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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대표님-35화 (35/136)
  • 035화 일하는 동안은 편해야 할텐데.

    요키아의 백연주 이사는 박주혁이 말하는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선을 그으려 했다. 하지만, 박주혁이 능글맞게 피식 웃으며 받아쳤다.

    “단독 업체로 등록할 힘은 있으시고, CR은 권한 밖이라 하시면···. 제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박주혁의 당돌한 말에 백연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는 곧 유쾌하게 웃어버렸다.

    “하하하. 박 사장님 제 예상을 뛰어넘으시는군요?”

    백연주는 한참을 웃더니 뭔가 결심한 듯 눈을 빛내며 박주혁을 쳐다봤다.

    “CR을 아예 막을 수는 없습니다. 제가 제안할 수 있는 것은 매년이 아닌 3년에 한 번 1% 이하로 CR을 요청하도록 명문화하면 어떻겠습니까?”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3년에 한 번 최대 1% CR은 단가를 거의 깎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좋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저흰 백희나 선수가 필요한 통역, 번역 등을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백연주의 통 큰 결정에 보답하듯 박주혁은 백희나에게 시원하게 언어후원을 선언했다.

    #

    조광연은 요키아 백연주 이사와 작성한 계약서를 읽고 있는 박주혁을 힐끔 쳐다봤다. 처음 회사에 출근했을 때부터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다.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의 느낌이랄까?

    ‘배워야 해. 사장님의 스킬들을 말이야. 언제까지 들러리일 수는 없다.’

    조광연은 운전대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다짐했다. 변화하기로.

    조광연이 눈빛을 결연하게 빛내고 있을 무렵, 박주혁은 백희나 선수와 계약한 내용을 읽으며 눈썹을 찌푸렸다.

    [백희나 선수의 요청이 있을 때, 파인랭스는 통역, 번역 등 모든 언어적 후원을 하기로 한다. 그 대가로 백희나는 왼쪽 어깻죽지 쪽에 파인랭스 로고를 붙이기로 한다.]

    “재미있네. 백연주라는 사람. 왼쪽 어깻죽지면 등 쪽인데, 이게 무슨 의미야?”

    박주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신의 왼쪽 어깻죽지를 힐끔 쳐다봤다. 그때 조광연이 정면을 주시하며 말했다.

    “사장님. 아무리 봐도 백 이사님 보통내기가 아닙니다.”

    “음?”

    어깻죽지를 쳐다보던 박주혁이 눈을 키우며 조광연을 쳐다봤다.

    “제가 골프에 관심이 많아서 자주 보는데요. 생각보다 왼쪽 어깻죽지가 티샷할 때 가장 노출이 상당히 많이 되는 곳입니다. 아직 그곳을 후원사들이 모르는 것 같은데. 명당입니다. 명당! 백희나 선수는 특히나 티샷이 그림같이 아름다워서 티샷 장면이 방송에 자주 잡히거든요.”

    박주혁은 조광연의 얘기를 들으며 다시 한번 자신의 어깻죽지를 돌아봤다.

    ‘여기가 잘 보인다고?’

    생전에 골프를 배워본 적이 없었기에 생소했다. 나이가 들어 골프가 대중화될 때쯤에는 파인랭스에 매달리느라 접하질 못했고 그 후로는 사업이 쪼그라들어 여유가 없었다. 다들 골프 친다고 난리였었는데···. 그러고 보니 권선호도 고객들과 골프로 접대를 한다고 들었었다. 영업의 시작과 끝은 골프라던가? 옛 생각이 나니 입이 썼다. 박주혁은 입맛을 다시며 조광연에게 물었다.

    “조 차장은 골프, 칩니까?”

    박주혁의 질문에 조광연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답했다.

    “영업에 필요하다고 해서 배우고는 있죠. 가만히 있는 공을 치는 게 어찌나 어려운지···.”

    “그래요?”

    “예. 여자 다루듯 공을 살살 다뤄야 한다는데, 저는 그냥 냅다 팹니다. 하하하.”

    “그래서 아직 결혼 못 하신 걸지도 모르겠군요.”

    박주혁의 말에 조광연이 순간 표정이 멍해졌다.

    “어? 어···.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건가요?”

    박주혁은 피식 웃으며 골프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다. 골프 얘기를 하다 보니 조광연이 제법 진중한 표정으로 자신의 골프 철학에 대해 박주혁에게 얘기하게 됐다.

    “골프는 마음을 수양한다 생각하고···.”

    조광연이 근엄한 표정을 보니 골프에 진심인 것이 느껴졌다. 박주혁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언젠가 저도 배워보고 싶군요.”

    “정말이십니까? 언제 연습장 같이 가시죠. 저도 못 하지만, 이것저것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래요. 한번 가보죠.”

    조광연은 싱글벙글 웃으며 회사로 차를 몰았다. 그러다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 박주혁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그런데 사장님. 알파텔에서도 한국통신 의뢰했었는데요.”

