이요? 심각하군요.”
박주혁은 방대혁의 고민을 공감한다는 듯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뭐 이건 ANT와 베스트 번역원 사이 문제고요. 파인랭스가 가져온 문서는 뭡니까?”
방대혁의 말에 조광연이 한설텔레콤 제안요청서의 영문본과 플로피 디스크를 건넸다. 방대혁은 눈을 빛내더니 조광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파인랭스가 절 살렸습니다. 진짜. 어휴.”
박주혁은 방대혁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불 보듯 뻔했기에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방 부장님. 베스트 번역원에 어떤 문서를 의뢰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흐으음.”
박주혁의 말에 방대혁이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