    “그랬죠.”

    “알파텔은 납품하지 않습니까?”

    “조 차장. 일에도 순서가 있듯 납품에도 순서가 있는 겁니다. 요키아가 가장 먼저 의뢰했으니 납품도 요키아가 먼저 받는 것이죠. 알파텔은 가장 뒷순위 아닙니까? 내일모레 납품하러 갑시다.”

    조광연은 왠지 박주혁의 말이 타당하다고 느껴져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

    사무실로 복귀한 박주혁은 랭귀지패스트를 사용해 제안요청서를 번역하고 있는 구경숙에게 다가갔다.

    “구 과장. 어때요? 할만합니까?”

    “편집에 손이 좀 가고 있긴 한데, 생각보다 문서들이 비슷해서 랭귀지패스트가 도움이 많이 되긴 하네요. 크트프리텔 제안요청서를 작업중인데 벌써 80%정도는 완료된 것 같습니다.”

    초기 무선설비 제안요청서야 5사가 대동소이했기 때문에 반복되는 문장이 유독 많았을 터. 구경숙은 랭귀지패스트의 참맛을 느꼈으리라.

    “이후에 시간이 되면 랭귀지패스트 관련하여 직원들에게 소개하는 자리를 한번 만드세요.”

    “네.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 물론, 프로그램 개선도 해야할 것 같아요.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네요.”

    구경숙의 볼멘소리를 들었는지 심영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과장님. 어떤 점이 개선되어야 할까요?”

    수첩까지 챙겨 온 심영찬이 구경숙의 말을 경청하며 수첩에 적어 내려갔다. 박주혁은 심영찬과 구경숙의 호흡이 마음에 들었는지 미소 지으며 심영찬의 어깨를 두드렸다.

    “심 대리. 얘기 중에 미안한데. 개발자들 이력서는 아직인가요?”

    “아, 네 아직입니다.”

    가만보니 아직 연락조차 해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때 박영희가 의자를 돌려 심영찬을 한 번 노려보더니 말했다.

    “사장님. 심 대리는 또 혼자 해보겠다고 끙끙거리고 있을 겁니다. 안 봐도 비디오죠. 개발자는 제가 한번 추려서 드려도 될까요?”

    박영희도 OECD와 제안요청서로 정신없을 텐데, 심영찬을 걱정하는 마음만큼은 놓지 않았다. 비록 보육원의 남매로 자랐지만, 친남매라고 봐야 했다. 박주혁은 씩 웃으며 답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곧 추려서 드리겠습니다. 심 대리는 좀, 퇴근 하세요!”

    “아. 아하하.”

    심영찬은 머쓱하게 웃더니 구경숙에게 다시 물었다.

    “그래서, 구 과장님. 이 부분의 에러율이 높다는 거군요?”

    심영찬은 박영희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구경숙에게 개선점을 다시 물었다. 못 말리는 일벌레다. 직원들이 이렇게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면, 리더인 대표도 뜨거워진다. 그리고 직원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찾게 되는 것이다.

    선순환.

    파인랭스는 지금 선순환으로 잘 흘러가고 있다. 박주혁은 뿌듯함을 가슴 가득 담고 사장실에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 삑.

    최근에 바퀴 하나가 고장나 의자가 움직일 때마다 귀곡성을 냈다. 사장실에 있는 의자가 이럴진대 직원들이 사용하는 의자의 상태는 어떻겠나?

    파인랭스 사무실은 오래된 건물에 세 들어있어 쾌적한 환경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故 박찬희 사장이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사들인 책상과 의자들이었기에 직원들의 책상과 의자는 모두 각양각색이었다. 모두 아버지의 손때가 묻어 있는 물건들이었지만, 내구연한을 넘긴 지 오래다. 특히 오랜 시간 앉아 있어야 하는 의자는 좀 시급했다.

    “일하는 동안은 편해야 할 텐데 말이지.”

    의자를 생각하니 예전에 번역을 의뢰했던 업체가 떠올랐다.

    ‘의자 이름이···. 더블백이던가?’

    “시스템 온. 검색, 더블백.”

    - 검색 완료

    배정산업 / 더블백 제품소개서 및 회사소개 한영 번역 / 1995년 7월.

    ‘더블백 맞네. 그런데 7월이네?’

    지금으로부터 한 달 뒤에나 의뢰된다는 것은 지금쯤 생산은 하고 있을 터. 박주혁은 잠시 고민하더니 수화기를 들어 경영지원팀 허인아 과장을 불러들였다.

    “허 과장.”

    “예?”

    “직원들의 의자 아직 쓸만합니까?”

    “의자요?”

    허인아는 박주혁이 의자 얘기를 꺼낼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는지 살짝 당황한 것 같았다.

    “의자가 낡긴 했는데···.”

    허인아는 말끝을 흐리며 박주혁의 눈치를 살폈다.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지출하지 않았던 박찬희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하루 종일 앉아 있는데 의자가 편해야 하지 않을까요?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 틀린 말씀은 아니지만···.”

    “배정산업이 더블백이라는 의자를 개발했을 텐데 한번 연락해 보세요.”

    “배정산업이요?”

    박주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금쯤 시제품이 나왔을 거예요. 구매 가능한지 확인해보세요.”

    “배정산업, 더블백. 예. 알겠습니다.”

    허인아는 박주혁의 말을 메모하고 자리로 돌아가 배정산업을 검색한 후 전화를 걸었다.

    “네. 배정산업입니다.”

    “안녕하세요. 여긴 파인랭스라고 합니다.”

    “파···. 랭스요?”

    “번역회사입니다.”

    “번역···. 예?”

    상대가 무척 당황하는 눈초리였다. 하긴 번역회사가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시기니까.

    “더블백이라고 의자를 개발 중이신 거로 아는데 구매가 가능한지 문의드리려고요.”

    “어! 그걸 어떻게?”

    허인아는 상대가 당황하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번 물었다.

    “구매 가능합니까?”

    “어, 어. 그게···.”

    상대가 말을 얼버무리자, 허인아가 미간을 좁히며 다시 한번 말했다.

    “불가능하면 그렇다고 말씀해 주세요. 저도 보고를 해야 하거든요.”

    “아, 판매 가능합니다. 다만, 아직 시장에 출시한 제품이 아닌데 알고 계셔서 당황해서 그렇습니다.”

    “그럼 견적서 좀 부탁합니다. 팩스 번호가···.”

    허인아는 전화를 끊고 사장실로 향했다.

    - 똑똑.

    “사장님. 더블백 구매 가능하다고 합니다. 견적서 보내라고 했으니 도착하는 대로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허인아는 자리로 돌아가려다 말고 박주혁에게 물었다.

    “저, 근데 배정산업이 더블백을 만든다는 것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박주혁은 너무도 태평한 표정으로 허인아에게 답했다. 아니 살짝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다.

    “신문에서 봤습니다. 독일 물리학자가 개발한 더블백이론의 특허를 한국 내 독점생산 및 판매권을 취득하여 더블백을 개발했다고 하더군요. 요추에 좋다고 합니다.”

    “아아.”

    “주요 제품은 더블백 의자, 책상 등이 있고···.”

    배정산업과 더블백에 대한 배경지식을 물 흐르듯 줄줄 외는 박주혁을 바라보던 허인아의 눈이 점점 커졌다. 박주혁은 허인아의 표정을 살피고는 입을 꾹 다물며 말했다.

    “그래서 직원들에게 좋을 것 같아서 말이죠.”

    “아아. 알겠습니다.”

    허인아가 얼빠진 얼굴로 자리로 돌아간 후, 박주혁이 나지막이 말했다.

    “시스템 오프. 너무 심취해서 읽어버렸네. 어쨌든 더블백을 구매할 수 있다니 잘됐군. 이참에 아직 학생인 백희나 선수에게도 하나 선물할까?”

    백희나 선수가 어떻게 성장할지 알고 있으니 미리 얼굴도장을 찍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박주혁은 서둘러 수화기를 들어 허인아 과장에게 전화했다.

    “네, 경영지원 허인아 과장입니다.”

    “허 과장. 더블백 여분으로 5개 정도 더 구매하세요. 개발팀에 충원도 있을 테고 선물할 곳도 있습니다.”

    “아, 네 견적서 들어오는 대로 네고 후 말씀드리겠습니다.”

    박주혁은 네고라는 말에 살짝 놀랐다. 지극히 사무적이고 융통성 없는 허인아였다. 항상 시키는 것 그 이상, 이하도 하지 않던 허인아가 먼저 나서서 네고를 하겠다고 하니 그 변화가 새삼 놀라웠다.

    ‘직원들의 분위기가 변하니까 다들 영향을 받나 보군. 좋은 현상이야.’

    권선호를 더 일찍 내쳤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그가 있었기에 지금의 분위기를 만들 수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권선호는 잘 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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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인테리어가 끝나지 않아 먼지가 자욱한 사무실. 권선호가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버럭 소리쳤다.

    “최 상무! 아직 제안요청서 멀었습니까?”

    “사장님! 번역이 무슨 기계로 돌리는 줄 아세요? 더군다나 번역사는 저 하나잖아요!”

    “베테랑 번역사면 당연히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프리랜서들 활용한다더니 대체, 왜 혼자 하는 겁니까?”

    “프리랜서를 어떻게 믿어요! 내가 여기 번역하러 왔지. 프리랜서 관리하러 왔어요?”

    권선호와 최소영의 날 선 목소리는 끊이질 않았고, 둘의 미간에는 주름이 잔뜩 잡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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